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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선교학에 있어서의 선교 개념
김성태 교수(총신대선교대학원)
선교학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선교 용어의 의미가 제각기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심지어는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선교 용어는 통일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현교 선교학은 신학의 양극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닉의 선교개념이 서로 상이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 양자의 간격을 좁히려는 시도가 계속 되어오고 있으나 결과는 그리 신통치 못하다. 미국에서는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의 선교 개념의 차이로 인하여 미국 선교학회가 종전의 선교학회와 그에서 갈라진 복음주의 선교학회로 나누어졌다. 한국교회는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의 선교 개념의 미묘한 차이를 아직 구분하지 못해 선교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다소 혼란이 있다. 저자는 선교 용어의 성경적 근거를 살펴보고, 선교 개념이 교회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또한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닉 진영의 선교 개념이 왜 서로 상이점을 보이기 시작했는지를 규명하며,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의 선교 개념이 어떤 신학적 입장의 차이로 인하여 갈라졌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는 어떤 선교 개념을 받아들여야 할지, 선교현장의 사례와 더불어 고찰하여 필자의 선교 개념에 대한 입장을 제시할 것이다.
1. 선교 용어의 성경적 근거
선교라는 용어는 그 기원이 성경에서 시작되었다. 대다수의 선교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요한복음 20:21의 ‘보낸다’의 어원인 ‘아포스텔로’와 마태복음 28:19에 나오는 ‘가서’의 어원인 ‘펨포’의 뜻이 상호 결합되어서 선교라는 용어의 의미를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보낸다’의 어원인 ‘아포스텔로’는 로마교회가 수도원 선교기구를 통해서 타문화권의 불신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도사들을 파송할 때 쓴 것으로, 이 용어를 ‘Missio’라는 라틴어로 번역,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31) 여기에는 로마교회를 유일한 사도적 교회로 보는 신학적 입장이 반영이 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동사형인 ‘아포스텔로’에 사도적 교회에서 파송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결부시켜 사용한 것이다. 후대의 개신교회는 사도적 교회를 로마교회로 보지 않고 사도적 신앙 고백과 사도들에게 기반을 둔 성경 66권의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사도적 교회의 기반으로 보는 것이다.32) 이런 의미에서 사도적 교회의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의 ‘Missio’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했고 여기에다가 선교의 역동성과 선교의 목표를 강조하기 위해 주님이 주신 선교명령에서의 ‘가라’라는 ‘펨포’의 의미를 결부시켜 선교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라틴어 용어인 ‘Missio’는 여러 파생어를 가지고 있는데 ‘Mitto, Mittere, Missio, Missions’ 등으로 사용되었고 이것은 결국 영어의 ‘Mission’, 즉 선교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17세기의 영국 청교도 지도자인 리차드 백스터와 영국에서 화란으로 파송된 청교도 선교사라 할 수 있는 윌리암 에임스는 마태복음 28장에 나타난 대위임령의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의 교회사역을 논한다. 대위임령에서 ‘가라’라는 말씀은 타문화권에서 이방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교회를 설립하는 비고정된 사역이요 ‘지키게 하라’라는 말씀은 지역 교회가 세워져서 목회자가 지역 교회를 목양하는 고정된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비고정된 사역이 없으면 고정된 사역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교회의 비고정된 사역 즉 선교사역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 되는 것이다.33) 선교역사를 통해서 이러한 에임스와 백스터의 대위임령을 통한 비고정된 사역 즉 선교사역의 신학적인 성찰은 17세기와 18세기 초의 영국 식민지령이었던 미국 동부의 13개 주를 대상으로 한 조직적인 선교 운동을 영국과 미국의 개혁교회 안에서 일으켰는데 대표적인 인물로서 인디언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엘리오트와 조나단 에드워드 등이 있다.
이렇듯이 개신교회에 있어서 선교용어는 ‘보냄을 받은 자’와 ‘가라’라는 의미가 결합되어 사용이 되었고, 이에 따른 선교의 개념이 정립되었다. 대체적으로 선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정의되었는데 하나는 광의적이고 포괄적인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실제적이고 협의적인 것이다. 광의적인 입장에서의 선교는 선교의 주체로서의 삼위 하나님의 주재권을 강조하면서 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말씀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복음증거의 삶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34) 이러한 선교의 의미는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선교의 사명이 있다는 것이요 그들의 삶의 현장이 선교지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선교의 대상은 윌리암 캐리가 정의했듯이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된다. 실제적이요 협의적인 선교의 의미는 교회의 파송을 받아 타문화권의 불신종족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쳐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 그리고 그 교회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시켜 선교의 책임을 다하는 교회로 세우는 것, 결국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 실제적인 의미의 선교정의가 보편적으로 교회의 선교정의를 논할 때 사용되었다.
여기서 저자가 생각하는 것은 양자의 의미가 서로 균형 있게 선교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즉 선교란 삼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의 백성들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삼위 하나님의 말씀을 입술과 행위로 전함으로써 그의 주재권을 증거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파송을 받고 교차문화의 상황 속에서 불신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 교회를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세움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증거하고 선교의 사명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요 20:21; 마 28:16-20; 행 1:8).
