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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2b 울산강의-창세기 6~9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고 5장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므두셀라는 왜 있고, 그 뒤에 노아는 왜 있는가? 그것은 에녹이 이야기한 하나님의 동행이라는 것이 이 땅에 어떤 효과를 주느냐?
여러분, ‘효과’할 때 여러분 하나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노아는 이런 혜택을 입었다. 이렇게 해석하시면 안 됩니다. 노아는 어디까지나 은물, 그러니까 하나의 애들 장난감이라고 보면 돼요. 무엇이 저주인가, 무엇이 축복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자기 성도를 다루신다는 겁니다.
노아는 얼마나 이익 봤는가, 이래 계산하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성경해석, 그게 자기 역사 만드는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건 잘못된 거고. 하나님께서 성도를 다루시는 방법은 일단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게 하시면서 이렇게 구원을 주게 된 것이 이 세상은 저주받아야 되며, 왜 데려가는 천국은 왜 축복된 세계인가? 그것을 알려주는 그런 역할 하라고 성도를 이 땅에서 계속 다루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질 테니까 대답해 보세요. 설악산 밤중에 등산을 할 때 보통 요새 보니까 여기다가 이마에다가 광고처럼 빛 나오는 것 쓰는 모양이죠. 옛날에는 그냥 후레쉬 들고 앞에 했잖아요. 빛을 자기가 자생하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여명이 열리는 것이 더 환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당연히 여명이죠. 내가 빛을 한다고 하면 후레쉬 들고 앞이 안 보이고 하면 귀찮은데, 날이 밝아지고 훤하니 희면 이 후레쉬 불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 여명이 뭐냐? 노아의 안식이란 말이죠. 여명이 쳐들어오는 그 첫 문턱에 노아가 서 있는 거예요. 이름이 노아가 뭐냐? '안식'이죠. 안식하면 창세기 1장에 마무리하면서 한 날이 무슨 날, 일곱 째 날을 무슨 날이라 했습니까? 안식일이죠.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 해놓고 그 빛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그때 하나님께서 굉장히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는데 이것이 도중에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비록 약간 지연되었지만 다시 안식,
그러니까 노아, 노아라는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명의 세상을 넘어온다. 수평선 넘어, 지평선 넘어 여명의 세계가 밝아오고 있다, 묵시의 세계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노아로부터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묵시의 세계가 지평선 너머로 쳐들어올 때 지평선 너머로 새로운 게 등장, 묵시의 해가 떠오르게 되면, 여기서 질문 하나 던집니다. 역사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것이 오겠어요, 알아먹지 못한 게 오겠습니까? 도저히 알아먹지 못하는 거예요.
세상에 방주 만드는 아이디어가 도대체 누구 아이디어에요? 이거는 그 당시 철공소 어떤 직원의 아이디어도 아닙니다. 방주 가지고 구원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세상에 십자가 피 흘림으로 구원받을 줄이야 이거는 그 어떤 종교도 모르는 거예요. 불교는 깨달아야 돼요. 도를 닦아야 돼요. 그러나 그게 아니고 내 도 안 닦아도 저쪽에서 피 흘리심으로 그 피와 살이 나에게 영생을 준다는 아이디어, 이 발상 자체는 지평선 넘어오는 묵시의 세계에서 공개된 사실이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걸 신약성경에는 사도 바울을 이걸 두 자로 뭐라고 합니까? '비밀'이에요,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이에요. 광주화평교회 설립 예배할 때 제가 설교 본문 뽑은 건데 한번 봅시다. 저는 그때 감동을 잊지를 못하겠습니다. 골로새서 4장인데요. 신약성경 328페이지. 이것은 우리 여기 새순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동원교회 목사님도, 새순교회도 마찬가지인데.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니까 기도하라고 요청하는데 그 기도내용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그 다음 뒤에 뭡니까? "그리스도의 비밀" 이거는 역사에 속한 사람이 도저히 꿈에 상상도 못할 역사세계에서 인간이 만들어낼 수도 없는 그러한 묵시세계에서만 비로소 있는 그 그리스도의 비밀이 지평선 넘어, 수평선 넘어, 넘어오기를 그리고 그런 문이 열리기를, 제발 좀 기도 해줘. 그리스도의 비밀, 전할 수 있는 문이 열리기를.
참, 기도한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기도내용이 중요하죠. 뭘 기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이 온 천지에 여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도록 제발 나를 위해서 기도 좀 해 달라. 내가 이 복음, 비밀 전하는데 지치지 않도록 주춤주춤 하지 않도록 과감하게 전할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 말 답변인지, 어떤 것을 이야기할 것인지 주께서 묵시적 힘으로 주님의 비밀의 힘으로 우리가 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사도 바울은 묵시에 속한 존재지, 역사에 속한 존재라고 볼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한번 볼까요. 298페이지. 12장 2절에 보면, 부득불 내가 자랑한다. 부득불만 나오면 내, 주몽 그 사람 생각나요. 부득불 자랑한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그 사람은 셋째 하늘에 올라갔죠. 몸 밖에 있는 몸 안에 있는지 구분도 안 되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그가 낙원에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비밀이잖아요.
묵시세계에 통용되는 그 비밀을 인간의 언어로써 어떻게 확실하게 담아 둘 수는 없어요. 하지만 불완전하게 담긴 역사적 언어 가지고 묵시를 이야기할 때 들을 귀 있는 사람은 그게 비록 불완전하게 얽혀있어도 묵시의 영이 같이 임해 버리면, 그걸 샛별이 떠오른다고 하는데, 샛별이 떠오르게 되면 베드로후서에 나오죠. 샛별이 떠오르게 되면 아, 그게 그게 그런 뜻이죠. 하고 믿어질 때 이것은 너가 네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능력으로 임했기 때문에 같이 십자가 피를 믿게 되었다 이 말이죠.
