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래님이 온각지 까페에 쓴 글이 곧 “處置처치”될 것 같아서 임의로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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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토론실 (글, 사진)
전통과 진실, 그리고 책임에 대하여(통합본)
나무아래 추천 1 조회 124 21.10.23 06:28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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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진실, 그리고 책임에 대하여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지금까지 제가 보고 경험한 바에 따라 온깍지 문파와 우리 전통사법에 관한 전반적인 생각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당연히 일개 초보 궁사의 주관적인 견해겠지만, 우리 활쏘기에 대한 나름의 진지한 공부와 우리 활판에 대한 충정이 담긴 글로써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 전통과 진실
먼저 전통에 대한 생각입니다. 온깍지 문파에서 늘 내세우는 ‘전통’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저는 무엇보다 ‘사법’에 관심이 있으니, ‘전통 사법’으로 의미를 좁혀도 되겠네요. 온깍지 문파에서는 전통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곧 몸과 몸, 말과 말로써만 이어진다는 생각을 늘 고수하시지요. 하지만 역사의 굴곡 속에서 한때 ‘끊어졌던’ 전통이라면 어떨까요? 과연 반드시 그렇게 당대의 사람을 통해 이어진 것만 전통이라는 주장이 가능할까요? 우리 역사 또는 문화재에는 같은 시대에 공존했던 ‘사람과 사람’에 의해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됐다가, 남아 있는 여러 자료들을 근거로 ‘복원’된 것들이 없을까요? 또, 그렇게 복원된 것들은 전통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전통 춤과 음악, 무예, 요리, 공예 기술 가운데서 몇몇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모로 살펴본 바로는, 우리 활쏘기 사법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것이 이른바 ‘철전사법’인데, 여러 문헌자료에 따르면 그 가장 큰 특징은 양팔을 모두 (특히 보사의 경우 위에서 아래로) 뿌리면서 화살을 보내는 것이지요(이른바 ‘별절’). 그렇게 양팔을 함께 뿌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활쏘기의 본질에 충실하여) 화살에 최대한 강력한 힘을 실어 보내기 위함이구요. 그런데 유감스럽게 이 사법은 19세기 말 활이 무기로서 총포에 완전히 밀려나고 무과(武科)가 폐지되면서 전승이 단절된 것으로 보입니다. 20세기 초의 희귀 영상이나 1930~40년대 무렵 집궁한 구사들의 궁체 영상을 봐도 그와 같은 모습을 찾아보긴 거의 어렵기 때문이죠. 하지만 <조선의 궁술>을 포함하여 최근에 알려진 자료[북관유적도첩, 사결, 사예결해, 정사론]상으로는 분명히, 이 사법이 조선 시대 무장들의 ‘주류’ 사법이며 ‘최상’의 사법이었다고 판단합니다(자세한 건, 철전 문파의 김귀혁 접장님이 쓴 ‘철전사법 소개글’과 ‘사법논쟁 글’ 참고).
만약 위 판단이 우리 활쏘기에서 사법에 관한 진실이라면, 과연 무엇이 우리의 진정한 전통사법일까요. 당연히 ‘철전 사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뒷손만 뿌리는 이른바 ‘온깍지 사법’은 아무리 잘 봐줘야 가벼운 유엽전을 보낼 때 쓰는 전통 사법에 불과하고, 화살에 최대한의 힘이 실리기엔 아무래도 부족해 보이며, 위에서 거론한 중요한 문헌 자료들에 근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죠. 온깍지 문파에선 <조선의 궁술>, 성문영 공과 (그 아드님) 성낙인 선생을 주요 근거로 온깍지 사법이 우리의 유일무이한 전통사법이라 줄곧 주장해 왔지만, 이에 대해서는 철전문파의 김귀혁 접장님이 윗글을 포함한 여러 글에서 충분히 반론을 제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특히 ‘철전사법이 창작사법이라고?’ 참고). 그 글들에 대한 제대로 된 재반론은 지금까지 없었구요.
