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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험한 현실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닐까
2017.04.30.(일, 맑음)
영월(11:30)→김삿갓문학관(12:20~13:10)→김삿갓묘(14:00~15:00)→김삿갓초막(15:30~40)→마대산정상(16:50)→전망대(17:05)→선납골(18:00)→합수점(18:15)→김삿갓묘역(18:25)→옥동천(18:35~19:20)
정선 10:00발 동서울행 버스를 타고 미탄에서 영월행으로...
김삿갓 문학관을 둘러볼까 했는데 11:30 출발이라니 곧바로 김삿갓문학관으로...
6.25 동족간 가슴아픈 시절 석탄을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소가 전력공급을 주도했다는데
한전시절 많이 들어왔던 영월화력을 오늘에서야 만나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석탄가루 날리는 험악했을 발전소가 이렇게 깔끔한 천연가스 발전소로 바뀌었으니....
탄광도 탄광촌도 옛이야기로만....
석회암을 연료로 하는 시멘트 공장은 제천 단양 영월 동해 옥계에선 여전한 것 같은데...
▼남한강변에 자리한 영월화력발전소
김삿갓면사무소에서 문학관까지 냇가와 마을길을 이어가는 길도 참 좋을 것 같다.
문학관에서 산줄기따라 백두대간 마구령 넘어 용운사 부석사쪽으로 이어지는 길도 좋을 것 같다.
한시대회에서 장원에 오르셨다는 관풍헌에서 김삿갓면사무소까지 강을 내려다보며 산줄기 어어가는 것도 참 좋을 것 같다.
문학관 전시자료를 가볍게 둘러본후 옥수수 4자루로 활동에너지를 ...
삿갓모에 관심이 있어 여쭈니 2만원이란다.
햇볕 가리게로 참 좋을 것 같은데 대중교통으로 이동할땐 어떻게 ...
접어서 배낭속에 넣었다 뺄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대나무 재질이니 아무래도
한번 써보는 것으로....
어머님과 처자식을 두고 하루 이틀 떠돌다보니 그만 오늘날의 노숙자처럼...
집 나올때 모습으로 되돌릴 수만 있으면 좋으련만...
이미 흘러가버린 세월앞에 이렇지도 저렇지도 깊어진 자신의 모습을 안따까워 하셨나보다.
객지를 떠돌지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선 늘상 가족을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 되돌아갈 수 없었으니
겪어보지 아니한 자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묘역입구 작은 초막이 있는데 안에 이런 저런 책자가 꽂혀 있다.
살짜기 내부를 드려다보니 안쪽에 한분이 계신 것 같다.
들어와 쉬었다 가시죠 하시는 것 같다.
궁굼한 것도 많은데 잘 됐다싶어 들어가보니 그 분의 기풍이 그대로 느껴지는 분이다.
문학관을 둘러본 소감을 이야기 하며 그 옛날에도 배경이 없으면 아무리 필기성적이 좋다해도...
사실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아닙니까?
씨도둑은 못한다는 말도 있듯이 두뇌, 말재주, 손재주, 운동 문학적 소질 그 모든 것이...
국가의 일을 맡길 자를 선발하는데 있어서도 겉으로 드러난 것 외에도 잠재적인 것들도 확인하려는 것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
어머님, 처자식과 함께 했드라면 좋았을 것인데 자신의 책무를 짐짓 부정하고 자신의 취향만을 쫒아 떠돌이 노숙자의 삶으로 마감했다는 것은 결코 잘한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 자립능력을 키우고 사람된 도리에 충실해야지 않습니까?
왜 되돌아가지 않았는지요?
오늘날의 노숙자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분들도 분명히 부모형제가 있을 것인데 돌아갈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
노숙자와 동일한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요.
모든 것이 입장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는 법이니....
그 나이가 되어야만이 이해될 수 있는 것들도 많지요.
객관적인 스펙을 높혀 놓아도 뜻을 이루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으니....
현대판 김삿갓이 많아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불가능했던 것들이 현실화되고,
사람보다 월등한 로보트가 여러 분야에서 주도한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이 참으로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사람의 가치가 기계보다 떨어지는 것 같으니?
사람이 기계를 능가하는 부분은 힘도 아니요 기교도 아니요 판단력도 아니요
오직 감성적인 분야로 좁혀질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면?
