황무지
원제 : Badlands
1973년 미국영화
감독, 각본, 제작 : 테렌스 맬릭
출연: 마틴 쉰, 시시 스페이섹, 워렌 오츠,
라몬 비에리
영화사의 세계 유명 감독사를 다룬다면 아마도 테렌스 맬릭처럼 괴상한 인물은 정말
보기드물 것입니다. 우선 70년대 두 편의 영화를 만들어서 주목을 받아놓고,
무려 20년간이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20년후에 복귀작을 내놓고 그 영화가
베를린 영화제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후로도 제법 띄엄띄엄 영화를 만들면서
2011년에 '트리 오브 라이프'가 칸 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렇게 몇 편 영화를 만들지도 않은 인물인데 굵직한 영화제에서 상을 척척 받았고,
70세를 훌쩍 넘은 그가 연출한 장편 극영화 숫자는 불과 8편에 불과합니다.
그나마도 2010년 이후에 4편을 만들어서 그정도 되는 것입니다.
칸,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가 좋은 영화 발굴에도 많은 역할을 하지만 그 못지않게
별 대단치 않은 감독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를 하는 발판역할도 많이 합니다.
테렌스 맬릭 감독 역시 전형적인 그런 케이스입니다. 그가 73년 '황무지'로 주목받고
5년이나 지나서 내놓은 '천국의 나날들'이 아카데미상 몇 개 부문 후보에 오르고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면서 불과 두 편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그는 주목받는 젊은
감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부담스러웠을까요? 지나친 과대평가를 받은
그는 20년간 영화를 만들지 않다가 결국 '씬 레드 라인'이라는 전쟁영화로 돌아왔고,
다소 모호한 철학적 영화로 느껴진 그 작품은 다시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그에 대한 과평가는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그런 명성을 지켜야 했기에 그는
띄엄 띄엄 영화를 만들어야 했겠고, 일부러 모호한 추상적 영화로 만든 듯한
'트리 오브 라이프'를 영화계에서 한 번 더 빨아준 것입니다. 이후 그가 만든
나머지 영화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혹평을 받으며 그의 실력이 사실상
한계에 부딫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작 8편 만든 그는 어느덧 70세를 훌쩍
넘긴 원로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두 번째 영화를 만들고 자산고갈이 된
셈입니다.
'황무지'는 테렌스 맬릭의 극영화 데뷔작입니다. 당시 TV 활동을 활발히 하던
30대 초반의 젊은 배우 마틴 쉰을 주인공으로 발탁했고, 신인 여배우 시시
스페이섹이 여주인공으로 출연했습니다. 베테랑 워렌 오츠가 시시 스페이섹의
아버지로 출연합니다. 일종의 로드무비인데 두 년놈들이 떠돌아다니며 무모한
범죄를 저지르는 내용입니다. 패륜적인 요소도 있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60년대 후반 '아메리칸 뉴시네마'를 통해서 등장한 삐딱한 영화의 범주이고,
30-60년대까지 헐리웃을 지켜온 '반듯한 정통 고전물'의 시대에서 이러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영화로 넘어가면서 등장한 영화의 물결을 타고 있습니다.
두 남녀의 무모한 범죄여행.....이런 영화의 '원조격'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이후 데이비드 린치의 '광란의 사랑'이 등장했고, 올리버 스톤의 '내츄럴 본 킬러'가
등장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권해효 주연의 '진짜 사나이'라는 영화도 있었습니다.
모두 '황무지'가 잉태한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황무지'는 당시로서는 꽤 신선한 재미가 있었던 영화일 것입니다. 이 영화를
업그레이드한 두 편의 수작이 '광란의 사랑'과 '내츄럴 본 킬러'인데 두 영화가
완성도에서는 '황무지'를 뛰어 넘지만 '황무지'가 원조격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지요. 테렌스 맬릭의 파격적인 감각과 거침없는 내용은
그를 주목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2번째 작품은 무려 5년이나
지나서 등장했지요.
데뷔초기 두 편의 영화가 주목받았으니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하지만 많은 아메리칸 뉴시네마 시대 이후에 등장한 세대교체 감독들이
'스티븐 스필버그' '우디 알렌'정도를 제외하면 제대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졸업'의 마이크 니콜즈, '내일을 향해 쏴라'의 조지 로이 힐, '대부'의
프란시스 F 코폴라, '라스트 픽쳐 쇼'의 피터 보그다노비치 등 엄청난 대표작
1~3 편 정도를 가진 그들은 '존 포드'나 '윌리암 와일러' '스탠리 큐브릭' '하워드
혹스' '알프레드 히치콕' '빌리 와일더' 등 선배 명감독들처럼 꾸준한 수작들을
계속 양산하지 못한 것입니다. '독특한 영화'와 새로운 시대의 영화로 주목을
받은것까지는 좋지만 계속 좋은 작품을 꾸준히 내놓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진정한 거장이 되려면 한 5편정도 내놓은 영화를 보고 평가 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테렌스 맬릭의 '씬 레드 라인'을 보았을때 그에 대한 기대치는 반반이었습니다.
