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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49 5월 26일 목요일
법화경 제 10 법사품(法師品) 교재 267쪽
안녕하십니까? 오늘 5월 26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제 10. 법사품, 법화경 28품 중에서 열번째 품인 법사품을 공부 할 차례입니다.
법사품은 말씀 그대로 불교에서 잘 쓰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 , 법을 설하는 사람. 법을 전하는 사람. 부처님 법을 출판하는 사람. 또 부처님 법을 책을 만드는 사람. 그것을 또 쓰는 사람. 읽는 사람. 외우는 사람. 한 구절이라도 외우고 다니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불교를 이야기해 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전부 법사입니다. 상당히 법사의 의미가 광범위합니다.
오종 법사라고 해서 우리가 알고 있던 법사는 꼭 어떤 형식을 갖추어서, 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어떤 교리를 강의 하거나, 설하는 그런 분을 가지고 법사다 라고 알고 있는데, 여기 법화경에서 밝히고 있는 법사는 오종 법사라고 해서, 경전을 가지고 다니기만 해도 법사입니다. 수지(受持)이지요.
그 다음에 ‘독(讀)’ 읽기만 해도 법사입니다. 그 다음에 읽다 보면 외우게 되지요. 한 구절도 상관 없습니다. 다 외울 수는 없는 거지요. 또 제목만 외워도 역시 그것도 법사입니다.
그래서 수지 독송 위인 해설! 해설하는 거지요. 경전을 풀이합니다. 경전을 그대로 읽어 주거나 뜻을 각자 소화한데로, 읽어주거나 설명해주는 것, 이것이 역시 법사에 해당되지요. 그 다음에 사경, 서사인데 요즈음으로 치면은 뜻이 광범위하지요. 집에서 혼자 기도 삼아 한글자 한 글자 쓰는 것도 해당됩니다.
또 이것을 컴퓨터로 요즘 사경하는 분들도 많지요. 집에서 컴퓨터로 사경하는 것도 역시 법사에 해당되고, 또 그것이 경 전체든지 아니면 요약한 것이든지 중요한 말만 모으던지 이런 것들도 역시 법사에 해당됩니다. 그것이 전부 사경에 해당 되거든요. 서사에 해당되기 때문에 많고 적음을 따지지 말고, 그런 다섯 가지의 관계가 되는 일을 하시는 분들은 모두가 법사입니다. 이것이 법사의 바른 뜻입니다.
우리가 법사 품에서 그런 것들도 바르게 이해해 주시고, 또 어디에 해당 되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법사다 라고, 이렇게 자칭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다섯 가지에만 해당되면 법사니까요. 그렇게 이해 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 법사품의 개요를 보면은 세존께서 열반에 드신 후 법화경을 수지하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 가지고 칠보 탑에 모시고, 공양. 공경. 찬탄하는 그런 불사를 하는 법사의 희유한 찬탄과, 또 법화경 한 게송. 한 구절이라도 듣고 기뻐하는 이에게 까지도, 모두 이제 부처의 삶을 살게 된다는 수기를 하신다는 그런 이야기인데 현재도 마찬가지요. 미래 불자들도 역시 똑같이 해당 된다고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또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고 서사 위인해설 이렇게 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장엄으로서 자신을 장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훌륭한 장엄거리를 가지고 몸을 치장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모습으로서 내 자신을 꾸밀 수는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법화경의 말씀대로라면은 부처님의 장엄으로서 우리들의 장엄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값비싼 금 은 보석을 몸에 두루고, 무슨 뭐 수술을 수 십번 해가면서 얼굴을 뜯어 고치고, 또 온갖 그런 귀금속을 달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야, 부처님의 장엄하고는 비교가 안되지요. 정말 부처님의 장엄으로서 장엄할 수 있는 인격적으로, 부처님처럼 된다고 하는 거지요. 부처님 같은 인격이 됐다면 거기에 무슨 어떤 외적 장엄이, 시각적인 장엄이 필요하겠습니까?