1당 100이라는 말은 기계를 통해 현실화되고 있으니....
결국 사람의 몫은 급격히 줄어들 수 밖에 없을 것인데.....
김삿갓 주거했다는 곳을 찾아 계곡을 이리 돌고 저리 돌며
관람편의를 위해 차량 1대 지나갈 정도의 포장길과 비포장길이 간헐적으로 이어진다.
깊숙이 들어가니 완만한 구릉지 산자락에 2,000평 정도의 계단식 밭이 보인다.
깁삿갓이 머물렀던 당시라면 이렇게 근사한 밭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위돌과 잡목이 혼재하는 곳이었으리라.
관람거리로 체계화시키는 과정에서 김삿갓이 한때 이곳에서 머물렀다며 어쩔 수 없이?
친정이 사대부인 것 같고 시아버님도 대단한 분이니 김병연이 한양에 머무는 유년시절 이미 사서삼경까지 척척 ...
아들에게서 이같은 자질이 있음을 알게 된 여인은 남편 사별을 기점으로 폐족이라는 세인들의 눈총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세웠을 것이다.
이렇게 살바엔 하며 친정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식들만 데리고 어렵게 떠난 길이 이곳 영월까지...
영월에 거하는 어느날 백일장이 있다기에 자식을 내보내기도 하고
장원급제했다는 소식에 영월 며느리도 얻어 자식을 영월사람으로 인식하게 하는데까지...
곧바로 한양 친지를 찾아가서 2차시험을 준비하도록 내 보냈을 것이다.
몇년을 며느리와 함께 손주도 보며 생계를 이끌었던 여인은 힘든 줄도 모르고 손꼽아 자식의 금의환향만을....
털래털래 나타난 자식이 울먹이면서 전하는 소식에 그만....
자신에게도 비현실적인 소망을 고집했다는 잘못을 그제서야...
숨겨왔던 사대부 여인의 존심이 울먹이는 자식을 향하여 발동되었을 것이다.
우리집안도 한때는 남들이 부러워 하는 사대부 였다고....
자식의 존심을 세워주려 했던 것이 그만....
서로가 부둥켜 안고 한참동안 울음바다를 ......
자식에게도 본의아닌 엄청난 충격을 안긴 격이 되었으니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모든 것 잊고 바람이나 쐐고 오라는 말밖에.....
그렇게 헤어진 후 한번도 어미곁으로 다가오지 못한 김삿갓
서로간에 그토록 보고 싶었을 것인데 미안함과 죄송스러움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만...
헤어진 곳도 영월 지금의 시가지 부근일텐데...
김삿갓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어지지 않는다.
자식이 출가한후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어미의 심정도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괜한 욕심을 품어 그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는 마음에...
객지를 떠도는 자식 걱정하다 병을 얻어 치료차 양주 친정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족 생계를 홀로 해결해야 했던 김삿갓 부인의 고통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소유 경작지가 없다면 이마을 저마을로 돌아다니며 농사일을 거들어 주는 일로 살았을 것이다.
깊은 산중에 개간할만한 토지가 있음을 알게 된후 할 수 없이 이곳까지 들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사정이라면 집다운 집을 지을 수가 있겠는가
건축재료도 그렇고, 목수도 구할만한 여력이 없었을텐데...
모두가 꾸며낸 산물같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이런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다 가출했을 것이라고...
안동金氏, 祖父(益淳)는 宣川府使,
父 安根과 母 함평李氏, 2남.
1807(순조7년)~1863(철종13년)
휘(諱)는 炳淵, 자는 性深 호는 난고(蘭皐)
순조 12년(1812), 조부가 함경도 선천군(청천강 북쪽)의 부사겸 방어사로 있을 때
지역차별과 학정에 반항하는 홍경래 난이 발생,
조부는 투항했다가 탈출했으나 대역죄로 처형당함, 이때 병연은 6세
연좌제로 폐족당할까 두려워했던 부친은 下人의 권유에 따라 가족과함께 황해도 곡산(하인의 고향)으로 잠적
2년후 사면소식이 전해지자 부친은 외가댁(양주) 으로 내려왔으나 그곳에서 병사하고 이어서 동생(炳河)까지도... 이때 병연은 10살정도
둘째 병연은 어릴적부터 한문공부를 즐기며 명석한지라 모친은 이 녀석이 집안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건만 집안내력이 고민되었을 것이다.
