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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와 시와 원문보기 글쓴이: 시소리
예술은 주어진 아름다움
문학의 예술성과 대중성은 서로 어떠한 관계인가. 이것이 원래 대립하게 되어 있는 관계라고 전제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관점이다. 예술은 인간들의 일이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는 존재이므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잘못되는 예술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술의 대중성 자체에는 왜곡되는 성향만 있는 것도 아니다. 기교와 감각에 기울어 관념화하고 말초적으로 자기 소모에 이르는 것이 왜곡되는 성향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의 대지와 같은 민중언어로 건강한 아름다움을 창조해 나가는 대중성의 흐름도 있다.
이 소론은 문학 안에서 예술성의 근원에 대해 되새겨 보고, 작품이 대중과 소통하는 과정의 관념적 차질과 창조적 가능성에 대해 헤아려 보고자 한다.
고대에 동양과 서양의 정신 작업 분야에는 일치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영원한 진리에 대한 추구' 였다. 중국의<역경>은 우주의 형성을 가리켜 하늘과 땅이 있고 그 가운데에 천지의 정수를 모아서 지닌 인간이 있다고 했다.<시경>과<예기>는 인간의 마음에서 말이 생기고 말에서 글이 생겨 시인의 가르침을 백성이 본받는다고 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두텁고 넉넉한(溫柔敦厚)' 마음의 시가 한 고장의 좋은 민심을 돕는다고 했다.
<장자>는 원래 천지에 큰 아름다움이 있다고 했다.<맹자>는 인간 본성에 감각적 쾌락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감각이 전부는 아니며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행하는 데서 얻는 것이 최상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서양에서 플라톤은 물질과 육체의 세계를 초월하는 불멸의 보편적 가치의식으로 이데아를 제창했다. 이 본질의 차원에 집중한 나머지 플라톤은 시가 본질계의 모방이므로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모방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정신에서 정화작용을 하는 것이라고 카타르시스론을 주장했다. 동양과 서양에서 이미 고대에 문학과 예술에 대한 원론적 논의는 상당히 전개되었다. 그 초기 단계에서도 '아름다움'의 개념에 관해 "본질적 직관인 자연미가 있고 인간 개성의 감각인 예술미가 있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에는 아직 예술의 범위 개념이 정돈되지 못했다. 문학. 미술. 음악 외에 재봉과 이발 등 손기술까지 예술이라 여겼다. 르네상스기에 이 손기술들이 예술에서 분리되었다.
서양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칸트의 저작 <판단력 비판>은 예술론이 미학적으로 발전하는 데에 토대가 되었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다. 아름다움의 보편적 형상은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 의해 공감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예술은 그것이 자연처럼 보여야 진정한 예술이다."
(<판단력 비판>) 1부 2장)
이것은 예술이 자연에 일치된다는 미학적 원리론이다. 그리고 예술은 보편적 직관이며, "아름다움은 도덕성의 상징" 이라는 말도 했다. 순수이성에 이어 실천이성의 양심률까지 연구하는 칸트가 예술의 개념에 도덕성까지 첨가해 놓았다. 그러나 어떤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강제로 예술을 구속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실천이성비판>에서도 칸트는 강제성을 띤 어떤 의도를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거짓과 폭력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싫어하고 저항하는 실천적 이성을 지니고 있으니 이것은 이 세계에 보편적 질서가 있다는 증명이다. 그런데 의롭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고 착한 사람이 고생만 하다가 죽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 양심률이 구현되기 위해서라도 내세는 있어야 한다. 천국에 가 보지 못했으니 내세가 있다고 증언을 할 수는 없지만 '내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방적 주장이 아니고 자연의 합목적적 당위론이다. 예술에 있어서까지도 이 도덕성의 요소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당연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미학적 결론이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미학이 학문적 영역으로 독립되지는 못했어도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연구들은 진지하고 깊이 있게 추진되었다. 지역적 전통문화의 개성이 어떠하든 이세계에는 자연과 인간적 개성이 충돌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본질적 직관과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예술로서 문학의 영역이 있다. 영국의 시인 키츠가 쓴 <그리스 술병> 끝 부분에 아름다움과 진리에 관한 노래가 있다.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답다! 이것이 그대들이 이 세상에서 아는 전부이고 알아야 할 전부이다."