저절로 거기서 품격이 우러 나오는 것이고, 말씀과 행동과 하는 일들이 전부 보기만해도, 사람들을 감동 줄 수 있는 그런 일이지요. 그것이 부처님으로서 장엄한 것이다 이런 표현입니다. 여래께서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다. 부처님이 양 어깨에다 그 사람을 짊어지고 다닌다 이 말입니다. 모시고 다닌다 이 뜻이지요. 또 여래의 사자다. 심부름 꾼이다. 이 말입니다. 부처의 심부름꾼이다 이렇게 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을 수지. 독송. 서사. 해설하는 사람은 여래의 일을 하게한 사람이라고, 부처님의 심부름꾼을 부처님이 해야 할 일을 이 사람이 하고 있다. 이렇게 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법화경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법사품을 보면은, 상당히 이런 입장에 있어서는 상당히 어떤 자랑스럽기도 하고, 자긍심도 생길 수 있는 그런 내용이 법사품이기도 합니다.
또 법사로서는 자세가 필요한데 뒤에 경문에도 나오겠지만, 먼저 조금만 소개해 드리면 대자대비의 집속에서 ‘자실인의’ 라 그런 불교 글을 쓸 때, 법화경에 있는 말을 잘 써요. ‘자실인의’ 자비의 집과 인욕의 옷을 입고 그랬습니다. 인욕의 옷을 입고 자비의 집에 앉아서 그런 입장에서, 또 그 다음에 만법이 개공한 것을 법을 설하는 자리로 삼아서, 거기에 앉아서 법화경을 설하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자비와 인욕과 모든 존재를 제법을 개공으로 볼 줄 아는 것, 제법공상으로 볼 줄 아는 그것이 일단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만 그것이 불교에 발심한 사람이고, 그 발심이 기본이 된 상태에서 법화경을 설해야, 그것이 이제 먹혀 든다고 합니다. 뭐 어떤 물욕적인 그런데 푹 빠져서 참 빠져있으면서, 입으로는 법화경을 이야기한다 참 잘 안 맞지요. 그러나 어쩝니까? 우리의 수행의 수준이 그쯤이라면 또 그렇게라도 또 해야겠지요.
법화경에서는 “자비의 집속에서 인욕의 옷을 입고, 만법이 다 공한 그런 법좌에 올라서 법화경을 설하라.”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 바람직한 모습이겠지요.
그 다음에 또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경을 찬탄하는데 법화경을 일체보살의 무상정등각이 이 경 속에 속해있기 때문에 ‘비요지장’이다. 아주 비밀하고 요긴한 그런 창고다. 그래서 함부로 설해주지 말라라고, 이런 분부도 또 법사품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법화경을 모시는 방법으로서는 법화경을 수지독송하고 해설하거나, 경이 있는 곳에는 칠보 탑을 세우고 그 안에 경을 모시고, 부처님 같이 공경하라 그랬어요. 그런 표현도 있습니다.
또 어떤 데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법화경이 있는 곳에는 더 이상 칠보 탑을 세울 필요가 없다. 법화경 그것은 곧 부처님의 진신(眞身)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이 부처님이 진신이다 그랬어요. 또 법화경이 부처님의 참 모습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법화경을 아주 극찬을 한 그런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이런 것을 또 나중에 간단한 비유로서 법화 칠유에 들지않지만, 또 한가지 법화경을 수지 독송 서사 하는 사람은 정각에 가장 가깝다, 마치 우물물을 팔 때 처음에는 마른 흙이지요.
그리고 차츰차츰 파면은 축축한 흙이 이제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축축한 흙을 더 파 들어가면 물기가 많이 섞여있는 흙을 만나면, 물이 솟는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와 같이, 우리가 이제 법화경을 수지독송하고 서사 해설하고. 지니고. 다니고 늘 가까이 함으로써, 머지않아 깨달음이 다가온다. 이런 내용으로 일관되어 왔습니다.
법사품 제목을 보면은 전체를 일관해서 이제 알 수가 있는데, 법사품의 제목을 보면 수행인이 경전을 듣는 공덕, 또 범인(凡人)이 경전을 수지하는 공덕. 죄를 얻은 사람과 복을 얻은 사람. 그리고 경전을 찬탄하구요. 경전을 설하는 규칙 이런 것도 있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어제 법화경의 그 수기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 드리면서 앞 부분을 소개를 해 드렸는데, 오늘 다시 한번 또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수행인(修行人)이 경전을 듣는 공덕
1 이 때 세존께서 약왕(藥王) 보살을 비롯하여 팔만 대사(大士)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큰 大자와 선비士자, 보살을 대사라고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또 경전에서 아예 그렇게 번역해 놓기도 하고, 또 그대로 보살이라고 두기도 하고 그래요.
