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교야구 최고스타인 남우식의 고3 때와 현재 모습.- ●청룡기 고교야구 스타들 어디서 무얼 하나?●
최고스타 경북고 남우식 대기업 임원…80년대 이후 수상자들은 선수로 감독으로 '펄펄'
지금부터 30년 전인 1971년 6월 제26회 청룡기(靑龍旗)쟁탈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 경북고와 경남고는 팽팽한 영(零)의 행진을 이어갔다. 결국 남우식(南宇植)이 투수로 완봉승을 거두고 5번 타자로 결승타를 친 경북고가 1 대 0으로 이겨 우승을 했다. 대구시내는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고 경북고 야구팀은 카퍼레이드에다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흔히 한국 고교야구의 최대 스타가 누구냐고 물으면 선동열이나 박찬호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고교야구를 아는 사람이라면 고2 때 2개 대회, 고3 때 청룡기를 비롯한 전국 5개 대회를 거의 혼자 던지면서 경북고를 우승으로 이끈 ‘철완(鐵腕)’ 남우식을 꼽는다. 당시 일본 원정 경기에서도 10전 10승을 기록했다. 경북고 동기인 천보성(千普成) 전(前) LG트윈스 감독은 “당시 다른 팀 타자들은 남우식의 공이 너무 빨라 보이질 않는데 어떻게 치느냐고 하소연했다”며 “요즘 기준으로 보면 시속 150km는 웃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우식은 현재 서울 신사동에 있는 (주)롯데햄·우유의 이사대우로 근무하고 있다. 야구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올해 대기업 임원이 되었다. "당시 고교야구는 요즘 프로야구보다 훨씬 더 열광적이었지요. 특히 청룡기는 역사가 가장 오래됐고 선수권 대회이자 교육과 예절을 강조하는 대회여서 가장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우식은 한양대 진학 이후 고교 시절의 후유증으로 팔꿈치와 어깨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결국 실업야구단 롯데 자이언츠를 끝으로 1980년 12월 야구계를 떠났다. 고교 이후에도 그런 대로 성적은 괜찮았지만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야구만 하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처음엔 너무 어렵더군요. 낮에는 영업사원으로 그라운드가 아닌 마케팅에서 경쟁했고 밤에는 경영대학원을 다니며 자신과 싸웠습니다. 운동을 하다가 직장생활을 하는 후배들을 위해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당시 남우식과 청룡기에서 맞붙었던 경남고 김성관(金成琯) 투수는 타자로 전향, 고려대를 졸업하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남우식과 함께 선수생활을 했다.
올해로 제56회를 맞는 청룡기 고교야구는 가장 오래된 역사에다 ‘선수권(選手權: Championship)’ 대회라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 특히 ‘배움’ ‘예절’ ‘근검’을 가르쳐 다른 대회와는 차별화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래서 역대 청룡야구에서 수상(受賞)한 스타들은 자부심도 크다.
대체로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이후의 청룡야구 스타들은 대부분 현역 선수로 뛰는 사람이 많은 반면, 1981년까지의 청룡야구 스타들은 다른 직장을 갖거나 아니면 감독·코치·해설가 등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박노준은 해설가로 맹활약
최강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고3 때인 1981년 단 한 차례 우승도 못한 선린상고의 좌완 박노준(朴魯俊:1980년 우수선수상, 1981년 감투상)과 우완 김건우(金健友:1980년 타격상)는 여고생 팬들을 몰고다니던 스타. 이들의 ‘고졸 이후’는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현재 박노준은 스포츠조선 칼럼니스트이자 SBS해설위원을 맡고 있다. 1986년 프로야구 신인왕을 받았으나 이듬해 불의의 교통사고로 계속 어려움을 겪다가 1999년 LG 투수코치를 끝으로 야구계를 떠난 김건우는 최근 경기도 일산구 탄현동에 선린중 동창인 정태준씨와 함께 최첨단 시설의 대규모 헬스 클리닉을 개장했다. 250평 규모에 100여 운동기구를 갖추고 있으며, 일반 헬스클럽과 달리 전문의(專門醫) 처방에 따라 회원들이 과학적으로 치료 및 운동을 병행한다는 점이 다르다고 한다.