2. 선교와 전도
선교와 전도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지리적인 측면과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측면이다. 먼저 지리적인 측면에서 선교와 전도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보자. 데이비드 부쉬는 서구 교회 역사에 있어서 선교와 전도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서구 교회는 20세기 초엽까지만 하더라도 선교의 의미를 서구 지역에서 비서구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요, 전도는 서구 교회 내의 명목 신자나 이웃 불신자들에 대한 복음 증거의 운동으로 해석하였다.36) 그런데 이러한 구분이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대회에서 미국측 대표로 참석했던 루푸스 존스에 의해서 의문시되었고, 그는 서구의 세속주의를 일종의 인본주의적 종교로 보아서 서구 지역도 선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7) 예루살렘 대회에서 선교와 전도개념의 코페르쿠스적 인식전환은 그 후 계속해서 오대양 육대륙에서의 선교 개념으로 바뀌어 왔고, 이것은 지금까지 보편적인 선교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선교와 전도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측면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주재권과 그분의 구속 의지, 그리고 구원의 대상이 되는 전 세상을 내포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전도는 그 기원이 성경의 ‘유앙겔리온’으로서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즉 ‘유앙겔리온’은 항상 ‘기쁜 소식을 전한다’ 혹은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용어는 ‘유앙겔리조’이다(마 11:5; 행 8:25; 롬 10:15). 데이비드 헤셀그래이브는 전도의 용어가 성경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기에 지금까지 선교의 실재적이고 협의적인 의미와 부합되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38)
존 스토트도 마찬가지로 이런 의미로 전도를 사용하는데 그는 전도의 세 가지 특성을 논하고 있다. 그것은 성경이 전도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첫째는 결과를 논하지 아니했고, 둘째는 방법적인 면을 논하지 않았고, 세 번째는 복음 메시지 측면만 논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 메시지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복음적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승귀이며(행 2:23; 행 5:30; 갈 3:10; 행 2:32-33), 둘째는 복음적 증거로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증언 즉 성경의 증거이며(행 2:25; 3:18; 고전 15:3-4), 셋째는 복음적 약속으로서 죄사함과 성령의 강림과 그의 자녀 됨이다(행 2:38). 네 번째는 복음적 요구로서 회개하라는 것이다(행 3:19; 10:43).39) 이러한 존 스토트의 전도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전도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의 주재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전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별로 강조하지 못했다.
칼 크로밍가는 전도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논하면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전도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이를 입증하려 시도하고 있다(행 6:7; 9:31; 11:24; 16:5; 살전 1:8).40) 맥가브란은 전도에 있어서 교회와 교인들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자화 세 번째 단계를 논했고, 완전케 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41) 전도에 있어 삼위 하나님의 주재권을 강조하며 복음 메시지의 중요성을 우선적으로 논하는 것은 합당하나 전도에 대한 교회들의 언약적 의무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전함으로 그의 백성들을 말씀 안에서 온전하게 세우는 사역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와 그의 언약 백성을 사용하셔서 그의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인 ‘Missiones Dei’가 되지만 동시에 인간을 사용하시는 선교로서 ‘Missio Hominum’이 되며 동시에 그것은 교회의 선교 즉 ‘Missio Ecclesiarum’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학자들은 선교와 전도의 의미를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전도의 의미가 선교에 포함된 것으로 알아서 상호 교차하여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에큐메닉 진영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그들의 선교학의 기반으로 삼아 선교를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보편주의적 차원에서 사용함으로써 실상 전도를 논하지만 전도의 의미가 다르며 성경적인 전도의 의미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 학자 중에 랄프 윈터는 선교 개념을 전도라는 용어로 사용하는데 그는 전도의 네 단계를 논한다. 첫 번째 전도의 단계는 ‘전도 0’(Evangelism 0)라고 부르는데 교회의 내적 성장으로 회심성장이라고도 한다. 그는 이 단계에서는 교회의 영적인 성장, 즉 교회가 영적으로 각성되어 있고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전도 1’(Evangelism 1)인데 이 단계에서는 교회의 구조적인 성장과 지 교회를 세우는 민족 복음화 차원의 선교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는 이런 성장을 가리켜서 팽창 성장과 확장 성장이라고 한다. 세 번째 단계는 ‘전도 2’(Evangelism 2)인데 이 단계는 모국문화권을 뛰어넘은 교차 문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복음증거의 운동으로서 유사문화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선교이다. 즉 이 단계서부터 본격적으로 타문화권에서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 이루어진다. 네 번째 단계는 ‘전도 3’(Evangelism 3)인데 이 단계도 타문화권에서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단계로서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다.42) 종래의 타문화권 측면의 선교 개념을 가지고 선교를 논한다면 ‘전도 2’와 ‘전도 3’이 바로 선교 상황이 되는 것이다.
데이비드 헤셀그래이브는 선교와 전도 용어를 동시에 사용하여 선교개념을 정립하고 있다. 즉 그에 의하면 ‘선교적 전도 1’(Mission-Evangelism 1)과 ‘선교적 전도 2’(Mission-Evangelism 2)와 ‘선교적 전도 3’(Mission-Evangelism 3)이 있다. 그의 선교적 전도 1은 같은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요, 선교적 전도 2는 유사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 선교적 전도 3은 완전히 이질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헤셀그래이브는 여기서 지리적인 구별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말을 한다.43) 그런데 선교적 전도 1의 단계를 선교학자들은 또한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국내선교 1’(Home-Mission 1)과 ‘국내선교 2’(Home-Mission 2)와 ‘국내선교 3’(Home-Mission 3)의 단계로 구분한다. 국내선교 1은 모국에서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요, 국내선교 2는 모국에서 유사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요, 국내선교 3은 모국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다. 또한 외국에 있는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을 구별하여 ‘외지선교 1’(Foreign Mission 1)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디아스포라 선교사를 가리킨다.44)
한국의 경제수준이 나아지면서 1990년대부터 유사문화권 지역의 중국에서 많은 조선족들과 중국인들이 근로자로 입국하였으며 또한 이질적인 문화권의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심지어는 서남아시아권의 사람들이 한국으로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국내선교 2와 3의 사역이 요청되는 상황으로서 한국교회는 국내에서도 전략적인 선교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수 없는 선교가 제한되고 금지되는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전략적인 선교의 대상으로서 저들을 효과적으로 전도하고 양육하여 훈련시킴으로 세계 복음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해야 하고 이러한 전략적인 국내 선교2와 3의 사역에 헌신하는 많은 일꾼들을 키워야 한다.
