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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의 산실, 영암 구림마을...대동계 꽃핀 회사정, 그 열매는 탐스럽다
호남 3대 명촌 구림마을
영암 3대 정자 회사정
향촌사회 지침서 구림대동계
전남 영암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고장 군서면 구림(鳩林), 구림은 비둘기 숲에 깃든 공동체라고 하는 구림 마을은 나주시 노안면의 숲이 우거져 새의 낙원이라 불리는 '금안동(禽安洞)' 마을, 정읍시 칠보면의 유교와 선비문화가 살아 숨 쉬는 '무성(武城)' 마을 등은 호남 3대 명촌(名村)으로 손꼽는다. 또 구림 서구림에 있는 회사정은 영암 3대 정자로 알려져있다.
회사정이 있는 곳 구림, 구림이라는 마을 지명은 신라 때 이곳에 사는 최씨 처녀가 마을 앞 냇가에서 빨래터와 연관된 설화가 등장한데 여기서 연루되어 지었다.
어느 날, 날이 밝자 최씨 처녀는 마을 앞 냇가에 가서 냇가 한편에 있는 구시 바위에서 빨래를 했다. 그런데 물에 푸른 오이가 둥둥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그 오이를 건져 먹었다. 빨래를 하다가 생각 없이 오이를 먹은 최씨 처녀는 임신을 하게 됐다. 최씨 쳐녀 부모는 딸이 아이를 낳은 것을 알고, 얼굴을 붉히며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집안 망신이라며, 딸을 나무란 부모는 아이를 몰래 마을 숲속 바위 위에 내버렸다. 사흘 후 최씨 쳐녀가 그곳에 가보니 비둘기들이 날개로 아이를 덮어 보호하고 있었다.
최씨 딸은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고 다시 아이를 키우게 됐다. 이 아이가 바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대가이면서 대한민국 불교사찰을 많이 세우며 불교문화를 크게 융성하게 했던‘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비둘기 구(鳩), 수풀 림(林) 자를 써 구림(鳩林)이라고 했다는 전속 속의 바위인 국사암의 서쪽을 서구림(西鳩林), 동쪽을 동구림(東鳩林)이라고 한다.
구림 마을 중에 서구림은 바다인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상대포(上台浦)라는 포구가 있다. 상대포는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일본을 오가는 배가 드나들었던 국제무역항이다. 상대포를 통해 이 고장 출신인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이 포구를 이용했다. 또한 신라 최치원도 이곳 상대포를 통해 당나로 유학을 갔다.
이런 유서 깊은 고장, 구림 마을은 '대동계(大洞契)' 라는 향약(鄕約), 즉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고 향촌민을 통제할 목적으로 상하 합계(合契)의 형태로 조직하였다.
구림 대동계는 언제 생겼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1706년(숙종 32)에 박사량(朴思諒)이 작성한 구림동계 전말서기(顚末書記)에 따르면 1565년(명종 20)에서 1580년(선조 13) 사이에 창계(創計)된 것으로 추측된다.
대동계는 선산 사람 임호(林浩)의 구림동중수계서(鳩林洞中修契序)에 따르면 창계 목적은 함양 사람 박규정(朴奎精)을 동장으로 임호, 이광필(李光弼), 박성정(朴星精), 유발(柳潑), 박대기(朴大器), 임완(林浣) 등이 주축이 되어 이미 구림 마을에 존재해왔던 이사 조직을 계승, 발전시켜 향약(鄕約) 정신을 구현함으로써 이상향(理想鄕)을 건설하자며 한동안 멈췄던 구림 대동계를 다시 부활시켰다.
호남의 대표적인 동약(洞約)으로서의 향약에 있어서 대한민국에서 표본이 되고 있는 구림 대동계는 임진왜란 등으로 운영이 침체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1613년(광해군 6)에 중수하였다. 이때는 은퇴한 양반 세력이나 향촌사회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토호적 향리(鄕吏) 세력인‘재지사족(在地士族)’이 결속하여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고 향촌민을 통제할 목적으로 상하 합계(合契)의 형태로 조직하였는데 이로써 조선 후기 동계(洞契)의 특징이 마련되었다고 한다.