그 십자가 피를 뭐라고 하느냐? 그걸 가지고 '새 언약'이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걸 새 언약. 새 언약이 있다는 말은 무슨 언약이 있다는 말입니까? 옛 언약이 있단 말이죠. 그 언약이 바로 맛보기로 창세기 6장에 보면 누가 나오느냐? 바로 노아가 등장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안식, 이름 자체가 노아의 이름이 뭐냐? 저주받는 이 땅이 노아로 말미암아 안식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우리 역사에 속한 인간들의 아이디어는 뭐냐? 뭉개고 새로 짓는 게 아니고, 과거의 나의 이력도 좀 인정해 주고 거기서 더 발전된 형식으로 잇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우리 뜻이고, 하나님은 뭉개고 새로 나가는 겁니다.
아침에 만약에 눈을 떴다. 그런데 오늘이 내 아들이 수능 치는 날이다. 안 그러면 오늘 원서 냈는데 시험발표 날이다. 기도하게 되면, 상투적인 기도 있잖아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해놓고 그런 건 상투적인 거예요. 그런 건 빨리 지나가요. 심각한 건 뭐냐? 주여, 제가 앞에 쫙 깔아 놨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전능하시고 자비롭고 상투적인 걸로 밑에 언질을 딱 뇌물 먹여 놓고, 하나님한테.
그 다음에 진짜 중요한 거. 주여, 애가 벌써 삼수 째입니다. 올해는 도저히 참을 만큼 참았는데 올해만큼은 어떻게 좀 의대, 그렇게 공부 잘했는데 의대 좀 들어가게 해주옵소서. 앞에 많이 이렇게 운 던져놨잖아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영광을, 십자가 복음을 그걸 받아 보시고, 다 가상타 여기시고 진짜 내 원하는 우리 아들 의대 좀 들어가게 공납금은 어쨌든 간에 내가 댈 테니까 넣어 달라. 이렇게 기도를 하지요.
복음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 다 이제 골로새서 4장 그 이야기는 없어졌어. 그런 건 기억도 안 나요. 할 때 하나님의 묵시의 능력이 와 버리면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는 내 기도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떤 순간에 깨닫는가 하면, 방금 내가 기도한 것, 참 잘했지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첫째 시간에.
마지막 내 양심이 이런 기도는 잘했다고 쳐주세요. 잘했잖아요. 영광을 위해서. 어쨌든 간에 잘했잖아요. 잘했다, 못했다를 따지는 이것을 이 판단이 사라지고, 최종판단,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이런 허접스러운 기도라도 하도록 그러니까 은물로써 하나의 노리개 감으로 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주께서 지금 내 기도를 받아주신 분으로 계시다는 게 믿어진다는 거. 이럴 때 우리는 뭐냐? 이것을 죽음을 느껴요. 나의 죽음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묵시가 올 때는 뭐로 온다?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역사를 역사가 아무리 길더라도 우리는 죽은 자로 간주하고 죽음조차도 이겨내는 십자가의 피, 이걸 하나의 세트로 해서 같이 병행해서 우리에게 쳐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오게 되어 있다고.
나는 참, 죽어도 당연하지. 그런데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용서받았잖아. 그러니까 내가 허접스러운 기도해도 주여, 이거 가지고 죄 많다 하지 아니하시고 용서해주잖아. 하는 그러한 느긋함. 그러한 느긋함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뭐냐 하면, 내가 내 아들이 떨어진다 해도 엄마로써 내가 뭘 해주지, 어떻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지, 내가 어떻게 하면 걔를 위로할 수 있지. 세상은 시험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면 되지.
다른 관점에서 십자가 관점에서 걔를 진정으로 묵시적 관점에서 위로해 주려고 할 때 그 사람은 바로 언약적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게 한 3초 하지만. 언약적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다가 나중에 엄마, 드디어 합격 먹었어. 삼수 만에 되었어. 하면 이노무 자식아, 주님께 영광 돌려야지. 니 자랑하면 안돼. 라고 속으로 하면서 주여, 보너스도 감사했습니다. 또 3초 지났으니까 다시 아까 3초 계획은 묵시적 계획을 다 날아가 버리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다른 교회는 감사헌금, [의대 합격했음 감사헌금] 이런 복음적 교회는 아니지만 다른 교회 가면 그렇게 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한테는 해당사항 아니고, 거기는 언약 관계없으니까.
창세기 노아의 존재는 바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성을 갖고 있느냐를 더 확대시켜서 그리고 더 십자가를 뚜렷하게 한 걸음 더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노아시대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베드로전서 1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이미 예수님 오시기 전에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기에 있어서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을 앞서서 미리 보여주었다. 다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언약이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봅시다. 창세기 6장. 여기 보면 6장 17절에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여러분, 이게 횡포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어떻게 땅에 있는 것을 다 죽이려고 하느냐? 너무 과합니다. 벌이 과합니다. 이렇게 하겠지만 여러분, 땅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는 땅이지 우리 소유의 땅이 아니에요.
펄벅이라는 여자 작가가 지은 책이 있지요. 뭡니까? [대지] 아닙니까? 그 대지는 중국의 선교사이야기인가 그런 쪽의 내용 같은데. 하도 땅이 넓어서 대지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뭐냐? 땅은 대지는 영원한 우리의 고향이라는 겁니다. 귀소본능에 의해서. 흙에서 돌아가는, 귀소본능이니까 우리 꺼라는 거예요. 땅으로 돌아가지만 우리 것은 아니에요. 이 땅은 하나님의 새 언약을 보여줄 책무가 있는 땅입니다. 제가 미리 성경의 창세기 8장, 9장을 앞당겨서 이야기합니다.
땅에서 뭐가 일어나는가? 사계절이 규칙적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은 인간이 비록 범죄 했지만, 그러니까 인간이 계속 범죄해요. 전에 노아 때 범죄 했으면 뭐 했습니까? 저주받았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죄를 해도 지금 저주 안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저주를 감해주는 다른 루트, 다른 노선이 새롭게 발생되었어요.