“약왕이여, 그대가 이 대중 가운데 있는 한량없는 천신. 용왕.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사람. 사람아닌 이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을 보라. 성문(聖聞)을 구하는 이, 벽지불을 구하는이, 불도(佛道)를 구하는 이들로서 이와 같은 이들이 모두 부처님 앞에서 묘법연화경의 한 게송. 한 구절을 들었거나, 내지 한 생각 동안이라도 따라서 기뻐한 이들에게 내가 모두 수기(授記)하노라. 그들은 마땅히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리라.”
요즘 같으면 법화경하고 인연 안 맺는 사람들이 사실 어디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다 이름을 다 한번씩 이라도 들었을 거에요. 묘법연화경 한 구절을 들었거나, 이렇게 인연을 그렇게 가볍게 맺는 이들도, 다 최상의 깨달음을 이룬다 라고 했습니다. 성불한다는 것인데 그것도 사실은 본래로 우리는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사상이 깔려있습니다.
또 이런 구절을 말만 좇아가다 보니까, 어떤 종파에서는 그저 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그 구절만 열심히 외우고, 염불하듯이 외우고 있어요. 그것은 일종의 염불이지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은, 법화경의 참다운 뜻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법화경 이름만 외워도 공덕이 된다고 유혹을 하는데, 내라도 이렇게 유혹을 하는데 부처님 같이 지혜가 뛰어나신 분이 왜 유혹을 안 하겠습니까? 그런 유혹에 걸려드는 근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안 되는 거지요.
그러다 보면은 법화경 한 구절을 읽게 되고, 한 페이지를 읽게 되고, 한 권을 읽게 되고, 그래서 정말 부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자 했는가? 부처님의 참 마음이 가까워질수록 가 있는 거지요. 그런 것은 다 방편이고 인연을 맺게 하는 그런 일입니다.
물론 무엇을 외우던지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하는 것을, ‘즉심이 부처다’ 이렇게 알아 가지고 일심으로 그렇게 정진해도 성불할 수 있었듯이, 무슨 법화경 구절 하나를 외우거나 불 보살의 명호 한 가지를 외우거나 간에, 일심으로 일념 되게 정진을 해서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것, 물론 그런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 하고는 다른 거지요.
그런 것들을 또 우리가 혼돈해서 생각 해서는 안됩니다. 대승 학인(大乘學人) 아닙니까? 여러분 모두가 법화행자(法華行子)고, 법화행자는 그야말로 대승학인 입니다. 대승학인 들은 대중들로부터 뛰어나야 됩니다. 출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거라든지 이런 것들이 시원시원하고 좀스럽지 않아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약왕보살에에 말씀하셨습니다. “또 여래가 열반에 든 뒤에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묘법연화경의 한 게송. 한 구절이라도 듣고 한 생각 동안 따라서 기뻐하는 이에게도 내가 또한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수기를 주노라.
이렇게 했습니다. 저 앞에서 방편품에서 내가 자주 언급했던 산란한 마음으로, 망상으로 부글부글 끓는 우리 중생들의 산란한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손 한번 들거나. 합장 한 번 하거나. 염불 한마디 한 것 만으로도 ‘개이성불도’다. 이미 성불해서 마쳤느니라. 아 이렇게 까지 이야기 했는데요. 거기다 비하면 이것은 상당히 노력을 기울인 것 아니겠습니까?
참 법화경 그래서 그 끝 모를 넓은 자비의 정신과, 또 본래로 이미 우리는 갖추어져 있는 어떤 이치를 그대로 수용하고, 깨닫고 그것을 내 살림살이로 하는 것, 그것이지 달리 만들거나. 조작하거나. 꾸미거나. 이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뭐 탑 쌓듯이 한층 한층 올라가고 조작을 하고. 조각을 하고. 치장하고. 꾸미고 이렇게 해서 되는 일이라면, 참 힘들 것이 아니예요. 화장 아무리 잘해도 저녁이면 씻어버리잖아요. 그와 같이 조작이 있는 것은 다 그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순간적이지요. 부처가 그렇게 순간적이라는 것이라면 부처 될 사람 누가 있겠어요. 그런 부처라면 내라도 크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참으로 변함없는 것! 영원한 것! 무한한 가능성! 이런 것이라야 부처가 되고싶지, 그렇게 다듬고. 조각하고. 쌓아올리고. 그랬다 또 무너져 버리고. 또 새로 고치고 그래 놓으면 이 사람이 보면 마음에 드는데, 또 저 사람이 보면 마음에 안 들고 그렇게 되거든요. 또 그러니까 그런 점들을 좀 깊이 있게,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범인(凡人)이 경전을 수지(受持)한 공덕
그랬습니다. ‘수지受持’ 받아 지니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종이와 먹으로 된 이 경전을 수지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이 경전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수지라고 이해해야 됩니다. 차원 높게 마음속에서 경전의 이치를 그것이 이치다,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에 수지라고 하는 것은 경전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뜻합니다.
