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은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 운동으로서 원시시대부터 행해진 것으로 알고있다. 원시사회 에서는 생존을 위한 기본조건으로서 강한 체력과 민첩한 움직임 등이 중요시 되었는데, 씨름과 같은 투기의 발생은 이러한 환경적 요인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부족사회나 부족국가에서는 집단 의식 행사의 하나로 씨름 경기를 즐겨 행하였으며, 또 그것이 즐거움을 추구하는 유희 및 일정한 형식을 갖춘 운동 경기로 변천, 발전하게 되어 오늘날의 씨름 경기가 되었다.
경상남도에서는 1960년대 씨름판을 평정한 고 김성률 장사를 비롯, 기술씨름의 진수를 보여준 이만기, 번개같은 뒤집기의 달인 이승삼, 모희규, 최욱진, 강호동, 황영호, 양점배 등 모래판을 호령한 장사들은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았다.
오늘날 씨름은 근대를 거치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기본 기틀을 다진 씨름이 방송과의 유기적인 협조로 전국적인 붐 을 일으키며 프로화를 통한 국제적 경기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서 씨름이 스포츠의 한 종목으로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시기는 1972년으로, 그해 장충체육관에서 대한씨름협회와 KBS가 공동주최 하고 문화공보부가 후원한 “제1회 KBS배 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였다. 이전까지 야외 모래판에서 실시하던 것을 실내의 매트에서 하게 되었고 경기가 열리는 3일동안 KBS-TV에서 중계방송을 전국으로 실시하여 전국민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경기를 보게 되었다. 그때까지 뉴스로만 취급되어오던 씨름이 중계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중계되었다는 것이 씨름발전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특히 경기가 열리는 장충체육관은 인기 종목인 구기종목의 국제적인 경기가 있어야만 관중이 1,2천명 정도였으나 씨름한판승이 열리는 연 3일동안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을 빈틈없이 꽉 메웠으며, 관중의 일부는 서울근교나 지방에서 온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1972년 당시 KBS배 장사씨름대회에서 예선을 거친 8명의 장사가 풀리그전으로 거행된 경기에서 우승은 마산의 김성률,준우승은 경북의 박범조, 3위는 마산의 정근종이었다. 그 후로는 인기를 유지하다가 축구, 야구, 기타 인기종목에 눌려 70년대 후반에는 시들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침체된 듯 하였으나, 80년대 들어 제5공화국이 출범하여 스포츠 장려정책과 함께 82년 4월에 출범한 한국 민속씨름위원회가 KBS와 공동 주최하는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를 계기로 다시한번 인기를 끌게 된다.
국내에서 씨름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선수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만기 교수다. 이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 이만기 장사가 당대 최고의 씨름꾼이었을까? 씨름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만기 장사 위에 또 한명의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가 바로 60~70년대 한국씨름판을 호령했던 마산출신의 김성률 장사다.
김성률 장사의 전성기는 60년대부터 70년대 초중반이었다. 나는 초등, 중학교 시절 마산에서 벌어졌던 각종 씨름대회에서 김성률 장사가 대단한 활약을 하는 것을 직접 씨름장에서 눈으로 보았다. 김장사는 우리보다 나이가 5살 위인데 시민극장 뒤편 포목점이 많이있던 곳에 살아서 한 동네였기 때문에 창동, 부림동 사람들은 옛부터 김장사를 유명한 씨름선수로 잘 알고 있었다.
김성률 장사는 1948년생이다. 어려서부터 운동에 다방면으로 소질을 보였고 그가 처음 시작한 운동은 씨름이 아니라 유도였다. 유도와 씨름뿐 아니라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보였고 축구에서도 빼어난 재능을 선보여 마산상고에 축구특기생으로 입학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성률 장사는 키가 183센티미터에130킬로그램으로 들배지기를 주특기로 전국대회에서 대기록을 달성했으며 현역시절 씨름꿈나무 지도와 육성을 통해 씨름의 발전에 기여하는 등 일생을 씨름 활성화에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이러한 도전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산에서 씨름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의 이름을 대회명칭으로 하는 "학산 김성률배전국장사 씨름대회" 가 신설되었다.
김성률 장사는 이미 고교시절 전국체전을 석권했고 1970년 7회 대통령기 장시씨름대회부터 77년 14회 대회까지 전무후무한 대통령기 8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선수생활동안 부상으로 타낸 황소가 100마리가 넘으니 그걸 모았다면 목장 하나 차릴 정도일 것이다. 무적에 가까웠던 김성률 장사의 아성이 75년 약관 18세의 홍현욱 장사가 무너뜨리긴 했지만 83년 시작된 프로씨름에서 홍현옥 장사 그리고 홍현욱 장사의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이준희 장사를 상대로 천하장사 타이틀을 거머쥔 것은 김성률 장사의 제자였던 이만기 장사였다. 아쉽지만, 현재 인터넷에서는 김성률 장사의 전성기때 사진을 구할 수가 없다. 김성률 장사는 2004년 5월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004년 6월 김성률 장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학산 김성률배 씨름대회가 열리기 불과 2주 정도 전의 일이다.
그의 씨름에서의 독보적인 기록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매년 마산에서는 학산 김성률배 전국장사 씨름대회가 열린다. 김성률은 그야말로 "모래판의 전설, 근대씨름의 영웅 " 으로 소개되고 있다. 마산이 경북 의성, 경남 진주 등과 함께 전국의 씨름 장사를 배출한 씨름의 고장 역할을 한데에는 김성률 장사와 이만기 장사, 강호동 장사 및 마산상고(현 용마고) 와 경남대 씨름부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고 본다.
최근 마산용마고 씨름부가 김성률 장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좋은 기록을 내고 있다고 알려졌다. 마산용마고는 그동안 서원곡에 있는 씨름장에서 더부살이를 해 오다가 교내에 전용 연습장이 갖춰짐에 따라 동계 전지훈련부터 전력 극대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하며, 향후 더 훌륭한 선수를 배출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 듯하다. 마산 용마고는 고 김성률 장사를 비롯해 이승삼, 이만기, 강호동 등 한국 씨름의 대들보를 키워낸 씨름의 명문 고교로서 앞으로도 더 큰 위업을 쌓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성률, 이만기, 강호동의 맥을 잇는 훌륭한 장사가 지역에서 계속 나타나길 기대해본다.
첫댓글 옛날에 성률이 형님이 택시를 타면 한쪽이 찌그려져 달릴 정도로 그 당시엔 상당히 거구였답니다. 참 좋은 양반이었는데......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만기가 씨름을 살맀지요!
안녕하세요, 문득 님의 카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만, 여기에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연주곡 아티스트하고 곡명좀 부탁해도 될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