그 후 1641(인조 19)~1646년(인조 24)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중수 사업에서는 다리나 도로의 보수 등 동리(洞里)의 공동사업에 관련된 약조가 추가되고 태만한 사람을 마을에 떠나게 만든 출동(出洞)으로 벌하는 등 상하 합계의 촌락공동체적 기증을 더욱 강화하였다.
구림 대동계는 현재까지 동계(洞契)로서 그 맥을 유지해오고 있는 전라남도 지방의 대표적 동계이다.
구림 대동계에 관련된 문서는 총 3종 81책으로 마을의 법조인 동헌(洞憲) 규약은 1609~1743년까지의 것이 잘 보존되어 있고 근래에 만들어진 완의(完議) 등을 비롯하여 집문서들도 있다. 이러한 동계 책과 고문서류는 조선시대 향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구림 대동계 3종 81책은 서호동헌(西湖洞憲) 3책(1613년), 계중수좌목(契中修座目), 완의(完義) 가로 26Cm 세로 34.5Cm, 상계안(上契案) 1책(1643년), 좌목(座目) 가로 24Cm 세로 31.5Cm 1책, 회사정제영(會社亭題詠) 1책, 구림동 중수계서(鳩林洞 中修契書) 가로 25Cm 세로 39Cm, 부급안(賻給案) 1책(1686년), 상사시부의물목(喪事時賻儀物木) 가로 19Cn 세로 25.5Cm, 동헌(洞憲) 1책(1686년), 서호동안(西湖洞案) 1책, 계약(契約) 가로 20.5Cm 세로 27Cm 8책 등이다. 이 외에도 상서(上書).품목(稟目) 4매와 문산재(文山齎) 샹량문 4매 등의 고문서가 있다.
구림 대동계는 마을 향약계(鄕約契)로서 그 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호남의 대표적 동약(洞約)으로 조선 시대 동계의 성립과 운영 전반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관련 동계 책과 고문서류는 조선 시기의 향약과(鄕約) 동계(洞契)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이라는데 특히 가치가가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여길만한‘보편적 가치(普遍的 價値)’라 할 수 있다.
영암 구림 대동계 문서는 구림 대동계 청사(廳舍)인 강수당(講修堂)에 소장되어 있으며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암 구림 대동계 문서를 보관하고 있는 강수당 옆의 회사정(會社亭)은 대동계의 창설과 때를 같이하여 지어진 회원들의 집회 장소이자 마을을 찾은 귀빈의 영접이나 경축 행사를 치르던 장소이며, 3.1운동 때 독립 만세의 기치를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구림 대동계는 1565년 경 조행립(曺行立), 현건(玄健), 박성오(朴省吾), 임호(林浩), 박규정(朴奎精) 등에 의해 창설된 이래 2021년 현재까지도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암의 3대 정자(군서 구림 회사정, 덕진 영보 영보정, 신북 모산리 영팔정)인 회사정은 1646년 창건돼 6.25 전쟁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980년에 복원된 것이다.
회사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이다. 2021년 현재 회사정의 내부에는 구림동중수계서(鳩林洞中修契序), 회사정병서(會社亭幷序), 회사정중건기(會社亭重建記)와 시문 7기의 현판(懸板)과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회사정이 있는 곳은 평평한 평지이다. 바로 옆으로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고 이 실개천 끝에는 상대포가 있다. 회사정은 바로 바다인 영산강과 근접해있는 정자이다. 회사정이 있는 주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수령과 함게 아름다운 수형을 자랑하고 있다. 아름다운 소나무 군락지에 자리한 회사정, 회사정은 소나무를 품으며 여기에 온 사람들의 정서도 품어내고 있다. 회사정 주변의 소나무는 한때는 일제강점기시대 공출로 태반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몇 구루는 억척스럽게 살아남아 회사정 주변을 두르며 자연의 환경을 극찬하게 하고 있다.