가지고 다녀야 보게 되고, 보게 되면 읽게 되고. 읽게 되면 외우게 되고. 그렇다 보면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도 해줄 수도 있지요. 그래서 휴대용 경전이 얼마나 많습니까? 천수경 부터 금강경으로 온갖 것이 법화경도 휴대용이 많습니다. 많이 나와 있어요.
3 만약 어떤 사람이 묘법연화경을 받아 지니고,
이것이 ‘수지’입니다. 오종 법사 소개입니다. 읽고 ‘독讀’ 두 번째. 외우고 ’송送’ 세 번째 ‘해설’하고 네 번째. 쓰되 다섯번째 ‘사경’이지요. 쓰되라는 말 속에는 출판하고. 쓰고. 염화실에도 경전 한 구절 쓰기 여기에도 다, 오종 법사에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쓰되 내지 한 구절이라도’ 그렇게 하며 길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묘법연화경이라고 경 이름만 써도 좋고 또 시간이 있으면 길게 써도 좋구요.
또 이 경전을 공경 하기를 부처님과 같이하여, 갖가지 꽃. 향. 영락. 가루 향. 바르는 향. 사르는 향. 일산. 당기. 번기. 의복. 풍악으로 공양하거나
여기 돈이라고 하는 말은 없는데 돈도 좋아요. 이 당시는 그렇게 화폐가 일반화 되지 않아서 아마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여기에 향이라든지 가루향. 바르는 향. 사루는 향 그 쪽 인도 지방에 향이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향 그것은 아주 그 어떤 돈보다 가치 있는 거지요.
이런 것 값 있는 것으로 공양 하거나,
내지 합장하고 공경하면 약왕이여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들은 이미 십만 억 부처님께 공양한 것이니라. 이 경전을 공경 하기를 부처님과 같이하여 경전에 꽃. 향. 영락. 가루향. 바르는 향 이런 것들을 공양한다. 그러면은 법화경에 이렇게 공양 하는 것이 십만 억 부처님께 공양한 것입니다.
우리가 불공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걸핏하면 불공 하지요. 어제가 지장재일 이었는데 지장재일이라고 불공하고. 초하루라고 불공하고. 그 다음에 관음재일이라고 불공하고. 보름이라고 또 불공하고. 초삼일이라고 불공하고 다 그렇게 불공에 참석하는데, 여기는 이런 불공을 소개하고 있네요. 법화경에 이렇게 공양하는 것이 “십만 억 부처님께 공양한 것이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법화경과 인연을 맺어서 법화경을 공부하는 여러 법우님 들은, 사실은 ‘여러 부처님계신 데서 큰 서원을 성취하고 사람들을 어여삐 여기어서, 이 인간에 태어난 줄을 알아야 된다.’ 그런 나도 모르는 과거의 원력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이런 시간을 갖고 법화경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법화경 잘 위해야 되요. 그래서 경중의 왕이라고 합니다.
약왕이여, 만약 어떤 사람이 묻기를 , ‘어떠한 중생이 오는 세상에 부처님이 되겠느냐?’ 고 하면, ‘이러한 사람들이 오는 세상에 반드시 성불하리라.’ 고 대답하라. 왜냐하면 ,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묘법연화경에서 내지 한 구절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고 쓰며 갖가지로 이 경에 공양하되, 꽃. 향. 영락. 바르는 향. 사르는 향. 일산. 당기. 번기. 의복. 풍악으로 하거나 합장하고 공경하면, 이러한 사람은 일체 세간 사람들이 응당히 여래에게 공양하듯이 공양해야 하느니라.