그게 뭐냐? 노아의 방주의 역할입니다. 노아의 방주 안에는 두 종류가 들어갑니다. 하나는 뭐냐? 정결한 짐승이 들어가고 또 하나는 더러운 짐승이 들어가요. 뭐가 더러운지, 뭐가 정결한 것인지, 이건 노아의 양심이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렇게 한 거예요.
어쨌든 간에 이 방주 안에는 뭐냐? 정결한 것과 깨끗한 것과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 두 종류 들어가지요. 들어가는데 사실은 홍수심판의 입장에서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여야 됩니까? 죄를 저주한다는 입장에서 누구를 죽여야 돼요? 더러운 건 죽이고, 정결한 건 살리는 이게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미래가 우리의 현재를 구원하는 입장에서는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역전이 일어나요.
뭐냐? 깨끗한 것을 잡아서 더럽기 한량없는 우리가 깨끗한 미래의 묵시 덕분으로 우리가 살아난다는 것을 묵시 안에 방주라는 도구를 가지고 은물을 가지고 보여줍니다. 방주를 통해서 보여주고, 그 다음에 노아라는 인간을 통해 보여줍니다.
노아가 술을 먹었거든요. 그야말로 처먹었다 하지요. 술을 진짜 자기 몸을 처먹었다는 말이 맞아요. 자기 생각 이상으로 많이 먹은 거예요. 노아가 술을 얼마나 먹었던지 자기가 벌거벗은 것도 몰랐어요. 알았으면 자기가 알아서 가리지. 그야말로 주책이에요, 주책.
노아가 벌거벗었을 때에 방주가 정결한 것이 죽고, 죽음은 이쪽에 정결한 것에 죽음이 오고 그 덕분으로 더러운 이 땅이 비록 죄는 졌지만 계속해서 사계절의 축복을 준 것처럼, 이것이 방주 안에 있는데. 같은 방주를 탑승해서 구원받아 놓고, 그 노아의 아들 가운데 셈과 함과 야벳 세 형제 중에서 자기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았는가를 이 묵시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가 벌거벗었잖아요. 참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 아닙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담요를 가지고 보지 않고 뒷걸음쳐서 이걸 덮어줬지요. 우리가 이같이 해서 구원받았다 이 말이죠. 우리가 벗겨버리면 둘 다 우리는 죄인인데 주께서 덮어주는 은총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해서 할 때 노아가 깨어나서 그 사실을 알고 하는 말이,
너 같은 사고방식은 이 땅의 은혜가 합당하니까 이 땅에서 번창하라. 해서 숫자가 늘어나는 축복을 받고, 그렇지 않고 얼레리꼴레리 한 함은 누가 잘났나 이렇게 아버지를 노출한 함은 이 땅에서 숫자가 증가하더라도 저주의 양태를 보여주는 저주가 이런 게 저주라는 것, 저주 받은 운명은 빼도 박도 못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그러한 인생길을 같이 갑니다.
그러니까 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인지 양 쪽 다를 보여주는 그러한 무대 역할극으로써 이 세상은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에 양과 염소가 분리되어야 됩니다. 흔히 양과 염소가 분리될 때 주를 위해서 착한 일 하고 뭐 했다 하니까 사람들은 그걸 나도 주를 위해서 착한 일 해야 양 취급 받아서 구원받겠구나. 하는데,
마태복음 25장 보면, 놀라운 것이 자기가 뭘 했는지 몰라요. 참 재미있어요. 제가 언제 주님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었으면 언제 했습니까? 하니까 너희들끼리 주의 이름으로 모였잖아. 그게 주님한테 한 거야. 이래 되고, 저쪽의 지옥 갈 놈들은, 내가 주님 오셨는데 언제 안 했습니까? 오시면 내가 했을 텐데. 이렇게 하잖아요.
그리스도 이름으로 안 모였으면 지옥 갈 집단이에요. 교회를 시시하게 보지 마세요. 교회란 것이 묵시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밀어줘야 들어올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 쓴 글이 있잖아요. 하나님의 노력 없이는 지옥 못 간다고. 얼마나 하나님의 공로가 없으면 지옥을 못갑니다. 그래서 지옥에서도 주님을 주님이라고 영광 돌릴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양쪽 다 영광 다 받습니다. 챙길 건 철저하게 다 챙기는 거예요. 지옥 보내서 영광 받고, 천국 보내서 영광 받고.
인간의 이 땅은 대지는 펄벅처럼 우리 소유가 아니에요. 우리가 돌아올 고향이 아닙니다. 우리가 돌아올 고향은 없어요. 천국 아니면 지옥 둘 중에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은 아니에요. 이 땅은 사라집니다. 나중에 저주로 사라져요. 그래서 땅에 건 생각하지 마.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대략적으로 그렇게 좀, 구체적으로 해봅시다.
여기에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완전한 자다 이 말이죠. 노아가 방주 만들 때만 순종했겠습니까, 그전에도 순종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순종했지요. 지금 모든 인간이 다 불순종하는 가운데 있는데 노아만이 순종했다는 말은, 노아가 자질이 뛰어났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동행이 에녹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노아를 인도한 거예요. 노아가 하는 행동마다 다 완벽했다면 노아가 메시아게요. 그런 건 아니고요. 메시아는 예수님이지 노아가 메시아가 아닙니다.
노아를 다루시는 분이 노아를 떠나지 않은 거예요. 하루에 2초가 되든 하루에 3초가 되든 심지어 한 달에 0.5초 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묵시의 능력을 그 노아의 역사를 깨부수면서 침투해서 늘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주님을 잊을 때도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늘 깨닫게 하는 거예요. 깜짝깜짝 소스라치게 깨닫게 하는 겁니다.
아, 나는 내가 의미 없지. 내 역사가 의미 없는 건데, 왜 자꾸 과거 회상하면서 그렇게 했는가? 뭐, 짧은 순간이지만 퍼뜩하는 순간이지만 아, 나의 역사, 나의 것, 내 자식, 내 교회, 내 직분 이게 의미가 없다는 사실, 이건 하나의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그걸 짧은 스쳐지나가면서도 깨닫게 한다는 겁니다.
