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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Trans Jeju 코스맵
출발 ~ CP1 (5.5km, 관음사 코스 출발점)
오전 6시 정각. 신나는 음악과 함께 출발한다.
50k 주자와 100k 주자들이 함께 출발하기 때문에 450명의 주자들이 처음부터 뒤엉킨다. 화대종주의 경험으로 봤을때, 출발 직후 조금 속도를 내 가능한 한 대열 앞쪽으로 나오는 것이 유리하다. 대부분의 산악 대회들이 시작하자마자 좁은 오르막을 오르는데, 주자들이 많을 경우 병목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도 역시나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파른 업힐이 시작된다.
이번 대회의 목표 시간은 18시간이다.
구간별 페이스와 시간을 계산해서 나온 목표는 아니고, 그냥 18시간 안에 들어오고 싶었다. ^^;; 1회 대회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예전 기록을 참고할 수도 없었고, 나 또한 첫 100k 트레일런이라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굳이 18시간으로 잡은 것은, "동네 아는 형"이 비슷한 코스를 그 시간대에 완주했고, 출발이 오전 6시이니 18시간이면 100km 산길을 당일(밤 12시 이전)에 끝낼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평균으로만 보면 시간당 5.5km 정도만 가면 되니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첫 5.5km 구간을 6분 페이스로 뛸 계획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세미양 오름의 100여미터 급한 오르막을 어렵지 않게 올랐다.
아직 헤드랜턴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두웠지만, 초반이라 다들 소풍나온 분위기이다. 그 숲속에서 단체로 길을 잊어먹기 전까진...ㅎㅎ 첫번째 알바때는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다들 당연한 듯 받아 들였다. 하지만 두번째 다시 길이 사라졌을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젠 다들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흩어진다. 난 내 바로 앞 대열들을 따라가는데, 길이 없는 숲속으로 들어간다. 내 바로 앞 여자 주자는 나무 사이에 걸쳐진 철조망에 걸리고, 내 바로 옆 아가씨는 위에서 굴러내려온 커다란 돌덩이에 발목을 맞는다. ;;; 먼저 내려갔던 그룹이 아무래도 길이 아닌듯 다시 올라오니 완전 멘붕...
다들 국적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힘든 일이 생기니 서로 돕기 시작한다. 뿔뿔히 흩어져 리본을 찾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앞쪽에서 큰 소리로 길을 찾았다며 뒷 주자들에게 알리기 시작한다. 뒷 주자들은 다시 그 뒷주자들에게 알리고... 그렇게 그 숲을 빠져 나왔다. 현장에선 주로 표시를 정확히 하지 않은 주최측을 원망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나중에 경험많은 외국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그 정도 알바는 당연한 듯 얘기한다.
관음사 주차장으로 빠져나와 1km 정도 도로를 달리니 관음사코스 출발점, 첫 CP에 도착했다. 원래 35분 정도로 예상했었는데, 거의 두 배인 1시간 7분 걸렸다. ^^;; 초반부터 힘을 쫙 빼놓는다.
CP 1 관음사지구 탐방지원 센터
두번째 CP인 성판악휴게소까지는 한라산을 넘어 17.9km를 가야 한다. 아무래도 500ml 두 병으로는 물이 부족할 거 같아 출발전에 미리 300ml 하나를 더 배낭에 챙겨 넣었다. 트레일런 CP(Check Point)에서는 마라톤 급수대보다 좀 더 다양한 음료와 간식을 제공한다. 이온 음료와 콜라, 바나나 및 초콜렛 등이 다양했고 무엇보다 제주도 감귤이 각 CP마다 준비되어 있다. 또한, 배번에 붙은 기록칩을 체크하는데, 이 때 체크된 기록은 실시간으로 개인 페이스북과 라이브트레일(www.transjeju.livetrail.net) 홈페이지에 업데이트 된다. 주자들은 휴대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자신의 순위와 페이스를 알수 있으며, 기다리는 가족들 또한 주자들의 위치와 기록을 알 수 있다. UTMB 대회와 같은 시스템인데 UTMB에서는 더불어 각 구간 카메라가 있어 주자들의 실시간 영상까지 중계한다.
