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에서 지리산으로 흘러내린 큰 산줄기, 백두대간이 이 땅을 일으켜 세우는 근골이라면 대간에서 이 땅 구석구석으로 굽이치는 13개의 산줄기들은 이 땅을 살지우고 살아움직이게 하는 팔다리요, 오장육부와도 같다.
남녘 백두대간에 이어 13개의 커다란 산줄기, 13정맥 속에 깃든 사찰을 찾아가려니 그 새로움이 남달라 앞엣말이 길어졌다. 13정맥 중 북녘 산하에 있는 청북, 청남, 해서, 임진북예성남은 휴전선에 가로막혀 있으니 지도 위에서 걷거나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13정맥에 깃든 산사, 그 속에 깃든 설화를 찾는 길은 남녘 한북, 한남, 한남금북, 금북, 금남, 금남호남, 호남, 낙동, 낙남의 아홉 정맥으로 향한다.
이번 길은 한강 북쪽의 커다란 산줄기 한북정맥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가볼 수 있는 가장 북쪽의 산줄기인데다 그나마 그 시작과 일부분이 휴전선 너머에 있으니 그 아쉬움이 이래저래 먼저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철원 심원사(深源寺). 생지장도량으로 이름나 있는 터에 언젠가 한번 지장보살님께 넙죽 절만 드리고 온 잘못도 빌고자 한 것이다.
심원사는 과거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말사로 「심원사지(深源寺誌)」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원년(657) 영원(靈源) 조사에 의해 영주산(靈珠山)에 지어진 네 사찰 중의 하나로 흥림사(興林寺)가 그 옛 이름이다. 신라 헌안왕 3년(859)에는 범일(梵日) 국사가 중창하고 천불을 조성하였다. 조선 태조 2년(1393)에 화재로 모든 전각이 전소되자 3년후 무학대사가 건물을 삼창(三創)하고 영주산을 보개산(寶蓋山)으로, 흥림사를 심원사로 이름하였다.
이후 임진난의 병화 속에서도 중건을 이룬 심원사는 소요 태능, 제월 경헌, 취운 학린, 풍담 의심 등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조선 중기의 선승들과 수많은 학승들이 주석 정진하는 도량으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250여 칸의 건물과 1,602위의 불상이 그 위엄을 드러내는 대찰이었다.
허나 1907년 정미사변과 6,25 전쟁의 와중에 잿더미로 변하길 몇 차례, 이제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사지에 옛 스님네의 부도와 탑비만이 활짝 꽃피웠을 보개산 도량의 향기로운 법향을 간직한 채 묵묵히 서있을 뿐이다.
어느새 발걸음은 보개산으로 들고 있다. 월드컵이 한창인 이 나라에 연천은 탱크와 군 트럭, 그리고 철모 밑으로 눈망울을 반짝이는 젊은 ‘군인 아저씨들’이 더 자연스럽다.
한북정맥의 지류쯤으로 어림하고 들어섰던 보개산은 임진강과 한탄강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산줄기를 좇아보니 보개산은 백두대간 줄기의 분수령 한쪽에 가닿는다. 그 옆 한북정맥의 시작이 뚜렷하니 보개산은 열세 개의 정맥처럼 백두대간에서 곧바로 가지쳐 내려온 산줄기로 보아야 옳겠다.
그런 보개산이니 그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정맥 하나를 그 빼어난 산세를 그대로 둔채 그 크기만을 3/1쯤으로 축소시켜 놓았다고 해야 할까. 내와 계곡을 따라 들어가는 심원사의 골 깊음과 시선을 빼앗는 풍광이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군부대를 지나 심원사 부도밭에 들어서니 3단으로 다져진 터에 취운당대사비, 제월당대사비, 풍담당, 청하당 등의 부도가 가지런히 모셔져 있다. 좀더 오르면 심원사의 널따란 옛터가 나오는데 잡풀이 무성한데도 흩어진 와편 등이 적지 않다. 여기서 옛날 형제 같은 스님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보개산 속 암자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올랐으리라.
뒤미처 우리도 지장보살님이 석상으로 그 몸을 나투신 석대암(石臺庵)으로 올랐다. 석대암은 신라 성덕왕 19년(720) 사냥꾼 이순석, 순득 형제가 출가하여 세운 암자로 다양한 설화와 더불어 그 창건설화가 구체적으로 전하는 사례로 흥미로움을 더한다. 여기서 충렬왕 33년(1307) 민지(閔漬)가 쓴 「보개산석대기(寶蓋山石臺記)」를 짤막하게 읽어보자.
“옛날 사냥꾼 이순석(李順碩) 등 두 사람이 한 마리의 금빛 멧돼지를 보고 활을 쏘았다. 붉은 피를 흘리고 달아난 흔적이 있어 쫓아가니 환희봉(歡喜峰) 쪽으로 간 것이다. 두 사람이 그 뒤를 추적하여 멈추어 바라보니 금빛 멧돼지는 볼 수 없고 단지 석상만이 보였다.
석상은 샘물 가운데에 머리만 나와 있고 그 몸은 샘물 속에 감추었는데 좌측 어깨에 순석이 쏜 화살이 꽂혀 있었다. 두 사람은 크게 놀라 화살을 석상의 몸에서 뽑으려고 하였으나 석상은 태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연실색하여 맹세하기를, ‘대성이시여,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십시오. 우리들을 이 세상의 죄에서 구제해주시려고 신변(神變)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만약 내일 이 샘물 곁에 있는 돌 위에 나타나 주시면 출가수도하겠나이다.’하고 물러 났다. 다음날 다시 그곳으로 와서 보니 석상이 돌 위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곧 출가수도하니 이 때가 당 개원 8년(720)이었다.
그들은 300여 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이 암자를 창건한 후 숲 속에서 수도하면서 돌을 모아 대를 쌓고 그 위에 항상 앉아 정진하였으므로 석대라 이름하였다. 그 후 두 사람은 득도후 열반 승천했다 한다.”
석대암 오르는 길은 인적이 드문 탓에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자라 있다. 두어 시간 올랐을까, 석대암터가 나타난다. 그 위에 올라서니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남쪽으로 트인 하늘이 환하다. 나무그늘만 지나왔기에 이런 높은 곳에 이렇게 양지바른 곳이 있을까 싶더니 그곳이 바로 석대암터인 것이다.
전설 속의 옛 석상이 계셨을 샘일까. 한쪽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들이켜니 정신이 번쩍 든다. 순간 심원사 명주전에 앉아계신 지장보살님이 입술이 올라갈 만큼 정겨운 미소를 건네신다.
마침 취재를 마치고 온 다음날 심원사지 복원 계획이 발표되었다. 그 기쁨을 어찌 감출 수 있을까. 어서 빨리 보개산 도량이 활짝 꽃피어나도록 지장보살님께 넙죽 절이라도 드려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