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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나면, 듣고 나면, 읽고 나면, 말이 막히는 그런 것들이 있다. 존 쿳시의 몇몇 소설은 내게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흥덩한 슬픔이 숨구멍을 막는 듯, 답답해진다. 가슴 먹먹함이 혀를 막아버린다. 그럼에도, 그 중 어떤 경우는 그 나오지 못하는 말을 기어이 털어놓는다. 아니 어쩌면, 나오지 못하는 말을 기어이 꺼내는 힘의 장 안에 밀어넣기도 한다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그가 소설을 통해 한 지점을 통과하듯, 나 역시 그렇게 불편함을, 아득함을 지나간다. 내가 이렇게 존 쿳시의 소설을 읽으면서 힘들어 하는 건 누구나 처할 수 있는 힘든 상황이 그의 소설 속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 보편의 문제로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어이 말을 꺼내는 힘의 장이란, ‘느낌 이후 감’이라는 하나의 경계를 넘게 하는 영역에 들어간 기분을 들게 한다는 말이다. 경계를 넘는 존 쿳시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도 그렇듯이, 이 소설 <슬로우 맨Slow Man>도 소설의 형식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형식을 말하는 소설처럼 보인다.
강력한 의견들, 세뇨르 C, 안야의 의견 등 3단 구성으로 된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가 ‘전체적으로’ 소설이라면, <슬로우 맨>는 초반부는 일반 소설처럼 시작한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작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인해 소설은 흔한 소설이 아닌 특별한/이상한 소설이 되어 버린다. 엘리자베스가 등장하는 그때부터 소설은 어떤 사람의 삶이 아닌 사람들의 사유의 집합체가 된다. 어디에(누구에게) 중심을 둬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교란’ 혹은 ‘교란 이후 생성, 산란’. 존 쿳시 소설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소설은 아래와 같이 정말로 평이하게(가슴아프게) 시작한다.
“충격이 전류처럼 날카롭고 놀랍고 고통스럽게 오른편에 가해지면서 그의 몸이 자전거에서 들린다. 그는 자기 몸이 공중을 나를 때 (“가장 편안하게 공중을 나를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긴장을 풀자!” 실제로 그는 자신의 수족이 고분고분 느슨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고양이처럼 몸을 굴려 일어나 이후의 일에 대비하자” ‘사뿐히’ 라는 이례적인 말까지 생각난다.
그런데 결과가 꼭 그렇게 그렇지만은 않다. 다리가 말을 안 들어서인지, 아니면 잠시 어리벙벙해서인지(그는 자신의 머리가 아스팔트에 부딪치는 충격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듣는 것 같다. 나무망치로 맞는 듯한 아득한 소리), 그는 전혀 일어서지 못하고 옆으로 자꾸 미끄러진다. 그 미끄러짐에 의해 잠잠해질 때까지.
그는 평화롭게 벌렁 누워 있다. 찬란한 아침이다. 햇빛의 감촉이 부드럽다. 자신의 몸이 축 늘어지도록 놔두고 활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나쁜 것들이 있다 .사실, 낮잠을 잠깐 자는 것보다 더 나쁜 것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는 눈을 감는다. 세상이 그의 밑에서 기울어지면서 돌아간다. 그는 정신을 잃는다. ”(5-6쪽)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나이든 남자가 젊은이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받힌 것이다. 남자의 몸이 잠시 공중을 난 뒤 땅에 떨어졌다. 이렇게 교통사고가 난 뒤 이 소설의 주인공 폴 레이몬트는 무릎이 돌아가 버려,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한다. 젊은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몇년에 걸쳐 몇번의 수술을 해서라도, 다리를 절단하기보다는 다리를 살리려고 했을 터인데, 늙은이라는 생각에서, 감염이 적을, 보다 편리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한쪽 다리를 절단한 뒤 몸이 부자연스러운 때, 그를 도와줄 두번째 간병인 마리아냐가 나타나고, 다리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큰 상황에서 설마 그럴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인데, 여튼 폴 레이몬트는 그녀를 욕망하게 된다. 