Livetrail CP 1 기록 (구간 속도 4.11km/h, 전체 순위 83등)
CP1 ~ CP2 (23.4km, 성판악 휴게소)
본격적인 트레일런이 시작되었다.
이번 트랜스 제주 코스는 제주 트레일런 대회 처음으로 한라산과 한라산둘레길 5코스를 다 담았다. 관음사에서 출발해 백록담을 지나 성판악으로 내려오면 사려니 숲길로 이어지고, 다시 수악길-동백길-돌오름길-천아숲길을 지나 관음사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지금껏 제주도를 여러번 와봤지만, 나에게 있어 제주도는 고등어회나 오겹살에 한라산 소주나 먹는 동네지, 한라산 같은 높은 산을 올라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자 쓸데없는 시간낭비이기에 생각도 해본적 없는데... 이제 달려서 올라간다. ㅋㅋ 더불어 한라산 둘레길까지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니 코스가 정말 "좋구나"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40km 지점, 본격적인 수악길로 접어들기 전까진 그랬다. "좋구나"라고...ㅎㅎ
관음사 탐방 코스 (총 거리 8.7km, 예상시간 5시간)
정상이 1950m 이지만, 출발점이 해발 500여미터 지점이니 대략 수직고도 1.5km를 오르면 된다. 화엄사-노고단 고도와 비슷한데, 거리가 1.5km 길어 경사도는 더 완만한 편이다. 더불어 많은 구간 나무 데크로 잘 정비되어 있어, 지리산에 비하면 꽃길이다. ㅎㅎ 일반 등산객 예상 시간은 5시간이나, 그 절반인 2시간 30분 정도를 예상해 본다. 첫번째 탐라계곡 다리를 지나면 경사가 가팔라지는데, 스틱 덕분인지 어렵지 않게 오른다. 해서 여러명의 주자를 따라잡았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더니 정말 정삼각형으로 깍아놓은듯한 봉오리가 앞을 가로막는다. 삼각봉이다.
삼각봉 앞에서.
물들어가는 단풍들과 바위산이 어우러진 모습들이 너무 예뻤는지, 올라오는 주자들마다 "지져스"를 연발한다. 삼각봉 대피소부터 용진각 현수교까지 산허리를 감아도는 나무계단을 따라가는데 여기에서 보이는 풍경이 기가 막히다. 마치 춘천 마라톤 10~15km 구간을 그대로 한라산에 옮겨온 듯하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셀카를 찍느라 낑낑대는데, 빠르게 달려오던 한 여성 주자가 자기가 사진을 찍어준댄다. 홍콩에서온 Sharon을 여기에서 처음 만났다.
용진각 현수교 가는 길. (샤론이 찍어준 사진)
용진각 현수교. 이 다리를 기점으로 다시 경사가 급해진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먼저 보냈는데, 용진각 현수교 지나서 아까 사진찍어준 그 홍콩 친구를 다시 만났다. 50k 주자인줄 알았는데, 슬쩍 배번을 보니 100k 주자이다. 100키로를 도저히 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체구인데 대단하다. 옆을 지나면서 통성명을 하는데 샤론이란다. 농담으로 "먼저 갈테니 이따봐" 했는데...
"I'll keep my eyes on you!"
라며 씩 웃는다. '지켜볼께', '두고보자' 등등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인데, 그 땐 무슨 의미인줄 몰랐다. "넌 곧 나한테 잡힐꺼야~"란 말인줄...ㅎㅎ
나름 빠르게 뛰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앞에 여성 주자들이 줄줄이 올라간다. 물론 50k 주자들도 있으니 페이스를 조금 빨리 했겠지만, 다들 그 경사를 잘도 올라간다. 몇 명을 제치고 드디어 백록담. 기록칩을 체크하는 요원과 백록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시는 자봉이 있다. 전체적으로 날이 흐려 백록담을 볼수 있을까 했는데, 푸른 하늘만 없을뿐 아주 선명하게 백록담이 내려다 보인다. 이제 막 9시가 넘어선 시간이라 정상에는 대회 주자들밖에 없어 여유롭게 사진 몇 장을 찍는다. 관음사에서 정상까지 2시간 4분 걸렸다.