백보 양보해서 문헌 근거 같은 것은 다 없다 치고, 온깍지 사법을 적어도 지금까지는 전통 사법의 적자라고 일단 인정해 보지요. 그런데 만일 지금 철전 문파에서 주장하는 사법이 더욱 ‘강력한’ 사법으로 실험을 통해 증명된다면 어떠할까요? 저는 후손들과 세계인들에게 전해 주어야 할 우리의 전통 사법은 철전 사법으로 당연히 대체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적어도 활쏙이의 사법에 관한 한 ‘최상의 것’만이 진정한 전통으로 남을 수 있는 권위를 누려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헌 해석을 둘러싼 논란은 일단 제쳐두고라도, 어떤 사법이 우리 활쏘기의 적통으로 전해져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객관적 실험, 실증을 통한 판별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죠. 그래서 일전에 제 글에서 그런 비교 검증도 제안했던 것이구요. 하지만 반응은 참...
결론적으로 우리 활쏘기에서 무엇이 진정한 전통사법인가를 확정하는 일은 두 가지 기준이 결정적이라 생각합니다. 첫째는 타당성 있는 ‘문헌적 근거’이고, 둘째는 ‘실증적 강력함’이죠. 일제 강점기라는, 우리 궁술의 쇠퇴기에 살았던 몇몇 구사들의 ‘모호한 권위’에만 기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곧,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검증 기준을 통과할 때만이 진정한 전통 사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고 그 사법을 바탕으로 세계에 우리 활쏘기를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철전 사법은, 엄정한 객관적 실험을 통과하진 못했기에(하지만 경험적으로는 거의 입증되었다지요) 아직 단정 짓긴 좀 이르지만, 전통사법의 적자로서 온깍지 사법보다 분명히 우위에 있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소견입니다.
2. 도피(逃避)
이제, (주장은 되지만 아직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대하는 태도와 책임에 관한 제 생각을 나눠보고 싶습니다.
사실상 활쏘기에서 사법은 단순합니다. 불과 10초쯤 안에 이루어지는 연결된 몇 개 동작에 관한 문제죠. 물론 실전에선 다양한 상황 속에서 여러 변형 동작이 필요하고 또 가능하겠습니다만, 적어도 서서 움직이지 않는 과녁을 놓고 쏘는 정사법에서 그 동작이란 고정된 한 초식에 불과합니다. 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바에 국한 시켜 말해 본다면 결정적인 차이는 단 한 부분이죠. 앞뒤 양 팔을 모두 뿌리느냐, (앞 팔은 거의 고정하고) 뒷 팔만 뿌리느냐... 물론 좀더 들어가면, 어떤 모양의 발디딤으로 서느냐, 허리 아래 몸통을 고정시키느냐 돌리느냐, 살대 높이는 어느 정도로 높이느냐, 뒷손은 어느 정도까지 당기느냐, 숨은 어떻게 쉬느냐 등등 여러 세부적인 문제가 있습니다만 그건 다 부차적이고 다양성과 여백을 얼마간 인정할 수 있겠지요. 온깍지 사법과 철전 사법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결국 앞 팔의 움직임입니다. 이 앞 팔이 거의 고정이냐 크게 뿌려지느냐가 핵심 쟁점이라는 뜻이지요. 온깍지 문파에선 주로 만나본 구사들의 궁체를 근거로 ‘고정’을 주장하고, 철전 문파에선 문헌 자료와 수련 경험을 근거로 위에서 아래로 (불거름까지) 크게 뿌리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사법 문헌에 부합할 뿐 아니라 더 강력하다는 이유에서죠. 이 차이는 너무 커서 혼동의 여지가 전혀 없기에, 각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중학교 수준의 지력만 되면 근거와 논리를 보고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고, 동작에 대해서는 어린 아이들도 눈으로 보고 차이를 대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뭐 뜬구름 잡는 어려운 얘기들 할 필요가 사실 없지요. 문헌의 내용을 읽어보니 어느 편 주장이 더 근거가 타당하냐, 동작을 살펴보니 어느 쪽이 더 힘차고 우람하냐(사예결해의 ‘務要豪壯’)고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올 수도 있는 문제란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리 어른들 사이에선 합의와 결론이 안 날까요? 저는 그 이유가 결국 ‘도피’라고 봅니다.
