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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유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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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병(高麗餠) | ||
고려 때 우리나라는 몽고의 침입으로 100여년간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몽고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야 하였고 복식과 머리모양도 그들의 것을 따라야 했다. 그렇지만 우리의 문화 역시 그들에게 전파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고려병이다. 충렬왕 22년 왕이 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결혼식 연회에 고려에서 가져간 유밀과를 차렸더니 그 맛이 훌륭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원나라에서는 이 유밀과를 고려병이라 이름짓고 혼인연회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존재로 삼았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아 그들의 공주를 시집보내는 대신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 하며 많은 조공을 요구하였다. 그 일환으로 고려의 여인들은 약소국의 설움을 안고 몽고의 궁녀로 이역만리 타국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이렇게 끌려가서 궁정에 살던 많은 고려인에 의하여 전해진 풍속은 고려병 뿐 아니라 고려율고, 상추쌈 등이 있었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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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자(高麗煮) | ||
고려자는 1650년대 일본문헌에 수록된 도미요리로 냄비에 소금을 뿌려 도미를 넣고 도미가 잠길 만큰 술과 물을 부은 다음 술기가 없어질 때까지 삶아 물을 붓고 간을 맞춰 버섯이나 파를 넣어 먹는 맑은 장국의 일종이다. 그런데 이 이름에 고려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조선에서 전래된 음식이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는 당시 우리나라를 통칭하던 명칭이었다. 『동아(東雅)』에 고려의 장인 말장이 일본에 들어왔는데 고려장(高麗醬)이라 표기하고 고려의 마 그대로 미소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음식에 우리나라를 통칭하던 고려를 붙였던 것이다. | ||
깍두기 | ||
무를 작은 밤알 크기로 모나게 썰어서 담근 김치인 깍두기는 젓무, 홍저(紅菹)라고도 하며 궁중에서는 송송이라 하였다. 이 깍두기는 조선 정조 때 정조의 딸이자 홍현주의 부인인 옹주가 처음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당시의 이름은 각독기(刻毒氣)라 하였는데 공주로 낙향한 정승의 한사람이 이 깍두기를 민간에 퍼뜨렸다고 한다. 따라서 깍두기는 공주깍두기가 유명하였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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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궁밥 | ||
우리의 식문화는 한 집안의 가장이 먼저 독상을 받는 것이 전통이었다. 가장이 식사를 끝내면 이 상이 아랫사람에게 물려져 식사를 하였다. 이를 대궁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상을 받은 사람은 상 위의 반찬을 전부 먹지 않는 것을 도리로 여겼다. 가장이 맛있는 반찬을 전부 먹어버리면 나중에 상을 받는 아랫사람을 먹을 반찬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맛있는 반찬을 탐하여 먹는 것을 매우 경계하였다. 어떤 관리가 지방마을의 수령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부임지로 가는 도중 높을 벼슬을 지냈던 종조부의 집에 들려 인사를 올렸다. 종조부는 무척 기뻐하며 푸짐한 상을 차려 주었다. 젊은 수령은 점심을 잘 먹은 후 그만 길을 떠나겠다고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이 종조부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너 이번에 그 마을로 갈 필요가 없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거라.” 젊은 수령이 깜짝 놀라자 종조부는 계속 말하였다. “그렇게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한 마을을 다스릴 수 있겠느냐? 아까 차려준 음식상이 혼자 먹으라고 준 것이더냐? 지금 네가 데리고 온 하인들은 방금 네가 물린 상을 받아 마당에서 대궁밥을 먹고 있다. 네 식사가 끝났다고 길을 떠나면 하인들은 굶으라는 말이야? 그렇게 아랫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니 임지에 가야 좋은 수령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 밥상 하나에서도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식문화였던 것이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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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 복쌈 | ||