백록담. 첫 등반에 백록담을 보았으니 운이 좋은 편이다.
그러고 보니 평생 산이라고는 월출산, 달마산(둘다 목마에서 가봄)밖에 못가봤는데, 올해에만 남쪽에서 가장 높은 산 두 곳을 올랐다. 이제 하산. 성판악까진 9.6km로 올라올때 보다 조금 더 길고 완만하다.
초반엔 잘 정비된 나무 데크를 타고 달렸는데, 갈수록 돌길이 많아진다. 하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내리막 연습하는 셈치고 빨리 내려갔다. 다행히 아래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한쪽 방향으로 길을 내어주고, 바닥의 현무암들이 날카롭거나 미끄럽지 않으니 연습했던 대로 달려진다. 외국인 한 명이 빠르고 치고 가니, 덩달아 속도가 빨라진다. 올라오는 등산객 또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로 그들만의 언어로 화이팅을 외쳐주니, 더욱 기분 UP! 이번 대회중 가장 신나고 빠르게 달렸던 구간인듯 싶다.
성판악 도착, 1시간 25분 소요. 관음사부터 성판악까지 총 3시간 30분에 달렸다. 초반 숲속에서 까먹었던 30분을 만회하고도 목표 시간보다 20분 빨리 CP2에 도착했다.
Livetrail CP 2 기록 (구간 속도 6.41km/h, 전체 순위 54등)
CP2 ~ CP3 (34.6km, 머체왓 숲길)
두번째 CP에서는 컵라면과 같은 음식들을 주는데, 배낭에 물도 많이 남았고 배도 고프지 않아 귤만 몇 개 집어 들고 출발한다. 막 방향을 잡고 출발하려는데, 샤론이 헐레벌떡 달려 내려온다. 헉! ;; 나름 빨리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기껏 20~30초 차이밖에 나지 않다니... 갑자기 맘이 바빠진다. 성판악 휴게소에서 100여 미터 내려와 사려니 숲길로 가는 산길로 접어든다.
50k 주자들과 길이 나뉘는 월든 삼거리까지의 4km 구간은 평소에는 통제 구간이다.
겨우 형태를 알아볼수 있는 트레일 위로 잡풀들이 무성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돌들이 주로 곳곳에 박혀있다. 갑자기 공룡이 뛰어나와도 전혀 이상할 께 없는 분위기다. ㅎ 대신 캐나다 록키 산맥에서나 봄직한 굵고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다. 가끔 나뭇잎이 쌓여 푹신한 길들이 나오는데,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보드라운 느낌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월든 삼거리에서 100k 주자들은 우회전.
여기서부터는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길인지 주로 사정이 좋다. 한라산에서 많이 난다는 돌들을 잘게 부숴 바닥에 깔았는데, 달리기에 부담이 없다. 다시 돌길이 나오기 전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고자 속도를 올렸다. 마침 200~300m 전방에 열심히 달리는 모령의 아가씨가 있는데, 똑같이 한라산을 넘어왔을텐데 전혀 지치지 않은 모습이다. 그래도 명색이 로드 러너(ㅋㅋ)인지라 곧 따라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건강미가 철철 넘치는 아름다운 아가씨다. 지나면서 간단히 인사를 하는데, 역시 홍콩에서 왔단다. 이번 대회 한국인 다음으로 많이 참가한 나라가 홍콩이라더니... 홍콩처럼 작은 지역에서 우리나라보다 트레일런 대회가 많단다. 자연스레 잘 달리는 동호인들도 많고...
그 주자를 지나쳐 500여 미터 왔나...