온깍지 문파는 적어도 2000년대 초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 거의 20년간 우리 활판에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우리 활쏘기가 대궁 중심의 145미터 과녁 맞히기 스포츠로 변화(축소)되는 와중에서, 이른바 온깍지 사법과 전통 활터의 사풍을 주장하면서 ‘전통’의 가치와 의미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사법’으로 주류 활판을 바꿔내는 부분에선 분명한 한계를 보였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대략 2010년대 후반부터 우리 활판의 변방에서 몇몇 활꾼들이, 진정한 우리의 전통 사법은 온깍지 사법이 아니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펴기 시작했지요. 짐작하시겠지만, 그 가운데 제가 보긴 가장 체계적이고 근거와 논리가 분명한 사람들이 철전 문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가장 큰 배경은 아마도, 북관유적도첩이라는 ‘충격적인’ 옛 그림이 알려지고, 사결과 정사론, 사예결해 등 조선 시대의 활쏘기를 알려주는 자료들이 우리 활판에 새로이 소개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아시는대로, 거기에는 이정우라는 열정적이고 근기(根氣) 있는 한 활꾼과 김귀혁이라는 냉철하고 글발(?) 있는 활꾼이 큰 역할을 했지요.
학문과 과학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팩트(자료)가 나타나 진실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펼쳐지면 관련 전문가들이 그 주장을 치열하게 검증하고, 타당성이 인정되면 그것이 하나의 학설로 정립되지 않습니까. 저는 이러한 상식적인 과정이 왜 우리 활판에선 잘 이루어지지 않는가에 대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진지한 검증은 없고 무시와 감정적 비난과 자기주장만 있어요. 결국 핵심 원인은, 전문가 또는 여론 주도자들이 진실(로서 주장되는 것)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일종의 도피이지요. 아마도 그동안 쌓아 올린 본인들의 작은 명예나 기득권을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 깊은 배경에 깔려 있을 테구요. (한편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수년 혹은 수십 년 익숙해진 내 궁체를 바꿔서 새로 시작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 대목에서, 진실 혹은 대의를 위해 내 것을 버릴 수 있는, 활꾼으로서의 대인배다움이 참 아쉽습니다.) 우리 활판의 전통 사법 논의의 장에서 매우 무게가 큰 온깍지 문파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철전 문파의 별로 복잡할 것도 없는 주장에 대해, 끊임없는 회피, 변명, 비난으로 일관해 왔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려보지요.
먼저, 성낙인 선생을 비롯하여 직접 만나 보았다는 구사들의 모호한 권위(과연 누가 그들에게 우리 전통 사법의 적통 혹은 계승자라는 권위를 부여했나요?)에만 거의 기댄다는 것, 전통은 몸과 몸으로만 이어지며 마치 바위에 새겨진 글씨와 같아 더하거나 뺄(곧 해석 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미 앞에서 짚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열린 논의에 대한 전형적인 회피의 태도이자 전통 사법에 대한 부당한 ‘독점욕’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전통 사법에 관한 한 우리와 다른 얘기를 하는 인간들은 죄다 사기꾼이다...”