내 한 몸 바쳐 반드시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아무도 모르게 炳淵을 데리고 깊은 산중으로 거쳐를 옮기며 세인들의 기역을 따돌렸으니 이 마을 저 마을로 품 팔아가며 10여년만에 영월 땅까지...
떠도는 중에도 교육에 힘쓴 모친은 20세가 된 병연에게 춘계 백일장에 응시해 보라 했을 것이고, 장원상 받았다기에 기뻤지만 시제를 듣고 보니 시아버지에 관한 것이었으니 놀란 가슴 남몰래 숨겼으리라.
15년이 지났는데도 목숨앞에 공직자의 의무를 소흘리했다는 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있었으니....
하지만 15년동안 떠돌면서 평민 신분으로 바꿔 놓았고
20세인 아들녀석 이곳사람과 결혼까지 해서 아들 둘을 낳았으니 이젠 신분상의 문제는 없어졌으리라.
항해도로 피신할 때까지 5년간 한양에서 살았지만 17년이 지났고, 22세로 몰라보게 성장했으니 한양에 올려보내도 기역하는 자 없을 것이다.
한양에 올라가 사대부 집일 거들면서 그들과 함께 과거를 준비해 보렴
말씀대로 세도가의 식객으로 일하면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세도가 자녀는 실력 없어도 선택받고 자신은 3년째 낙방하는지라 이유에 대해 고민하다보니 가문이 확실하게 좋지 않으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처럼, 자손은 분명 조상을 닮을 것이고 그렇다면 조상이 어떠했느냐를 따져 보려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닌데 내 어찌하겠는가?
3년이 넘도록 오로지 자신의 과거급제 소식만 기다리는 모친과 부인에게 빈손으로 내려가는 발걸음 무척 무거웠으리라
어머님께 한양에서 있었던 일을 고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괴로움 속에 그제서야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비밀을 털어 놓으며 이제 그만 벼슬길을 정리하라 했을 것이다.
우리도 한 때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대부 집안이었지
네가 백일장에 응시할 때 나온 주제 인물 익순씨가 네 조부가 되신단다.
세상사람들이 알아주는 안동김씨 어른으로서 우리도 그 분과 함께 사대부 집안들만 모여 사는 동네에서 살았는데 너는 그곳에서 태어났지
네가 태어날 때도 조부께서 아들 손자 보셨다며 많은 분들이 선물 보내며 축하해 주었지
네 어미인 나도 양주에서 알아주는 사대부 집안이었고..
정말 그랬어요. 어머님
우리도 할아버지 살아계실 땐 엄청난 사대부 집안이었군요
병연이 조상에 대한 죄책감으로 어찌할 수 없었으니 모자는 부등켜 안고 목놓아 울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부질없는 욕심으로 자식에게 정신적 상처를 안겨 주어서 미안하고,
아들은 조부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백일장에서 막 말을 한없이 했으니....
어머님 가슴 아파 하지 마세요
세살살이가 다 그렇지요.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위엄 떨고....
집안내력 운운하는데 솔직히 그 놈들과 함께 하고 싶지 않더군요.
죄송합니다.
어머님의 오랜 소망이 그렇했었는데....
병연아 일이 손에 잡히지 아니할텐데 바람이나 쐐며 잠시 마음을 정리하고 오려므나.
어미는 이제까지 살았는데 별 일이 있겠느냐
걱정 말고 쉬었다 오려므나
병연의 부인 역시도 울먹이며 내색을 못하고 그만....
어머님과 함께 잘 있구려
내 곧 돌아오리라
주변사람들의 시선과 마주치는 것이 부담되어 삿갓 쓰고 잠깐 나돌다 올 생각으로 집을 나서.
이 마을 저마을로 돌며 으시대는 훈장과 벼슬길 탐내는 사대부 자식들 만나 이런 저런 공동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다보니 밤늦도록 술해 취할 때가 많았을 것이고
그들의 주선으로 또 다른 훈장이나 사대부 만나러 발길 재촉했을 테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향집은 아득히 멀어져만 갔을 것이다.