이게 여러분들, 능력이 아니면 안 돼요. 이게 우리 자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공부해서 아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막 흔들어 대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을 우리가 흔든다고 해서 그게 날아가는 게 아니에요. 증발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한테 물어보지 않고 순간순간 그걸 툭툭 이렇게 내 속에서 또 다른 능력이 차올라서 그걸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노아가 방주 만들 때 대패질이 완벽했느냐, 그거 치수가 뭐, 정확했느냐? 어디 전자현미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쟀겠어. 대충 했겠지, 대충. 그걸 문제 삼는 게 아니고, 노아가 순종했다는 게 중요하다 말이죠. 노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이라고 취급을 했고, 그쪽에서 노아가 아무리 여러분, 비 옵니다. 홍수 옵니다. 이야기해도 그거는 어느 개가 짖느냐하고 듣지를 않았어요.
사람이 십자가 피로 어떤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서 천당 갑니다는 말을 저쪽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믿어지는 것은 주의 능력이 임해야 믿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발음이 똑똑하고 문법이 맞아서 더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말을 바꾸어도 대충 이야기해도 믿고, 믿고 구원받을 사람은 믿습니다. 저들이 안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어이 못 믿게 했기 때문에 안 믿는 거예요. 그 사람보고 너무 닦달 내지 마세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사도 바울이 성령으로 전했어요. 그래도 그 사람들 유대인들은 안 믿었습니다. 성령으로 했는데 능력 있는 설교했는데 안 들었어요. 그 사람들은. 왜? 성령께서 원래는 구원받을 사람, 지옥 갈 사람 구분하기 위해서 성령이기 때문에 다 믿게 100% 믿게 하는 게 성령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참 이런 말씀 있어요. 어디 가서 니가 복음 이야기할 때 네 선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너가 아니고, 너 속의 성령께서 이야기한 줄로 니가 인정하라 이 말입니다. 참 묵시에 속한 사람은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 목사님이나 성도님들이 설교나 전도해놓고 후회하지 마세요. 아이고, 바보병신 같이 그 말씀을 놓치다니 그걸 해서 완벽하게 완전히 꼬시는 건데. 이렇게 하지 마세요. 어눌하게 이야기해도 내 양심이 잘했다, 못했다 판단하지 마세요. 그거 또 하나의 죄입니다.
믿을 사람은 거꾸로 해도 저쪽에서 번역해서 집사님, 말 바꿔서 한 것 아닙니까? 저쪽에서 알아서 합니다. 믿습니까? 안 믿을 사람은 완벽하게 이야기해 줘도 절대로 안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아직 때가 안 되었나 보다. 나만 참 고생했지만 그래도 내 고생해도 아직 내가 살아있는 자체가 기적이니까. 주의 능력으로 저 사람
그래서 어떤 사람 만날 때,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항상 기회가 생겨서 어떻게 단도직입적으로 하면 안 되고 어떻게 어떻게 복음을 섞어서 이야기하려고 찬스를 노리죠. 하다보면 말도 놓쳐서 아이고, 바쁘다. 내, 집에 가스불 올려놨다. 가는 수도 있고, 붙잡혀서 나한테 한 소리 듣는 수도 있고. 그것 때문에 구원받거나 안 받거나는 우리들 소관이 아니니까.
여러분, 교인수 적다고해서 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교인수가 적다, 나쁜 짓 했다. 우리 양심이. 교인수가 많다. 야, 착한 짓했구나. 우리 양심이 이야기하죠. 이것 저거나마나 피로 구원받습니다. 피로 구원받는데 내가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이 피를 그 순간 모독하는 게 돼요. 예수님의 피를 모독한 게 됩니다. 주님께서 능력 없어서 구원받을 사람 못 구하는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양은 내 음성을 알고 목자는 양을 아나니. 어떤 경우에도 목자 놓치는 양이 없고요, 양을 놓치는 목자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성사해 냅니다. 아버지 주신 자를 반드시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다 살리는 이것이 내가 온 뜻이다. 다만 우리를 그렇게 사용할 뿐이죠.
항상 우리가 노아를 생각하세요. 노아는 방주를 크게 지었습니다. 아마 지금 계산으로 해보면 여기에 어떤 사람은 여기에 수천 명 들어간다. 수천 명까지는 들어 가겠습니까만 어쨌든 간에 여덟 명 보다는 많이 들어가요. 그러니까 자리가 텅텅 비어 있어요. 그래도 노아 방주는 출발시켰습니다. 이 전세버스는 그냥 출발했어요.
에게, 여덟 명이냐? 더 태워라. 이런 거 없습니다. 때가 되매, 달랑 여덟 명 태우고, 말이 여덟 명이지 사실은 자기들 식구 밖에 없잖아요. 목사 식구들 밖에 없어요. 그중에서도 함은 하나의 에이리언4처럼 외계곤충이 들어와서 완전 엉망진창 만들어놨지만, 저주받은 놈이 탔지만. 어쨌든 간에 목사 가정은 구원 받았어요. 노아 목회 성공한 겁니다. 크게 성공한 거예요.
왜? 여덟 명만 태우고 출발할 수 있다는 거. 보통 배짱이 아니거든요. 순종했습니다. 비 오는데 뭐. 노아가 출발시킨 게 아니고, '출발' 이게 아니라 뜨는 데 어떻게 해요. 비 오니까 뜨잖아요. 어, 뜬다, 뜬다 하니까 떠버리는데. 일종의 물에 뜨는 잠수함이죠. 떠 있는 잠수함. 그것도 문도 외부에서 닫아버려요. 닫아서 문 열어주세요. 해도 소용없고, 여기서 열려고 해도 닫을 사람 없고, 닫혀도 열사람 없고.
