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 감독의 최근작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는 어긋난 소통과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 낙빈왕의 시 <咏鹅, 영아>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이자 문학적 메타포이다. 영화는 먼저 불통의 관계를 보여준다. 윤영(박해일)과 아버지, 윤영과 송현(문소리), 송현과 그녀의 남편, 민박집 사장(정진영)과 아내 혹은 딸은 서로 붙통 관계이다. 여기서 윤영과 송현이 불통 관계라는 것은 일견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면서도 최소한 사랑의 관계만큼은 소통이 되지 않는다.
장률 감독은 일단 영화를 소통이 안되는 상황을 계속 보여주지만 차츰 영화가 전개되면서 서서히 소통을 회복한다. 먼저 남편과의 갈등 끝에 헤어진 송현은 군산의 민박집 사장을 만나자 새로운 소통을 시도한다. 또한 아빠와 엄마의 갈등으로 엄마를 잃은 민박집 사장의 딸은 윤영의 우울한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역시 새로운 소통을 시도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남녀의 사랑을 내세운 소통 방식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긋난 소통이자 어긋난 사랑으로 귀결된다. 먼저 자신의 잘못으로 아내를 불귀의 객으로 만든 민박집 사장은 아내에 대한 죄책과 회한으로 송현의 사랑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송현의 일방적인 짝사랑일 수밖에 없다.
이점은 민박집 사장의 딸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폐증을 앓는 환자지만 윤영의 모습에서 동병상련의 모습을 발견한다. 윤영과 민박집 사장딸은 나중에 어느 섬을 찾아간다. 이들은 함께 숲속에 들어서는데, 숲속 오솔길이 나오자 사장 딸 혼자서 들어간다. 이 장면은 윤영과의 관계가 단지 완전한 소통이 아님을,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즉 이 영화에서 남녀는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완전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랑까지는 발전하지 못한다.
이쯤에서 영화의 주제를 말해보자. 당나라 시인 낙빈왕이 7세때 썼다는 시 <영아>는 공교롭게도 윤영의 죽은 어머니가 아들을 부를때 '영아'라고 부른데서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자애로운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을 부를때 인자한 음성, 사랑에 가득한 목소리로 '영아'라고 부를때, 아들은 엄마의 사랑 가득한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윤영은 사랑하는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 그러던차 어느 술집에서 송현이 윤영을 향해 '영아야"라고 부르자 순간 윤영은 희미하게 기억속에 사라졌던 엄마의 목소리가 송현의 모습에 오버랩된다.
하지만 송현은 단지 영아야라고 부를뿐, 윤영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다. 윤영은 영아라고 부르는 송현을 향해 사랑의 춤사위를 낙빈왕의 시<영아>를 부르며 보여준다. 마치 숫컷 극락조가 춤을 추며 암컷 극락조를 부르며 구애하는 모습과 흡사한 장면이다.
이제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층위를 살펴보자. 이 영화는 표면에 네 사람의 어긋난 소통, 혹은 사랑을 다루면서 동시에 다른 이면에는 동아시아 3국의 현제적 상황 나아가 조선적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한데 아우르고 있다. 만약 장률 감독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가 단시 연애물에 그쳤다면 뛰어난 영화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장률 감독은 윤영과 송현의 어긋난 사랑을 다루면서 앞에서 말한대로 동아시아의 현재적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대사는 "어데선가 많이 본듯하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주로 윤영이 하고 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동아시아 3국, 즉 중국, 한국, 일본인들은 거의 외모가 흡사하다. 이들은 길거리 어데선가 만난다면 거의 구분하기 힘들정도다. 실제 그런 장면이 몇 번 나타난다. 가령 관광객으로 온 중국인들, 일본인, 나아가 조선족까지 서로 구분하기 힘들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 조국 한국으로부터 차별받는 조선족의 모습은 특별히 여러 장면에서 나타난다.
먼저 시인 윤동주를 보자. 일본 후쿠오카의 한 감옥에서 죽은 윤동주는 조선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연변의 수도 용정에서 출신이다. 그런데 극우 아버지를 둔 윤영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조선족 여인도 용정 출신이자 윤동주의 먼 친척뻘이다. 하지만 윤동주는 국민시인으로 대접받고 가정부는 조선족으로 냉대받는다. 만약 윤동주가 후쿠오카에서 죽지 않고 용정에서 그대로 살았다면 그 역시 조선족일 되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조선통치시기에 한국을 통치하면서 숱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한국에게 씼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런 사실앞에서 진정으로 사죄를 하지 않는 역사의 죄인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군산은 일본인들의 적산가옥이 그대로 남아있는 현장이다. 일본인들의 세운 동국사도 그대로 있다. 일본인들은 이런 그들의 역사적 현장, 실은 수탈의 현장인 이곳을 옛 추억을 회상케 하는 그리움으로 장소로 찾아오고 우리는 관광지화해서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는동안 역사의 진실은 은근슬쩍 감춰지고 관광상품만이 활개치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한국인은 바로 같은 한국인인데도 조선족으로 업신여기는 행위와 다를바 없다.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나아가 조선족까지 어데선가 많이 본듯한것은 비슷한 모습, 하나의 모습 같아서 그렇다.
이런 동아시아 3국, 조선족의 현실은 다름아닌 윤영의 처지와 다를바 없다.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그, 단지 그리움의 표상인 영아라는 소리를 귓전 가까이 듣지만, 막상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는 상태, 이게 바로 일본으로부터 한국, 한국으로부터 조선족이 처한 현실을 의미한다. 서로 비슷한 외모에서 가까움을, 어데선가 본듯한 그리움을, 그래서 사랑을 기대하지만 이런 기대는 번번이 어긋나고 미끄러지며 심지어 냉대받고, 조롱까지 받는다.
장률 감독은 재중 동포로서 한국사회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 그의 현실은 윤영의 처지, 어긋난 사랑, 기댈곳 없는 그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연애담을 말하고 있지만 한 층 꺼풀을 들어가면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