외로울수록 자연과의 만남은 더욱 깊어졌으니 길가다 어두워지면 밤하늘의 달과 별을 친구삼아 노숙할 때도 많았을 것이고, 신이 헤어져 발바닥이 아플지라도 오로지 죽장에 삿갓 쓰고 보이는 모든 것들과도 시로서 독백하며
백안시 당할지라도 눈에 거슬리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따끔한 훈계를 서슴치 아니하였으니 마음만은 이미 선비이상으로 자긍심을 갖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가문중심의 등용이 잘 못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억울하다 할 것이다.
밑바닥부터 훈장과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두루 만나 존심을 겨루다 보니 마음속의 응어리는 어느정도 해소된 것 같은데 백발이 되기까지 홀어머니와 아내를 잊고 방랑한 자신이 한없이 미웠으리라
방랑중에도 고향집 그리며 돌아가야지 생각했지만 죽기까지 마음만은 선비이상으로 고고하게 살겠노라며 자신에게도 쓸데없는 아집이 있었는지...
김병연 역시도 어미를 닮았는지?
존심도 대단한 것 같고....
마대산 정상 가는 길이라니 시간적으로도 막차를 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산길로...
급경사를 이리 저리 겨우사리가 여기저기다.
영월방향
고씨동굴
백두대간 줄기도 어렴풋이 바라보고...
1863년(철종13년) 전남 화순군 동북면 달천변에서 향년 57세를 맞이한 섣달 그믐날 그는 32년간의 긴 방랑생활을 회고하면서
되돌아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그물에 걸린 양과 같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으니 모친과 아내에게도 한없는 용서를 빌며 자연으로 돌아갔으리라
둘째 아들 익균이가 청년이 되기까지 아빠가 돌아오지 않자 부인은 아들녀석에게 아빠를 찾아보라 했을 것이고, 한시를 읊으시며 술 좋아하시는 분 보셨는지요? 하며 소문을 쫒아간지 3년만에 전남 화순군 동북면 달천변에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간신히 찾은 무덤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영월군 와석리로 조용히 옮겨 왔을 것이다.
익균의 자식도 조상의 기질을 닮았는지 홍천군수가 되었지만
조부 병연씨가 대단한 시인일지라도 술독에 빠져 방랑하다 객사했음을 알았을 테니 부모 고생시킨 미움으로 가득했을 것이고 조부 묘를 역부러 방치했으리라
방랑생활 뒤돌아보니 가슴 아파라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나 가슴 아파라. 짚신에 대지팡이로 천 리 길 다니며 물처럼 구름처럼 사방을 내 집으로 여겼지. 남을 탓할 수 없고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어 섣달 그믐엔 서글픈 마음이 가슴에 넘쳤지. 초년엔 즐거운 세상 만났다 생각하고 한양이 내 생장한 고향인 줄 알았지. 집안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꽃 피는 장안 명승지에 집이 있었지. 이웃 사람들이 아들 낳았다 축하하고 조만간 출세하기를 기대했었지. 머리가 차츰 자라며 팔자가 기박해져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더니, 의지할 친척도 없이 세상 인심 박해지고 부모 상까지 마치자 집안이 쓸쓸해졌네. 남산 새벽 종소리 들으며 신끈을 맨 뒤에 동방 풍토를 돌아다니며 시름으로 가득 찼네. 마음은 아직 타향에서 고향 그리는 여우 같건만 울타리에 뿔 박은 양처럼 형세가 궁박해졌네. 남녘 지방은 옛부터 나그네가 많았다지만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몇 년이나 되었던가. 머리 굽실거리는 행세가 어찌 내 본래 버릇이랴만 입 놀리며 살 길 찾는 솜씨만 가득 늘었네. 이 가운데 세월을 차츰 잊어 버려 삼각산 푸른 모습이 아득하기만 해라. 강산 떠돌며 구걸한 집이 천만이나 되었건만 풍월시인 행장은 빈 자루 하나뿐일세. 천금 자제와 만석군 부자 후하고 박한 가풍을 고루 맛보았지. 신세가 궁박해져 늘 백안시 당하고 세월이 갈수록 머리 희어져 가슴 아프네. 