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지역 3.1운동과 기독교
- 교인 김종부는 주머니칼로 왼팔(허벅지)을 찔러 흐르는 피로, 태극기 그리고, 장양헌 전도사의 구술을 받아 독립사상 고취의 글을 태극기 여백에 써 넣다.
충주 지역의 3.1운동은 충주제일교회(충주읍교회)의 교인에 의해 주도 되었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충주제일교회는 일제강점기 충주 지역 독립운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충주제일교회의 담임 목사는 의병 출신인 장춘명 목사(1856-, 1915-1922)였다. 그의 나이 64세, 당시로서는 노인이라 여겨져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그 대신 양손자 장양헌(張良憲, 1898~1975) 전도사가 충주삼일운동의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장춘명 목사는 1남 1녀가 있었으나 아들이 자식을 얻지 못해 장양헌을 양손자로 받아들여 함께 생활하였다.
장양헌 전도사는 1898년 음력 4월 29일 경기도 여주군 소개면 삼포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농부 장운보였는데, 아들을 어려서 장춘명 목사의 양손자로 입적시켰다. 장양헌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13년 여주 개신학교를 졸업(1913)하였으며 1916년 배재학당 고등과 3년 수료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은 장춘명 목사의 영향이었으며 서울 서대문 피어선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면서 충주제일교회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던 중 삼일운동을 맞았다. 그의 나이 22의 청년이었다.
1919년 3월 5일, 장양헌은 서울의 학생연합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학교가 휴교가 되자 충주로 내려왔다. 그는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운동 경고문을 충주읍교회 안에서 등사기로 수백 매 인쇄했다. 이 때 교인 유석보(劉錫寶)가 아직 어린 소년의 신분으로 협조했고 추성렬 속장도 함께 도왔다.
그러면서 장양헌은 만세시위를 함께 할 동지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3월 10일경 범바위(虎岩里)에서 충주 농업간이학교 졸업기념 야유회가 열렸을 때 교사 유흥식, 학생 오언영(기독교인), 장천석, 유석보(기독교인) 등이 충주 장날(15일)에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고 교회측 장양헌과 연결을 맺으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 때 유석보가 범바위 야유회에서도 교회측과의 연락책임을 맡았다. 그런 과정에서 금가면 도촌교회 교인 최명희 집사가 뜻을 같이 하였다.
이 때 충주농업학교 학생과 보통학교 학생이 의논하여 장양헌 전도사 측과 손을 잡기로 하고 각 부서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 비밀이 헌병보조원으로 채용될 예정이던 정모 청년에게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거사는 실패하였지만 이 경고문은 최명의 집사 등에 의해 각처에 배포되었다.
이 때 장양헌 전도사를 중심으로 한 만세 시위 준비팀과는 별도로 천도교측에서도 준비하고 있었다. 3월 11일 충주군 달천에서 장날을 맞아 천도교인 홍종호 김응배가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3월 12일 충주 읍내 장터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그것을 계기로 경찰의 경계는 더욱 삼엄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4월 1일 신니면 용원(龍院) 장날에 기독교인 김종부(金鍾富)와 이희갑(李熺甲) 등이 주도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장날에 약 200여명의 군중들이 준비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에 들어갔다. 당시 기독교인 김종부는 일경의 체포를 피해 충주읍내로 들어와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던 장양헌 전도사 팀과 합류하였다.
이로써 충주에는 김종부, 장양헌, 오언영, 최명희 등으로 지휘본부가 구성되었다. 이들은 오는 충주장날(15일)을 기해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을 수립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4월 8일 기독교인 김종부(金鐘富)의 주창으로 주모자들은 충주면 탄금면 칠금리에 사는 권태은(權泰殷) 집에 모여 충주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이 때 김종부는 주머니칼로 자신의 왼팔(일설에는 허벅지)을 찔러 그 피로 태극기를 그리고 장양헌의 구술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문장을 태극기의 여백에 써 내려갔다. 오언영으로 하여금 충주공립보통학교 여교사 김연순에게 독립운동 계획서를 보내어 충주 장날 만세운동에 동교 여학생들을 참가시키도록 하자는 권유문을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극기와 경고문, 독립가 각각 1통, 일반태극기 10여개를 우여곡절 끝에 김연순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번 독립만세 시위운동도 결국 거사 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금가면 최명희 집사는 금가면 도촌리의 엄용복에게, 김종부는 최명희 집사와 함께 엄정면 목계 교회 지도자 김종태(金鍾台) 권사를 찾아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하자고 권유하였다.
이를 보면, 장양현 전도사, 도촌교회 최명희 집사, 김종부 등은 충주구역 내 각 교회를 돌면서 교회 지도자들을 만세운동 지도부로 포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충주지역 만세운동은 추진과정에서 충주교회를 비롯한 충주구역 교회 조직과 연락망이 이용되었다. 교회가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충주지역에서도 확인되는 부분이다.
당시 김종태 권사는 목계 구역 교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지도적 인물이었다. 김종태가 다니던 엄정면 목계교회, 그리고 용산교회, 유봉교회, 동량면의 대전리교회, 금가면의 문산교회, 소태면 구룡교회 등은 모두 감리교회에 속해 있었는데, 선교사의 독선과 독재, 조선인을 위한 교회 수립을 명분으로 감리교회를 탈퇴하고 1928년에 조선기독교회(김장호 목사파)로 이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합동)에 속해 있다.
장양헌을 비롯한 김종부 오언영, 최명희 유석보 등이 중심이 되어 계획한 만세 시위는 거사 직전 비밀이 탄로나 주동자들이 체포되었다. 그해 5월 3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재판에 회부되어 김종부 1년 6개월, 최명희 8개월, 장양헌 6개월, 오언영 6개월 등의 징역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장양헌 전도사는 후에 목사가 되어 강화 온수리교회에서 목회하였으며, 이천지방에서 정년으로 퇴임한 후에도 수족이 성할 때 전도해야 한다며 미자립교회인 문촌교회를 담임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실로 충주 지역의 3.1운동은 장양헌 전도사, 추성렬 속장, 오언영, 유석보 등을 중심으로 한 충주제일교회 교인들이 주도하였으며, 교회 조직망을 통하여 김종부, 최명희 등 주변 교인들과 연계하여 3·1만세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