물론 누구도 돌아보거나 관심이 없던 시절에, 지난 세월 우리 활쏘기를 열성을 다해 지켜온 구사들을 존경하고 대우해야 한다는 선한 의지로, 사라져 가는 그들의 몸짓을 기억하고 배워 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아낌없이 시간과 돈을 들이고 ‘발품’을 파신 부분은 일단 칭찬 받으실 만합니다. 하지만 객관적 학문 또는 진실의 세계는 뜨거운 열정만 가지고는 안 되고, 무엇보다 냉철해야 하지요. 적어도 그때 만나 본 구사들이 <조선의 궁술>을 거의 몰랐다는 점(따라서 문제의 중요 구절, “줌손과 활장이 반드시 불거름으로 져야 가장 좋은 사법이다”에 대해 그분들의 궁체를 근거로는 제대로 해석이 안 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조선의 궁술> 이후 발굴된 새로운 사법 문헌 자료들을 충분히 세심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점 등을 간과하신 것이 아닐지요. 혹시, 알고 계십니까? 고산자 김정호 선생께서 대동여지도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것은 전국을 몇 번 돌고 백두산을 수 차례 오르는 열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그건 완전한 신화이죠), 집안에 들어앉아 숱하게 수집된 지도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조합하고 편집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국, ‘발품’이 아니라 ‘이성’이 그런 뛰어난 지도를 만들어냈지요. 쇠퇴하여 이미 사라지다시피 한 궁체는 그 시대 구사들을 아무리 찾아 다녀봐야 알 수 없었고, 오히려 우리 활쏘기가 쇠퇴하기 전 당대 최고의 궁사들을 통해 남아 있는 문헌 자료들 안에 제대로 원형이 보존돼 있었다고 추론한다면 억측일까요?
온깍지 문파의 또 다른 기둥인 류근원접장님이 쓰신 ‘전통 사법을 찾아서’라는 글이 있지요. 앞으로 100년 동안 <조선의 궁술> 해석과 관련하여 그 이상의 글은 나올 수 없을 거라 정진명접장님이 평가하셨던 글 말입니다. 그 글을 보아도, <조선의 궁술> 가운데 마치 ‘보석처럼’ 박혀 있는 위 구절[‘줌손과 활장이...’]은 매우 모호하게 해석하셨더군요. 등힘이 밀리면서 발시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곧 천천히, 줌손은 불거름으로 떨어진다는 식으로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발시하고 나서 줌손을 ‘천천히’ 불거름으로 내리는 동작이, ‘가장 좋은 사법’이라는 말까지 붙이면서 써 놓아야 할 내용일까요? 발시 후 과녁을 향해 멈춰 있던 줌손이, 굳이 천천히 불거름으로 갔다가 다시 옆구리로 갈 까닭이 뭐 있겠습니까. 그냥 바로 본래 자리인 옆구리로 가야지요. 도무지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온깍지 문파 접장님들의 동영상을 봐도 발시 후 동작이 저는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더군요. 또 온깍지 사법을 오래전부터 구사들로부터 회자되는 ‘학무형 사법’이라 줄곧 주장하셨지만, 오히려 철전 사법이야말로 학무형에 어울린다는 김귀혁 접장님의 새로운 주장(학무형 사법이란 무엇인가?)도 흥미가 있으니 한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당시로선, 발시와 ‘거의 동시에’ 줌손을 수직으로 힘차게 뿌리는 동작은 상상할 수가 없었고, 당연히 그리 어정쩡하게 해석을 하실 수밖에 없었으리라 여깁니다. 그 글을 참고했을까요? 지금 돌아다니고 있는 <조선의 궁술> 현대어 판본을 보면, 그 대목을 옮기면서 원문에 없는 ‘서서히’라는 구절을 삽입해 놓았더군요. 전형적인 ‘뇌피셜’이고 오역이라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옛 사법 문헌[왕거의 <사경>, 그리고 그것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서유구의 <사결>]에 나오는 ‘극력견전’ 항목을 보면 발시와 동시에 빠르게 윗고자를 오른 신발 쪽으로 그어 내리면 화살의 힘이 더해진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죠. 바로, 유명한 ‘별절’에 관한 구절입니다. 이 ‘별절’은 명나라의 기효신서는 물론 조선의 사법비전공하, 사예변증설, 사예결해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정사론에는 장언식 공의 독창적 용어 ‘전거후집’이 포괄적으로 설명되면서 ‘동병상직’, ‘절파절현’이란 용어로 좀 달리 표현되어 있지요. 이렇게, 오래전부터 무장들 사이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 <조선의 궁술>에 나오는 바로 그 보석 같은 구절이라 해석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쏘아보면 다르게 쏠 때보다 화살이 훨씬 강력하게 날아감을 저도 경험했구요. 또 이정우접장은 그 보석 같은 구절에 함께 나오는 “줌 뒤로 화살이 떠서 들어간다”는 말도 그리 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철전 문파 카페에는 더욱 자세한 내용을 담은 글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온깍지 문파에서는 전통 사법에 관한 위와 같은 새로운 주장에 대해 꼼꼼하게 검토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지적하며, 근거를 들어 비판하면서 정면으로 논쟁하는 대신 슬쩍슬쩍, 두리뭉실(비판 대상을 적시하지 않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태도로 일관하셨지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봅니다.