하여튼 방주는 오늘날 예수 안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징은 첫 번째, 방주는 인간의 계산으로 완벽하지 않다는 거예요. 완벽케 하시는 분이 따로 있다. 인간의 치수가 완벽하냐 그거는 여러분 상관없어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교회가 교회다워야지 하는데, 교회답다는 게 뭐고 물으니까, 교회가 절기 지키고 뭐, 목사는 어떻게 해야 되고 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되고. 에라이, 그래서 완벽해 봐라. 전부다 역사적 산물이죠. 교회가 그런 식으로 완벽한 게 아니에요. 교회는 주님의 피에 감사하면 그 자체로서 이미 완벽, 끝났습니다. 화목제물로 끝났다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자막 올라가는데 뭐가 더 필요한데요.
우리 교회는 딴 건 다 좋은데 점심 식사당번이 빵꾸가 나고. 그거 괜찮아요. 식사당번 한 번 안 하면, 그 다음 라면 끊어먹으면 되고, 자장면 시켜 먹으면 되지, 하면 되지. 그것 가지고 교회 덜 완벽하다 더 완벽하다 그것 가지고 따지지 마세요. 괜히 먹는 것 때문에 사람들, 주의 피가 모독당합니다.
하여튼 간에 이 방주라 하는 것은 노아가 어떻게 엉터리로 만들었던지 간에 물 오면 뜨게 되어 있다는 사실. 물로 간다면 안전빵이라는 거예요. 안전, 이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는 거예요. 어쨌든 아무리 방주가 어설퍼도 다른 대안은 방주 바깥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요. 인간이 아무리 어설퍼도 착한 일 적게 해도 예수 피를 대체할만한 대안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완벽하게 살고 어설퍼도 어설픈 신자라도 성경 평생 한 번 못 읽은 어설픈 신자라도 기도 오천 번 못하더라도 예수 피만큼 완벽한 그런 인간의 행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방주 안에는 누가 죽는다? 방주 안에는 노아가 죽어가는 게 아닙니다.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이 죽어야 되고, 같이 탔던 더러운 짐승이 그 덕분에 살아서 그 뒤부터는 이 땅에 무지개로서 죄 지어도 다시는 물로써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그런 은혜가 일어납니다.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다는 이 사실이 너무 혜택을 많이 입다보면 당연한 거 같지만 정작 물로써 심판 받다보면 이게 얼마나 큰 보너스인지를 알게 될 겁니다.
그래서 방주를 만든 세계는 그러니까 방주에서 새 땅이 나오죠. 그게 몇 장이냐 하면, 진도 잘 나간다. 진도 나가는 맛이 있어야지. 맨 날 1장, 이래 하면 맛이
창세기 8장에 보면, 8장 20절에.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그 다음에 뭡니까?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그러면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은 그 짐승이 짐승을 위함이 아니고, 누굴 위함이란 말입니까? 사람의 죄를 위함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선 뭘 대신 받았다? 깨끗한 짐승을 받았단 말이죠. 이제 깨끗한 짐승을 방주에 실어 놓은 이유를 알겠지요.
죄 짓는 인간에게 땅의 입장에서 전의 차원에서 저주하지 않겠다는 그런 은혜의 뜻으로서 정결한 짐승을 같이 태워서 동승시켜서 잡은 겁니다. 그래서 새라 하는 것은 단순히 새의 죽음이 아니고, 결국은 나중에 누구의 죽음이다? 어떤 인물의 죽음, 어떤 인격자의 죽음,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용서받는 그런 것을 방주 안에서 이미 그걸 담아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노아가 방주에 나올 때 베드로후서는 이걸 뭐로 보느냐? 바로 이걸 가지고 세례라고 해요. 아이고, 죽을 놈, 살아났구나. 그걸 새로운 피조물이라. 세례 받았다. 세례를 표시할 때 이렇게 표시합니다. 방주 가지고 사용합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어려서부터 악하다 이 말은 결국은 사실은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이 아니면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 이 말이고, 죽어 마땅하다 이 말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안식을 건드린 죄목, 하나님의 안식이 있어야 될 그 자리에 죄로 범람케 했던 그 죄목에 의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싹쓸이 당할 저주 받아야 마땅한 인간인데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영생 얻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영생 얻었다는 말을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좀 더 풀이하면, 예수님 때문에 영생 받았다 하는 것이 저 지평선 넘어 영생의 나라에 영생 받았다는 게 확연히 들어나지만, 지금 이쪽에 지금 현재 아직까지 예수님 재림하지 않은 이 세상에도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영생 받았잖아요. 영생의 힘이 아직 예수님 재림하지 않은 우리에게 계속 도달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밥 먹고 사는 것도 누구 덕분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신 덕분에 밥 먹고 사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밥 먹고 사는 게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덕분에 우리가 목숨이 유지되고 목숨이 부지 되니까 건강이 유지되니까 그 건강히 일하니까 우리가 월급 받고 사는 거예요.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살아가는 거예요. 모든 덕은 예수님 덕분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께 영광 돌려라.
미래가 현재를 장악하고 있다 이 말 이해됩니까? 결국은 지금은 도대체 이 혜택이 누구한테 오지? 지금은 희미하고 몰라요. 나중에 죽어서 주님을 만나보면, 아이고, 주님이시군요. 주님께서 나를 먹이시고 입히셨군요. 라고 그때 십자가 지신 그 못 자국 보면서 안다 이 말입니다. 도마가 그걸 했잖아. 아이고, 주님께서 이렇게 못 자국 지셨군요. 살았군요. 이야기한단 말이죠. 미리 지평선 넘어서 여명이 우리 속에 비추는 겁니다.