봄, 여름, 가을뿐 만 아니라 겨울까지도 이듬해 농사준비로 여념이 없었던 조상들에게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농한기는 1년에 둘도 없는 휴지기였다. 대보름이 지난 이후에는 다시 농사를 지을 준비가 시작되는데 대보름날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 가장 많은 것도 이것 때문이다. 한해동안 소출된 곡식을 조금씩 모아 만든 오곡밥, 아홉가지 묵은 나물을 먹는 진채식 등 이때 먹는 음식에는 풍작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곰취잎, 피마자잎, 소루쟁이잎 등 잎이 넓은 나물로 쌈을 싸먹는 복쌈도 이름 그대로 풍년과 평안이 깃들기를 바라는 음식이었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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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떡 | ||
우리나라 한옥의 변소는 집 밖에 있었으며 깊고 커서 아이들이 실수로 변소에 빠지는 일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면 사람들은 변소에 살고 있는 노일저대라는 신이 춥고 배고파서 아이를 잡아가려고 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송편 크기의 쌀떡 100개를 빚어 신을 달래고자 하였다. 변소에 빠진 아이는 이 떡을 들고 똥떡 똥떡을 외치며 온 동네를 다니면서 이웃들에게 골고루 그 떡을 나누어주고, 그러면 노일저대가 그 아이를 잡아가지 않는다고 믿었다. 똥떡 이외에 붉은수수로 만든 경단이나 백설기도 어린 아이를 지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아이가 태어나서 100일이 되면 하얀 백설기를 만들어 이웃에게 돌리는 풍속이 있다. 백설기의 흰색이 정결, 신성함을 상징하므로 아이가 이렇게 티없이 잘 자라기를 비는 것이다. 수수경단은 수수의 붉은 색이 잡귀의 침입을 막는 것으로 여겨 아이가 10살이 될 때까지 수수경단을 만들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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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 | ||
설렁탕은 조선시대에 생겨난 음식이라 전해지고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친경을 할 때 갑자기 심한 비가 내려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친경 때 쓰던 소를 잡아 맹물에 넣고 국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조선시대 때 매년 이월 상신일이면 왕이 지금의 제기동이 있던 선농단으로 가서 생쌀과 생기장, 소와 돼지를 제물로 바친 다음 직접 밭을 가는 친경행사를 하였는데, 이 행사가 끝나면 미리 준비해둔 큰 가마솥에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소는 갈라 국을 끓이며, 돼지는 삶아 썰어놓고 친경 때 소를 몰던 늙은 농부와 구경꾼 가운데 60세 이상의 노인을 불러먹였다고 한다. 이때 뚝배기를 빌어다 밥을 담고 국도 퍼놓았는데, 반찬이 되는 김치가 없어 파를 씻어다가 놓고 간장도 없어 소금으로 간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선농단에서 끓인 탕이라는 뜻에서 선농탕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설렁탕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설렁탕은 소의 부위를 가리지 않고 통째로 고아내는 음식으로 가장 서민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옛날 설렁탕집에서는 소 한 마리를 가죽과 오물만 제거하고 큰 가마솥에 넣어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끓여 손님에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혀밑, 우랑, 우신, 혹살 등 삶아낸 고기는 부위별로 썰어 채반에 널어 놓고 손님이 오면 그 앞에서 뚝배기에 밥을 담고 뜨거운 국물로 토렴하여 식은 밥을 데운 후 백면을 한 사리 얹고 썰어 놓은 고기건더기를 얹은 다음 커다란 국자로 펄펄 끓고 있는 국물을 한 국자 떠서 내놓았다. 조선요리학, 한국의 풍토와 인물(김화진 을유문화사 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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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취떡 | ||
단오날 여자들은 청포물에 머리를 감았으며 홍색과 녹색의 새옷을 입고 그네를 뛰었다. 성춘향과 이몽룡의 만남도 단오날 그네뛰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단오가 명절로 자리하게 된 것은 1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달이었기 때문이다. 이 날은 양기가 오를대로 오른 쑥잎을 뜯어다 멥쌀가루에 넣고 찐 수레바퀴 모양의 절편을 먹었다. 음양오행론에 의하면 하늘은 양에 땅은 음에 속하고 하늘은 둥근모양을 땅은 네모난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둥근 수레바퀴모양을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하여튼 수리취 떡은 양기를 몸안에 축적시키고자 하는 소망이 담긴 것으로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바쁜 철에 양기를 상징하는 음식을 먹어 음한 병귀의 침입을 막고자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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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김치 | ||