1. ‘북관유적도첩’에 대해 “~도첩인지 뭔지...”라며 냉소적으로 표현함. [<활쏘기의 지름길> 113쪽]
: 이 그림은 화가 이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림 솜씨와 내용으로 볼 때 당대 최고의 화가에 의해 그려진 조선의 중요한 역사기록화이지요. 그리 가볍게 볼 만한 그림이 결코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림에서 활장이 엎어져 시위가 땅을 향하고 있는 모습은, 처음 그 그림을 본 많은 활꾼들을 충격에 몰아넣었고, 의문을 낳았으며, 그 뒤 별절 사법 연구에 불을 당겼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림에는 말 또는 성벽 위에서 구사하는 수평형 별절만 나오고 있습니다만, 사경과 사결의 ‘극력견전’ 항목에는 보사(步射)로 앞에 장애물이 없을 때 구사하는 수직형 별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수평이나 수직이나 힘의 강약(또는 제어 여부)만 좀 다르지 힘쓰는 원리와 방향은 똑같지요.
2. ‘고자채기’는 줌손 쳐들림을 방지하기 위해 윗장을 누르는 중국 사법이라 근거없이 주장함. [<활쏘기의 지름길> 103~104쪽]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각궁 문화권 안에 면면히 전해지는 ‘별절’ 또는 ‘카트라(KHATRA)’에 관한 완전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겠지요. 단순한 ‘회피’ 목적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제가 본 중국 사법서 어디에도 ‘별’을 그러한 활병 방지 목적으로 구사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절’과 함께 ‘별’이 활쏘기의 근본이라는 구절[기효신서]은 있어도 말입니다. 혹시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3. <조선의 궁술>은 유엽전 사법이고, 무과 사법은 명맥이 완전히 끊어져서 이제는 복원이 불가능하다고 말함. [본 카페 ‘온깍지 동문회’ 게시판 10번글]
: 이에 대해서는 김귀혁 접장님이 ‘철전사법이 창작사법이라고?’라는 글에서 자세히 반론을 펼쳤다고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4. <사예결해>에 나오는 ‘별절’이란 용어는 무관 이춘기의 말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 적은 젊은 문관 서용보 개인의 첨가물일 것이라 무리하게 추측함. [네이버카페 온깍지 아카데미, 사법공부방, 683번 696번글]
: <사예결해>에서 ‘결’은 이춘기 공의 말이고 ‘해’는 서영보 자신의 풀이라는 억측을 바탕으로 말씀하셨던데, 우리 전통 사법에서 ‘별절’을 제거하고 싶은 바램에서 비롯된, 무리한 전제와 추론이라 생각합니다. 김기훈 교수님의 <사예결해> 해설 논문을 좀더 꼼꼼이 읽어보셔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당대 최고의 선배 무장이 이야기한 사법을 일개 후배 서생이 제 맘대로(조선에선 쓰이지도 않는?) 중국 사법 용어를 그냥 가져와 쓴다...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억측이지요.
