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황소가 산다 / 정 곤 (전북문협) 새 만금 방조제부근에는 어릴 때 내 삶의 지문이 묻어있는 포구가 있다. 항구에는 방수문만 있고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한때 칠선 바다에서 어부가 돌아오면, 포구는 온통 생선 비린내를 풍겼다. 그 냄새는 항구를 설레게 만들었다. 모두가 그 냄새를 그리워했다. 나도 생선 냄새를 좋아하고 기다렸다. 이제 생선을 팔던 아줌마와 국밥집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었다. 녹슨 대문 사이로 황소 한 마리가 한가로이 되새김하던 풍경도 찾을 수 없었다. 생선 말리던 아낙네는 어디로 갔을까? 조개를 캐러 다니던 억센 전라도 사투리는 이제 들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일까? 갈매기 소리였다. 안개가 걷히자 수평선 사이로 햇살이 돋아났다. 그림 같았다. 까투리와 장끼도 둥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새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모래 위에 보였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때로는 어느 방향으로 갈까 망설이다 출발한 흔적이 보였다. 발자국 속에는 가끔 뒤를 돌아보는 발자국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넓은 들판에 잡초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풀을 보자 소를 몰고 풀을 뜯는 목동이 되고 싶었다. 소는 우리 조상과 함께 살아온 친근한 동물이었다. 우리 집엔 황소 한 마리가 있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가끔 소를 몰고 산에 올랐다. 소는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지만 나를 깔보기도 했다. 풀을 뜯다가 갑자기 신나게 달렸다. 깜짝 놀라 힘껏 고삐를 잡아당겼다. 소용없었다. 한참 달리다가 멈춰 서서 소는 내 눈치를 보았다. 숨을 할딱거리며 달리는 소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골탕 먹이니까 속이 시원하냐?” 소는 하늘을 보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마치 제주도 여행 중 이 중섭의 말년 작품인 <황소>처럼 소리를 질렀다. 붉게 물든 화면에 누런 <황소>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어 마치 내 어릴 때 길렀던 ‘황소’를 닮았다. 고함을 지르는 소는 눈을 위로 크게 치켜떴다. 외롭고 가련한 세상살이를 한탄하며 살던 작가의 마음이 녹아 있었다. <황소>는 황소가 아니라 마치 사람의 형상을 한, 불만 섞인 작가의 내면이 숨어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내 안에 황소가 살고 있다. 어릴 때, 내 추억의 방과 후는 늘 망태를 메고 풀을 뜯었다. 그것도 소가 좋아하는 억센 풀을 뜯었다. 어릴 때 가장 싫어하던 것이 그것이었다. 비 오는 날, 음산한 공동묘지에서 혼자 풀을 벨 때 누가 따라오는 것처럼 무서웠다. 그래도 거기를 가야 소가 좋아하는 풀이 있었다. 풀을 짊어지고 내려오면 몸은 천근이고 빗물은 옷과 내 얼굴을 완전히 적셔놓았다. 어떤 때는 뱀도 만나고 알을 품고 있는 꿩도 만났다. 재수 좋은 날에는 도라지와 산딸기를 발견했다. 목마르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도라지를 빗물에 씻어 먹었다. 정말, 꿀맛이었다. 나는 가을이 오기를 무척 기다렸다. 왜냐하면? 산에 풀이 적으면 풀을 뜯지 않아도 되었다. 참 엉뚱한 생각이었다. 나는 팔남매의 장남으로 늘 마음이 무거웠다. 남들은 형과 누나가 있어 엄청 부러웠다. 부모님은 일터에 가고 나 혼자 저녁밥을 짓고 있으면 할 일이 많았다. 마지막 풀을 베어 오는 날 풀이 아주 적었다. 할 수 없이 여물을 만들기 위해 풀과 볕 짚, 고구마 줄기를 작두로 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작두로 여물 썰 때, 왼손으로 힘주어 자르고 오른 손으로 풀을 꽉 잡아 압력이 생기면 작두 안에 풀을 넣었다. 그래야 잘 잘라졌다. 근데, 오른 손에 잡고 있던 고구마 줄기가 당겨지지 않아 약간 힘을 주어 당겼다. 그 때 작두에 손이…, “아이~ 구!” 오른손 손가락 세 마디가 그만… 작두 속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메리야스를 찢어 감고 병원에 갔다. 수 십 바늘을 봉합한 거 같았다. 근데, 아픈 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손가락이 병신 된다는 생각이었다. 너무 무서웠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때 일기장에 이렇게 섰다. 농사를 절대 짓지 않겠다고 울면서 다짐했다. 반세기가 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잊고 주말농장을 하는 것은 내 안에 황소가 살고 있어서다. [정 곤] 수필가. 《수필과비평》등단. 김제 출생 전북문인협회,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전북펜문학 회원 덕진문학회 회장 역임. * 작촌예술문학상 * 『삶이 묻어있는 포구』 어린 시절 농촌에서는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과 집안일을 거들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일에 익숙하지 못하니 크고 작은 사고도 피할 수 없고요. 하마터면,,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이네요. 소는 농가의 재산 1호였지요. 미운 정 고운 정 든 황소. 밉고 귀찮았지만, 교감하다보니 은연중에 정이 들어 내 하소연도 늘어놓는 친구가 되었을 것 같아요. 인내도, 끈기도 소에게서 배웠고요. 선생님의 후덕한 인품이, 마음에 품고 사는 소의 순박하고 선한 눈망울에서 비롯되었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