외지 선교 1의 단계에서는 디아스포라된 동족들을 위해 현지에 한인 교회를 세우고 저들을 섬길 때 내적 성장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선교적 성장, 하나님 나라의 교량역할을 하는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현지에서 자라는 2세와 3세를 훈련시킴으로 저들 가운데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열매가 맺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지를 복음화하는 데 있어서 직쪾간접적으로 하나님께 사용되는 선교의 중요한 사명이다. 선교와 전도의 모든 단계는 이렇듯이 서로 필요하며 어느 하나도 소홀히 될 수 없는 전체적인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교회 진영에서는 선교라는 용어보다 전도라는 용어에 선교의 의미를 포함시켰다. 미국 칼빈 신학교의 학장을 역임했던 카이퍼(R.B. Kuiper)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하나님이 중심이 된 전도』(God-Centered Evangelism)에서 선교를 외국에서의 복음증거요 전도를 국내에서의 복음증거라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근거가 없음을 분명히 지적하면서 전도라는 용어로서 선교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45) 또한 청교도 신학을 전공하고 캐나다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을 확산시키고 있는 패커는 그의 명저인 『전도와 하나님의 주권』(Evangelism and the Sovereignity of God)에서 카이퍼와 동일한 의미로서 전도에 선교의 개념을 포함시켜 사용하고 있다.46)
이렇듯이 선교와 전도의 의미가 상호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지리적인 구분은 이미 오래 전 선교학에서 의미가 없어졌다. 다만 문화권을 뛰어넘는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가장 시급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타문화권에서의 불신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사역을 전도로 생각하고, 국외에서의 사역을 선교라고 인식하여 선교는 반드시 외국에 나가야만 가능하다는 생각과 선교는 특별한 사람, 즉 교회의 파송을 받고 외국에 나가 원주민들에게 복음 전하는 사역자만을 가리킨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은 오히려 선교의 사명을 특수화시키고 교회의 본질적 사역을 변두리 사역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선교와 전도를 이해할 때 교회의 선교사명이 광의적이고 실제적인 선교사명으로 인식하여 이 모든 과정이 교회의 선교를 가능케 한다는 총체적인 차원에서 선교를 이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교는 일반적이며 또한 특수한 사명이요 광의적이며 또한 협의적인 복음증거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균형 있게 총체적인 복음(Whole Gospel)을 전 세상(Whole World)에 전 교회(Whole Church)가 증거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로잔 언약문은 세계 복음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전 교회(Whole Church)가 총체적인 복음(Whole Gospel)을 전 세상(Whole World)에 전해야 한다고 진술한다.47)
3. 전통적인 선교 개념에 대한 도전
교회역사를 통해볼 때 선교의 주된 강조점은 교회설립이었다. 초기교부시대의 문서로서 『디다케』는 교회의 세례와 성찬예식에 관한 지침을 내리면서 순회 전도자에 대해서 언급하며 어떻게 저들을 분별하고 영접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48) 1세기 말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저들의 착한 행실과 인내함으로 복음의 빛을 모든 사람들에게 비춰서 많은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언급한다.49)
3세기의 역사학자로서 교부시대의 교회역사를 추적한 최초의 교회역사학자라고 할 수 있는 유세비우스는 순회전도자들의 활동을 통해서 로마 제국 산하의 모든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그 결과로서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50) 선교에 있어서 교회설립의 중요성을 강조함은 로마교회의 교회관과 병행하여 더욱 강조되고 강화되었다. 특히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 반동종교개혁운동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예수회 선교 운동은 복음전파를 통한 교회설립과 교회의 확장을 제일 중요한 선교의 목표로 세웠다.51) 당시의 예수회에 속한 선교지도자들 가운데 개신교를 비판하여 말할 때 선교를 수행하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는 말을 하였다. 화란의 제 2의 종교개혁운동 지도자이며 영국의 청교도 선교사라고 할 수 있는 에임스에게 영향을 받은 보에티우스는 당대의 예수회 선교학자들의 신학적인 도전에 상당한 자극을 받았고, 그는 교회의 선교를 정의하기를 이교도 개종과 교회 설립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였다. 로마교회는 소위 베드로의 후계자로 불리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교회 중심의 선교를 주장했으나, 개신교회는 구원받은 택자가 중심이 된 가시적인 교회 안의 불가시적 교회를 우선하는 교회설립의 선교를 주장하였다. 어쨌든 양자는 교회설립이 선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이러한 교회설립을 중심으로 한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이 선교의 목표를 단순히 교회설립으로만 머물지 않게 하고 교회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통치권과 주재권을 증거하고 회복하는 차원에까지 선교영역을 확장시켰으나 교회설립의 목표는 조금도 희미해지거나 부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선교개념이 1925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생활과 사역’(Life and Work)회의에서 당시 유행하던 사회복음주의의 영향에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그 회의에서 전통적인 선교 개념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교회설립과 영혼구원의 선교는 경제와 산업 문제 그리고 사회윤리와 교육 분야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52) 물론 여기서 교회설립의 선교가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전통적인 선교 개념으로 당시의 산업화와 기술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자각과 선교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러한 선교 개념의 주장은 1928년 예수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 대회에서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전도와 사회적 행동의 구분이 아닌 통합으로서의 포괄적인 선교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53) 1938년 인도의 마드라스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 대회에서 존 모트는 확대전도(Larger Evangelism)개념을 소개하였는데, 이것은 선교란 단순히 영혼구원이나 교회설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부조리, 문화의 낙후성, 정치적인 불의에 대항하는 총체적인 복음증거 운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었다.54) 모트의 이런 주장은 신학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부인하거나 회심을 지향하는 교회 중심의 선교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교의 범위와 목표를 상당히 넓혔고 만일 영혼구원과 교회설립의 내용이 빠진다면 이것은 단지 인본주의적 사상에 불과할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국제선교협의회의 올드햄과 같은 일부 지도자들과 세계교회협의회의 맥케이 같은 지도자들은 당시 유행하던 사회복음주의 신학과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의 신학에서 나오는 윤리신학의 케리그마 그리고 후기 바르트의 종교사회학적 신학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52년 윌링겐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 대회에서 화란의 선교학자인 호켄다이크에 의해서 “왜 전통적인 선교이냐?”(Why Missions?)라는 주제 강연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새로운 선교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호켄다이크는 전통적인 선교의 과정으로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으로 삼아서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 세상 속에서 그의 나라를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사도적인 교회로서 세상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살롬을 성취하는 도구로서 그 존재 의의가 있다. 