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귀환이다. ‘다크 나이트’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지 2년. 그의 새 영화 ‘인셉션’에 세계 영화계가 들썩이고 있다. 평자들은 마치 서로 좀 더 강렬한 언사를 찾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열광적인 찬사를 쏟아내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40) 감독의 ‘인셉션’은 남의 생각과 무의식을 훔치거나 조작하는 것이 가능한 근미래, 타인의 꿈에 침투해 벌이는 전쟁에 대한 영화다. SF스릴러의 외피 속에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 기억과 주체 등의 문제를 파고든다. 복잡한 퍼즐을 꿰맞춰가는 지적인 두뇌 게임인 동시에, 무수한 상징 따위 무시하고 가볍게 즐겨도 마냥 쾌감으로 폭주하는 블록버스터다.
영화평론가 피터 트레버스는 “‘매트릭스’ 세계에 빠진 007, SF 걸작 ‘블레이드 러너’와 놀란 감독의 전작 ‘다크 나이트’ ‘메멘토’까지 연상시킨다”고 호평했다. “하지만 이런 수식 없이도 ‘인셉션’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렬하다. 지적으로 폭발한 대작 블록버스터가 탄생했다. 그냥 푹 빠져들어 미쳐버려라!”고도 썼다.
물론 이 영화가 과연 ‘다크 나이트’를 뛰어넘는 걸작인가에는 이견이 있지만, 놀란의 창의성이 아직도 무궁무진하며, 그가 오락과 스펙터클 안에 지성과 철학을 녹여내는 문제적 감독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크 나이트’로 수퍼 히어로 무비의 새 역사를 썼던 놀란은, ‘인셉션’에서 또 한 발 나아갔다. 아이맥스 촬영은 시도하지만, 모든 액션을 실제로 해내고 컴퓨터그래픽 시각효과를 최소화하길 고집하는 놀란. 누군가 할리우드의 미래를 묻는다면 그의 영화를 보라고 할 것이다.
그의 데뷔작은 1998년 ‘미행’. 런던대를 졸업하고 가족과 무명 배우들을 동원해 찍은 저예산 독립영화였다. 이 작품으로 신인들의 등용문인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타이거상(대상)을 수상한 그는 그 수익금으로 ‘메멘토’(2000)를 완성했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상업영화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메멘토’는 놀란 영화 세계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 이어 ‘인썸니아’ ‘배트맨 비긴즈’ ‘프레스티지’ 등을 거쳐 ‘다크 나이트’로 전 세계에서 10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파워를 발휘했다. 평단을 열광시킨 것은 물론이다. 또 하나의 역작 ‘인셉션’ 이후 그는 현재 2012년 개봉 예정인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를 준비 중이다.
꿈과 기억, 무의식을 찍는 감독
놀란은 첫 출세작 ‘메멘토’를 필두로 줄곧 기억과 꿈, 무의식을 찍어왔다. 기억상실증(‘메멘토’), 불면증(‘인썸니아’), 꿈의 해킹과 조작(‘인셉션’)이다. ‘프레스티지’ 또한 마술과 환영에 대한 영화였다.
‘메멘토’는 불과 10분 전 일밖에 기억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이 피어스)가, 아내의 살해범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주변에 덕지덕지 포스트잇 메모를 붙이거나 제 몸에 문신을 하는 남자의 분투가 강렬했다. 특유의 비선형적 이야기 구조, 충격적인 반전도 놀란의 낙인을 선명히 새겼다.
‘메멘토’의 성공 이후 처음으로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톱스타들을 기용해 만든 영화가 ‘인썸니아’다. 97년작 노르웨이 영화의 리메이크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형사(알 파치노)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속에서 용의자 아닌 동료 형사를 쏘고 협박에 쫓기는 내용이다. 외피는 수사물이지만, 백야의 알래스카를 배경으로 부유하는 뿌연 이미지 속에 불안과 죄의식 같은 내면에 초점을 맞춘, 심리 드라마였다.
‘배트맨 비긴즈’나 ‘다크 나이트’는 직접적으로 꿈과 무의식을 다루지는 않지만, 이 역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죄의식, 도덕적 카오스 등을 주요 모티브로 삼았다.
