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7년 평북 정주에 세워진 오산학교(현 서울 오산중고교)는 7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지만, 설립자 이승훈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우는데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총,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깨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7명의 학생밖에 없지만 차츰 자라나 70명, 700명에 이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일심협력하여 나라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오산학교는 평민정신, 민족사랑,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과 애국사상을 일깨웠다.
한편, 이승훈은 1907년 안창호가 신민회를 조직할 때 참여하였고 1911년 105인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4년 넘게 옥살이를 했다.
석방된 후 목회자가 되려고 52세 때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지만 1916년 교육사업에 다시 전념하고자 학업을 중단하고, 이후 자신이 설립한 정주 오산교회 장로가 된 후 평신도로 교회를 섬겼다.
그러다가 56세 때 3․1 독립운동 때 기독교계 대표로 33인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안방에서 편히 죽을 줄 알았더니 이제야 죽을 자리를 얻었구나.”라고 했다.
민족대표 서명을 앞두고 자기 종교인을 먼저 써야 한다며 좌충우돌하자, “이거 죽는 순서야.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이름을 먼저 써”라며 천도교에 첫 자리를 양보했고 장로교 대표 자리마저 길선주에게 내주었다.
오산학교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날씨가 몹시 추운 어느 날 변소에 가 보니, 꽉 차오른 오물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오물을 치우기 시작했는데, 이를 본 학생들이 자신들이 치우겠다고 하자 남강은 “열심히 공부하는 일은 여러분의 몫이고, 이런 청소는 내 몫입니다. 장차 모두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인재들에게 이런 일로 시간을 빼앗기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좌측부터 오산학교의 교장과 교사를 지낸 조만식, 신채호, 이광수
1945년 광복직후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고당 조만식 선생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이 모습이 그의 마지막 사진이다
고당(古堂) 조만식 선생은 원래 평북 정주에서 머슴살이하던 청년이었다. 머슴살이할 때, 그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마당을 쓸었다. 그리고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씻어 햇볕에 말려가지고 다시 안방에 들여놨다. 이에, 그 주인은 그를 머슴으로 두기엔 너무 아깝다고 여겼다. 그래서 ‘평양숭실학교’를 거쳐 일본 명치대학교로 유학 보내어 공부시켰다. 공부를 마친 고당은 고향으로 돌아와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그 학교 교장이 되었다. 훗날 사람들이 선생께 “머슴이 어떻게 대학공부까지 하게 되었고, 신문사 사장과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수 있었나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고당 선생은 “주인의 요강을 정성껏 씻는 성의를 보여주면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
信天 함석헌 선생
칼과 활로 하는 혁명이 껍데기의 혁명이라면, 속알의 혁명은 교회와 학교를 통해 하는 정신의 운동이다. 홍경래가 들다가 못 들고 만 민중혁명의 정말 큰 불은 그가 간 지 한 세기 후에 남강 이승훈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고당 조만식 선생에 의해 일으켜졌다.
남강 선생은 홍경래가 하늘에 사무치는 한을 품고 죽던 그 정주성에, 양반의 사냥개인 관군이 혁명에 나섰던 민중을 단으로 묶어세우고 무찔러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던 그 광경이 아직도 생생한 가운데 자랐을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도산 선생은 그 홍경래가 났던 용강에서 났고, 조만식 선생은 그가 성공했더라면 필시 새 나라를 거기에 배반했을 평양에서 자랐다.
그들은 홍경래처럼 칼과 활을 들지는 않았다. 그처럼 술책을 쓰고 선동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붉은 가슴을 가지고 민중의 붉은 가슴에 대했다. 그렇지만 그 운동은 홍경래의 혁명으로는 비할 수 없는 맹렬한 형세로 퍼져나갔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이들의 정신적 세례를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여기서 ‘한글’을 처음 배웠다.
우리 글을 배워야 할 시기에 나라가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어의 상용이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오산학교에는 3인의 민족지도자 외에도 첫 교사였던 독립운동가 여준(呂準), 체육교사 서진순(徐進淳), 뒷날 친일파로 변신한 이광수, 그리고 함석헌의 또 다른 정신적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가 있었다.
함석헌이 오산에서 유영모를 만난 것은 큰 축복이었다.
다석은 그때 서른두 살, 투옥된 남강의 부탁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노자>, <장자>ㆍ<사서오경> 등 중국 고전은 물론 기독교 신앙에도 정통하여 스물한 살의 함석헌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일본 동경물리학교를 갓 졸업한 개명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유영모는 조선총독부가 교장 취임을 불허하여 1922년 4월 서울로 돌아가고 말았다.
함석헌은 1년 밖에 안 되는 기간의 사제관계였으나 평생 스승으로 모셨고, 그로부터 폭넓은 중국 고전과 속 깊은 기독교신앙을 배우게 되었다. 함석헌은 유영모 선생 밑에서 오산학교 교가를 부르면서 2년여 동안 혼과 신체를 단련하였다.