대중성의 왜곡과 창조
문학에 있어서 대중성의 문제는 몇 가지 유형으로 분별해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수용미학에서 말하는 독자 대중이 있다. 문학은 작자와 작품과 독자가 함께 참여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독자 대중은 독자층으로도 불리는 것으로서 작품의 유통과정론 성격이 있다. 그러므로 창작 작업의 본령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둘째로 대중성은 이른바 통속소설이 대중소설로도 불리는 데서 연상되는 경유이다. 그러나 통속소설류는 1950년대에 문단적 작업들이 정예화한 이후로는 점점 위축되어 이제는 문학적 논의의 대상에서도 거의 사라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대중성의 경우는 작가의 개인주의적 처세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작가가 스스로 엘리트연하는 위상을 경계하고 범속한 대중에 친화감을 느끼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작가로서는 사회 현실 속의 이른바 거대담론 경향을 냉담하게 경원하는가 하면 한편으로 그의 작품은 때에 따라 베스트셀러급에 오르기도 한다.
역사 현실의 탁류 속에서 거대담론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객기와 소영웅주의 또는 황당무계와 과대망상을 연출하므로 경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주의 성향의 작가는 스스로 폐쇄적 에고이스트인 경우가 있고, 작품의 유통량이 향상되어도 작품 자체의 질적 차원을 보면 느닷없이 허무주의라든가 외설이 섞이고, 시의 경우에는 난해하게 관념의 공전을 드러내고 있다. 난해의 경우는 작품의 유통에도 관계가 없다. 그야말로 굳이 명분을 생각한다면 지난 세기말의 풍조였던 예술지상주의 같은 것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근래에 한국 시단이 난해시로 범람하고 있다. 일찍이 T.S.엘리엇이 난해시에 관해 말했다. "이해될 수 없는 진실은 없다" 고. 그렇다면 무모하게 난해시를 남발하는 시인들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시 자체를 이해하지도 못하며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대 현실의 변화를 맞이해 일정한 역사의식도 상실했고, 인간정신의 끝없는 내면적 깊이와 인간성의 무진장한 표정도 신뢰하지 못하며 머리로 꾸며서 쓰는 시들이 너무 많다.
이것은 시인들 서로가 바라보기에도 겸연쩍고 민망한 낭패의 계절이다. 이것은 지난 세기말의 퇴폐 사조뿐 아니라 1930년대 모더니즘 2천 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누적된 용도 폐기의 상태이다. 이쯤에서 문학은 일대 성찰과 재생의 미학을 챙겨야 할 것이다. 이때의 새로운 미학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는 듯이 기상천외한 것이 아니다.
혼미해 진로를 알 수 없을 때 돌파구는 어떠한 것인가. "변화무쌍한 것들 속에서 변하지 않고 있는것" 이것이 바로 돌파구다. "아름다움의 보편적 형상은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 의해 공감되고 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예술은 그것이 자연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도덕성의 상징이다." 이 대목의 미학은 변하지 않고 있으면서 동시에 돌파구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진로를 잃고 방황할 때에도 이 고전적 미학을 실천하며 활기 있게 창작의 임한 이들도 없지 않다.
시집 <악의 꽃> 때문에 퇴폐분자처럼 여겨지기도 한 보들레르의 경우는 실상 낭만적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리얼리즘 소설가 위고와 발자크의 친구였다. 그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이야말로 편협한 에고이즘과는 정반대인 열린 마음의 전형이었다.
그의 산문시들을 보면 한 시인의 정신이 얼마나 풍요한지를 알 수 있다.
"군중을 즐기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다. 군중과 섞이는 이는 열광적으로 환희를 안다. 거리를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에게 내 마음을 다 바치는 영혼의 성스러운 간음에 비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연애라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미미한 것이냐."
현대인들은 흔히 '군중 속의 고독'을 말한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 군중이라는 목욕탕 안에 알몸으로 들어가 보는 이의 홀가분한 자유는 더없이 상쾌하다. 거리에 밀물져 지나가는 인파 속 그녀가 누구인지 다시 만날 기약도 없으면서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그 아름다운 모습을 훔쳐 보는 영혼의 간음, 이것은 뜨겁고 풍요한 '인간애' 그 자체이다. 시인의 가슴은 이렇게 세상을 향해 흔쾌히 열려 있다.