영암 구림 대동계의 집회 장소로 세워진 회사정, 1646년 세워진 회사정, 1565~1580년 사이에 시작하여 대동계를 가졌던 회사정 구림 마을 사람들의 집회 장소이자 쉼터였다.
회사정에서 향약의 성격인 대동계를 열며 마을의 정사를 논의하고 발전을 바랐던 마을 사람들, 그들이 추구했던 계약과 동헌, 강령은 그 내용이 향약의 성격이 강했다. 기존의 동계에 중국에서 전래한 향약이 반영된 향약적 성격의 동계였다.
조선시대 성행했던 향약은‘향촌규약(鄕村規約)’의 준말로 지방의 향인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약속이다.
넓은 의미로‘향촌규약(鄕村規約), 향규(鄕規), 일향약속(一鄕約束), 향약계(鄕約契), 향안(鄕案),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안(洞安), 족계(族契), 약속조목(約束條目)’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원칙적으로 향약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자치와 이를 통해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숭유배불정책에 의하여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각종 재난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기 위한 규약이라고 할 수 있다.
향약이라는 용어가 역사적 의미를 지니면서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실체로써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전국적으로 시행 보급되면서부터이다.
중앙집권적 관료제 사회로 신분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초기에는 자치적 기능이 미약했고 향촌사회의 독자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건국 초부터 지방에서 시행하고 있던 향규는 중앙집권을 위한 보다 효과적인 지배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관치의 보조 기능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군현 단위든 자연 촌락 단위든 간에 자치적 기구가 존재했고 자치적 기능도 일정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향청(鄕廳)을 근거로 하는 사족(士族) 또는 향족(鄕族) 등의 활동은 향촌사회의 권익과 특성을 대변해 주었으며, 촌락에서 자생적인 촌계(村契)는 당시 생활이나 문화 수준에서 필요했던 상부상조의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시키고 안정된 사회생활을 지속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향약은 그 성격, 기능, 내용에서 특히 시대적 배경 속에서 향규(鄕規), 동계(洞契), 주현향약(州縣鄕約), 촌계(村契)로 나누어 보는 것이 조선시대 향약을 더 잘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동계(洞契)는 임진왜란 후 실정에 맞게 간편한 것을 위주로 하였는데 여씨향약(呂氏鄕約)과 관계없이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속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체 구성을 권면조(勸勉條)와 금제조(禁制條)로 나누고 권면조는 진충사군(盡忠事君), 창의복수(倡義復讐) 등 11조, 금제조는 불구급난(不救急難), 천벌금림(擅伐禁林) 등 18조로 시국과 사회생활을 반영한 독특한 약조로 되어 있다. 또한 이 약문에는 고평등의 상민도 계중(契中)에 들게 하여 하계(下契)라는 용어가 처음 보인다.
조선 후기 동계는 임란 후 전후복구의 급한 고비를 넘긴 뒤부터는 상하 협력보다는 상계에 대한 하계의 순종을 강조하는 수분(守分)이 첫째가는 덕목으로 고취되는 등 사족의 동민 지배기구로 성격이 강화되어 갔다.
그러나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신흥세력으로 부상한 부농층 서얼들이 면리(面里)의 실무를 맡게 되자 사족들의 향권(鄕勸)은 약화되었다.
조선시대의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은 시행 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예속(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긴박시켜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고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서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향약은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강령인‘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 예속을 서로 권장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취지를 살려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이 마련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족세력은 하층민들을 통제하고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를 강화할 목적에서 양반신분의 상계(上契)와 상민신분의 하계(下契)를 합친 형태의 동약(洞約)을 만들었다.