그리고 마침내 ‘인셉션’은 꿈과 의식에 대한 놀란의 탐구가 정교한 스토리텔링으로 본격화한 영화다. 드림머신이라는 기계를 통해 남의 꿈에 침투하거나 공유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꿈속의 꿈속의 꿈속의 꿈’이라는 무의식의 저변을 파고들어간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뒤섞으며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묻는 장자적 일갈이야 크게 새로울 것 없으나,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야심 찬 시각화나 의식의 여러 차원이 서로 맞물리는 관계를 빈틈없는 이야기로 풀어낸 직조력만큼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물리학이 무시되는 꿈의 세계, 가령 땅과 하늘의 3차원 공간이 둘둘 접히고, 거리가 슬로 모션으로 폭발해도 꿈꾸는 자만큼은 멀쩡한 진공장면 등은 반드시 눈으로 확인해야 할 명장면. 계속해서 올라가기만 하는 펜로즈 계단은, 3차원에 갇힌 지각의 한계를 비튼 네덜란드 판화가 에셔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놀란은 심지어 이런 장면에서조차 상당 부분 리얼세트, 리얼액션의 원칙을 고수했다).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이야기꾼
거의 모든 작품을 직접 쓰는 놀란의 창의적 스토리텔링은, 그의 영화가 기본적으로 두뇌게임, 퍼즐 맞추기를 지향한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한눈에 간파되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조각을 꿰맞추는 영화, 비선형적으로 여러 층위의 이야기가 동시다발로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정체를 드러내며 지적인 정복감을 안기는 영화다(드물게 반복 관람 욕구를 자극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가령 ‘메멘토’에서는, 극중 컬러 화면은 뒤로, 흑백 화면은 앞으로 시간이 흐른다. 엔딩에 와서야 흑백의 시간대가 하나로 맞물린다. ‘인셉션’ 또한 영화의 클로징에서 오프닝이 반복된다. 이런 순환구조에 꿈과 현실, 꿈과 꿈 속의 꿈이 뒤섞였다. 자신이 축조한 거대한 이야기 세계를 납득시키기에 필요 이상 관객의 피로를 강요하는 감이 없잖지만, 놀란은 ‘인셉션’을 통해 ‘지금껏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라는 놀라운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다크 블록버스터’ 블록버스터의 진화와 혁신
놀란 감독의 또 다른 놀라운 점은 그가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자기만의 독창성을 잃지 않으며 주류와 비주류의 감성을 섞는 영리한 행보의 개척자란 점이다. ‘다크 나이트’는 수퍼 히어로 무비의 반성이자, 단순한 안티 히어로물 이상의, 전혀 새로운 성찰적인 영화로 탄생했다. 선(배트맨)과 악(조커)의 대결이 될 줄 알았던 영화는 선의 수호자였던 하비 던트(에런 에크하트)가 얼굴 반쪽을 잃어버린 후 정의의 이름으로 악(복수)을 행하는 ‘하비 투 페이스’에 대한 영화가 된다. 선악 대결 장르를 선악 성찰 장르로 바꾸는 놀란의 힘이다. 물론 오락 대작영화의 틀 안에서다. 우울한 디스토피아 계보인 ‘인셉션’ 또한 블록버스터의 아찔한 쾌감을 놓치지 않는다.
상상력을 위해 영화적 기술을 총동원하지만 ‘리얼리티의 힘’을 믿는 그는 ‘인셉션’에서도 컴퓨터그래픽을 최소화한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꿈꾸는 동안에는 그 세계를 현실로 느끼는 것처럼 영화 속 꿈의 세계가 환상 아닌 현실로 보이길 원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놀란은 창의적이면서 고전적이고, 실험적이면서 상업적이다. 그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진정한 혁신자로 부르는 이유다.
글=양성희 기자 사진=워너브러더스 제공
[시시콜콜] 놀란 감독의 사람들
그의 모든 작품 제작은 아내가, ‘메멘토’ 원작은 동생이 썼죠
‘인셉션’은 화려한 배우 라인업으로도 화제다. SF는 처음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를 위시해 마리온 코티아르, 엘렌 페이지, 와타나베 겐, 마이클 케인, 톰 베린저 등 아카데미를 수상했거나 후보 출신 실력파들이 총출동했다. 이 중 마이클 케인은 ‘배트맨 비긴즈’ ‘프레스티지’ ‘다크 나이트’에 이어 네 번째로 놀란과 손잡은, 대표적인 놀란 사단 배우다. 탄탄한 연기력으로 주인공을 보좌하며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이다. 감독도 그의 출연을 “행운의 부적 같다”고 표현할 정도다. 킬리언 머피도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에 이어 ‘인셉션’에 출연했다. 와타나베 겐 역시 ‘배트맨 비긴즈’에 이어 나오며 감독과의 인연을 과시했다.
놀란 하면 떠오르는 간판 배우는 역시 크리스천 베일이다. ‘배트맨 비긴즈’ ‘프레스티지’ ‘다크 나이트’에 연속 출연했다. 원래 스튜디오가 배트맨으로 점찍은 배우는 애슈턴 커처였으나 놀란이 오디션을 고집해 베일을 캐스팅했다. 직전에 ‘머시니스트’에 출연하며 20㎏ 가깝게 감량했던 베일은 “배트맨은 덩치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지나치게 몸을 불려, 촬영 초기 현장에서는 ‘뚱보 배트맨’이라 불리기도 했다.
히스 레저는 ‘다크 나이트’에서 놀란과 만나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연을 펼쳤으나 아쉽게도 이 영화가 유작이 됐다. 사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이 바쳐졌다.
놀란의 영화에는 가족의 이름도 발견된다. ‘메멘토’는 동생 조너선 놀란이 쓴 단편 ‘메멘토 모리’에 기반해 시나리오를 썼다. ‘미행’에서부터 ‘다크 나이트’ ‘인셉션’ 등 놀란의 모든 작품에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엠마 토머스는 놀란의 부인이다. 두 사람은 신코피라는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다.
연출작
1998년 미행
2000년 메멘토
2002년 인썸니아
2005년 배트맨 비긴즈
2006년 프레스티지
2008년 다크 나이트
2010년 인셉션
양성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