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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산(金錢山) 쇠 금(金)과 돈 전(錢), 돈을 의미하는 한자로만 이름 지어졌다. 이 산의 옛 이름은 쇠산이었으나 100여 년 전부터 금전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산 이름이 바뀐 것은 풍수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낙안읍에서 금전산을 올려다보면 영락없는 쇠 금(金) 자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산이 햇빛을 받으면 금빛으로 빛난다고 해서 '쇠돈산'으로 불리다,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지만 금전산으로 개칭됐다는 것이다. 금전산의 지세 때문에 순천에서 로또 1등 당첨자가 많이 나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도 전한다. 덕분에 금전산은 현지에서 '로또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청앞에서 출발하기 전 물단풍꽃 화분
바위 틈새에서 몇백년을 살아온 소나무 분재
정상에서 인증샷!!!
어제 저녁 많이 추웠나 보다.
들판 가운데 낙안 읍성의 동네가 보인다.
쌍고드름을 보았나요!!! 하늘을 오르는 관문이라 해서 통천문인데 여기는 극락을 가는 "극락문"이다.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남내리, 서내리 3개 마을로 이루어진 낙안읍성은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302호로 지정된 옛 지방도시. 사적지 지정과 함께 초가 120여 채와 관아 등 전통 고을을 재현하고, 다양한 민속 관련 자료를 갖춰놓아 관광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낙안읍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태조 6년(1397) 낙안 출신 절제사 김빈길이 흙으로 성(토성)을 쌓았고, 세종 6년(1424) 석성(石城)으로 개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총 길이는 1410m, 높이 4~5m, 성벽 상단 폭 2~3m로 원형훼손이 가장 적은 읍성으로 알려진다. 성곽 앞에는 낙안의 '진산'으로 일컫는 금전산(670m) 자락에서 흘러내린 개천을 보완한 해자(垓字)가 있었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1차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성곽주변 하천이나 개울 등을 이용한 '자연 해자'와 사람이 호수를 만들어 고랑을 낸 '인공 해자'로 나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성을 처음 축조할 당시에는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넓이 3.5m~4m, 깊이 1.5m~2m로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는 낙안읍성 해자는 처음엔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흘렀으나 당시 낙안 군수 애첩이 서문 쪽에 살았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집이 물에 잠기곤 해서 물길을 막아버렸다는 얘기가 내려온다. 현재 남아 있는 해자 길이는 동쪽, 남쪽 합해서 596m 정도.낙안읍성 해자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아전들 기가 세지지 못하도록 물길을 돌려놓기도 하고 사라호 태풍(1959)으로 수해가 나기도 하는 등 수난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해자는 삼국시대부터 도성과 읍성 등에서 자연 해자 위주로 널리 이용됐으며, 성내에 설치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성 입구에 3마리의 돌짐승이 성문을 지키며 앉아 있다. 무슨 짐승일까? 石狗(석.개구)
동네에서 바라본 "금전산" 쇠 금(金)자로 보이는가? 남세밭에는 채소와 꽃이 싱싱하게 아름답다. 약초시장의 "우슬초"
홍살문 관아.수문장, 원님이 죄인을 취조하는 모습을 마네킹으로 만들어 놓았다 박물관 뜰에 세워놓은 장성과 양석 화장실 서쪽 성밑 화장실이다. 약 150채 정도인 동네이다. 성 오른쪽은 성밖이고 왼쪽은 성안 동네이다. 낙안 읍성 동네에서 "ㄱ"자 집은 처음 보는 것 같다.그 당시 괘 높은 양반댁 부자집이고 큰집이다. 집 문패를 보니 "이방의 집"에 동백꽃이 밑에는 흰꽃이 피고 위에는 붉은 꽃이 피여 있다. 대장간의 굴뚝 아직도 대장간에서 호미를 만들고 있는 대장쟁이 아저씨 300년 은행나무 한바뀌 둘러보고 마지박은 주막에서 막걸리 동동주를 파전,김치 안주로 한사발하고 일러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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