5. 각궁이 아닌 개량궁으로 익히고 쏘면서, 또한 각궁을 10~15년 다뤄보지 않고서, 이야기하는 전통 사법 논의는 들어볼 가치가 없다고 말함. (너무 많이 말씀하셔서 굳이 출처를 적시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전통 사법 논의는, 앞에서도 잠시 짚었지만 실상 그리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 아니지요. “발시할 때 앞팔을 (짜면서) 크게 밑으로 뿌리는 것이 최선이냐, 아니면 그냥 그대로 고정하(거나 살짝 미)는 것이 최선이냐” 이는 중학생 수준에서도 각 주장들의 근거를 보고 판단 가능하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각궁이냐 개량궁이냐의 차이는 여기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거의 똑같은 크기와 구조를 가진, 그리고 거의 비슷한 성능을 보여주는 활 ‘재질’의 작은 차이가 서로 다른 사법의 ‘쏘임(의 우열)’을 판단하는 데 미칠만한 영향은 거의 없다는 것이지요. 게발(반)깍지와 온깍지를 미세한 차원에서 비교할 때는 혹시 몰라도요. 스트라디바리우스던 동네 악기점의 30만원짜리 연습용 바이올린이던, 찌고이네르바이젠을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내공을 가늠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각궁을 방패 삼아 자꾸 뒤에 숨으신다면 아이들이 웃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철전 문파에서도 각궁을 쓰는 사람이 분명 있다고 아는데, 각궁으로도 철전 사법을 구사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고 오히려 개량궁보다 더 편하다는 이야기도 나오던데, 그렇게 쏘면 각궁만 부러뜨린다, 각궁도 안 쓰는 사람들이 뭔 전통 사법이냐라는 얘기가 (댓글에서도) 계속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냥 헛소문만 듣고, 아니면 자기만의 희망 사항에 근거하여 그들을 무조건 깍아내리고 싶어서들 그리 하겠지요.
6. (철전 문파의 주장을 포함하여) 사법에 관해 나오는 여러 주장들을 단순히 인터넷 혹은 온라인에서나 이루어지는, 한 단계 아래에 있는 것들이라 은근히 깍아내림(역시 여러 군데서 말씀하셨기에 굳이 출처를 밝히지 않습니다).
: 일종의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정식 책이나 논문으로 활자화되지 않고 인터넷 게시판이나 유투브 등에서 나오는 사법 주장들은 그다지 가치가 없다는 말씀이지요. 이는 물론 온깍지 문파의 화려한(?) 출판 업적을 바탕에 깔고 하시는 것일 텐데, 역시 도피라 봅니다. 매체가 곧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얘기도 있습니다만, 실상 매체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 자체가 아닐까요? 물론 인터넷 글 가운데는 너무 쉽고 가볍게 쓴 글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요. 하지만, 온깍지 문파 분들만큼 글쓰는 능력도, 인맥도, 돈도 없는 활꾼들이 공짜인 인터넷 매체를 통해 글을 쓰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 ‘내용와 질’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긴 철전 문파에서 나온 많은 글들 가운데는 지금 바로 책이나 논문으로 편집해 담아도 될 만한, 알맹이 있는 것들이 꽤 되던데요. 정말로 만일 활자화가 된다면, 그땐 진지하게 읽고 평가해 주시겠습니까? 온깍지 문파도 인터넷이 막 퍼져나가던 시절을 잘 타면서 우리 활판에서 이름을 얻지 않으셨습니까. 개구리가 올챙이적 시절을 모른다는 속담이 이런 경우일까요.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인터넷을 많이 활용하고 있는 온깍지 문파에서 ‘인터넷 글’ 운운하시면서 다른 주장들을 일단 깍아내리고 들어가시는 것은 별로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선입견 없이, 언제나 글 내용 자체를 봐 주십시오.
7. 그 외에도 ‘<조선의 궁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질문들’이나, ‘활공부에 걸림돌이 되는 어리석은 생각’ 같은 글에도 도피에 해당하는 것들이 꽤 눈에 보이지만, 김귀혁 접장님의 ‘사법논쟁 글’이나 제 글에서 중요한 반론은 거의 이루어졌다 보고 이만 생략하겠습니다.