향약은 17세기 후반부터 유향(儒鄕)이 나누어져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된 반면에, 면리제(面里制)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수령권(守令權)이 강화되어 지방관이 주도하여 향약이 확산되어 갔다. 면을 단위로 하여 기존의 동계.촌계를 하부단위로 편입시켜 신분에 관계없이 지역주민 전부를 의무적으로 참여시켰다.
향약은 19세기 중 후반 서학(西學), 동학(東學) 등 주자학적(朱子學的) 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함에 따라 향약의 조직은 1860년대 이후 이항로, 기정진 등 보수적인 유학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반침략, 반외세의 정치사상으로 성리학적 세계관과 지배체제를 강화하여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려는‘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에 활용되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 측에서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는 미명 아래 식민통치(植民統治)에 활용하였다.
1565년 임구령, 박규정, 신희남, 이후백, 백광훈 등의 주도로 영암 지역 최초의 향약(鄕約)이 성립하였는데 임구령과 박규정이 바로 구림출신이니 구림 대동계(大洞契) 역시 비슷한 시기에 조직됐다.
구림 대동계는 본래 임진왜란 전에 만들어졌지만 이 난으로 동계와 관련된 기록이 소실도자 광해군 원년에 완의(完議)를 만들면서 복구한 1646년의 중수계안(重修契案)이 조선시대 말까지 존속되었다.
이 계는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상하 합계로 만들어졌으며 그 주된 내용은 혼상부조로 특히 상사(喪事)의 부조가 중심이었다. 동계원은 70명으로 한정하여 그 전통은 현재도 지켜지고 있으며 계의 운영은 보미(補米)를 수합하여 필요한 경비에 사용하였다.
17세기 중엽에는 보미의 수합이 순조로워 이를 재원으로 전답을 구입, 의장(義庄)을 마련하였으며 계답(契畓)은 하인에게 병작(竝作)시키고 수조(收租)는 전적으로 유사가 책임졌다.
구림 대동계는 임진왜란을 만나 잠시 위기를 맞았으나 1610년 무렵에 중수가 이루어지고 이때 밝혀놓은 동계(洞契)의 목적이‘전쟁 이전의 전통 복구, 향촌의 결속과 안정, 통제’등으로 볼 때 향약적(鄕約的) 성격을 여실히 보여줌을 알 수 있다.
1641~1646년에는 제중수가 이루어지는데 그 기본 취지는 역시 사족(士族)에 의한 향촌 지배 질서의 구축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동계는 큰 변화 없이 구림 특유의 보수적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준수되어 온 덕에 깊은 유서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구림 대동계는 그저‘잘 살아 보세’를 위한 동네 사람의 모임이 아니었다. 17세기 사족의 입장에서 향촌 지배 질서를 담고 있는 만큼 다분히 위압적인 면도 강한 대동계였다.
예컨대 마을 공동의 사업, 이를테면 교량이나 도로의 보수 및 개선, 마을 하천 보수 및 개선 등의 일을 벌이면서 여기에 태만한 사람은 가차 없이 계(契)에서 빼는‘출계(出契)’정도가 아니라 마을에서 쫓아내는‘출동(出洞)’으로 벌(罰)했다.
대동계는 지역의 헌법(憲法)이면서 민법(民法), 형법(형법), 상법(商法), 세법(稅法), 노동법, 경제법, 사회보장기본법, 교육기본법, 청탁금지법 그리고 관습법(慣習法)과 예법(禮法) 같은 규약이며 규범으로써 그를 기준으로 하여 마을 정사를 봤고 이를 통한 올바르고 훌륭한 발전을 기했다.
대동계는 향약으로서의 마을 발전만 기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출세 등 훌륭한 인물로 키워내고 배출시키는데도 적용됐고 넓은 의미로 이용했다.