대형 헬스클럽을 경영하기로는 1970년 대구상고를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투수상을 받은 정기혁(鄭基赫)도 마찬가지. 그는 현재 서울 대치동 해암빌딩에 있는 스포츠센터 (주)프리죤의 전문경영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프리죤의 회원은 1400명으로 각계 유명인사들이 즐겨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틀랜타의 두뇌파 투수 그렉 매덕스를 연상시키는 컨트롤과 슬라이더가 뛰어났던 정기혁은 한양대 시절 투수 최고의 영예인 퍼팩트 게임도 기록했고, 기업은행 시절엔 아마추어 국가대표 투수로 활약했다.
그의 두 아들도 모두 야구를 하고 있는데 둘째가 두산 베어스의 떠오르는 샛별인 정진용 투수로, 아버지와 투구 폼을 빼닮았다는 평이다. 정기혁은 고2 때인 1969년에도 준우승을 하면서 감투상을 받아 청룡기와는 인연이 깊다. 그가 31년 전 청룡기 우승을 기념해 만든 사진 스크랩에는 ‘매일 300개의 피칭이 오늘을 이루었다’ ‘모교에서 나는 피나는 연습을 하다’ 등의 제목이 적힌 사진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1981년 결승전에서 선린상고를 6 대 5로 '물'먹이면서 우수투수상을 받은 경북고의 좌완 두뇌파 성준(成埈)은 프로선수 시절 통산 97승을 거두고 은퇴한 뒤 현재 SK 투수코치로 재직하고 있다. 성준은 고교 시절부터 노트에다 상대방 선수의 장·단점을 모두 기록, 분석하는등 가장 공부를 많이하는 야구선수로 동료들이 인정하고 있다.
다른 프로야구단의 사령탑에도 청룡 스타들이 많다. 최근 7연패의 늪에서 겨우 빠져나온 롯데 김명성(金明成) 감독은 부산공고 시절인 1963년 우수투수상과 1964년 타격상을 거머쥐었고, ‘오리궁둥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해태 김성한(金城漢·군산상고 유격수) 감독은 1976년 감투상을 받았다. 1978년 부산고에 청룡기를 안겨준 ‘컴퓨터 좌완’ 양상문(楊相汶) 투수는 현재 롯데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첫 우수투수상 장태영씨는 작고
-아버지와 아들의 닮은 피칭폼.- 1970년 청룡기를 대비해 연습하는 당시 대구상고 정기혁 투수(왼쪽)와 그의 아들인 두산 베어스 정진용 투수.
최근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LG 감독에서 전격 해임된 이광은(李光殷·배재고) 감독은 1973년 청룡기에서도 비운의 스타였다. 1973년 6월 16일 벌어진 배재고와 중앙고의 승자 준(準)결승은 이틀 동안 총 5시간에 연장 20회까지 벌어진 혈투. 결국 중앙고가 4 대 0으로 승리했다. 이틀에 걸쳐 완투하며 패전투수가 된 이광은은 불과 20분 뒤 열린 대구 대건고와의 패자 2회전에 다시 마운드에 올라 4안타 무실점으로 1 대 0 완봉승을 이끌어내는 괴력을 보였다. 이광은은 당시 5게임 62이닝을 완투하는 초인적인 힘을 과시, 우승이나 준우승을 하지 않았는데도 감투상을 받았다.
백인천(白仁天·경동고 포수)과 김용희(金用熙·경남고 유격수)는 각각 1959년과 1973년에 우수선수상을 받았으며 삼성 라이온즈 등 여러 프로구단의 감독을 역임했다. 지금은 야구해설이나 평론에 치중하고 있다.
청룡기 스타 중에는 유명(幽明)을 달리한 스타도 많다.
1947년 제2회 대회(제1회 대회엔 개인상 제도가 없었음)에서 우수투수상을 받은 장태영(張泰英·당시 경남중, 지금의 경남고)은 1999년 8월 2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와 좌완 라이벌이며 1949년 제4회 대회에서 우수투수상을 받은 김양중(金洋中·당시 광주서중, 지금의 광주일고)은 서울중앙병원에 달려와 경쟁자의 죽음을 누구보다 서러워 했다.
젊은 나이에 작고한 스타들도 있다.
60년대 말 경북고 야구신화를 달구며 1967년과 1968년 연거푸 청룡기 우수투수상을 받은 좌완 임신근(林信根)은 졸업 후 불어난 체중과 어깨 통증을 이기지 못해 한일은행에서 타자로 변신, 각종 타격상을 휩쓸었다. 그는 프로구단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1991년 9월 17일 쌍방울 창단 수석코치 시절 구단 버스 안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40대 초반의 나이였다.