즉 교회는 세상보다 앞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살롬의 역사에 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55) 이런 점에서 세상을 변혁하는데 헌신하는 인본주의적이고 박애주의적 목적을 가진 제 사회기구나 심지어는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살롬의 역사는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선교의 목표로서 회심이나 교회설립을 불필요하게 만들었고,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소위 인간애적이고 사회구조 변혁을 추구하는 제 행동들을 하나님의 살롬의 역사로 보게 했다. 이는 결국 선교무용론을 낳았고, 선교가 보편구원설의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했다. 당시에는 이런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온건한 복음주의 입장을 가진 레슬리 뉴비긴이나 칼 하텐스타인에 의해서 비판되고 거부되었으나 1963년 멕시코 시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세계전도와 전도 분과대회에서 호켄다이크의 하나님의 선교개념으로 완전히 기울어졌고, 이것은 대회가 끝난 이후에 발행된 『타자를 위한 교회: 회중의 선교적 구조』(The Church for Others: The Missionary Structure of the Congregation)라는 책 속에 잘 반영되었다. 이 책에서 호켄다이크는 전통적인 교회의 회중 구조를 조악한 근본주의 개념의 산물로 보고, 교회는 세상을 향해 가는 구조가 되어 세상 속에서 도시갱생 프로그램이나 지역 사회 개발 등 세속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할 것을 촉구하였다.56)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1968년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선교를 정의하기를 그리스도를 모델로 한 새로운 인간성에의 참여인데 실상 그리스도의 모델의 신학적 내용이 하나님의 선교 사상과 부합됨으로 곧 선교는 인간화(Humani zation)가 되고 말았다.57) 1973년 태국의 방콕에서 열린 세계선교협의회 산하 세계선교와 전도 분과대회는 선교를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선교사상에 입각해서 여기에다가 해방의 주제를 포함시켜 선교를 경제 정의구현과 정치적인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인간소외에 대한 결속 등으로 규정하였다.58) 이런 하나님의 선교사상은 세계교회협의회의 대회 시마다 조금씩 신학적인 강조점은 다르지만 오늘날 세계교회협의회의 선교학의 기반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것은 개종을 말하고 회심의 중요성을 논한다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 개념과 다르게 하나님의 선교사상이 작용하기에 그 신학적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59)
4. 총체적인 선교 개념의 등장
세계교회협의회 산하의 레슬리 뉴비긴이나 비써트 후프트 그리고 칼 하텐스타인 등은 전통적인 교회설립을 중시한 선교를 부인하지 않았고, 이것을 선교의 중요한 목표로 여겼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교학 사상을 가진 호켄다이크나 에밀리오 카스트로 그리고 사마르타 등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들의 입장은 인도의 마드라스 대회에서 확대 전도 개념을 발표한 존 모트의 입장과 거의 동일하다. 1975년 영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인 존 스토트는 『현대 세계 속에서의 기독교 선교』 (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라는 그의 책에서 전통적인 선교 개념으로서의 선교 ‘Missions’와 세계교회협의회의 온건한 복음주의 입장에 선 신학자들의 선교 개념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즉 ‘missio’의 개념 대신에 총제적인 선교인 ‘Holistic Mission’을 주장하였다. 영어의 ‘Holistic’ 이라는 말은 유기체적인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선교사명에 있어서 전도적인 명령과 문화적인 명령 즉 사회적인 책임이 서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유기체적으로 결속되어 있다는 의미가 있다. 스토트는 왕국 신학적 측면에서 선교를 교회의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의 사명으로 보았고, 이것은 전도적인 명령과 문화적인 명령의 동등한 비중으로서의 총제적인 선교를 의미하였다.60)
이러한 그의 입장은 1974년 로잔 세계 복음화 대회에서의 그의 입장과 대조되는 견해였다. 로잔 대회에서는 스토트는 복음전도를 우선으로 하지만 문화명령을 선교의 본질로 보는 선교 개념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로잔 언약문은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한 주제로 다루면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나눌 수 없는 기독교인의 의무이요 말씀과 행위의 관계로 규정하였다.61) 스토트의 총체적인 선교 개념은 복음주의 교회진영 안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특히 남미 교회를 대변하는 올란도 코스타스와 르네 파딜라 그리고 사무엘 에스코바르는 이것을 적극 환영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튜빙겐 대학의 선교학 교수인 피터 바이엘하우스는 이런 스토트의 견해를 그리스 역사 속에 나오는 트로이성의 목마의 함정으로 보았고, 결국 세계교회협의회의 선교 개념인 하나님의 선교의 영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였다.62)
미국 달라스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조지 피터스도 그의 대표적 저서인 『선교의 성서신학』에서 문화적 명령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으며 선교의 목표는 복음전도를 통한 교회설립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스토트의 입장을 반박하였다.63) 그러나 하비 콘은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언약증거와 언약책임을 양분할 수 없는 교회의 선교사명이라 보고, 총체적인 입장에서의 스토트의 선교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64) 사무엘 에스코바르와 존 드라이버도 『기독교 선교와 사회정의』(Christian Mission and Social Justice)라는 그들의 저서 속에서 멘노나이트 신학에 있어서 복음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성경 속에 나타난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결국 선교를 총체적인 입장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65) 세계 복음주의 친교회의 총무였던 월드론 스코트는 그의 책인 『정의를 드러냄』(Bring Forth Justice)에서 선교의 개념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것은 대위임령에서 비롯되었고 그 내용은 복음선포와 제자삼음과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것이다. 그도 역시 총제적인 선교 개념을 옹호하고 있다.66)
로잔 복음화 대회가 끝난 이후에 1982년 미시간 그랜드 래피드에서 로잔 산하의 신학 및 교육분과 위원회와 세계 복음주의 친교회의 윤리 및 사회분과가 후원하는 『전도와 사회적 책임간의 관계에 대한 협의회』(Consultation on the Relation ship between Evangelism and Social Responsibility)가 열렸다. 여기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마치 결혼관계와 같은 선교의 동반자가 된다고 하였다. 전도와 사회적 책임간의 세 가지 관계모델을 제시하는데 첫째는 사회적 활동은 전도의 결과라는 입장과 둘째는 사회적 활동은 전도의 교량역할을 한다는 것과, 셋째는 첫째와 둘째의 입장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를 더 보완하여 사회적 활동은 전도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협의회에서는 보완된 동반자의 관계를 옹호하였고, 1974년 로잔 복음화 대회에서의 전도의 사회적 책임보다 우선한다는 입장을 재천명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전인성을 강조하였다.67)