3. 책임
지금까지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도피’에 관해 여러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핵심은 간단합니다. 성낙인 선생을 포함한 해방이전 집궁 구사들의 궁체를 가까이서 직접 지켜보고 이야기를 들은 우리가 정립한 온깍지 사법만이 곧 <조선의 궁술>이 말하는, 변할 수 없는 정통/전통 사법이라는 전제 하에, 전통 사법이나 <조선의 궁술>에 관해 말하는 다른 어떤 이야기도 사이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지요. 이러한 주장 혹은 전제(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취약한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로 말씀드렸습니다)를 깔고서 우리 활판의 주류(게발/반깍지) 사법이나 근거가 매우 취약한 다른 전통 사법 주장들(대한궁술원 장영민 접장님의 활대 엎기나 조영석 명궁님의 정연궁체 등)을 비난하시는 것은 혹 무방하나, 이른바 ‘족보’와 문헌 근거와 경험적 강력함이 ‘거의 입증된’ 철전 사법까지 싸잡아 제대로 검증도 안 하고 무시, 비난하신다면 되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런 태도는 (앞으로 ‘확증’될 가능성이 많은) 진실에 대한 단순한 회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훗날 조상님들과 후손들에게 무거운 책임 추궁도 감수해야 할지 모를 사안이라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온깍지 문파는 적어도 우리 활판의 전통 사법 분야에서 좋든 싫든 가장 중요한 전문가 그룹이자 여론 주도자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 활쏘기의 전통(최상의 원형)에 목마른 많은 활꾼들에게 ‘선생’ 노릇을 상당히 하고 있다는 뜻이죠. 이 말은 또한 그만큼 많은 책임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에 그런 말씀이 있다죠. “너희는 선생 되기를 즐겨 하지 말라” 말씀(진리)을 가르치는 선생에게는 더욱 많은 책임을 묻겠다는 하나님의 경고라 하더군요. 그래서 선생 된 자들은 늘 자신을 엄격하게 되돌아보며, 내가 혹시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는가, 사람들을 혹시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지 않는가 조심 또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예수께서도 당시 유대 백성들의 선생 노릇을 독점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일갈하셨지요.
그런데도 온깍지 문파는 우리의 전통 사법을 오직 일제 말기에 집궁한 구사들의 몇몇 궁체에 근거하여, ‘전통은 오직 몸에서 몸으로만 전해진다’는 편협한 생각을 방패 삼고서, 조선 시대의 중요한 사법 문헌들은 대개 가볍게 여기면서, 그것들과 깊이 연관된 <조선의 궁술>(특히 보석이라 할 만한 그 핵심 구절)에 대해서는 본인들만의 해석을 고수하고 계시지요. 이는 단순한 고집이나 무책임을 넘어 일종의 배임과 이기적 욕망이 아닐지요. 제 글에 달린 몇몇 댓글들을 보십시오. 철전 문파의 주장과 근거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사기꾼이니, 사이비니, 골로 빠졌느니, 족보 없는 사법이니 하며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왜 있겠습니까. 온깍지 문파 안에서 (자기들 보기에) 매우 권위 있는 선생들이 그러한 얘기들(최근엔 ‘유사품’이란 표현도 나왔지요)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옛 말씀에 ‘호가호위(狐假虎威)’라 하던가요. 결국, 깊은 공부가 부족하고 수양이 덜 된 활량들은 ‘온깍지야말로 한국 전통 사법의 종주’라는 식의 선생들 말씀을 등에 업고 다른 주장에 아예 눈과 귀를 막은 채, 터무니없는 비난과 반말조의 악담마저 꺼리지 않는 일(특히 몇몇 국궁 밴드나 국문연 카페에서 본 서울 S정의 최모 씨나, 여기서 보이는 조,말, 슈슈빠빠 같은 사람들의 댓글)이 벌어지고 있지요. 또 그러한 비난은 안 하더라도, 온깍지 사법을 배워 숱한 시간을 들인 사람들이 스승님들의 말씀만 듣고 철전 문파의 주장에 눈 귀를 완전히 닫았다가, 나중에 혹시 진실을 알고 “이 산이 아니었구나” 한다면 그 보상은 누가 어찌 하시겠습니까.
