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 원해. 어딘가 도망칠 곳을 모두 원해.
무언가 색다른 것을 모두 원해.(모두 원해)
모두 원해.(모두 원해) 나도 원해. -
음악을 들으며 독서실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의 수다에는 언제나 빠지지 않는 나이지만, 오늘은 덜덜거리는 창문에 머리를 맡긴 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곡의 절묘한 음색을 감상했다. ‘자우림’의 ‘일탈’이라는 곡이었다. 언제나 ON되어 있는 라디오였지만 시시껄렁한, 소위 스타들의 잡담이나 혹은 거기서 거기인 - 나름대로는 구구절절하다고들 한다. - 사연들이 쏟아지는 것 이외에는 보통 음악CD를 듣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 때문에 겨우 고막을 통과해서 달팽이관에 다다른 라디오의 음향은 나의 코르티기 유모세포에서 뇌로 그 정보를 전달하기도 전에 그대로 사그라지어 버리고 마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일탈‘이라는 이 노래는 고맙게도 깨어있는 뇌 사이에서 거의 잠들어 있던 내 ’의식‘의 중요한 부분에 무언가를 불어 넣었다.
‘일탈’ 이란 명제에 대한 고민이 어두컴컴한 독서실에서의 두 시간을 그냥 삼켜 버리고 말았음에도 전혀 불쾌하지가 않았다. 앞으로 수학능력시험 까지 96일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그 수많은 시간들 사이에서 이렇게 깨어있는 뇌를 가지고 생각하는 시간을 마련 한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기에, 나에게는 오히려 행운적인 일이었다.
- 일탈(逸脫)[명사][하다형 자동사 하다형 타동사][되다형 자동사]
①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
로부터 빠져 벗어남.
②사회.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원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 같기에, 보편적으로 누군가가 꿈꾸는 ‘일탈’이 있다면 첫 번째 의미의 ‘일탈‘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일탈’이라는 것이 존재 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태어난 것 아니, 그 이전에 하나의 정자와 또 하나의 난자가 결합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우리의 인생은 ‘일탈’의 연속을 달리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평온하게 부고환의 일부에 저장되어 노닐던, 지금의 ‘나‘를 이룬 이 한 마리의 정자는 어느 날 엄청난 ’일탈‘을 맞이하게 된다. 하루에도 수억이 죽어가는 무수히 많은 동료들과의 일상 속에서 드디어는 자신과 결합하여 생명체를 이룰 난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분명 그 난자도 한달에 한번씩 엄청나게 죽어간 선배(?)들 과는 확연히 다른 ’일탈‘을 겪은 난자이리라. 그 덕분에 나는 태어나게 되었고 또 이렇게 일상의 연속성이 지겨워져버려 궤변을 늘어놓는, 자그마한 하나의 ’일탈‘을 꿈꾸는 존재로 성장에 성공 하였다.
나에게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에 이르는 꽤 많은 졸업과 입학의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로의 입학은 분명히 하나의 작은 사건이며 또 꾸역꾸역 먹으며 뒹굴기만 하던 일상에서의 ‘일탈’이었다. 하지만 입학 후, 하루하루가 흘러감에 따라 고등학교의 생활은 일상이 되어 버렸고 내 삶은 또 다른 ‘일탈’을 향한 욕구로 끌어 올랐다.
‘어째서 나의 일상은 지겨워져 버린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환상’이다. 환상이 깨어짐과 동시에 ‘일탈‘은 일상으로 변해 버린다.
흩어지는 뽀얀 연기, 혀끝을 짜르하게 울리는 니코틴의 묘한 감촉과 어우러지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칼칼한 연기자락.
중학교 때쯤인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쓸린 나는 혼자 남아 있는 내 방안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몇 번의 콜록거림. 어느 정도의 어지러움을 동반한 끝에 기어코 한 가치를 다 피웠다. 그건 분명한 ‘일탈’이었다. 눈의 양쪽에 가리개를 씌워 달리게 만드는 경주마처럼 언제나 정면만 주시하며 내달려온 나에게는 처음으로 일상이 깨어진 날 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에 다시 문 담배에서는 설렘이랄까. 여하튼 그런 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특이한 현상은 입에 담배를 버릇처럼 물게 했고, 그 이후 나는 담배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환상이 깨어진 담배는 나에게 더 이상 ‘일탈’을 향한 욕구의 분출구가 아니었다.
착한(?) 나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내가 좀 더 욕구 분출의 의지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더 큰 자극을 향한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지겹지만 안전한 일상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고 그 덕분에 무사히 고등학교에 진학 할 수가 있었다.
수험생의 미치도록 지겨운 일상을 마무리 지은 뒤, 또 다시 나에게 닥칠 미래가 두렵다. 어차피 모두 일상이 되어 버릴 수많은 ‘일탈’은 무기력함으로 그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뭔가를 이루지 못한 사람의 죽음은 그냥 일상 속에 묻혀 버리기에 슬픈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님들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자식에게 끊임없이 강요 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부모님들은 학창 시절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일부 학부모들은 착각을 한다. ‘자신이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커다란 착각!’
또 다시 수험생의 삶, 그 무참한 일상에 짓밟혀 본다면 전혀 생각조차 못할 그런 환상속의 착각 말이다.
‘일탈’이라는 곡으로부터 시작된 모처럼의 사색이 결국 ‘일상’이라는 평범한 존재로 퇴색해 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내일의 나는 또 다시 ‘일탈’을 동경하는 한 수험생으로 돌아가겠지만, 오늘 나의 고뇌 속에서 건진 고귀한 진리는 일상을 견디는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일상의 발에 밟히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결국 일상 속에 묻혀버릴 서글픈 삶이 아닌, 내 생명이 스러져 가는 순간조차도 덮어 버릴 수 없는 ‘일탈’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 96일 남았다...
첫댓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고3인데요- 그래서 그런지 더 공감가는 글이었습니다. 저도 1학년때 일탈이라고 써 놓은 수필이 하나 있는데 자우림 노래를 쓴거며, 느낌이며 비슷해요.10대라는 길위에선 우리들이란-!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분명 일탈을 꿈꾸는 우리에게도 아직 퇴색하지 않은 각자의 빛이 있는 거겠죠?
정말로 잘 읽었어요 !! 평소에는 몰랐던 걸 느끼고 공감하게 되네요. 일탈.. 저도 10대인지라 더 공감이가네요. 참고로 전 중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