쌈김치는 우리에게는 보쌈김치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넓은 배춧잎에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김치를 싸서 담그므로 쌈김치 또는 보쌈김치라 한다. 배와 밤, 낙지, 생전복, 조기젓, 표고와 석이버섯 등 고급재로가 소로 들어가는 개성지방의 명물음식이다. 개성배추는 속이 연하고 잎이 길며 맛이 고소한 특징이 있어 유명하였다. 그런데 이 배추를 통째로 따서 김치를 담그면 씨를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상술에 밝은 개성상인들이 배추를 뽑을 때 생장점이 다치지 않게 배추통의 중간을 잘라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잘라낸 배추로는 김치를 담고 나머지는 짚을 덮어 월동시켜 씨를 받아 팔았다. 잘라진 배추는 숭숭 썰어 버무릴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통김치에 비하면 볼품이 없다. 따라서 넓은 배춧잎에 싸서 마치 통김치 모양의 쌈김치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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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주 | ||
우리나라의 술은 크게 약주(藥酒)와 탁주(濁酒), 소주(燒酒)로 나뉘어진다. 우리가 흔히 약주라고 말하는 술은 술이 익었을 때 용수를 박아 맑은 술만 떠낸 청주(淸酒)이다. 소주는 술을 증류해 알코올을 받아 낸 것이고 거르지 않고 그대로 먹는 술은 탁주이다. 그런데 청주를 약술(藥酒)이라 부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이다. 우리의 술은 주로 쌀이나 찹쌀로 빚는 곡주이다. 그런데 쌀은 귀중한 식량자원이다. 나라에 재해가 들어 식량생산이 줄면 자연히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되었고 말 그대로 병을 치료하는 수단의 일환인 약주만이 허용되었다. 따라서 나라에서 금주령이 떨어지면 권력자들은 몸이 나빠 약술을 먹는 것이라는 핑계로 술을 약주라 부르며 마셨다. 이런 연유로 권력이 있거나 점잖은 사람이 마시는 술은 모두 약주라 부르게 되었고 오늘날 술의 높임말로 쓰이게 된 것이다. 청주를 약주라 부르게 된 연유로는 또 약현(藥峴)에 살았던 약봉(藥峰) 서성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성의 집안은 술맛이 좋기로 유명하였는데 그가 사는 곳이 약현이었고 서성의 호가 약현이었기에 그 집의 맛있는 청주를 약주로 부르다가 술의 높임말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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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복쟁반 | ||
어복쟁반은 직경 50cm쯤 되는 놋 쟁반에 소의 뱃가죽살을 얇게 썰어 양념을 하고 달걀과 파와 배, 잣 등을 고기 위에 살살 덮은 다음 따끈한 쇠고기 국물을 부어 익혀 먹는 음식이다. 이 어복쟁반은 평양의 유명한 향토음식인데 이 음식은 평양의 상가에서 발달하였다고 전해진다. 평양의 상인들은 개성상인, 수원상인과 더불어 상술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들은 1전을 두고도 격렬히 흥정을 하는 상술을 발휘한다. 이렇게 격렬히 흥정을 벌여 상대방과 적대감까지 생기게 되면 긴장을 풀고 흥정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함께 어복쟁반을 먹었다고 한다. 한 쟁반의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다보면 흥정시 생겼던 긴장감은 다 풀어져 버리고 의리 있고 인정 많은 평안도 사람들의 기질이 되살아나서 흥정이 부드럽게 풀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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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면 | ||
음력 6월 6일 유두날에 먹는 국수를 유두면이라 한다. 원래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슬과 같이 만들어서 끓는 물에 삶아 오색으로 물들여 세 개를 색실로 꿰어서 몸에 차거나 문설주에 걸어서 잡귀를 예방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유두면을 몸에 차거나 문설주에 걸어두고 유두면을 먹으면 여름 내내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속신이 있어서 유두날에는 맑은 시내나 산간폭포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후 밀전병이나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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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의 버선본 | ||
민속박물관이나 민속촌에 가보면 장독대에 있는 커다란 독에 버선본이 거꾸로 붙여져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왜 장독대에 버선본이 거꾸로 붙어 있는 것일까? 이것에는 장 만드는 것을 무엇보다 중시한 우리 선조들이 장맛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장은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거쳐 제조된다. 그런데 발효와 숙성의 과정은 매번 다르게 결과가 나타나는 특성이 있다. 아무리 같은 과정을 거치도록 노력해도 미묘한 차이로 장맛이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선조들은 신비한 힘이 개입되어 장맛을 결정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장을 담글 때 이 신비한 힘이 부정적인 요인에 의해 사라지지 않도록 많은 금기를 지킨 것이다. 장을 담그는 주부는 부정을 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사흘간 외출을 하지 못하게 하였고 장을 담글 때는 입을 창호지로 봉하고 작업하여 여성의 음기가 장에 닿지 못하게 방지하였다. 장독대 주변에는 붉은 빛의 맨드라미를 심고, 독 주위에는 금줄을 두르고 고추, 솔가지 등을 끼워 잡귀가 범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아주 센 귀신이 있어서 이러한 모든 방비를 뚫고 독에 까지 접근을 하게 되면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 그 속에 들어가게 하였다. 버선본이 거꾸로 붙어 있으므로 그 속에 들어가면 위가 막혀서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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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랭이떡국 | ||