이러한 사람이라면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고. 외우고. 해설하고. 쓰는 사람. 법화경을 일차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성불하지, 그 외 사람이 성불한다는 사람 못 들었다. 좀 강하게 표현하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묘법연화경에서 내지 한 구절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고. 쓰며 갖가지로 이 경에 공양하되. 공양하는 그 사람에게는 이러한 사람에게 응당히 이렇게 해야 한다. 여래에게 공양 하듯이 해야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법화경 공부 잘하시고 있는데, 가족이 누가 그렇게 좀 천시를 하시거나 함부로 하거든, 법화경을 내가 공부하는데 법화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나를 부처님께 공양 하듯이 공양해야 된다고 우스개 소리 비슷하게, 사실은 경전에 있는 말씀이니까 뭐 이러한 방편을 빌어서 법화경과 인연을 맺게 한다면, 그것도 좋은 기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대보살로서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였느니라. 중생들을 가엾게 여기어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원하여 묘법연화경을 널리 펴서 연설하고 분별하는 것이니라. 그런데 하물며 경전을 전부 받아 지니며 갖가지로 공양하는 사람이겠는가.
한 구절만 해도 벌써 부처님께 공양 하듯이 해야 하는데, 경전 전체를 우리가 공부한다고 하면 더 말 할 나위가 없지요. 그런데 요는 우리가 정말 부처님의 마음, 법화경의 마음 이것을 잘 읽고 거기에 우리가 마음이 개합이 되어야 합니다. 딱 맞아 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법한 법당에는 가보면은 좌우에 부처님을 정면에 모시고, 좌우에 경전을 반드시 모셨어요. 한쪽에는 화엄경을 모시고, 또 한쪽에는 법화경을 모시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경우를 보는데, 그렇게 법화경과 화엄경을 그렇게 모셔 놓았으면, 제대로 갖추어서 모셨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조성해서 복장이라고 그러지요, 부처님 조성한 속은 비었으니까요. 나무로 하든. 철로 하든. 돌로 하든 속은 대개 비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비면은 그 속에 정말 부처님 다웁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부처님이지 가르침이 빠져버린 부처님은, 그것은 허수아비다 이렇게 보신 것입니다.
맞는 생각인데 가르침은 무엇을 대신할 것인가? 경전을 대신 합니다. 반드시 부처님을 조성하고 복장에는 텅 비었거든요. 거기에는 경전을! 가장 법화경을 제일 많이 모시게 됩니다. 왜냐하면 법화경은 7권이니까 어지간한 불상 복장에는 들어가게 돼 있어요.
화엄경은 복잡해서 금강경이라든지 이런 대승경전을 많이 모시는데, 그렇게 해서 부처님 복장에 경전이 들어 있어야, 지금은 말하자면 가르침이 있는 부처님이다. 진짜 부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칙입니다. 가르침이 있는 부처님이니까 살아있는 부처님이다 이 뜻이지요. 탑에도 사리가 없으면은 탑에 경을 넣어라고 그렇게 되어 있고, 어떤 탑에는 지금도 경전이 대개 사리 대신에 모셔져 있습니다. 사실 진짜 사리는 경전이지요. 부처님 가르침이 진짜 사리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실지로 참 부처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유골이야 무슨 부처님 역할을 합니까? 사실 이 시대에 부처님 역할을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경전을 법화경에서 이렇게까지, 높이 받들어서 표현하는 것이 절대 무리가 아닙니다.
경전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심지어 뭐라고, ‘십만 억 부처님께 공양한 것과 똑같다.’ 경전에 공양하는 것이 십만 억 부처님께 공양한 것과 똑 같다.’ 라고 했으니, 이것도 내용을 잘 알고 보면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약왕이여,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스스로 청정(淸淨)한 업보(嶪報)를 버리고 내가 열반한 뒤에 중생들을 가엾게 여겨서 나쁜 세상에 태어나서 이 경전을 연설하는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실은 청정한 업을 가지고 아주 좋은 세상에 태어나 가지고 험한 중생들, 사바세계 말 안 듣고. 업이 두껍고. 고집이 세고. 악업만 잔뜩 있는 그런 중생들 안 보고, 저 아주 깨끗한 세계에 가서 살아야 할 것이로되, “내가 열반한 뒤에 중생들을 가엾게 여겨서 나쁜 세상에 태어나서 이 경전을 연설하는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렇게 이해 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우리하고 살 사람이 아닌데 원력 수생이다. 원력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간혹 보면 그런 분들이 있어요. 제가 원력 수생을 간혹 표현하는 이들을 두분 보는데 한 분은, 저의 사형 통광스님 이고, 한 분은 화엄경을 금자로 사경을 하려고 원을 세운 그런 거사님인데 보았어요.