이걸 제가 여명이라고 했는데 성경에 있는 표현으로 보면, '복음의 광채' 결국 여명이죠. 여명, 빛살, 햇살. 복음의 햇살이 우리 마음속에 비추게 되면 어둡던 우리 마음이 복음으로 만족하는 그리스도의 비밀로 만족하는 그러한 성도가 된다는 그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는 뭐가 비추지 않습니까? 복음의 햇살이 비추지 않지요. 이용복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있지요. 그 낯짝에 땡빛이 하는 것. 그 얼굴의 햇살이라 하는 노래있지요. 그 낯짝에 땡빛이 비춘다는.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그 얼굴에 낯짝에 주님의 땡빛이 비춘다 했어요. 얼마나 좋았던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엘리사를 위해서. 하나의 시대를 초월한 역사를 초월한 묵시적 세계에서 한 가족이라. 그게 패밀리에요, 패밀리. 이상 가족이죠.
뭐, 먼저 죽었던 엘리야도 거기 있고 모세도 거기 있고, 심지어 아브라함은 예수님 보기를 고대하다 봤고, 이천 년 전에 아브라함도 예수님 봤고, 그 유명한 인사들 거기 다 모여 있어. 요압, 예레미야, 이사야. 톱으로 켜인 사람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도 거기 있고. 악수하기 바쁠 거야. 아이고, 형님, 잘 있었소. 수고 많이 했지.
그래서 그걸 가지고 제가 이런 표현 했지만, 히브리서 12장에 이렇게 합니다.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가 운동회 할 때 쪽쪽발이 하잖아요. 할 때 먼저 도착해서 뭐 합니까? 뛰어라, 뛰어라. 잘 한다 내 새끼, 잘 한다 내 새끼. 고구마 줄까? 유치원 달리기 할 적에 먼저 학부모들이 운동회에서 응원하듯이 뛰어라. 잘한다, 잘한다. 좀 더 힘내. 격려하듯이 나중에 오면, 짝짝짝 내 새끼 최고, 내 새끼 최고. 안고 뽀뽀하고 난리 안 납니까? 점심 되면 점심 먹으러 가자. 김밥 하나 사들고 맛있게 김밥 먹고 하잖아요.
내가 달려 갈 길 다 달리고, 마지막에는 나의 면류관을 갖다 주님 발 앞에다 반납하는 그런 길을 우리보다 먼저 앞서서 믿음을 선물 받았던 이삭, 아브라함 그 사람들 다 갔던 길입니다. 지금 고난이요, 묵시적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 지금 사람이 근본적으로 영혼이 살아야 이게 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을 할 수 있지, 꼴랑 자기 몸도 자기 사진도 보기 싫어하면서 무슨 이 세상에서 재벌 됐니, 박사 돼서 성공 했니, 큰 교회 목회자해서 성공했니. 그건 성공이란 말 하지 말아야 돼요.
여러분, 예배당 크게 지어 놓으면 한 육 개월 동안 기분 좋을 겁니다. 육 개월 지나고 보세요. 맨 그 자리가 그 자리고. 별로 또 큰 교회 있으면 욕심만 나지 별로 좋다는 느낌 안 들어요. 여러분, 아파트 새로 들어갈 때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이제는 더 이상 어떤 벌도 ( ) 좋습니다. 저는 여기서 만족합니다, 하겠지요. 그거 두 달 못 넘겨요. 포르말린 냄새가 어떠니, 옆집 아파트 값이 내리니 오르니, 게다가 폐기물하면 데모한다고 이러지. 늘 오게 되면 좋은 줄 몰라요. 욕심이 생겨서 더 좋은 것 또 찾아가고 싶지요.
그래서 남편이 하는 이야기 안 있습니까? 여자한테 잘 해줘봐야 소용없다고. 잘해주면 늘 잘해주는지 알고. 술 안 하지, 담배 안 하지 이게 보통 남편한테는 없는 건데. 술 안 하고 담배 안 하고 이러면, 집사가 그래야지, 뭘 잘했다고 마땅한 것 아니냐? 이거 얼마나 어렵다고? 뭘 어려워. 당신, 딴 거 안 하니까 그것 가지고 핑계 댄다고, 이래 티방주고 이러죠.
어쨌든 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미 무지개언약을 그걸 무지개를 피워서 하나님께서 너거 죽을 뻔한 놈, 어린양 보고 살려준다 하는 그것이 계속 각인되도록 새겨지도록 그런 쪽으로 이 세계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마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햇빛과 공기를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내린다 이 말이에요. 햇빛과 공기를. 엘리뇨 현상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안 옵니까? 오게 되어 있지요.
저는 전라남도 눈 내린다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아파요. 철렁 내려앉습니다. 왜? 아이고, 저 화평교회 멀어서 교인 적으면 목사님 설교하는데 얼마나 착잡하겠노? 눈 온다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주일날만 눈 오게 하느냐 말이죠.
여러분, 크리스마스 날 이게 주일이었습니다. 다가오는 설날 뭔 날입니까? 주일날입니다. 목사들, 통탄합니다. 지금. 오후예배 하느냐, 마느냐 고민입니다. 지금. 오후예배를 안 드리자니 세속에 타협했다는 주의 책망이 겁나고, 오후예배를 그냥 밀어붙이라고 하자니 목사가 분위기 파악도 못한다고 교인들한테 어색한 관계 될까봐 겁나고.
주의 뜻대로 이카지만, 하나님 뜻대로 하는 게 아니라 교인들 마음대로 하지만. 특히 주일날 낮, 오후 2시 하는 덴 덜 해요. 7시에 하는 교회, 난~처합니다. 전부다 술 먹고 여기다 강정 먹어서 이빨 전부다 끼어서 술 먹고 이렇게 오면 옆에 한 쪽에는 고스톱 치다 와서 손이 더러운 돈으로, 타짜 되어서 이래서 오는데 모여서 고스톱 한판 돌리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주일날을 설날 되게 해서 하십니까? 그게 뭐냐? 설날 된 게 나쁘냐? 라고 판단하는 너의 양심이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 이러한 묵시를 또 놓치게 만들어요. 또 놓치게 이렇게 만들었다 이 말이죠. 주께서 앞으론 주일날마다 설날 되고 주일날마다 추석 되어서 계속 뭔가 양심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 걸 깨닫게 하는 쪽으로.