작은 돌 하나를 잘못 밟은 것이 발톱 하나가 들린것 같다. 참고 갈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발톱이 빠질 것 같아 멈춰섰다. 양말을 벗고 보니 다행히 붙어있긴 한데, 앞으로 갈 길이 먼지라 밴드로 감아주려고 하는데... 출발 후 처음으로 멈춰서인지 고관절에 쥐가 나, 발가락까지 손이 닿질 않는다. ^^;; 쥐가 풀리길 기다리는데 아까 그 홍콩 주자가 지나간다.
"Are you Ok?"
발톱이 빠질려고 해서 밴드로 감아줄려고 한다고 했더니, 약이랑 밴드가 있냐고 묻는다.
없다 하면 자기껄 꺼내줄 기세다.
"I'm Ok. Thanks!"
했더니 다시 제 갈길을 가는데, 그 후론 다시 보진 못했다. (대회 후 기록을 보니 여자부 4위 Olivia Luk이라는 선수다. 나보다 한시간은 먼저 경기를 끝냈다.) 계속 주자들이 지나가는데, 그 중 몇몇은 괜찮냐고 묻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트레일러너들의 암묵적 룰이자 의무라고 한다. 워낙 멀고 험한 길을 가다보니, 중간에 사고를 당했을 경우, 제일 먼저 도울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는 동료 주자들이다. 해서 달리지 못하는 주자들을 보면 꼭 상태를 물어보는게 예의라고 한다. 좋은 걸 배웠다.
사려니 숲길을 나와 목장길을 조금 따라가니 세번째 CP인 무체왓 숲길 입구가 나온다. 출발한지 34.6km 지점. 정확히 6시간이 걸렸다. 목표 시간보다 20분 빨리 들어왔으며 전체 순위는 48등.
CP3 ~ CP4 (46.4km, 수악교)
간단히 물만 채워서 머체왓 숲길로 들어간다.
한라산 정상부터 지금까지 내리막이였다면, 지금부터 80km 지점까지는 꾸준한 오르막이다. 오르막도 300 고지에서 해발 1000m 이상까지 올라야 하기 때문에 만만히 볼 일은 아니다. 머체왓(제주도 방언으로 머체:돌, 왓:밭) 숲길은 이름 만큼이나 돌이 많지는 않다. 오히려 숲속으로 난 부드러운 흙길이 많아 달리기에 편하다. 덕분에 이 곳에서 아까 날 지나쳤던 몇몇 주자들을 다시금 추월한다. 머체왓 숲길이 끝나고 두번째 한라산 둘레길인 수악길로 접어들자, 주변 환경이 확 변한다.
수악길 삼나무 숲. 자잘한 자갈이 깔여 있어 달릴만 하다. 한라산 둘레길이 다 이런 줄 알았다...^^;;
사려니 숲길처럼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하게 솟아있고, 그 사이로 잘 정비된 둘레길이 굽이굽이 흘러간다. 다만 배수로 공사를 하는지 곳곳에 파헤쳐진 곳이 많고, 솎아내길 하는 건지 여기저기 벌목된 나무들이 보기가 흉물스럽다. 한라산 오르막에서 너무 힘을 썼던지 생전 아프지 않던 왼쪽 종아리가 뻐근한 것 빼놓곤 아직 달릴만하다. 오르막은 걷고 평지와 내리막은 천천히 달린다. 언제부턴가 혼자 달리고 있다. 내 페이스가 고수들과는 차이가 많고 초보자들보다는 약간 빠른가 보다.
총 길이 16.7km의 수악길의 중간 지점은 516도로와 만난다. 교통 경찰의 안내를 받아 도로를 건너 46.6km 지점인 CP4 도착하고 보니 출발한지 7시간 47분이 흘렀다. 예상 페이스표를 보니 여전히 목표 시간보다 20분 빠르다. 정말 대충 각 구간 예상 시간을 잡았는데, 신기하게도 얼추 비슷하게 맞는다. ^^ 이제 거의 절반 왔으니 지금껏 걸린 시간에 두 배를 하면 목표 시간까진 2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순천 울트라의 경험으로 보면 후반부 50km는 전반부보다 1~2시간 정도 걸리니 대충 18시간 안에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Livetrail CP 4 기록 (구간 속도 5.28km/h, 전체 순위 37등)
점심 먹을려고 계획했던 CP라 큰 컵라면 하나를 부탁해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친구가 들어온다. 또 샤론이다. 아놔... ^^;; 아직 다 먹지 못한 컵라면을 내려두고 일어선다.
