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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당시 사진
광화문 사거리에 나와서 환호하는 서울시민들
뒤에 태극기가 펄럭이고있다
광복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된 독립투사들과 함께 환호하는 서울시민들
(1945년 8월 15일)
조국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1945년 8월 15일)
여담으로는 광복소식이 들려옴과 동시에 어떤 정체불명의 사내가
서울역에 소련군이 도착했다는 허위사실(?)을 퍼트렸고
이 허위사실(?)에 속은 많은 서울시민들이 정말 소련군이 서울역에 나타났는지
확인하기위해 서울역으로 시민들이 매어졌다고
물론 이는 말도안되는 거짓말이였다
플랜카드를 들고 광복을 기뻐하는 학생들
서울 남산에 태극기를 계양하고있는 가슴 벅찬 순간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전남 광양 서국민학교
일제히 시작되어빼앗겼던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치는
감격을 맛보았다. 사진은 첫수업
배치한 간이 책상에 옹기종이 모여앉아
되찾은 우리 글을 익히고 있다. 사진은 강원도의 한 산골.
이 대회는 해방후의 첫 전국체전으로
태극기를 든 손기정씨가 감격에 벅차 눈물을 닦고 있다.
광복절 노래
정인보詩, 윤용하曲
1.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 길이 지키세 길이 길이 지키세
2.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1절 :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절 :
꿈 엔들 잊을건가 지난일을 잊을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닿게
세계에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나리니
힘써힘써 나가세 힘써힘써 나가세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밤새도록 기뻐서 울었다...
1945. 8.15일
해방을 맞아 모두 길거리를 나와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전남 광양 서국민학교 교정에 모인 군민들. (1945년 8월15일)
전국에 메아리진 해방의 기쁨 -
조국해방은 방방곡곡 어디라 할 것 없이 기쁨과 감격의 물결을 이루게 했다.
사진은 1945년 8월16일 전남 광양읍 목성리에서 주민들이 해방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李坰謨씨 제공)
조국으로 돌아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 -
왼쪽 세번째가 법무위원이었던 이시영,
다음이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 순이다.
왜왕(日王) 히로히토가 45년 8월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항복을 발표하자 서울 광화문 네거리으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
1045년 일제에 해방후 해방 경축 전국 체육대회-종합 경기대회-
1945년 10월27일에 열린 이 대회는 해방 후의 첫 전국 체전.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끊고자 박은 것으로 보이는
전남 해남 옥매산 정상의 쇠말뚝.
해남군 황산면과 사회단체로 구성된
'해남 옥매산 쇠말뚝 뽑기 추진위원회가
오는 8·15일 광복절을 기해 이 쇠말뚝을 뽑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한국이 독립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하였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 날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독립기념관의 경축식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기념 행사를 거행한다.
전국의 모든 가정에서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권장하고, 정부는 저녁에 외교사절 등을 초청하여 경축연회를 베푼다.
기념식에서는 정인보가 작사하고, 윤용하가 작곡한 〈광복절의 노래〉가 연주된다.
◈ 1894년 . 19세
동학군 토벌을 위해 일어난 진사 안태훈(안중근의사의 부친)과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을 맺고 구월산으로 이전하였으나 이동엽부대의 습격을 받아 패하였습니다.
◈ 1896년 . 21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
◈ 1908년 . 33세
안창호 등 애국지사 104명과 신민회 조직하여 참여. 안악에 양산학교 설립.
◈ 1909년 . 34세
신교육 운동과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배일운동을 전개. 안중근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사살 사건 관련자로 몰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 후 석방..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전념함.
◈ 1910년 . 35세 :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하여 만주 무관학교 설립을 결의함.
◈ 1919년 . 44세
3. 1운동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취임.
◈ 1926년 . 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
◈ 1927년 . 52세
임시정부의 헌법개정으로 국무위원 겸 재무장에 취임.
◈ 1932년 . 57세
이봉창의사로 하여금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게 함.
윤봉길의사에게는 폭탄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지게 함. 한국독립당 등 5개 단체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 1935년 . 60세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이사장으로 취임.
◈ 1940년 . 65세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발족시키고 집행위원장에 추대됨.
또한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되어 한국광복군을 조직 후 총사령관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
◈ 1941년 . 66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5개항의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
◈ 1943년 . 68세
미국 O.S.S와 합작으로 국내침투를 위해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 작전을 계획.
3.1절 기념대회에서 <임정에 국제지위 주기를> 를 연설. 장개석과 회견 (7.26) ,
◈ 1944년 . 69세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
◈ 1945년 . 70세
해방 후 귀국하여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건국 포부와 방책을 밝힘. (11.26).
모스크바삼상회의 소식에 반탁운동 전개. <3천만에게 고함> 을 엄항섭 대독으로 방송.
◈ 1946년 . 71세
비상국민회의를 조직 후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총리에 취임.
대한독립청년단을 발족하여 부총재에 선출.
미국 하지 중장과 요담하여 좌우합작에 찬성, 좌우합작 7원칙 발표 ( 10.13 )
◈ 1947년 . 72세
우익반탁위원회를 구성 후 위원장에 취임.(1.26) ,
대동청년단 결성하여 부총재 취임. (9.21)
◈ 1948년 . 73세
김구 선생 등 3영수 19일 하지와 북조선 정권수립설에 대해 요담. (2.19)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 김두봉에 남북회담 제의함. (2.25)
◈ 1949년 . 74세
성금을 내어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설립. (1.29)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피습을 받아 운명. (6 .26)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교 고등과 1년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1일 아오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격렬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헌병에 의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 당하고 유관순은 주모자로 잡혀 고된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제의 한국침략을 항의하고, 일제법률에 의하여 일제법관에게 재판받음이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법정모욕죄까지 가산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틈만 있으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불굴의 투혼으로 계속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17세의 나이로 끝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신민들은 1945년 8월15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방송에서 히로히토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신민들에게 “견디기 어려움을 견디라”고 설득했다. 민음사 제공
패전국 일본 병사가 고개를 떨구고 쫓겨가고 있다.