앞에서도 짚었듯이 온깍지 문파가 그 동안 상당한 수고와 노력으로 이 패역하고 완고한 우리 시대의 활판에서 전통 활쏘기를 지켜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법에 관해선 제가 판단하기에 한계가 분명한데도 무리하게 그것을 밀고 나가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고 쌓아 올린 업적으로 한국 활쏘기 역사에서 독보적인 이름을 남기겠다, 그리고 지금과 훗날에 사람들의 유일한 인정과 추앙(?)을 획득하겠다는 뜻이겠지요. 뭐 그것이 크게 돈이 될 일은 없겠지만 나름의 명예는 될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명예욕’(혹은 자존심)이 온깍지 문파의 밑바닥에서 작동하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나름 짐작해 봅니다.
이제 긴 글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만일 온깍지 문파에서 저의 글을 정말 진지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신다면 다음과 같은 반응 혹은 변화를 저는 기대해 보고 싶습니다.
1. 철전 문파와 (초청이든 방문이든) 선배로서 그리고 강자(어쨌든 더 세력이 크니까)로서 먼저 손을 내밀어 교류를 시작하고, 서로의 쏘임에 대해 선의의 비교 검증을 해 본다. 그리고 만일 어느 한 편이 우월한 것으로 판정되면 깨끗이 승복하고, 진 편에서는 더 이상 본인들이 우리 전통 사법의 대표라는 식의 주장을 하지 않으며 이긴 편에서도 상대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진 편에서 상대편의 사법으로 모두 꼭 바꿔야 할 필요는 당연히 없고, 양쪽의 장단점이나 본인의 자질,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혹시라도 유의미한 우열 판정이 확실히 나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 서로를 인정하고, 적어도 상대에 대해 사이비니 사기꾼이니 하는 비난을 삼간다.
2. 우리 활판의 주류 관행 사법을 전통 사법으로 바꿔 나가는 데 서로가 아낌없이 힘을 모은다. 양 편의 인력과 자원을 필요할 때 서로 제공하면서, 연구 세미나, 출판, 영상 제작, 활쏘기 대회 개최 등을 함께 추진한다.
제 바램이 너무 이상적이고 순진한가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적어도 현재로선 철전 문파보다 훨씬 강자인 온깍지 문파가 약자에 대해 자신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손을 내밀기는 힘들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인간에 대해, 특히 선조들이 남겨 주신 자랑스런 활쏘기를 사랑하고 수련하는 활량들에 대해, 일말의 기대마저 저버리고 싶진 않네요. 그래도 혹시 압니까. 온깍지 문파의 좌장이신 정진명 접장님께서, 옛날 젊은 시절 우암정 정간 현판을 도끼로 내리 찍던 서슬퍼런 결기로, 대의를 위해 당신의 마음에도 도끼를 내리 찍으실지 말입니다.
지금까지 때로 주제넘게, 외람되이, 실례를 무릅쓴 말씀들도 많이 드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활쏘기를 사랑하는 무명의 한 초보 활꾼이, 우리 활판이 진실과 대의를 바탕으로 변화하고 우리의 전통 활쏘기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 빛나기를 염원하는 열정으로 쓴 글이오니, 혹시라도 마음 상하시지 말고 충정을 헤아리며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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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문중에 “적어도 활쏙이의 사법에 관한 한 ‘최상의 것’만이 진정한 전통으로 남을 수 있는 권위를 누려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활쏙이”는 2벌씩 자판에서 일어나는 활쏘기의 오타인듯.
젊은 문관 서용보 >> 사예결해를 기록한 죽석관인 서영보 오기인듯. 아랫쪽 줄에 바로 서영보가 나오므로 오기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