CP4 ~ CP5 (53.3km, 돈내코)
다음 CP5 까지는 7km. 다른 구간에 비해 짧은 편이다. 이제 나머지 절반의 수악길을 간다. 그런데...
최악의 돌밭길이 시작된다. 크고 작은 돌들이 빼곡히 박힌 돌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잠깐 방심하면 바로 발목이 꺽인다. 뛰는 건 고사하고 걷기도 힘들다. 머리위 이정표를 보고 가야하는데 이제 발밑까지 신경써야 한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비까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가민 GPS에 찍힌 거리가 47km에 딱 멈춰서 가도가도 키로수가 올라가지 않는다. 비슷비슷한 주변 환경은 계속 제자리를 걷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게 한다. 이제 절반도 못왔는데... 처음으로 "포기"라는 단어가 머리에 들어왔다.
수악길 돌길. 한라산 둘레길의 70~80%가 이런식이다. 둘레길이 아니라 "돌"레길이다.
CP4 직전에 추월했던 한국인 커플이 다시 날 추월해가더니 눈 앞에서 사라진다. 이런 돌길을 어찌나 빨리 잘 걷는지... 이제 달리는 건 포기하고 최대한 빨리 걷기를 해본다. 이건 수악길이 아니라 "숭악한" 길이야...ㅋㅋ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숭악"길을 지나 마침내 돈내코에 도착했다. 이제 한라산 둘레길 5코스중에 겨우 2개를 통과했다. 목표 시간을 3분 넘긴 9시간 18분 경과.
CP5 ~ CP6 (66.9km, 무오법정사)
돈내코 CP에서 물을 보충하면서 보니 빈 물병보다 새 물병이 많아 자봉 요원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지나갔어요?"
"한 30~40명 갔을걸요..."
오, 생각보다 선방하고 있다. 힘이 조금 나는 듯 하다.
이제 동백길이다. 둘레길 내내 키 큰 동백나무가 가득하다. 여전히 돌길이지만, 이제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좀 더 빨리 걸어진다. 더욱이 가끔 나타나는 흙길은 정말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다. 걷다 뛰다를 반복하는데, 아까 수악길에서 날 추월해 갔던 남녀 커플을 다시 따라 잡았다. 여자 주자가 다리를 조금 저는 것이 발을 다쳤나 보다. 그리고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검은 유니폼이 휙 지나가는데, 한국인 여성 주자다. 전형적인 마라톤 주자 폼이다. 그 돌길을 어찌나 빨리 뛰던지... 돌길에 익숙해질 무렵, 이제 새로운 장애물이 힘빠진 주자를 괴롭힌다.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빗물이 표면의 흙을 쓸어가고 바위들만 남긴 건천(乾川). 폭이 3~4미터로 좁은 것부터 100미터나 되는 것까지 끊임없이 주로를 가로막고 있다. 나중에 물어보니 둘레길엔 100여개의 건천이 있단다. ^^;; 큰 바위로 이루어진 건천 하나를 건너는데... 다음번 바위를 밟다가 미끄러져 바위들 사이로 빠졌다. 무릎이랑 정강이를 찍혔는데 다행히 카프가드가 있어서 심한 찰과상은 면했다.
한라산 건천. 대회 당일에는 비가 와서 바위가 더 미끄러웠다.
"둘레길이 이런 돌밭이면 누가 올까... 바닥에 가마니라도 좀 깔지..."