1983년에 세계 복음주의 친교회가 주관하고 로잔의 전략분과 위원회가 후원하는 휘튼에서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는 교회에 관한 협의회”(Consultation on the Church in Response to Human Need)가 열렸다. 이 협의회에서 논의된 바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강조하였으며 그의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뿐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의 영역에 미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의 성취와 도전과 고난을 통과하고 또한 미래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기도 하는데 이 양자가 서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확신하면서 그의 변혁케 하시는 역사 속에서 현재의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되 이것은 사회,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68) 이 대회의 교회의 선교관은 왕국 신학적 입장에서의 복음의 전인성과 포괄성을 강조하는 총체적인 선교의 입장이었다. 이런 일련의 복음주의 진영 안의 총제적인 선교에 대한 신학적 정립은 결국 1989년 로잔 두 번째 복음화 대회가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열렸을 때 마닐라 선언문에서 ‘검증된 복음’(The Authentic Gospel)이라는 용어를 등장하게 만들었다. 이 뜻은 전도적 명령이 기능적인 측면에서 우선권이 있으나 신학적으로는 복음은 말씀과 행위로서 증거되어야 하고 복음은 구체적으로 선한 행실도 포함되기에 이것은 분리될 수 없는 총체적 복음이며 그 영역 안에 전도와 사회적인 책임의 동등한 자리 매김이 있다는 것이다.69) 이렇듯이 서구의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학자들은 1974년의 로잔 복음화 대회 시의 선교 개념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1989년의 로잔 두 번째 대회 시의 총체적인 선교 개념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크게 둘로 양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 개념의 차이는 결국 선교현장에서 선교 전략이나 선교정책을 결정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 속에서 전도명령과 문화적 명령이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 선교신학적으로 조명해 보자.
5. 전도 명령과 문화명령
존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의 자연적인 재능이나 의지, 이성 등이 범죄 이후의 타락한 인간에게 완전히 거두어진 것이 아니고 무지로 둘러싸여 있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제 제도들과 인간의 예술, 과학능력은 성령의 일반 역사로서 하나님의 보통은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보통은총을 인간에게 허락한 것은 그들이 죄로 인하여 완전히 멸망하거나 금수 같은 상태로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정의한다.70) 여기에서 칼빈은 보통은총 안에 있는 인간의 재능, 예술, 과학 등은 결국 죄의 영향력 하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채 왜곡되거나 변질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였다.71) 따라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특별은총으로서의 성령의 구속적 사역이 필요하며, 이러한 성령의 특별한 역사 속에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72)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결국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구속적 사역을 요청하게 되고, 그것은 논리적으로 전도 명령에 기반을 둔 문화적 명령의 수행으로 나타나게 된다.
칼빈의 『시민정부에 관한 소고』(A Treatise on Civil Government)에서도 나타났듯이 정치영역에서의 정권의 합법성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순종이라는 자발적인 믿음의 행위 속에서 시민의 권리를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73)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발전되었는데, 카이퍼는 인간 삶의 총체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고,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영역 주권의 원리를 주장하였다.74) 그러나 카이퍼에게 있어서 영역 주권의 원리는 복음선포를 무의미하게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죄와 사탄의 역사가 있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이를 ‘반정립’(Anti-Thesis)이라 불렀으며, 성령의 구속적 사역, 즉 복음선포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적 영사가 선행되지 않으면 영역 주권은 이루어지지 않음을 철저히 인식하였다.75)
이러한 전통적인 개혁신학에 있어서 성령의 구속적인 사역, 즉 복음선포를 통한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우선하는 전도명령의 문화명령에 대한 우위는 벌카우워나 헤르만 도이에베르트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벌카우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이신득의의 의미는 성화에 대한 은총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서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76) 벌카우워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의로운 삶의 열매가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헛것이라는 믿음과 행함의 상호 연관성(Co-relationship)의 그의 유명한 이론을 주장한다. 벌카우워는 이러한 상호 연관성의 이론을 성경을 해석하는 데도 적용시키는데 삶에 실천이 없는 말씀은 그의 이론에 의하면 더 이상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이다.77) 이것은 전도명령과 문화명령을 함께 결속되어 있는 유기체적인 것으로 보는 총제적인 선교 개념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도이에베르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가 그의 우주법에 의해 통치되는데 15개의 영역으로 되어 있으며, 각 영역은 상호 결속되었고 그러면서 각자의 고유 영역 주권을 소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는 자연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그리고 신앙의 영역을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보면서 신앙의 영역이 모든 영역의 기반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도이에베르트는 통합된 신앙이 중심된 세계관을 논하는데, 이것은 너무 거시적이고 포괄적이기에 일원론적인 구조를 나타내며 유기체적 특징을 가지게 된다. 그의 영역 주권의 이론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유사하나 차이점은 일원적인 통합된 체계를 강조하느라고 카이퍼가 지적한 반정립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또한 지나치게 각 영역의 기능과 역할을 낙관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것은 총체적인 선교관에 부합되는 이론인 것이다.78) 여기서 필자는 칼빈과 카이퍼의 입장이 성경적인 견해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복음전도가 선행되지 않는 문화적인 명령수행은 아무리 복음전도를 인정하고 두 차원을 동시에 취급한다고 하여도 문화영역이 성령의 구속적인 사역을 먼저 요구하고 있기에 비성경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20-2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여기서 ‘굴복하는’과 ‘굴복케 하시는’은 원어로 보면 ‘uπετaνη’와 ‘uποτaζαντα’인데 이것은 원동사가 되는 ‘uποτaσσω’의 수동태와 능동태로서 모두가 과거형이다. 이 말은 이미 어쩔 수 없이 죄와 사탄의 영향력 아래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그래서 그의 구속을 바랄 수밖에 없는 피조 세계의 상태를 의미한다. ‘굴복하는’ 상태에서 피조물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도록 해방되는 역사가 있을 것임을 말씀한다. 여기서 ‘해방되어’의 원어로 쓰여진 시제는 원동사인 ‘ελευθερoω’의 미래형으로서 ‘ελευθερωθnσεται’이다. 이것은 이미 굴복된 피조세계가 원어의 의미 그대로 성령의 구속적인 사역에 의해서 계속해서 해방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온전히 해방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렇듯이 성령의 구속적 사역으로서의 전도명령이 문화명령보다 우선권이 있지만 문화명령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로잔 언약문은 문화명령을 선교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보았고 말씀과 행위의 관계로 보았다. 전도명령 수행은 교회공동체를 통한 말씀의 선포로 나타날 것인데, 이것은 교회 안과 밖에서 공히 나타나야 하며 입술의 증언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 삶의 제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재권을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만일 말씀을 증거한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적인 말씀 선포가 아니요, 인간 삶의 제 영역을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는 영역으로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설교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의 중요성이 있으며, 이것은 총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의 주 되신 삼위 하나님의 주재권을 확립하고 증거하며, 삼위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그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어야 한다.