통광 스님은 6.25때 칠불이 다 타버린 것을, 움막을 쳐놓고 천일기도를 했습니다. 고향이 그 밑인데 아마도 전생에 칠불에서 살았던 그런 인연으로, 아마 칠불에 빚이 많았던지 인연이 깊었던지 칠불을 복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우리가 이렇게 흔히 합니다. 복구를 아주 잘 했어요.
그 스님은 기도할 때는 저녁을 먹고 올라가서, 저녁 예불하고 기도에 들어가면은 언제 시간이 갔는지, 날이 환하게 이렇게 밝아오더랍니다. 그것이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전혀 의식을 못하고, 날이 훤하게 세는 그런 경험을 수없이 했다는 거예요.
기도를 하면은 그쯤 해야 되고, 참선을 해도 그쯤 해야 뭐가 이루어지는 거지요. 그래서 그 천일기도를 거기서 세 번을 했는가요. 그렇게 하면서 그런 식 기도를 오래 하면서, 칠불 복구를 아주 완전 정말 완전무결하게, 그렇게 다 하신 그 분이 원력수생 같고,
근래 화엄경의 금자 사경의 원력을 세운 거사님이 계시는데, 그분은 그분이 직접 쓰는 것은 아니고, 자기 글씨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전국에 아주 명필을 찾고 찾아가지고서 옛날 신라 때나, 고려 때 금자로서 사경하는 것을 그 전통을 되살려야 되겠다고, 이런 원력을 세워 가지고 운문사 삼계리 라고 하는 마을에, 여의주 사경원이라고 하는 사경원을 차려놓고, 아주 명필의 고급 인력을 들여서 그렇게 시봉을 해가면서, 그리고 또 종이도 아무 종이나 하는 것이 아니고 감지에다가 그것을 맞추고, 책을 꾸미고 그 주변 일을 정성 들여서 하는 것을 보면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습니다.
화엄경 전체 다하고. 법화경 하고. 금강경 하고. 지장경 하고 해서 무려 91권의 책입니다. 지금까지 그것도 한문으로 아주 고급스럽게 그렇게 해서, 무려 십억 여원에 가까운 그런 경비를 들여가지고 화엄경과 법화경과 금자 사경을 그렇게 했는데, 그 분도 원력 수생이다 라고 생각 해요. 과거생의 원력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이렇게 이 시대에 했다. 그런 것을 아주 저 나름대로 아주 깊이 느꼈습니다.
이 시대에 보물을 하나 남겼어요. 정말 뭐 절 짓는 것도 물론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여기저기 요즘 기계 좋고 외국에서 들어와서 나무 좋고 장비 좋고 해서, 뚝딱하면 절 한 채! 뚝딱하면 법당하나!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십억 여원의 경비를 들여 가지고 금자 사경을 91권의 책을 했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 예요.
그것을 다 사제를 그렇게 털어서 하고 결국에는 빛까지도 아주 많이 지고 있는 그런 실정인데, 이것을 신문에도 몇 번 나고 했습니다마는, 누가 어떻게라도 해결을 잘해 줬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틀림없이 과거생에 원력을 품고 태어나신 분이다 라고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가 살펴보다 보니까 그런 이야기로 연결이 됐는데, 이분은 법화경에서 이렇게 이제 열심인 사람은, 정말 훌륭한 업보로서 좋은 세상에 태어나야 되는데, “내가 열반한 뒤에 중생들을 위해서 나쁜 세상에 태어나서 경전을 연설한 줄 알아야 하느니라.”
나는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앞서 소개한 칠불을 아자방 까지 완전 복원한 통광 스님과, 여의주 사경원의 그 거사님과 이 두 분은, 내가 만난 사람으로서 틀림없이 원력수생이다. 그렇게 믿음이 가집니다. 여의주 사경원은 홈페이지가 있습니다. 여의주 사경원을 찾아서 한번 가서 그 사경한 것을 친견할 수 있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도 함께 가져봅니다.