<거렁뱅이를 때려눕히자>. 한 보름 동안 서재에 묻혀 있으면 24시간 내에 대중을 모두 행복하게 해 줄 방법에 관한 책들을 읽게 된다. 그러나 독서를 마친 이의 실천은 막연한 관념 속에 잠길 뿐이다. 시인이 바람이나 쏘이려고 집 밖에 나서는데 한 걸인이 다가와 동냥을 청한다. 시인은 다짜고짜로 그 걸인을 두들겨 팬 후 반격을 받아 때린 만큼 얻어맞는다. 그리고 일어서서 주머니에 있는 돈 절반을 걸인에게 준다. "두 사람은 똑같이 자존심과 분노를 지닌 평등한 인간이다. 이것이 시인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사격장과 묘지>. '묘지가 보이는 주막' 이란 간판이 달려 있는 주막 옆에 사격장이 있다. 주막에 들어가 앉으면 사격장의 총소리가 술병의 마개가 폭발하는 소리처럼 들려 온다. 인생의 덧없음을 아는 이들의 향연인가. 사람이 무덤으로 가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유일한 진짜 목적지에 이미 도착해 있는 고인들의 인식을 방해하면서 수선스럽게 사격의 놀이를 벌이고 있는가. 인간의 정체성으로서 가장 분명한 한 가지는 '결국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 한계를 가장 잘 기억하는 이가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다. 보를레르의 산문시 안에 누락된 중요한 그 무엇이 있는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이것이 시가 대중에게 소통하는 모습이다.
삷의 생동하는 구체성 속에서
시인이 가슴을 열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인간애를 발휘하는 것은 좋은 의미의 대중성이다. 그러나 이 대중성을 미학에 연결신다는 것이 미학을 위한 또 하나의 미학으로 관념화되어서는 안 된다.
미학의 동기와 결과는 현실 속 삶의 구체성을 생동케 하는 데에 연결되어야 한다. 2013년 6월 9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한 정부의 통일정책 실무자들이 전격적으로 만나 남북 장관급 회담의 진행에 착수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촉즉발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한 날들이었는데 느닷없이 판문점에서 만난 남북의 사람들은 악수하며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상호 '고무찬양'의 모습이다
정희성 시인의 시<어느 통일꾼의 주례사>가 있다. "신랑, 어때, 좋지?/신부도 좋지?/ 남과 북도 이렇게 합치면 얼마나 좋을까?/ 살아가면서 다투지들 말어/ 서로 고무찬양해야 돼" 이것이 작품의 전부이다. 올해 6월의 남북 회동은 불현듯 정희성의 이 시를 일깨운다. "서로 고무찬양 해야 돼" 이 한 마디가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남북이 서로 견해의 차이는 조절해 나아가면서 고무찬양을 하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런데 '고무찬양' 이 한마디 말은 남한의 반공법 안에 들어있는 죄목이다. 시 <주례사>는 촌철살인의 익살이다.
구소련의 미학자 바흐친은 스탈린 치하에서 5년간 시베리아 변방에 유배를 당했다. 바흐친은 굴하지 않는 민중언어의 주요 요소가 '익살' 이라고 보았다. 미완의 운명에 대응하는 인간성의 잉여와 역동성을 그는 신뢰했다. 고갈되지 않은 인간성의 잉여가 있으면 문학을 할 수 있다. 이념과 정치적 계파와 사회운동의 조직에 관계없이 아름다운 작품을 쓸 수 있다.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답다." 키츠의 시를 증명할 수 있다.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 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 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기없이 /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 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는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죄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 없는 저 강물에 지도받고 있다고
- 송경동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이 시를 쓴 송경동 시인은 실제로 용산참사 현장을 비롯해 각 기업의 노동분규 현장을 찾아다니며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하다가 몸을 다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 자세는 이 시에 있는 내용 그대로이다.
역사적 현실의 구체성 안에 들어가 '실천'을 한다는 것은 원래 어려운 일이다. 그 고통의 비장함 안에 갇히지 않기도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시인은 "말 없는 저 강물에 지도받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끝을 냈다. 현실적인 실천에서 조성된 치열성의 부담을 덜고 마음을 비운 모습이기도 하다.
