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 있는 제암리 교회 순국기념관을
저도 다녀 왔습니다.
3월이 가기전에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것 같아
자료를 찾아 감히 올려 봅니다
좀 길더라도 읽으시고
자녀들에게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제암리는
전체 31가구 가운데 2가구를 제외하고는 순흥 안씨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집성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9년 4월 15일 이곳은 죽음의 마을로 바뀐다.
1919년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3월 31일 발안 장날에도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 명은 발안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날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써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만세 운동은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계획하였고,
3.1일 정오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이 따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위협 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졌다.
시위대는 인근 일본인 소학교에도 불을 질렀다.
에 일제는 이 지역 독립 운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제암리 감리교회에
이들을 가두고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른다.
일본군 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으며,
이정근과 그의 제자 김경태 등 3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고주리 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 났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가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들어왔다.
마을에 도착한 후 조휘창과 사사키를 내세워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들을
제암리교회로 모이게 한 뒤 사격을 가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23인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이웃마을 고주리로 가서 시위의 주모자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6명을 칼로 차례차례 목을 베고
난도질을 하여 참혹하게 죽이고 시신을 노적가리와 함께 불살라버렸다.
①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
라고 말하여,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②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③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안종후 권사로 추정)이란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④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하였다.
⑤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⑥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
⑦ 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 ‘노경태’(노불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다.
⑧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
⑨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강태성)의 아내(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하였다.
⑩ ‘홍씨’(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⑪ 군인들이 이웃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여섯명을 총살했다.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 :
1919년 4월 17일 스코필드는 언더우드, 커티스, 테일러 일행과 자동차로
수촌리 현장을 확인하러 가던 도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4월 18일 스코필드는 홀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한 이래 여러 차례 오가면서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사진기에 현장을 담고 조선에서의
일본 지배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다.
예배당에 뒤엉켜 있던 21구의 시신과
불에 타다 남은 두 명의 여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10 여리 밖 도이리 공동 묘지에 매장한 것도 스코필드였다.
1920년 스코필드는 4년간의 계약이 만료되고
일제에 의해 고국 캐나다로 추방된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아
1958년 다시 귀국하고 죽을 때까지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서 가르치며
고아들을 돕고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 사업에 힘을 쏟는다.
스코필드는 34번째의 민족 대표라 불리며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국립 묘지 애국자 묘역에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