만일 이 선남자. 선여인이 내가 열반한 뒤에 은밀히 한 사람만을 위하여 이 묘법연화경을 설하되 내지 한 구절만이라도 말해준다면, 마땅히 알아라. 이 삶은 여래의 심부름꾼(如來使)이며, 여래가 보낸 사람이며, 여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인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런데 하물며 대중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널리 연설하는 사람이겠는가.
아 이런 구절을 읽을 때는 어깨가 좀 으쓱해 지네요. 은밀하게 한 사람만을 위해서 묘법연화경 한 구절만을 설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대단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여래의 심부름꾼, 누가 부처님의 심부름을 맡아서 할 수 있겠습니까? 참 영광이지요.
어릴 때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뭐 아주 간단한 심부름 하나 시키면 아주 기분이 좋지요. 몇 날 며칠을 자랑거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님의 심부름을 받아서 우리가 그 심부름꾼 역할을 한다, 세세 생생 영광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이렇게 이제 법화경을 수지하는 공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또 법사품 이것은 오종법사 인데요. 책을 가지고 다니기만 해도 여러분들은 법사입니다. 안 읽어도 괜찮아요. 읽기만 해도 법사고, 한 구절만이라도 법사고. 해설해도 법사고. 그것을 한 구절 써도 법사고. 사경을 쓰던. 출판을 하던. 출판을 하는데 시주를 하던 이렇게 해서 법화경을 널리 퍼지게 합니다.
요즘 뭐 우리 홈 페이지에 이 까페에 사경을 해서 올리고, 녹음을 또 올리고. 그것을 제가 사이사이에 개인적인 소견을 첨가하면은, 그것을 또 낱낱이 녹취해서 그것을 기록을 해서 딴 사람들이 한번 더 볼 수 있도록, 그것을 올려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분들이, 참 여러분들이 많으세요. 모두가 법사이십니다. 또 부처님의 심부름꾼들이십니다. 부처님의 사자시고 부처님이 보내신 분이다 라고, 이렇게 우리가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법화경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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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성
5종법사-수지,독,송,해설,사경: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서 위인해설 하는 사람은 부처님을 장엄해서 자신을 장엄하는것이다.법사는여래의 사자며 여래께서 양 어깨에 모시고 다닌다.제법공상을 기본으로 삼아야 발심한 사람이고 그 발심이 된 상태에서 법화경을 설해야한다.공부하는데 마음이 계합해야 한다.법화행자-대승학인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인의! 자실! 법공좌! 정말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스님 건강하시죠? 또 뵙겠습니다.
5종법사-수지,독,송,해설,사경: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서 위인해설 하는 사람은 부처님을 장엄해서 자신을 장엄하는것이다.법사는여래의 사자며 여래께서 양 어깨에 모시고 다닌다.제법공상을 기본으로 삼아야 발심한 사람이고 그 발심이 된 상태에서 법화경을 설해야한다.공부하는데 마음이 계합해야 한다.법화행자-대승학인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_()()()_
큰스님 법문 감사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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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골님! 여기서도, 또 미디어에 띄어서도, 좌우로 왔다갔다 할수있는 바가 움직이지 않는것을 어떻게하면 되나요?
미륵골님! 편찮으세요? 올린 시간을 살피니 부쩍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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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법문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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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다음 세상에 이 경을 받아 지니는 사람은 내가 그를 인간에 보내어 여래의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니라. _()()()_
‘어떠한 중생이 오는 세상에 부처님이 되느냐 하면, 선남자 선여인이 묘법연화경 한 구절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해설하고 쓰며 갖가지로 이 경에 공양하는 이러한 사람은 오는세상에 응당히 성불하리니 여래에게 공양하듯이 공양해야 하느니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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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_
감사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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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장엄으로서 우리들의 장엄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감사합니다._()()()_
내가 열반한 뒤에 은밀히 한 사람만을 위하여 이 묘법연화경을 설하되 내지 한 구절만이라도 말해준다면, 마땅히 알아라. 이 삶은 여래의 심부름꾼(如來使)이며, 여래가 보낸 사람이며, 여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인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나무묘법연화경
고맙습니다.
인욕의 옷을 입고 자비의 집에 앉아서 그런 입장에서, 또 그 다음에 만법이 개공한 것을 법을 설하는 자리로 삼아서, 거기에 앉아서 법화경을 설하라...나무묘법연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