상을 받기는 했지만 솔직히 제 기준으로는 기대에 못 미친, 모호한 느낌이었고,
다음 작품을 지켜보자 라는 생각이었는데 역시나 뜸을 또 들였고, '트리 오브 라이프'
에서는 완전히 그의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그냥 수많은 감독들이 그랬듯 데뷔초기
작품 두 편이 생의 역작으로 끝나는 반짝 감독이라는 한계가 그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일찍 주목받고 일찍 퇴조하는 감독은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뉴시네마 시대의 위에 거론한 감독 외에도 제인 캠피온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지요. 마이클 치미노도 있군요. 그런 면에서 리들리 스코트
같은 인물은 정말 대단한 것이지요.
우연히 길가다가 만난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부모에게까지 일종의 패륜적인
행동을 하고 살인을 일삼으며 정처없는 여행을 떠나는 내용, 키트(마틴 쉰)와
홀리(시시 스페이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건 사랑때문에 일방적인 도피를
하는 '엘비라 마디간'이나 '테스'의 변형적인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 고전적
이야기를 '범죄영화'로 재구성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지요.
'황무지'라는 제목만 보면 농부나 정착민의 이야기처럼 생각되겠지만 로드무비성
범죄물입니다. '황무지'에서는 사실 거침없는 살인과 범죄는 키트의 몫이고
홀리는 얼떨결에 키트를 따라다니는 셈인데, 그게 '광란의 사랑'이나 '내츄럴 본
킬러'에서는 여주인공의 역할이 훨씬 능동적을 바뀌고 있는 것이지요.
'황무지'에서 냇 킹 콜의 노래를 활용하고 있는데 '광란의 사랑'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를 활용하고 있고, '내츄럴 본 킬러'에서는 저음가수
레너드 코헨의 'Waiting for the Miracle'이 활용되고 있으니 왕년의 가수들의
감미로운 노래를 활용한다는 점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황무지'가 후대의
영화들에 분명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지요.
'황무지'는 신선하고 도발적이고 파격적이고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물론 그 시대의
기준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그런 점에서 테렌스 맬릭은 재능은 있지만 꾸준한
작가로서의 역량이나 거장으로서의 능력은 없는 인물입니다. 준수한 데뷔작을
만든 인물로 꾸준히 연출기회를 만들었다면 그래도 토니 스코트나 존 카펜터를
능가하는 급의 활발한 감독의 포지션을 가질 수도 있었는데 결국 무거운 어깨를
일찌감치 받은 채 띄엄띄엄 영화를 만들면서 과평가 시대를 지나서 잊혀져가는
원로감독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가 남긴 70년대 두 편의 영화는 젊고 감각적인
감독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남겼다고 봅니다.
마틴 쉰, 시시 스페이섹 등 두 배우는 이 영화를 통해서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30대 초반이던 마틴 쉰은 이후에도 영화보다 TV활동을 더 활발히
한 편입니다. 30대 시절 꽤 동안이던 그는 마치 제임스 딘을 연상케 하는
자유분방하고 거침없고 다부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후 '지옥의 묵시록'을
통해서 많은 이름을 알렸습니다. 시시 스페이섹의 경우는 주연급 여배우로는
가장 외모가 두드러지지 못한 배우로 미아 패로우, 마를레네 조베르 등 70년대에
활동한 '평범한 외모의 주근깨 배우' 3인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외모때문에 연기파 배우로 분류되는데 '캐리'같은 대표작을 남겼고, '광부의 딸'로
아카데미 주연상까지 받는 등의 활약을 했습니다.
'황무지'는 결국 젊은 감독, 젊은 남녀배우 등 주목받을 만한 3인이 돋보이는
신선한 영화였고, 테렌스 맬릭은 이렇게 영화계에 등장했습니다. 마틴 쉰이
연기한 키트의 도발적 행동을 통해서 보여준 이 삐딱한 시선의 범죄 로드무비
영화는 반듯한 고전영화 시대의 마감을 알리는 또 한 번의 파격적 내용의 영화로
그 시대의 변화를 확실히 알리고 있습니다.
평점 : ★★★ (4개 만점)
ps1 : 시시 스페이섹은 2012년까지 꾸준히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예쁘지 않은
배우가 나름 헐리웃에서 살아남은 전형적인 본보기입니다.
ps2 : 우리에게는 미국 50대주 중에서 생소한 편인 사우스다코타주 지역을
배경으로 한 특징이 있습니다. 캐나다에 인접한 미국 중북부 지역이지요.
총인구 80만에 불과한 지역인데 이 영화에선 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토의 2배는 되는 크기인데 80만명 인구라니요.
영화속에서 보여지는 모래먼지 날리는 긴 황무지가 이해가 갑니다.
그런 곳이니 수배령이 떨어져도 범인을 찾기 쉽지 않았겠죠. 물론 60년대가
아닌 요즘이라면 그렇게 숨어다니기 쉽지 않겠지만.
[출처] 황무지(Badlands 73년) 테렌스 맬릭의 도발적 데뷔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