그럼 아직 주일날 오후예배 드리자는 말입니까, 말란 말입니까? 아직 결론 안 났습니다. 니 마음대로 하세요. 니 마음대로. 니 마음대로 하면 돼요. 해도 아무것도 아니고, 안 해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냥 니 마음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안 왔다고 안 온 교인들 닦달 내지 마시고, 오신 것만 해도 고맙다고 여기면 되는 겁니다. 결론 났네? 오는 것만도 감사해요. 칭찬 받으려고 오시면 된다 이 말이에요.
9장에 보면,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라고 했을 때 '너희'가 누굽니까? 지금 새롭게 땅에서 번식하는 그러한 짐승들과 사람들은 계속 누구의 혜택을 입는다 말입니까? 누구의 혜택을.
노아가 갖고 있는 노아가 받았던 그 언약의 혜택을 입지요. 그죠? 이 말은 뭐냐? 노아언약에 의해서 심판되는 시대에 돌입했다 이 말입니다. 너의 양심이 너를 판단하는 게 아니고, 너에게 은혜를 주는 분이 너를 판단할 자격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어느 때부터? 노아 때부터. 노아 때부터는 이 노아에게 은총을 주시는 분이 바로 노아 땅 위에 있는 모든 땅의 사람들, 짐승과 모든 걸 심판할 권한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로마서 1장에 보면, 저희들이 하나님을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도 하나님께 감사치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사 그들로 하여금 사형에 해당된다. 저주받게 하시잖아요. 마지막 심판하잖아요.
이런 질문하는데, 목사님, 세종대왕이 구원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세종대왕 구원받았습니까하는 것은 그 심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양심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세종대왕이 우리에게 어떤 혜택을 주었는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종대왕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가지고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판단해봤자 지옥 갑니다. 왜?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방인은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저주받아요. 무조건 저주에요. 판단하나마다 지옥 가는 거지요.
주몽, 소서노 다 지옥 가는 겁니다. 유리왕 다 지옥 가는 겁니다. 부득불 지옥 가는 겁니다. 아아, 그들이 지옥 가니 아깝다. 아깝다하지 마세요. 우리도 지옥 갈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접붙임을 받아서. 여러분, 접붙인다는 말이 뭔지 알아요? 보궐로 들어왔다, 보궐로. 서울대학 보궐로 들어왔다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는데 누구 하나 아파서 그 자리에 들어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보궐인 거예요.
그래서 개 같은 여자한테 데가볼리가 여인이라 하죠. 그 같은 아이에게도 주인한테서 떨어지는 주인이 실수해서 떨어트리는 그 음식물을 먹고도 주인의 상의 맛을 함께 그 주인의 맛이 얼마나 맛있는가를 맛보면 그걸로 족합니다. 개 같은 여인, 우리한테도 부스러기 가지고 니가 구원받았다. 니가 오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이 말입니다. 뭐가 믿음이냐? 저는 주님 앞에 개 같은 여자, 인간이며 구원 안 해 주셔도 주님 책임이 아닙니다. 그걸 아는 자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세리하고 바리새인하고 기도하는데 성전에서. 주여, 나 같은 인간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고 기도하니까 니가 의인이고, 바리새인은 저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에라, 이놈아 지옥 가거라.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닙니다. 이게 지금 왜냐하면, 심판주가 따로 있어요. 그분은 심판만 할 뿐 아니라 심판 받을 자에게 영생 주는 권한도 그분한테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구원받은 게 지붕 뚫어서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중풍병자는 뭐냐 하면, 주님께서 용서하면 병이 아니고, 죄까지 난다는 걸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로써 사용되기 위해서 주께서 그냥 체포해다가 포착해서 사용하신 거예요. 지붕 뚫어서 하면 우리도 지붕 다 뚫어서 하겠다. 일부러 정문 아니라 지붕 다 뚫겠다.
주께서 구원 될 자가 아닌 자도 구원하신다. 그게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새 부대에 담는 그겁니다. 새 포도주가 되죠. 여기서 무지개를 세워서 하는데 13절에 보면, 내 무지개를 두어 이것이 너와 세상과의 무엇의 증거라 했습니까? '언약의 증거' 야, 이 언약을 이루는데 방주 만들라고 누가 지시했습니까? 하나님이죠. 그러면 언약은 누가 이루십니까? 언약은 바로 언약을 내리신 분이 언약을 이루어요.
그렇다면 구약은 구 언약이죠. 신약은 새 언약이죠. 이 말씀, 이 모든 행함, 지시, 명령, 율법 누가 다 지킵니까? 하나님이 지키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는 뭔데? 우리는 죽었다가 그냥 공짜로 건짐 받은 것뿐이에요. 이 말씀 지킨 혜택 입은 것뿐이에요. 그런데 이 말씀을 자기가 지킨다고 우기니까 그게 자기 의가 되잖아요. 어떤 말씀도 못 지킵니다. 다 지켜서 우리에게 그냥 공짜로 넣어주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십자가 다 지켜서 우리에게 그냥 넣어 주는 거예요. 구약이든 신약이든 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 왜 보게 하느냐? 우리가 어느 하나도 못 지킵니다. 그럼 못 지킨다는 말은 우리는 저주 받아야 마땅한데 참, 십자가 상아탑 조~오타. 십자가, 하나님의, 우리식으로는 지혜죠. 세상 사람은 모르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 참된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나오지, 내가 말씀 지켜서 나온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 사람만이 십자가만을 증거하지요. 내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공로인 십자가만을 증거하지요. 성경 보고 십자가 증거하고, 성경보고 십자가 증거하고.
세상에 어느 인간이 돈을 싫어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어느 인간이 먹는 거, 입는 거로 만족한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우리는 이걸 어느 인간이 다시 구름 타고 오는 걸 기다리겠습니까? 우리는 내일 되면 내일 할 일도 바쁜데 어디 딴 걸 기다리겠어요. 주께서 우리에게 늘 깨닫게 하시는 그런 능력을 주시는 겁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쉽지만.