돌아갈래도 어렵지만 그만둘래도 어려워 중도에 서서 며칠 동안 방황하네. 鳥巢獸穴皆有居 顧我平生獨自傷 조소수혈개유거 고아평생독자상 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四方 망혜죽장로천리 수성운심가사방 尤人不可怨天難 歲暮悲懷餘寸腸 우인불가원천난 세모비회여촌장 初年自謂得樂地 漢北知吾生長鄕 초년자위득락지 한북지오생장향 簪纓先世富貴人 花柳長安名勝庄 잠영선세부귀인 화류장안명승장 隣人也賀弄璋慶 早晩前期冠蓋場 인인야하농장경 조만전기관개장 髮毛稍長命漸奇 灰劫殘門飜海桑 발모초장명점기 회겁잔문번해상 依無親戚世情薄 哭盡爺孃家事荒 의무친척세정박 곡진야양가사황 終南曉鍾一納履 風土東邦心細量 종남효종일납리 풍토동방심세양 心猶異域首丘狐 勢亦窮途觸藩羊 심유이역수구호 세역궁도촉번양 南州從古過客多 轉蓬浮萍經幾霜 남주종고과객다 전봉부평경기상 搖頭行勢豈本習 口圖生惟所長 요두행세기본습 구도생유소장 光陰漸向此中失 三角靑山何渺茫 광음점향차중실 삼각청산하묘망 江山乞號慣千門 風月行裝空一囊 강산걸호관천문 풍월행장공일낭 千金之子萬石君 厚薄家風均試嘗 천금지자만석군 후박가풍균시상 身窮每遇俗眼白 歲去偏傷빈髮蒼 신궁매우속안백 세거편상빈발창 歸兮亦難佇亦難 幾日彷徨中路傍 귀혜역난저역난 기일방황중로방 |
세상에 태어남을 축하한다지만 실은 사람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런 고통없이 제멋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하루 3끼와 비바람 추위를 피한다는 것이 땀 흘리지 않고 가능하겠는가?
아무리 학식이 높고 사대부들도 부러워하는 시선일지라도...
뙈약볕아래 온종일 쭈구리고 앉아 잡초를 뽑아야 하고 허리 굽혀 땀 흘려야 그런대로 끼니와 쉴만한 잠자리를 얻을 수 있으니...
하루 3끼를 먹고 비바람 추위를 피할 수 있어야지 전국을 떠돌수 있는 법인데
오로지 구걸로 해결하려 했다면 문전박대의 연속이었으리라.
간신히 살아가는 한두채 산촌에서 구걸상대를 찾는 것도 마음 괴로웠을 것이다.
끼니는 커녕 하룻밤만이라도 비바람 추위를 피할 수만 있어도 다행일 때도 있었으리라.
동절기엔 몇달동안 목욕도 못했을 것이니 남들이 싫어하는 체취까지 뒤랐을 것이니
구걸을 받아드리는 입장도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서울역 노숙자 거지가 따로 있겠나
그 누구나 빈털털이로 내몰리면 세인들로부터 배척당할 수 밖에 없는데...
이같은 삶으로 끝날줄이야 시선 김병연도 알지 못했는지?
백발이 뒤어서야 세상 이치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은데 그만 석양으로 기울고 있었다며...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을 탄한 것 같은데....
참으로 안타깝다.
초반에 꺽이면 금새 바로 잡을 수도 있지만 깊어진 후엔 그 모든 것이 불가한가 보다.
현장 인근 농촌을 자주 지나치는데
옥수수 밭고랑을 따라 강풍으로 꺽인 것 찾아 뽑아내고 여분의 묘종으로 다시 심는다.
뿌리가 있으니 그냥 두어도 괜찮치 않습니까
한번 꺽인 상태로 내버려 두면 좋은 결실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바꾸는 것이 좋다 하신다.
성장한 후에도 강풍에 꺾일 수 있는데 그 때는 포기하는 수밖에....
모든 것이 하늘에 달려 있단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기대하는 결실을 볼 수 없다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라는 말도 인생 전체에 적용될 수는 없으리라.
중년이나 노년기에 꺾이면 재기가 불가능함은 자연을 통해서도 알게 되는 것 같다.
1982년 10월 박영국, 김영배, 이상기 등의 증언으로 묘를 찾았다 하니...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구름처럼 바람처럼 읊어 날려버린 시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보존하는 자 드물었을 것인데
이응수란 분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456편을 찾아 내어 그가 죽은지 76년만인 1939년에 김병연의 첫 시집인 <김립시집> 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