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과 귀신의 존재는 천사만큼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다. 물론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사탄과 귀신은 한낱 나약한 인간의 심리적 현상이나 질병에 대한 옛날 방식의 표현이거나 또는 사회의 구조적 힘을 의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인격적 존재로서 사탄과 귀신의 실체를 망설임 없이 증언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사탄과 귀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표상하고 드러내는 현상적 실체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덧붙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경은 악한 존재 혹은 세력을 일컬어 사탄(Satan) 혹은 마귀(Devil)라고 부른다. 이 존재는 영적 실재로서 인격적인 측면도 있지만, 때로는 악한 세력이나 구조적 악으로도 나타난다. 성경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다고 경고한다(요일 4:1).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영들은 사탄 혹은 사탄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 영들은 타락한 천사(벧후 2:4; 유 6)로 추정될 수 있겠는데, 자신의 지위를 지키지 않고 타락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이 타락한 존재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대항하고 인간들을 미혹한다.
구약에서 사탄의 존재가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창세기의 타락사건이다. 물론 사탄의 실제 존재가 표면에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아담과 하와를 속이고 유혹하는 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뱀이 곧 사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탄이 뱀이라는 동물로 표상되었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 오늘날 뱀처럼 억울한 대접을 받고 있는 동물은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뱀인가? 뱀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다산(多産)과 재물(財物)의 상징이었고, 이교의 신(神)을 표상하는 주술적 상징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론된다. 그래서 그런 뱀의 일반적 이미지가 사탄을 표상하는 동물로 적합하게 채택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성경에서 사탄의 기원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계기로 사탄이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하나님이 사탄을 본래 그런 모습으로 창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가 타락해서 사탄이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타락의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창조 이후 인간의 범죄 이전에 타락했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어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사탄의 이름을 “레비아탄”(욥 41:1; 시 104:26), 혹은 “루시퍼”(사 14:12)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에스겔 28장 15-17절과 이사야 14장 12-14절 등은 사탄과 관련해서 자주 인용되는 본문들이다. 하지만 이 본문들 사탄을 지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이 본문들은 실제 존재했던 두로(Tyre) 왕과 바벨론(Babylon) 왕의 교만함과 처참한 운명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루시퍼라는 이름은 이사야 14장 12절에서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라는 구절에서 “계명성”을 라틴어 성경과 킹제임스 성경에서 “루시퍼”(Lucifer)로 번역함으로써 지금까지 사탄의 이름으로 오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 이름의 유래가 어찌 되었든 사탄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의 타락으로부터 기인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체로 지지를 받는다. 사탄의 타락이 먼저 있은 후 그를 따르는 사자들의 타락도 이어졌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275-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