아래 사진은 ...
1970년 12월 7일,,,,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폴란드 바르샤바를 국빈방문 중에 1943년 2차 대전 당시 ... 폴란드의 유태인수용소 폭동사건으로 희생당한 유태인들을 기리는 기념묘역을 참배하던 중 ...
갑자기.... 예정에도 없이...
비에 젖어 있던 콘크리트 위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입니다...
나중에 ... 기자들이 ... 왜 예정에도 없이 그렇게 했냐고 물었더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말 했다고 합니다.
67주년 째 맞는 광복절입니다.
전쟁범죄국.. 일본은 ... 사죄와 반성은커녕...
해가 갈수록 노골적으로 더 뻔뻔해지고 있습니다.
이 뻔뻔한 일본아... 이 사진을 보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죄를 하라 ...
저 독일 브란트 수상처럼.
노을05에서보내준자료
박두철
2012년 8월 13일 오후 10:08
일본의 무조건항복 개요
1945년 5월 8일의 나치 독일 항복에 이어 1945년 9월 2일에 일본제국의 항복 (포츠담 선언 서명)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었다. 20세기의 세계사 세계 대전 시대의 종결과 냉전 시대의 시작을 선포하는 큰 전환이 된 사건이기도하다.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한 점령 통치의 시작이며, 1868년 1월 3일 메이지 유신("왕정 복고의 큰 호령")에 의하여 성립된 일본 제국은 성립으로부터 77년 후에 붕괴했다. 일본 천황을 기축으로하는 "일본제국"(日本帝國)에서, 일본국 헌법과 미일 안보 조약을 기축으로하는 "일본국"(日本國)으로 바뀌었다. 일본의 역사상 1603년 도쿠가와 막부 성립과 1868년 메이지 유신과 나란히 큰 전환점의 하나이다.
세계 정치사적으로 보면, 1911년 ~ 1912년 신해 혁명에 이어 제2 공화제 도미노가 일어났는데 그 도화선이 1945년 일본의 항복이다. 이것에 이어 제3의 물결은 1989년 동유럽 혁명에 의해 과두 공화제 (일당제)가 잇따라 쓰러진 것이다. 즉, 일본의 항복은 전세계에서 대통령제 국가를 성립시키는 요인이 된 중요한 일이다. 이 일본의 항복으로 폭력적인 군주 지배와 개인 독재를 특징으로하는 추축국은 모두 패배 붕괴, 대통령제 (민주 정치)와 일당제 (과두 정치)을 불문하고 공화제를 하는 연합국의 승리가 결정했다. 1945년 이후 성립된 국가 대부분에서, 대통령제가 깔려있는 것은 주목할만한 점이다.
[편집]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일본 점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5년 8월 10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소식을 전해 들은 파리 시민
1945년 8월 14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들은 뉴욕 시민1945년 7월 26일, 미국, 중화민국, 영국 정부 수뇌가 모여 일본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의 정치가들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했다. 그 결과 일본제국의 단말마는 1945년 8월 방문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된 2발의 원자폭탄이다. 이 원자폭탄 이외에, 8월 9일에는 소련군이 괴뢰 국가 만주국을 침공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1945년 9월에 정식으로 제 2차세계대전에 참가하여 일본을 공격할 거라고 예정되어 있으나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실패하였으며 연합국(영국, 미국, 중화민국, 소련) 측에서는 9월에 일본을 독일처럼 분할 점령하려고 했으나 이 역시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어 결국 미국이 단독 점령을 하였다.[1] [2]
2발의 원자폭탄은 일본제국군이 점령한 동북 아시아와 동남 아시아에서 독립 운동을 야기 제2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켰다. 그 날 뚜껑을 끈 사건이 8월 13일 발발한, 호치민의 베트남 8월 혁명이다. 쇼와 천황이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선언했다 일은 그 다음날 8월 14일이었다.
[편집] 포츠담 선언 체결그리고 항복 선언 3일 뒤인 8월 17일에는 일본 군정하에 인도네시아에서 독립 선언이 나왔다. 8월 18일에는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결국 무너졌다.
그리고 포츠담 선언은 1945년 9월 2일 체결 즉시 발효되었다. 포츠담 선언 조인식에서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이 9월 2일 '대일 승전 기념일(VJ 일)'라고 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이 포츠담 선언 체결 일, 호치민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바오다이 이끄는 베트남 제국은 붕괴했다.
[편집] 구 일본제국의 영토일본 제국이 주권을 박탈당하자 식민지는 승전국인 미국, 중화민국에 각각 넘어갔다.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했다.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여 일본 식민지가 되었으나 항복하는 바람에 다시 프랑스로 넘어갔다(1945년에 북베트남은 독립운동으로 남베트남은 1954년에 프랑스가 미국으로 넘겨주는 덕에 독립을 하였다).
타이완은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나머지 일본의 도서 지역은 미국이 주도하는 GHQ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괴뢰 국가였던 만주국은 멸망하였다.
Japanese Sign Final Surre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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