6. 선교현장과 선교 개념
금일의 한국교회 선교현장에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영역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선교지의 상황이 모든 면에서 낙후되어 있기에 학교 설립이나 병원 건축 등을 시도하게 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최근에 문이 열리고 있는 북방 지역의 선교지 상황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선교사의 눈앞에 당장 굶주리고 헐벗은 선교지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이들을 구제하려는 계획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교회가 선교 역사는 대체적으로 한국교회보다 길다고 하지만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기에 선교사의 재정적 지원이 요청된다. 바로 이런 환경에서 총체적인 선교 개념은 상당한 매력을 줄 것이고, 이런 입장에서 선교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1900년도의 한국교회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현재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북방 지역의 선교지 상황보다 열악하고 더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경제적으로 극히 빈곤하고 정치적으로 나라의 주권을 상실하고 신앙적으로도 유아기적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선교는 이루어졌다.
저자는 1993년부터 약 3년간에 걸쳐서 태국 목회자 훈련원의 강의 요청을 받고 태국을 계속하여 방문하였다. 태국 목회자들에 대한 필자의 강의 핵심은 현재의 태국교회가 인구 6천만에 목회자 수효가 1천여 명이 못되고 신자수효가 10만 명을 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이라도 초창기의 한국교회 상황보다는 훨씬 낫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선교역사가 160년이나 되지만 지금까지 서구 선교기관의 재정적인 도움에 의존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은 아니다. 오늘날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교회가 이런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과거 서구 교회가 수백 년 동안 선교하였지만 문화 우월 의식에 의한 일방적인 선교로 말미암아 지도력 배양에 실패하고, 문명화를 기독교화의 첩경이라고 보고 온갖 사회 복지 시설과 교육시설 등을 지었지만 그것이 인간 심령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물질적인 문화생활의 향상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는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런 점에서 한국 장로교회에서 실시되었던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토착교회의 자급, 자치, 자전의 능력을 최대한 배양하고 토착교회의 지도력을 키우는데 선교의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선교사들을 관할하던 극동지역 담당 선교총무였던 로버트 스피어는 문화적 명령에 해당하는 구제, 병원설립, 학교건축 등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시한 것은 토착교회의 자율적 생존 능력 바탕 위에서 균형을 맞추면서 토착교회와의 협력 속에서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그 책임을 온전히 맡을 수 있도록 하는 목표에서 실시하였다. 병자를 치료하여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 원목과 전도 팀이 있어서 환자를 복음으로 변화시키고, 퇴원한 후에는 그 환자의 가정, 마을을 방문하여 바로 거기서 교회가 시작되게 하는 선교를 수행한 것이다.79)
현금의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여러 선교지에서 현지 교회 지도자들과의 협력 없이, 또 토착교회를 성경적인 교회로 성장시키려는 선교 목표 없이 단기간 내에 이루어지는 물량적이고 외형적인 선교 프로젝트 위주의 선교는 짧은 시간 동안에 이루어지는 가견적 결과에 대한 자기 과시나 자랑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교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경향은 선교 현지에 대한 선교학적인 통찰력의 결여로 올 수도 있지만 요한네스 버카일이 지적한 잘못된 선교 동기 중 하나로 말미암을 수도 있다.80) 중국에서의 북한 탈북자들을 돕는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교회를 통해서 많은 재정 지원을 받는 조선족교회는 교회 건축물이나 시설에 대한 중국 정부의 불이익이 있을까봐 두려워하여 수만 명의 북한인들이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돕지 못하고, 다만 형식적으로 흉내만 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북한과 접경 지역에 있는, 모든 면에서 낙후되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상황 속에 있는 조선족 교회들이 오히려 북한 탈북자들을 돕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저들은 정식 교회당 건물도 아닌 가정집을 예배 처소로 개조하여 예배를 드리는 열악한 상황에 있고, 북한인들을 돕다가 중국 정부에 발각이 되면 엄청난 벌금을 물게 되지만 이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북한인들을 돕는 사역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교는 물질적인 부요함이나 문화적인 삶의 풍요로움이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요,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자세이요, 사랑을 실천하는 말씀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세워지지 않았는데 문화적 삶의 향상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세속화의 함정으로 빠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전통적인 선교 개념으로서의 교회설립을 중요시하되 이미 세워진 선교현지교회가 신학적으로 취약하고 영적으로 병들었을 때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고 저들을 섬기는 교회 중심의 선교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또한 아시아의 20억이나 되는 불신 종족들에 대하여 전략적인 선교를 수행하되 궁극적인 목표를 교회설립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 선교 목표가 상실되거나 위축되거나 흐려지지 않는 방향에서 선교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교회의 한계와 사역의 범위는 어디까지가 되어야 할지 신학적인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총체적인 선교를 옹호하는 입장의 선교학자들은 대체로 구조적인 사회악에 대하여 교회는 조직적으로 대처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회적 행동(Social Action)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선교 개념을 가진 선교학자들은 대체로 사회적 행동에 대하여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그 이유로 제시되는 것이 교회는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사회변혁기구가 아니기에 정체성의 혼란이 있게 된다는 점과 사회행동은 결과를 목적으로 한 행위이기에 교회는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결과 지향의 조직체가 아니라는 것이다.81) 그러나 필자는 이 양자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취한다. 