이렇게 투덜거리는데, 마치 오즈의 마법사 벽돌길처럼 숲 사이로 야자매트가 깔린 길이 시작된다. 워낙 돌들이 커 매트를 깔아도 울퉁불퉁하지만 최소한 미끄러지지는 않는다. 그러는 사이 또 한 명 날 추월해가는데, 이번엔 스틱을 이용, 엄청 빠른 속도도 걷는 분이다. 아, 나도 스틱이 있었지! 한라산 정상에서부터 매달고 왔던 스틱을 다시 편다. 균형잡기 훨씬 편하고 무릎에 부담이 없다. 진작 쓸걸...ㅎㅎ
좀더 빠른 속도로, 햄버거가 기다리는 무오 법정사 CP에 도착했다. 66.9km / 11시간 38분 (목표시간 20분 초과)
CP6 ~ CP7 (75.9km, 돌오름 입구)
CP6에선 대회 출발 직전 미리 맡긴 개인 용품(드랍백)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동시에 필수 장비를 다 가지고 있는지 대회 진행 요원으로부터 점검 받는 곳이기도 하다. 일단 드랍백에서 가민 충전기부터 빼서 시계랑 보조 밧데리를 연결한다. 가민 GPS 용량이 15시간인데, 이번 대회는 18시간 이상 예상되니 중간에 충전을 해야한다. 그리고 내 사랑 햄버거. ㅋㅋ 자봉이 따라주는 콜라에 크게 한 입 물었는데 꿀맛이다. 젖은 반팔과 팔토시를 벗고 역시 드랍백에 넣어두었던 긴 팔로 갈아입는다. 양말은 상태가 괜찮은 거 같아 그대로..
CP 6 66.9k 지점 드랍백
햄버거를 거의 다 먹을 무렵 두 명의 주자가 들어오는데...
아까 날 추월했던 검정 유니폼의 한국 여성 주자(중간에 4km나 알바를 했단다.. 나중에 알고보니 청주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65뱀띠 마라톤 조춘자씨. 싱글기록에 풀코스 130회, 308k, 622k 완주. 엄청난 분이셨다. 이번대회 18시간 2분으로 여성부 5위, 전체 31위)와 샤론.
샤론이 날 보더니 웃으며 한마디 한다.
"넌 내가 보기엔 조금 서두르면 18시간 정도면 들어갈 것 같은데.. CP에서 너무 즐기는 거 아냐?"
"그래? 내 18시간 안에 들어가면 니 덕분이니 맥주 한 잔 사지! ㅎ"
샤론보다 먼저 일어섰다.
73키로 지점이였나... 앞서가던 커플 한쌍을 따라 잡았는데, 남자는 동양, 여자는 서양 친구다. 특히 여자는 쌀쌀한 날씨에 속옷같은 민소매티 한장 달랑 입고가는데, 어깨랑 팔이 온통 문신이다. 나랑 거의 속도가 비슷해서 계속 뒤따라온다. 제법 넓은 내리막 길을 따라 쭉 내려오는데, 갑자기 야광 리본이 보이질 않는다. GPS를 보니 3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 올라오는 날 보고 그 친구들도 당황한다. 나만 보고 따라왔다고 한다. 남자 친구는 좀 더 아래로 내려가 리본을 찾아보기로 하고 난 트랭글을 확인했다. 100여미터 전에 오른쪽 갈림길을 미처 못본듯 하다. 세명이서 다시 올라가는데 위에서 5개의 헤드랜턴이 뛰어내려오더니 우리보다 먼저 그 갈림길을 따라 들어간다. 순식간에 순위가 5위나 밀렸다. ^^;;
분명 그 중 한명은 샤론일거고....
또 맘이 급해졌다. 조금 무리를 해서 그 그룹을 따라간다. 얼추 일곱번째 CP 다와서야 따라잡을 수 있었다.
CP7 75.9km / 13시간 34분 / 목표 시간 30분 초과
CP7 ~ CP8 (87.5km, 천아수원지)
아까 그 다섯명중 두 명은 아까 추월한 적이 있는 한국인 남녀커플이고, 중국인 한명과 일본인, 그리고 샤론이다. 참 다국적일세...ㅎ 그 중에서 중국 친구가 맨 먼저 출발하길래 따라 붙었다.
이제 마지막 둘레길인 천아숲길.