존 쿳시의 소설이 갈수록 이민자들을 다룬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에서 안야가 그렇듯이, 마리아냐 (조기치)는 크로이티아에서 온 이민자이다. 폴 역시 어머니를 따라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한 이민자이다. 남아공 태생의 존 쿳시는 남아공과 무관한,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라는 것만을 말하는 소설을 썼다. 이렇게 원래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이 아닌 폴과 마리아냐가 한 곳에서 얽힌다. 폴은 그녀만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모든 것들을 욕망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그녀와 연관해서는 뭐든 해주고 싶어 한다. 나누고 싶어 한다. 허나 그 일방적인 사랑(욕망)이란, 가능하지 않을 일, 가능할 수 없(다 생각하)는 일이다. 이유는 폴의 욕망에 상응하는 마리아냐의 욕망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리아냐는 이미 결혼한 30대의 여인으로, 남편이 있고, 아들이 있고, 딸이 있다. 아들이 원하는 사립학교에 가려면 큰 돈이 드는데, 마리아냐에게는 없는 그 학비를 레이몬트가 대신 내주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이 드는 건, 그녀를 사랑해서라고 그가 말하는데, 꼭 그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걸 레이먼트는 소설적 인물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개입으로 생각해보게 되고, 생각을 통해 마음을 바꾸게 된다. 내가 받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걸 마리아냐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개입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이렇게 다른 소설과 별다르지 않게 감동적으로 흐르던 소설은 어디에서 나타난지 모를 엘리자베스의 등장? , 아니 이건 개입이다, 그녀의 개입으로 색다른 소설이 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와 똑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작가라는 데서, 소설가 존 쿳시에 데리고 온 작가로서는 같은 인물이 아닐까 싶다. 엘리자베스는 소설에서 미리 까는 복선도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등장인물의 속내를 모두 아는 어찌 보면 친구, 어찌 보면 예언자, 어찌 보면 말이 되지 못한 내면의 거울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억압받지 않는 내면의 말이고, 어찌 보면 갈 길 아는 자신의 내면이기도 하다. 좀처럼 알 수 없는,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나은 친구 정도는 된다. 그 엘리자베스의 영향으로,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여러 사건이 지나 레이몬트는 홀로 서는 길을 걷게 된다. 마리아냐를 욕망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으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도움으로. 아니, 그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그 자신의 언어의 힘으로, 사유의 힘으로. 바로 소설의 힘으로. 여기에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누구인지, 폴 레이몬트에게 읽혀진 부분을 옮겨보자.
“도서관 참고열람실에 있는 <현대세계작가들>을 보니, 바다의 분위기가 풍기는 똑같은 사진과 함께 간략한 소개말이 있다. 1928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출생. 장기간에 걸친 유럽생활. 1957년에 첫 소설 발표, 수상경력. 줄거리가 소개되지 않은 저서목록. 두번에 걸친 결혼. 아들 하나, 딸 하나!”( 159쪽)
일흔 두살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나타나, 결국 폴 레이몬트의 욕망을 잠재워줄 눈 먼 마리아나를 데리고 오고, 마리아냐 가족과 이리저리 얽힌 사건들을 풀어주게 한다. 그녀가 어떤 소설을 쓰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해)답을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답을 생각하게 해주는 작가이다. 그야말로 스스로 길을 찾게 해주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폴 레이먼트의 경우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길을 찾아가듯, 폴은 그녀와의 실제 삶을 통해 움직여진다.