다시 이야기합니다. 언약을 세웠다는 말은 우리보고 언약대로 살라는 말이 아니고, 언약을 세운 분이 언약을 마감하신다. 완료를 시켜요. 그래서 우리는 뭐만 하면 됩니까? 언약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다 완성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그게 우리한테 적용되는가? 그것을 우리는 관람하고 참여하고 동참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홍해 건너갈 때 우린 물 한 바가지 퍼내지 않았습니다. 뭐, 홍해 흘러가는 그 바닷물을 한 바가지 퍼낸다고 바닷물이 움찔할 줄 압니까? 아이구, 야 이거 우리가, 이래 할 줄 압니까? 퍼내도 소용없어요. 그냥 바닷물 갈라요. 주께서 그 안에 길을 냈다 이 말은 우리 힘으로 어떤 혜택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 앞으로 옆으로 통과할 때 그걸 세례라 하는데, 고린도전서 6,7장에 세례라 하는데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내가 한 건 없습니다, 내가 한 건 없습니다. 하고 그 세례를 받아야 되고 그걸 통과해야 되죠. 내가 한 게 전혀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지금 이 역사의 세계, 나의 역사보다도 묵시의 여명이 내 마음에 비춰서 내 마음은 항상 새벽이다. 샛별 또는 내 마음은 새벽이어야 돼요. 너무 대낮 되면 더워서 안돼. 늘 새벽처럼 신선해야 됩니다. 새벽의 여명을 안고 우린 직장에 가고,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 나가게 되죠.
그때 우리는 거기서 실수를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나의 죄를 알고, 언약은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지요. 어떤 힘으로 나는 이 성경 말씀 하나 못 지켜요. 탐내지 마라는 말씀 줘도 못 지켜요. 우리는 다 보이는 게 탐이 나고 다 그런 겁니다. 그걸 깨달음으로서 말씀을 주께서 지킨다는 걸 알게 합니다.
그 다음에 9장 마무리해야 되니까 계속 해 봅시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여기서 제가 아까 원칙을 이야기했지요. 창세기 1장에서 2장할 때 액센트가 어디 있었나? 액센트가 2장에 있지, 1장에 있지 않다는 거. 1장은 하나의 시작이고 항상 결과가 중요한 거예요. 2장에서 4장까지 4장의 끝이 여호와의 이름, 여호와가 중요하다는 거. 5장에서 동행한다, 에녹이 중요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9장에 보면, 함과 셈과 야벳 이렇게 되는데, 갑자기 함이 안나오고 뭐가 나옵니까? 함보다 먼저 나오지요. 뭡니까? 예? 누구? '가나안'이 먼저 나오지요. 새로운 지명, 새로운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셈과 야벳이 하나로 뭉쳐져요. 뭉쳐지면서 셈이 축복받는 대열에 대표자로 등장하고, 함과 가나안에서 가나안이 저주받는 대열의 대표로 등장하면서 가나안과 셈의 전투가 전쟁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래야 줄거리가 앞에 또 미래에서 잡아당기니까 미래가 잡아당기는 힘은 딱 걸어서 현재를 걸어서 당기는 힘은 이런 새로운 죄와 저주와 축복의 내용이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내용이 보여 지도록 인도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다보면 목사님한테 설교 들으면 이제 하나 정리했다. 이젠 복음에선 난 빠삭하니 알았다. 백점 만점이다. 했는데 나는 이제 어지간한 죄는 용서한다. 어지간한 고민과 걱정거리는 복음으로 이겨낸다고 장담을 했는데 지평선 너머에 새로운 인물이 딱 등장한다 이 말이죠.
과거의 남자친구를 우연히 만났다든지. 일단 갈등이 또 새로운 갈등을 유발시켜요. 이거는 그 남자 만나기 전까지 내 안에 미처 그런 죄가 아직 그런 게 있을까? 아마 없을 걸. 하고 장담했던 그 죄가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면서 나도 미처 몰랐던 그것이 내 속에서 나의 본성이 다른 색깔들이 또 나옵니다. 나오면 나중에 그것보다 더 큰 그 죄보다 더 큰 은혜가 은혜의 국자가 준비되어 있어서 너는 오년 전만 해도 이렇게 큰 은혜인줄 몰랐지. 지금 보니까 바로 니가 오년 전에 생각했던 니 세계관에서 생각했던 은혜보다도 지금 은혜가 더 크지, 봐, 더 크잖아.
죄가 가는 곳에 은혜가 이만큼 큰지 미처 몰랐지. 하고 그동안에 있었던 오년 동안 있었던 나의 모든 죄까지 말끔히 날아가면서 오년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이제 어떤 죄를 져도 복음으로 정리하고 이길 수 있다. 마귀야, 온나. 한판 붙자. 라고 장담하면서 십년 뒤에 또 무슨 일이 나타날지 몰라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예측 못할 일들이 자꾸 발생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지 했는데 세상에 그 이웃이 나의 아파트 값을 내리게 할 줄이야. 그 위층에 이웃에 동창생 왔다고 친하게 지내고 예수 믿고 전도했는데 세상에 이웃 애가 와서 얼마나 떠드는지, 장차 우리 집 팔려고 하니까 위층의 애 떠들어서 한 천만 원 내려야 돼. 생돈 천만 원 날리게 만드는 동창, 그럴 때 나의 과거의 노력을 생각할 때 저주하고 싶잖아요.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무슨 사태가. 이렇게 천사 같은 나에게 어떤 그런 악랄한 악마의 양면적인 모습이. 그걸 여러분 각오를 하세요. 각오를 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복음을 알았다 하지만 또 주님께서 죽어도 다시 산다는 영생을 신나게 보여주기 위해서 또 무슨 사건을 우리를 간직하고 있는지 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건을 만나든지 간에 십자가 피에서 이미 죽은 자고 우리의 역사는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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