한국 현대시문학의 범주에서도 문학의 예술성과 대중성 문제는 대강 가닥이 잡힌다. 여기에서도 역사의 원천과 오늘의 현장은 한 끈에 이어진다. 오늘의 한국 시문학 안에서 어떤 문제의식의 치열성과 언어의 밀도하는 왕성한 편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들은 대체로 해체 의식의 성향을 띠고 있다. 자연에 바탕을 둔 보편적 가치질서의 화법에서 일탈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2천 년대 이후로 확장되었다.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계권이 와해된 데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적 근대가 가고 사회주의적 현대가 오는 것이 사회과학에 의한 지성의 판단인 것으로 알았는데. 예측이 어긋났다는 것이다. 이 사태에 대해 저항을 하는 것이다.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의 추세이다. 기존의 존재론적 세게인식과 보편적 가치로부터 해체를 주장하며 '근대이후'를 기획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대안 자체는 마련이 되지 못하는 데서 허무의식이 팽배한다. 이러한 연유로 시가 난해하고 산만해진다.
그러나 자유와 책임에 바탕을 두는 보편적 가치의 세계는 쇄신을 동반하며 지속되어 갈 것이다. 예술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과정 자체가 자생적이며 아름다움의 추구이다. 이 아름다움은 감각적인 쾌락지상주의가 될 수는 없고 도덕성의 상징이라는 영예도 지닌다. 그러면서 미학은 관념이 아니고 역사적 현실의 구체성을 지니는 인간의 삶에 생동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현실의 구체성에서 뿌리뽑히지 않은 인간의 삷이 창조하는 문학, 여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의 세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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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서/ 문학평론가. 1963년<신사조>에 평론 발표로 비평 활동 시작.저서로 <한국문학과 역사의식> <자연과 리얼리즘> 등 다수와 수필집 <면양정에 올라서서> 시조집 <불멸의 좋은 시간> <세족례> 등이 있다. 요산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 수상.
첫댓글 근래에 한국 시단이 난해시로 범람하고 있다. 일찍이 T.S.엘리엇이 난해시에 관해 말했다. "이해될 수 없는 진실은 없다" 고. 그렇다면 무모하게 난해시를 남발하는 시인들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시 자체를 이해하지도 못하며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대 현실의 변화를 맞이해 일정한 역사의식도 상실했고, 인간정신의 끝없는 내면적 깊이와 인간성의 무진장한 표정도 신뢰하지 못하며 머리로 꾸며서 쓰는 시들이 너무 많다. 것은 시인들 서로가 바라보기에도 겸연쩍고 민망한 낭패의 계절이다. 이것은 지난 세기말의 퇴폐 사조뿐 아니라 1930년대 모더니즘 2천 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누적된 용도 폐기의 상태이다.
혼미해 진로를 알 수 없을 때 돌파구는 어떠한 것인가. "변화무쌍한 것들 속에서 변하지 않고 있는것" 이것이 바로 돌파구다. "아름다움의 보편적 형상은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 의해 공감되고 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예술은 그것이 자연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도덕성의 상징이다." 이 대목의 미학은 변하지 않고 있으면서 동시에 돌파구 역할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진로를 잃고 방황할 때에도 이 고전적 미학을 실천하며 활기 있게 창작의 임한 이들도 없지 않다. 시집 <악의 꽃> 때문에 퇴폐분자처럼 여겨지기도 한 보들레르의 경우는 실상 낭만적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리얼리즘 소설가 위고와 발자크의 친구였다.
구소련의 미학자 바흐친은 스탈린 치하에서 5년간 시베리아 변방에 유배를 당했다. 바흐친은 굴하지 않는 민중언어의 주요 요소가 '익살' 이라고 보았다. 미완의 운명에 대응하는 인간성의 잉여와 역동성을 그는 신뢰했다. 고갈되지 않은 인간성의 잉여가 있으면 문학을 할 수 있다. 이념과 정치적 계파와 사회운동의 조직에 관계없이 아름다운 작품을 쓸 수 있다.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답다." 키츠의 시를 증명할 수 있다.
십수 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기없이 /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 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는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죄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 없는 저 강물에 지도받고 있다고 / 송경동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예술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과정 자체가 자생적이며 아름다움의 추구이다. 이 아름다움은 감각적인 쾌락지상주의가 될 수는 없고 도덕성의 상징이라는 영예도 지닌다. 그러면서 미학은 관념이 아니고 역사적 현실의 구체성을 지니는 인간의 삶에 생동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현실의 구체성에서 뿌리뽑히지 않은 인간의 삷이 창조하는 문학, 여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의 세게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