존 쿳시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간 읽은 그의 소설들이 겹쳐지면서, 한 사람의 작가인 존 쿳시, 그의 작품들 속 사람들, 그리고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 존 쿳시가 걱정하는 세상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들을 수 있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에서 보여지는 아버지로서의 그, <소년 시절>에서 보여지는 아들과 손자로서의 그, <야만인의 기다리며>를 통해서는 제국주의의 심장부를 판단하는/건드리는 그, <추락>을 통해서는 성욕이라는 욕망에 희생된/짓밟힌 그, <마이클 K>를 통해서는 자기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수인의 삶으로 살았던 K를 통해 경계를 넘어 탈출 가능한 삶을 말하는 그, <포>를 통해서는 얘기가 된 소설(삶)을 통해 언어보다 중요한 삶 자체를 생각하게 하는 그,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를 통해서는 어느새 대가의 입지에 들어섰지만 할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일까를 의문하는 그가 보여진다. 그의 소설에서 보여지는 그가 어느 부분에서는 존 쿳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언어로서 사유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여러 소리가 들리는 존 쿳시의 소설에서 들리는 소리 중 공통적인 소리가 하나 있는데, 그건 ‘그는 작가’라는 소리이다. 그는 늘 언어와 함께 논다. 굳이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길 원치 않아 보이는 (외국어/자국어) 영어를 같이 놓거나 그것만을 놓는 존 쿳시를 통해서, 언어로 가능한 세계라는 걸 알게 된다. 하나의 세계에서 어떤 경계를 지난 사람으로, 나는 존 쿳시를 보게 될 듯하다. 존 쿳시는 <슬로우 맨>에서는 육체의 경계를 넘었다면, 그는 자서전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 생의 경계까지 넘는 듯하다.
존 쿳시의 소설 <슬로우 맨>을 생각하다보니, 제목 때문인지, 내용과는 무관하게, 밀란 쿤데라의 <느림>이 떠올려진다.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출연하여 서사를 부분 교란(혹은 환기)시키는 데에서도. 작가와 아내가 소설 속 회의가 열리는 고성(古城) 호텔로 찾아가는 길 발견한 오토바이에서 시작된 <느림>은 그 성에 모인 사람들과 작가가 만든 드농이란 작가의 허구의 소설 <내일은 없다>을 얽기 설기 엮어보며, 쾌락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느림>에 출연하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말해지는 것은 의식 속에서 감지할 수 있는 쾌락 혹은 즐김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지금 보여지는 그들의 삶은 허깨비들의 공연과도 같이 느껴지는데, 그들의 공연이 보여지는 <느림>은 결국 그곳을 떠나는 작가와 아내가 보여지면서 소설을 끝난다. 작가가 이름 붙여준 벵상이, (독자인 혹은 현실 속 )아내에게 벵상이 되는 건 아닌데, 작가는 벵상이라며 벵상과의 만남을 의식하게 한다. 그러나 그건 작가의 내면/의식(소설) 일뿐이다. 하여 아내는 이 성이 귀신들렸다고 말하는 것이고. 바로 (작가의 아내) 베라의 존재가 <느림>의 색다름으로 보는데, 존 쿳시는 그 상황에서 보다 더 나아가, <슬로우 맨>에서 작중 인물의 미래는 다 알고 있는 듯한 엘리자베스를 소설 속 인물들과 같이 살게 한다. 소설 속에 내던져져 당황해하는 베라와 달리 그녀는 보이지않는 소설의 한 축이 된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라는 다른 소재가 있지만, 일면 무관해 보이는 이들의 교란이라는 측면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쓰기의 작인 존 쿳시가 혹 <슬로우 맨>을 쓰면서 밀란 쿤데라의 <느림>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혼자서 생각해봤다.
물론 존 쿳시의 여느 소설이 그렇듯이, 시작과 영향과 단초와 역사는 한 작가 혹은 한 소설 혹은 한 사건에 있었을지언정, 소설은 다르다. 새롭다. 느낌도, 감상도 다르다. <슬로우 맨>에서는 ‘그’가 사건의 중심인물이고 ‘그’가 변하는 소설이라면, <느림>에서 (저 멀리서 작중 인물들을 바라보는/알아보는 무관한) 나는 화자일 뿐이다. 소설 내용과 상관없이 나의 아내까지 등장시키면서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나의) ‘소설’이 바로 <느림>이다. 물론 나는 호텔로 사용되는 오래된 성으로 여행을 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카메라로 담는 것처럼 소설에 그들의 삶을 담아내지만, <느림>에서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상상하고 생각하고 기술하기만 하고 있다. 나의 아내 ‘베라’의 꿈을 심란스럽게 하는 등장인물들까지 등장시키지만 말이다.