교회는 사회변혁기구가 아니기에 사회적 행동을 직접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구조적인 사회악에 대하여 다만 봉사차원에서의 일방적인 섬김으로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교인들을 훈련시켜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관에 붙들린바 되게 하고, 그 성경적 세계관을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재능과 은사에 따라 구현하도록 계속적인 동기부여와 격려를 해야 한다. 교회는 불의한 세상에 대하여 선지자적인 사명을 다할 뿐 아니라 교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현하도록 저들을 지원하고 격려해야 한다. 즉 칼빈이 말한 바처럼 신율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요, 카이퍼가 말한 영영 주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요, 반틸이 말한 왕국의 변혁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교회가 처한 특수 상황 속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모든 불의한 세력과 구조에 대하여 교인들을 통해 성경적인 방법으로 이것들이 해결되도록 저들을 돕고 격려하는 구체적인 교회병행 선교기구를 만들 수 있고, 이것을 통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주재권을 증거할 수 있다.
7. 결어
지금까지 선교의 용어가 성경에서 어떻게 유래가 됐고, 이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선교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선교와 전도의 성경적인 의미를 규명했으며, 역사적으로 이것이 어떻게 사용되었고, 현금의 선교학에 있어서 선교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선교와 전도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선교 개념에 있어서 선교학의 양극화 현상을 논했고, 복음주의 교회진영 안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총체적인 선교 개념을 성찰했다. 이미 본 소고에서 언급했지만 필자의 입장은 1974년도의 로잔 언약문에 나타난 선교 개념 이해이다. 선교에 있어서 전도적 명령을 우선으로 한 그러나 문화적 명령을 단지 전도적 명령에 대한 부수물이나 열매로 보지 않는다. 문화적 명령도 선교의 본질적인 명령인 것이다. 이것은 말씀과 행위의 문제이요, 신양과 삶의 문제이다. 그러나 전도적 명령과 문화적 명령의 중요성을 동등하게 여긴 채, 우선권을 논하지 않고 총체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선교현장에서의 선교전략과 방법에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잘못하면 제도주의나 세속주의의 올무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총체적인 선교 개념을 가지고 선교하는 것을 필자는 우려하고 있다.
국내 상황에서의 교회의 사회적 책임 즉 문화적 명령을 어떻게 수행하는가의 문제를 언급하였다. 문화적 명령이 교회 선교사명의 본질적인 것이라면 다만 부수물에 그치지 않는다고 하면 보다 적극적인 교회의 대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여러 개혁신학자들의 모델을 언급했으며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선교 개념을 성경적, 신학적으로 바로 이해하고 혼란 없이 국내든 국외든지 최선을 다해서 선교사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주석
31) cf. J. Verkuyl, Contemporary Missiology(Grand Rapids: Eerdmans, 1978), p. 2, David J. Bosch, Transforming Mission(Maryknoll: Orbes, 1991), p. 1.
32) 사도적 교회라는 말을 선교와 연관해서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한 사람은 아브라함 카이퍼이다. 요한 바빙크는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카이퍼에게 사도적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See J.H. Bavinck, An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Missions(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ilshing Col., 1979), p. x vi-x vii.
33) See William Ames, The Marrow of Theology, John D. Eusden, ed. (Boston: Pilgrim Press 1968), pp. 183-196, Richard Baxter, The Practical Works of Richard Baxter, vol. 1. (london:np, 1888), p. 641.
34) 이러한 광의적인 의미의 선교 정의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존 스토트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조정주의 입장으로는 레슬리 뉴비긴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다. See John R.W. Stott, “The Biblical Basis of Evangelism, : in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J.D. Douglas, ed. (Minneapolis: World Wide Pub., 1975), pp. 66-68, Lesslie Newbihin, The Open Secret(Grand Rapids: Eerdmans, 1995), pp. 19-29
35) 이 실제적인 선교정의는 17세기에 활약한 화란의 보에티우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선교를 세 가지로 정의하였고 이것은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의 정의는 교회가 복음을 전파함으로 이방인을 개종시키고 교회를 설립하는 일과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은총을 나타내는 일이다. 20세기에 와서 맥가브란이 중심이 된 교회성장학파는 선교의 개념을 대위임령과 연결하여 복음선포와 제자삼음과 교회설립으로 구분하고 와그너는 이것을 좀더 발전시켜 제자삼음의 개념에다가 현지 교회의 선교적 성장, 즉 왕국적 성장의 개념을 포함시켰다. See J.A. Jongeneel, “Voetius, Zendingstheologie, de eerste comprehensieve protestanse zendingstheologie”, in De Onbekende Voetius, J. Van Oort, ed. (Kampen:Kok., 1989), pp. 117-147, Donald A. McGavran, Understanding Church Growth(Grand Rapids: Eerdmans, 1986), pp. 26-92, 피터 와그너, ?기독교 선교전략?, 전호진 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1), pp. 176-178
36) 데이비드 부쉬, ?선교학?, 전재옥 역(서울: 두란노, 1992), pp.24-26
37) William Richey Hogg, Ecumenical Foundations(New York: Harper & Brothers, 1952), p. 247
38) David J. Hesselgrave, Planting Churches Cross-Culturally(Grand Rapids:: Baker, 1980), pp. 31-33.