떡국은 설날 먹는 음식으로 보통은 흰 가래떡을 어슷어슷 썰어서 만든다. 그런데 개성지방에서는 특이하게 흰 떡을 누에고치 모양으로 만들어 끓여 먹는다. 이렇게 떡을 비틀어 누에모양을 만드는 데는 고려 패망의 한이 담겨있다고 전해진다.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자 고려 왕씨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개성은 고려 500년의 도읍지로 조선왕조가 성립되었지만 마음으로 복속한 것은 아니었고 마음속에는 고려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정월 초하루날 떡국을 끓일 때 패망한 고려의 왕실을 생각하면서 조선의 왕실을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뜻에서 이렇게 떡을 비벼서 끝을 틀어 경단 모양으로 잘라내어 끓여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랭이떡국에는 고려 패망에 대한 한과 더불어 복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본래 정월 초하루에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은 새해에도 무사하게 지내며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개성의 조랭이떡국은 그 형태가 조롱박 모양을 하고 있다. 조랭이라는 말도 이 조롱박에서 유래한 것 같다. 조롱박은 잘룩한 형태를 하고 입구가 좁아서 물건이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어렵다. 따라서 악한 잡귀가 이 조롱박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조선요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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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 ||
동양에서 차의 역사는 매우 깊다. 차를 마신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00-300년경 중국 촉나라에서 발견된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흥덕왕 때 전해졌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김대렴(金大廉)이 당의 문종으로부터 차 종자를 얻어다 왕에게 바치니 왕은 이것을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보천과 효명이라는 두 왕자가 오대산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매일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끓여 문수불에게 공양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강릉 한송정(寒松亭)은 신라 화랑들이 차를 마시며 놀던 유적이라고 한다. 한송정은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해 있으며 소나무가 울창하였고 정자 곁에 다천(茶泉)과 돌화덕, 돌절구가 있어서 차를 마시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라 한다. 고려시대에도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중요한 국가의식에 차를 공양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차를 마시는 대신 술을 주로 마시게 되었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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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 | ||
팥죽은 붉은색을 띠고 있어, 잡귀를 쫓는 수단으로까지 발전한다. 붉은색은 태양과 불, 피 등과 동일한 색이므로 고대인들은 붉은색을 생명과 힘의 표식으로 삼고 숭상하였고 이런 연유에서 동짓날 팥죽을 먹었던 것이다. | ||
해장떡 | ||
충북 중원군 강변마을에서 만들었던 떡. 조선시대 때는 강을 이용하여 조운을 행하였다. 뱃사람들이 배에 물자를 싣고 밤새 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 강변마을에 도착하면 새벽이 된다. 추위에 떨던 뱃사람들은 이 강변마을에서 해장국 한그릇과 함께 손바닥만한 인절미에 팥고물을 두둑하게 묻힌 떡으로 요기를 하였다. 이 떡을 배고픔과 추위에 얼어 있는 장을 녹여주는 떡이라 하여 해장떡이라 불렀던 것이다.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 (유애령 교보문고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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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처음보는 우리 음식도 많이 있네요.. 이제 다음 주말엔 보름이니 부럼과 찰밥에 나물 반찬을 준비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