<슬로우 맨>도 <느림>도 이방인들(이민자들/추방된사람들)을 부러 등장시킨다는 느낌이 든다. < 슬로우 맨>의 폴도, 마리아냐도 이민자들이다. 밀란 쿤데라도 존 쿳시도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났다. 그러고보면 밀란 쿤데라는 관찰자로서 사유하고, 존 쿳시는 행위자로서 사유하는 작가인 듯하다. 그 차이에서 한 작가는 소설의 종언을 한 작가는 소설의 힘을 믿는 듯하고.
이어지는 면이 있어 보이는 두 소설이, 그럼에도 차이나는 건, <슬로우 맨>이 자전거와 사고를 통해 단절로부터 가능한 ‘사유 이후 변화된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면, <느림>은 오토바이와 여행과 쇼를 통해서 어떤 삶/시간 속으로 (뭔가를 타고 흐르듯) 흐르게/사유하게 한다. 이렇듯 다시쓰기의 달인이라고 할 수 는 존 쿳시는 <슬로우 맨>을 통해서 어찌 보면 시대에 추월당한 노인을 통해서, 늦게서야 제대로 발휘되는 사유의 힘을 강조한 건 아닐까 싶어진다. 제목에서, 그리고 상관없어보이는데도 돌연 등장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와 베라로부터, 나는 또 잠시 두 작품의 상관성과 무관성에 머물렀다.
더불어 표지 얘기 하나. 영어본의 Slow Man의 책 표지그림과 한국의 책 표지 그림이 다른데, 한국의 책 표지는 과정 속 족쇄를 강조한 듯하고, 영어본은 언제고 흐르는 사유의 힘을 강조한 듯하다. 둘 다 아니라고 부정할 순 없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에 근접하는 표지그림은 영어본이 아닐까 싶다. 자전거를 타는 느린 삶, 한쪽 다리가 잘려진 느린/추월당한 삶이라기보다는 느리게 가도 별 문제없는 삶을 그린 게 아닐까 싶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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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슬로우맨> 정말 괜찮은 소설입니다. 이거 서평 쓰려고 했는데..ㅋㅋ
^^ 세바스찬바흐님이 이미 읽었을줄 알았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서 한줄 글쓴 기억이 있는데 언제 무엇을 썼던가 궁금하더군요. 작년 2월에 라캉의 [세미나1] 읽기를 시작하는 글이더군요. 지금 [에크리]를 다시 읽고 있어서 라캉의 개념을 그 소설에 엮게 되는군요. [세미나11]을 참조하여, 폴이 잃은 다리는 '대상 a'이지 않을까요? (-ph)... 그가 다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그 다리는 도로 찾을 가망없이 잃어버린 대상의 상징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두 다리가 멀쩡했을 때는 추억처럼 아득해진 성욕이 다시 환기되면서, 마치 다리가 있다면 욕망을 충족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환상($<>a)을 책 길이로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론 저는 정신분석학을 생각하지 않고서 이 소설을 상당히 감동스럽게 읽었습니다. 프로이트도 라캉도 '문학이 독자의 무의식에 말한다', 고 주장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분석하지 않고 읽을 때 즐겁다는 말이겠지요. 시간이 나면 쿤데라의 [느림]도 읽어 보겠습니다.
언급해주신 덕분에 작년에 읽었던 한살림님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때는 존 쿳시의 <슬로우 맨>을 읽지 않을 때였기에, 그 부분에서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 병행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한살림님 글을 읽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그때 읽었을 때와 다른 생각과 느낌이 듭니다. 네, <느림>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 만큼이나 두께가 얇은 소설입니다. 말씀처럼, 시간이 나면 읽어보셔요...
존 쿳시의 <슬로우 맨>의 경우도 그냥 읽어도 재미있고/감동적이고, 나중 이리저리 생각하며서 읽어도 재미있는 작품 같아요.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서 읽어도 그렇고요. 그렇군요, 다리를 절단한 이후 폴의 욕망을 그렇게 환상공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네요...
^^
전 지금 읽고 있네요. 느림도 읽어야 될 듯 하네요.
딴지 걸려고 하는 소리는 아니고, 혹시 존쿳시에 대한 비판적인 글은 없나요? 단점을 지적하는 그런 글... 누가 쓴 비평이든 그런 글이 있으면 읽어보고 싶네요.. 우선 비평고원 내에서 찾아봐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