10.9km로 제법 길고 그 중 4키로가 1000m 고지까지 오르막이다. 다행히 길은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하긴 한데, 경사가 급해 도저히 뛸 수가 없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중국 친구를 따라 잡았다. 길은 다시 숲길로 들어가는데, 그 친구가 계속 일정 거리를 두고 따라온다. 숲으로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쪽 아니예요!"
"아니, 이쪽에 리본이 있는데..?"
뒤에서 보니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가고 있었나 보다. 그 중국 친구가 능숙한 영어로 내게 알려준다. 고개를 들어보니 리본이 있는 길이 내 정면이 아닌 오른쪽에 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잠시 같이 걸었다. 중국에서 온 젊은 친구인데, 이번이 7번째 울트라 트레일런 이라고 한다. 어쩐지... ^^;; 걷는 속도가 내가 뛰는 속도랑 거의 비슷하다. 먼저 보내고 다시 내가 뒤를 따르는데 갈수록 거리가 멀어진다.
한참을 가는데, 그 불빛이 다시 돌아온다.
앗, 그 친구도 길을 잘못 들었나 했는데,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앞에 진흙밭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그거 알려주려고 다시 돌아왔나 보다. 어찌나 고맙던지... 참, 오늘 여러가지 배운다.
드디어 80키로 지점 정상을 지나 내리막길.
하지만 이제 하반신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다. 안 아픈데가 없고 몇 걸음 뛰지도 못한다. 그래도 이 산만 내려가면 포장된 도로가 나온다. 그럼 기어서라도 완주할 수 있다. 초코파이 하나를 먹으며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다시 두 개의 불빛이 다가온다. 아, 이젠 그만와....ㅠㅜ
" Soo(내 영어 이름이다), Run!"
하며 샤론이 지나간다. 아놔, 남자가 가오가 있지... 따라 뛰는데, 내리막 거의 끝나는 지점까지 한 2키로를 쉼없이 뛰었다. 이제 말로만 듣던 절벽같은 계단이 나온다. 먼저 내려간 샤론이 가지 않고 계단을 비춰준다. 자기도 넘어졌다고 엄청 미끄럽단다. 계단을 다 내려오면 강 폭이 넓은 무수천이 나온다. 바윗길. 주최측이 형광봉으로 길을 표시해 놓았다. 무수천을 건너니 드디어 말랑말랑한 아스팔트가 느껴진다. 이로써 지긋지긋한 5개의 둘레길을 끝났다.
하, 이제 다 왔다. 대략 1키로를 샤론과 함께 달렸다. 알고 보니 이 친구도 트레일런 매니아다. 한국에선 처음이지만 이번이 총 5번째 100k 대회라고 한다. 처음 봤을때 "지켜본다"라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날 잡을 자신이 충분이 있었는데, 내가 생각보다 잘 뛰었단다. ㅎㅎ 첫 울트라 트레일런이라고 하니 더 놀란다. 마지막 CP에 도착했다. 87.5km / 15시간 53분
CP8 ~ 결승점 (100.8km, 제주 국제 대학교 )
드디어 끝이 보인다.
아직 12.5키로 남았지만, 목표했던 18시간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았고 포장도로에 내리막이니 충분하다. 아니 충분할거라 생각했다. 금방 도착할 거 같아 물통을 반만 채우고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내리막을 달려간다.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비가 오더니 점점 빗줄기가 굵어진다. 방수자켓을 꺼낼까 하다가 시간이 아까워 그냥 달린다. 다리를 절고 가고 있는 키 큰 주자 한명을 잡고, 아까 스틱을 잘 쓴다는 주자도 걷고 있길래 추월했다. 그런데...
계속 내리막일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긴 오르막이 시작되고 오르막이 끝날 무렵 "스틱 주자"(나중에 보니 "달리는 의사들" 클럽, 나보다 3분 빨리 골인)이 다시 추월해 간다. 드디어 관음사 주차장에 도착. 새벽에 단체로 헤멨던 숲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시계를 보니 12시까지는 40분이 남았고 GPS는 96.7km를 찍고 있다. 산길 4키로. 40분.