39) John R.W. Stott, “The Biblical Basis of Evangelism”, in Mission Trends No. 2: Evangelization, Gerald H. Anderson and Thomas F. Stransky, eds. (Grand Rapids: Eerdmans, 1978), pp.9-13
40) Carl G. Kromminga, Bringing God’s News to Neighbors(Nutl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1977), pp. 7-14
41) Donald Mcgavran, The Bridges of God(New York: Friendship Press, 1981), pp. 13-16.
42) Ralph D. Winter, “Seeing the Task Graphically”, in Crucial Dimensions in World Evangelization, Arthur F. Glasser, Paul G. Hiebert, C. Peter Wagner, Ralph D. Winter(Pasadena: William Carey Library, 1976), pp. 91-104.
43) Hesselgrave, op. cit., pp. 33-41.
44) Marlin 1. Melson and Chaeok Chun, “An Open Letter to Directors of Asian Mission Societies”, in Readings in Third World Missions, Marlin L. Nelson, ed. (Pasadena:William Carey Library, 1978), pp. 234-247.
45) R. B. 카이퍼, ?복음전도신학?, 김득용 역(서울: 총신대학 출판사, 1981), pp.3-4.
46) See J. I. Packer, 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61).
47)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p. 5.
48) J. B. Lightfoot, trans. & ed. The Apostolic Fathers(Grand Rapids: Baker, 1965), pp. 123-129.
49) Ibid., pp. 13-41.
50) Eusebius, “The Evangelist that were still Eminent ant that Time”, in The Church History of Eusebius, vol. 1,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Arthur Cushman Mcgiffert, trans, & ed. (Grand Rapids:: Eedmans, 1952), p. 169.
51) Andre Seumois, Theologie Missionaire 1 (Rome:OMI, 1973), p. 18.
52) William Richey Hogg, Ecumenical Foundations(New York Harper & Brothers, 1952), p. 250.
53) IMC, “Vol. 8. Addresses on General Subjects”, in The Jerusalem Meeting of the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March 24-April 8, 1928(London: IMC, 1928), p. 16.
54) Hogg, op. cit., p. 281.
55) J. C. Hoekendijk, “The Church in Missionary Thinking”, in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Vol. 41. No. 163, 1952, pp. 324-336.
56) WCC, The Church for Others and The Church for the World(Geneva: WCC, 1968), pp. 19-23.
57) Norman Goodall, ed., Official Report of the Fourth Assembly of he World Council of Churches, Uppsala, July 4-20, 1968(Geneva: WCC, 1968), pp. 423-426.
58) WCC, Bangkok Assembly 1973(Geneva: WCC, 1973), pp. 88-89.
59) 필자는 이 문제를 에큐메닉의 선교학을 논할 때에 좀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60) John R. W. Stott, 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75), p. 23.
61)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pp. 4-5.
62) Peter Beyerhaus, “Forword”, in The Battle for World Evangelization(Wheaton:Tyndale, 1978), p. 11.
63) George W. Peters, A Biblical Theology of Missions(Chicago: Moody Bible Institute, 1972), pp. 209-210.
64) See Harvie M. Conn, Eternal Word and Changing Worlds(Grand Rapids: Zondervan, 1984), pp. 229-235.
65) 그는 서론에서 현대 선교학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전도와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역사적이며 성경적인 차원에서의 총체적인 입장의 그의 선교관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See Samuel Escobar and John Driver, Christian Mission and Social Justice(Scottdale: Herald Press, 1978), pp. 11-35.
66) Waldron Scott, Bring Forth Justice(Grand Rapids: Eerdmans, 1980), pp. vi-x viii.
67) Grand Rapids Rport, “Evangelism and Social Responsibility: An Evangelical Commitment”, in Lausanne Occasional Papers No. 21, A Joint Publication of the LCWE & the WEF, 1982, pp. 19-25.
68) V. Samuel and C. Sugden, eds., “The Church in Response to Human Need”, in The Wheaton 1983 Consultation(Grand Rapids: Eerdmans, 1987), pp. 254-265.
69) LCWE, “The Manila Manifesto”, in New Directions in Mission & Evangelization 1, James A. Scherer & Stephen B. Bevans, eds. (Maryknoll: Orbis, 1992), p. 297.
70)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 John T. Mcneill, ed. (Philadelphia:Westminster Press, 1967), pp. 270-277.
71) Ibid., pp. 277-284.
72) Ibid., pp. 284-289
73) John Calvin, “On Civil Government”, in Calvin: On God and Political Duty, John T. Mcneill, ed. (Indianapolis: Bobbs-Merrill Com., 1977), pp. 45-49.
74)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Grnad Rapids: Eerdmans, 1983), pp. 95-97.
75) Ibid., pp. 121-125.
76) G. C. Berkouwer, Faith and Sanctification, John Vriend, trans.(Grand Rapids: Eerdmans, 1952), pp.27-28.
77) G. C. Berkouwer, Holy Script-xure, Jack B. Rogers, trans. and ed.(Grand Rapids: Eerdmans, 1975), pp. 44-45.
78) Herman Dooyeweerd, In the Twilight of Western Thought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60). pp. 6-7.
79) Robert Speer, Report on the Mission in Korea of the 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s(New York: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C USA, 1897), pp. 24-28.
80) 버카일은 네 가지의 잘못된 선교동기들을 지적하는데 첫째는 제국주의적 동기가 있고, 둘째는 문화적 동기가 있으며, 셋째는 상업적 동기와 넷째는 교회적 제국주의의 동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문화적 동기나 교회적 제국주의 동기가 해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See. Verkuyl, op. cit., pp. 168-175.
81) 피터 와그너가 이런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다. See C. Peter Wagner, Church Growth and the Whole Gospel(New York: Harper & Row, 1981), pp. 11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