백두산서 자란 범은 백두호라고
범 중에 범으로 울리나리라
우리들은 오산에서 자라났으니
어디를 가든지 오산이로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유영모 교장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를 통해 일본 무교회주의 지도자 우치무라 간조와 기독교의 지도자 야마무로 군페이를 알게 되었다.
또 스코틀랜드 출신 토머스 칼라일을 배웠다.
그의 시 <오늘>은 함석헌이 나이가 많아질때까지 좋아했다.
오 늘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자 말지어다
영원에서 이 날은 나왔고
영원으로 밤이면 돌아간다
이날을 미리 본 눈이 없고
보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지 말지어다.
개교 105주년 맞은 민족학교 ‘오산’
<평안북도 정주에 설립 구국인재 양성>
‘민족학교’ 오산중·고교(이사장 이영근)가 지난 15일 개교 105주년을 맞이했다. 이 학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남강 이승훈 선생이 구국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1907년 평안북도 정주군 길산면 익성동 제석산 기슭에 설립했다.
처음 시작은 ‘강명의숙’이라는 서당에서 입학생 7명이었지만 이 학교는 4개월 뒤 신학문 중등교육기관인 오산학교로 탈바꿈하며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의 중심에 서는 민족교육의 요람으로써 포효를 시작한다. 개교 이래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고, 해방 직후엔 반공의 선두에 서는 등 우리 역사무대엔 항상 ‘오산학교’가 있었다는 평가다.
특히 이 학교의 항일운동 역사는 개교 초창기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순종 황제가 일본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남강의 공로를 표창하는 행사에 참가하자 오산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일장기 대신 태극기만 흔들며 환영행사를 펼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남강의 독립선언에 호응해 학생 1200여명이 다음날부터 만세운동을 벌였고,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학교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도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대거 참가했다가 37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런 저항정신 속에서 오산학교는 수많은 항일애국지사와 예술인들을 배출했다. 3·1운동 때 활약한 독립운동가 김도태(1회), 도쿄 2·8독립선언의 주역 언론인 서춘(3회),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세계에 알린 신우철(4회), 신사참배에 항거해 순교한 한국 기독교의 양심 주기철(7회), 한국 의용군 사령관이었으며, 육사 교장, 신민당 당수를 역임한 김홍일(9회), 한국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민주·민권운동의 양심 함석헌(13회) 등이 이 학교를 나왔다. 또 근대 첫 개인시집을 낸 김억(4회), 민족시인 김소월(12회), 토속 서정시인 백석(18회), ‘소’의 화가 이중섭(25회)과 백병원을 설립한 백인제(6회), 한국 기독교의 기둥으로 영락교회를 창설한 한경직(10회) 등도 이 학교와 함께했다.
특히 무오독립선언의 주인공 시당 여준,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독립운동가 고당 조만식, 소설가 춘원 이광수와 횡보 염상섭 등 선각자들이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설립 초기 오산학교 교장을 맡은 고당 조만식 장로는 행사나 모임 때마다 예배를 드리는 등 기독교교육을 실천했다. 다석 유영모와 씨알 함석헌이 성경을 가르쳤고, 춘원 이광수가 새벽기도를 인도하기도 했다.
이밖에 현재 유용태 전 노동부 장관, 산악인 박영석, 영화배우 이성재, 탤런트 유호정, 배도한, 이민우씨가 동문이다.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해 동대신동 산4번지에 학교를 재건했다가 수도 탈환과 함께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를 거쳐 1959년 지금의 보광동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오산학교는 류영모 선생이 교장으로 계셨던 곳이라 알게 되었다. 류영모 선생은 서울 출신이지만 오산학교 교장을 하면서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고 이승훈 선생을 기독교에 입문시켰으며,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넘나드는 학문의 대가이기도 하다. 1890년생으로 일일일식하시면 청빈하게 1981년까지 사셨으니 근현대를 모두 사셨다. 다석일지를 남겼다. 우리민족의 정한이 넘치고 생동감 넘치는 황소를 많이 그린 화가 이중섭 선생도 오산학교 출신이다.
정주는 영변의 아래 서해쪽에 위치하고 있다. 문선명.백석.방우영.이광수의 고향이고, 1907년에 이승훈에 의해 오산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당시 지도교사에는 여준 ·윤기섭 ·유영모 ·장지영 ·이광수 ·염상섭 ·김억 등이 있었고, 교장으로는 백이행의 뒤를 이어 이종성 ·나부열 ·박기선 ·조만식 ·유영모 ·주기용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심혈을 쏟았다. 학교 출신 주요 인물로는 김소월, 김기석, 주기철 목사가 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도 오산학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