길만 잃지 말자하고 달리는데, 또 리본이 안보인다. 잠깐 헤메는 사이, 아까봤던 일본 친구가 추월해간다. 이어서 샤론도 따라왔다. 마지막 100미터 급격한 언덕. 폐타이어로 길을 만들어놨는데, 비가 오니 계속 미끄러진다. 심장이 터질것 같은 기분으로 오름 정상에 올라, 마지막 계단 내리막. 결승점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회자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끝이라 생각했는지, 바로 뒤에 따라오는 샤론에게 농을 건넸다.
"샤론, 홍콩에서도 응원할때 "짜요"라고 해?"
"마지막까지 집중해! 얘기는 경기 끝내고 하자!"
마지막까지 이 젊은 친구한테 한 방 크게 맞았다. 그 때부터 결승점까진 정말 정신없이 뛰었다.
그리고, 골인.
100.8km / 18시간 09분 56초 / 전체 34/158, 남자부 29/131
샤론은 나보다 40초 늦게 들어왔다. 18시간 10분 36초 / 전체 35위 / 여자부 6위
대회 끝난지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도 다리가 뻐근하다.
그만큼 힘들었지만 인생 최고의 경험이였다.
그래서 다음은 어디? ^^
(끝)
P.S) 내가 젤 좋아하는 트레일런 영상이다. 가끔 운동하기 싫을때 보면 막 달리고 싶다. ㅎ
TNF Endurance Challenge 50 Miler 2016
Zach Miller (2015 TNF 챔피언) vs Hayden Hawks (2017 CCC 1위)
(5:15부터 펼쳐지는 레이스가 압권이다. 이걸 카메라로 담아낸 사람도 대단.ㅎ)
첫댓글 공부(운동은 아닌거 같고 ㅋㅋ) 잘하는 사람들은 뭔가 달라요~~지나온 길을 요러코롬 꼼꼼하니 다 기억하다니~~~
공부는 성이 더 잘 했을거 같고...ㅎ
오랜 시간 혼자 뛰면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전 대부분 그 시간에 구간구간 기억에 담을려고 많이 노력합니다.ㅎ
진짜 돌이 무지 많아서 힘들었지..
1년 동안 볼 돌들을 하루에 다 봤습니다. ㅎ
근데, 한라산 코스는 정말 경치가 멋지더군요~ 사려니 숲길도 좋았고~ ^^
샤로니 전번 땃쓰 안땃쓰~~~?
아재, 요즘 누가 전번을...ㅋㅋ
대부분 "페북"이나 운동하는 사람들은 "스트라바" 검색하면 다 뜸~^^
대회 끝나고 내 스트라바에 뜨길래, 바로 팔로우~ ^^
채수현씨 주경남씨 멋진 담박질 하고 온 걸 축하합니다.
이런 것도 펄펄 살아있을 때 뛰어보지 언제 뛰어보겠어요
한라산이 겁나게 좋아했겠습니다, 아 이런 멋지고 튼튼한 놈들이 나를 밟고 신나면서도 힘들게 뛰었다고 얼매나 대견하게 생각했겠어요
다칠로 또 한 번 축하축하^^
전에 우연히 뵙게 되어서 반가웠습니다~ ^^
다시 운동을 함께 하신다니, 앞으로도 자주 뵙겠습니다.
선배님 노하우 많은 전수 부탁 드립니다~
늦었지만 축하해주셔서 감사 드리고, 담에 기회가 되신다면 같이 가시죠~^^
이번에도 같은 클럽 선배가 함께 뛴다는 사실만으로 참으로 반갑고 든든했습니다~
아이고 제가 많이 배워야 하지요
트레일 러닝을 좀 더 빨리 접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한답니다.
인자 다리가 힘이 부쳐요 ㅎㅎ
수현씨 후기에도 써 있듯이 제가 TMB 트레킹 갔을 때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가 주는 주위 경치도 매우 좋았습니다만, 거기서 담박질 하는 넘들 보니까 '와~나도 저기 끼어서 달리고 싶다'라는 욕망이 마구마구 치솟더라고요. 부러워 하면 진다고 했지만 그래도 부러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