단구(短軀)의 중앙고 투수 윤몽룡(尹夢龍)도 절묘한 슬로커브로 1972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황규봉(黃圭奉)과 이선희(李善熙)로 이어지는 철벽 마운드의 경북고를 3 대 0으로 완봉시키며 그해 고교야구 최고 스타로 올랐으나 건국대 입학 이후 탁월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으며 결국 수년 전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의 아들인 정몽윤 전(前) 대한야구협회장은 중앙고 재학 시절 같은 학년인 윤몽룡에 매료되어 ‘도시락 싸서’ 야구장을 쫓아다녔고 결국 1997년부터 지난해까지 대한야구협회장을 맡아 아마추어 야구 발전에 기여했다.
경북고 황규봉은 1972년 감투상을 받는 데 만족했으며 이후 고려대와 삼성 라이온즈에서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다가 은퇴, 지금은 일본과의 무역업을 하고 있다고 지인들이 전했다.
청룡기와 빼놓을 수 없는 스타는 최동원(崔東原·경남고) 한화 투수코치다. 1976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김성한 등 강타자가 포진한 군산상고를 맞아 무려 20개의 삼진을 뽑아내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최동원의 이력은 설명이 필요없다. 그는 10년 가까이 야구복을 벗고 있다가 올해 한화 코치가 되면서 다시 유니폼을 입었다. 대구상고의 '헐크' 포수 이만수(李萬洙)도 1977년 청룡기에서 우수선수상과 타격상을 받았다. 그는 현재 미국 시카코 화이트삭스의 외국인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현역 선수들 중에는 국내외에서 활약 중인 유명 선수들이 거의 모두 청룡야구에서 상을 받았다.
국내외 유명선수는 거의 모두 수상
우선 해외파로는 일본에서 구원투수로 맹활약하고 있는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구대성(具臺晟·대전고)이 1987년 대회에서 우수투수상을, ‘바람의 아들’인 일본 주니치 드래곤스의 이종범(李鍾範·광주일고)은 1988년 결승전에서 연장 11회말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며 우수선수상을, 최근 아깝게 1군에 들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 트리플A리그 포터킷의 김선우(金善宇·휘문고)는 1994년 우수투수상과 우수선수상을 각각 받았다. 1995년엔 현재 미국에 가있는 광주일고 두 동기의 활약이 눈부셨다. 공포의 핵 잠수함인 미국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김병현(金炳賢)은 우수선수상을, 지난해 오른손목 인대 접합수술 때문에 한해를 쉬고 최근 뉴욕 메츠에서 도약을 꿈꾸는 서재응(徐在應)은 우수투수상을 각각 받았다. 김병현은 당시 청룡대회에서 43개의 삼진과 23이닝 연속 무실점, 28이닝 동안 1실점으로 기록적인 0.035의 방어율을 올렸다.
1997년 최우수선수상과 타격상(6할8푼8리)·타점상을 싹쓸이한 신일고의 봉중근(奉重根)은 특이하게 고교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산하 싱글A에서 활약 중이다. 다만 ‘코리안특급’ 박찬호(朴贊浩)는 공주고 2년 때인 지난 1990년 준우승 멤버로 청룡기와 인연을 맺었으나 당시 투수보다는 우익수로서 활약했다.
국내파로는 악바리 노장투수인 두산 베어스 조계현(趙啓顯·군산상고)이 1982년 우수투수상과 우수선수상, 청룡기에서 선린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던 삼성 라이온즈 노장진(盧長震·공주고)은 1992년 우수투수상과 우수선수상, 지방으로 내려가던 청룡기를 서울에 머물도록 한데 공헌한 삼성 라이온즈 포수 김동수(金東洙·서울고)는 1985년 우수선수상을 받았다.
홈런왕인 삼성라이온즈 이승엽(李承燁·경북고)은 1993년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미완의 괴물 신인투수’로 주목받는 삼성라이온즈 이정호(李正鎬·대구상고)는 가장 청룡기 상복이 많다. 1998년 감투상, 1999년 우수투수상, 2000년 감투상을 받아 3년 내내 청룡기 수상 스타가 됐다. 올해로 제56회 대회가 진행 중인 청룡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기를 가장 많이 가져간 학교는 경북고로 통산 7회를 우승했다. 그 뒤를 경남고가 6회로 바짝 뒤쫓고 있으며, 전설적인 투수 신인식(申仁植:그는 1956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중앙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을 배출했던 인천 동산고는 5번 우승기를 가져갔다. 이밖에 대구상고가 4번, 부산고와 광주일고가 각각 3번씩 우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