촌락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공동 노동이야 필수적인 것이지만 문제는 상하 두 개의 계가 합쳐진 동계로 상계(上契)에 속한 사류(士類)들이 동네 울력에 함께 참여했을 리 없다는 점이며, 결국 상계가 하계(下契)를 지배하는 형태가 되면서 하계원(下契員)은 지속적으로 탈락해 나가고 결국 반족짜리 동계(洞契)가 되지만, 그래도 구림에서 동계가 차지하는 지위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회사정 주변에는 불효(不孝)나 풍기문란(風紀紊亂)을 일으킨 자를 묶어놓고 온 동네 우세를 시키던 돌(石)이 지금도 우뚝하다.
회사정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지방자치 화합을 했던 곳이다. 회사정에서 동계를 논의하며 마을 정사를 폈던 것은 지금의 주민자치라 할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 주민자치를 논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읍면동과 통리다. 읍면동과 통리를 민주화, 자치화 시키는 것이 주민자치의 출발이다. 이런 주민자치는 조선시대부터 향약이라는 규약으로 실시됐으며 이런 자치제가 오늘날의 지방자치의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
동과 읍면 주민자치회는 사회소속이다. 주민자치의 주체가 자치단체에서 지역사회로 변하고 있으며 기능도 달라지고 있다. 사회적 자본 형성, 사회 서비스 공급, 주민의 목소리 대변이 주민자치회가 담당해야하는 기능인 것이다.
향약은 종친 간 또는 마을 사람들 간의 상부상조를 위한 규약이었다. 조선에서 이를 향약으로 받아들여 사족들의 향안이 되었는데 반상에 의거한 수직적 관계를 구축해 상민의 도덕교화에 목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향약은 수령향약으로 변모하여 수령이 친정하기 때문에 수령의 현명함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수령향약은 자치조직이 아니라 통치조직이었다. 결국 조선 향약은 이런 과정을 거쳐 실패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수령향약의 실패가 향촌자치의 새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수령은 현처에서 업무를 보고 양반은 향교에서 공부하며 수령이나 양반 없이 상민들끼리 함께한 촌계가 그것이다. 이게 바로 조선의 주민자치이다. 향규, 상하 합계, 수령향약 다 실패하고 오직 촌계만 성공했다. 조선 향약이 주는 교훈은 주민끼리 수평적, 민주적으로 자치할 때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 상황과 너무 닮았다. 수령대신 행정이 주도하고 간섭한 주민자치는 실패했다.
현전 회사정은 한국전쟁 때 불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1980년에 복원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회사정은 다른 정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칸과 칸 사이가 매우 넓어서 남도의 고만고만한 누정과는 달리하며, 제법 웅장한 느낌을 준다. 내부는 방을 두지 않는 통마루형 구조인데 개인 소유가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공동(共同)으로 사용하던 집회(集會) 장소라는 본래의 이용 목적에 충실한 구조이다. 정자 주변에 아름드리 소나무 군락지가 조성되어있어 회사정의 운치는 더할 나위가 없다.
회사정이 마을을 찾은 귀빈(貴賓)의 영접 장소로 이용하거나 경축일(慶祝日) 행사장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하니, 남도 천리 길 영암 구림 마을 회사정일지라도 월출산 산수 좋은 풍경과 상대포 그리고 구림 마을을 감상하면서 풍류를 즐겨보고 싶은 곳이기에 천리 길 마다하지 않고 인생 축복을 누리고 싶어 한 전남 영암 구림‘회사정(會社亭)’이다. 구림 회사정은 영암의 3대 정자의 하나이다. 덕진 영보의 영보정, 신북 모산리의 영팔정과 다른 점은 회사정은 외국과 국내 귀빈들을 맞이하여 영접(迎接)한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띠었다는데 의미를 달리한다.
구림 마을은‘역사책(歷史冊)’이라고 한다. 주변에 유서 깊은 문화재들이 많아서다. 초기 구림 대동계를 이끌었던 조행립을 모신 사우 서호사(西湖舍)와 조중수 가옥이 있으며, 사유도기 발상지를 기념하는 구림도기박물관, 왕인이 일본으로 떠난 상대포, 서호정 마을의 호은정 등 여러 역사문화 숨결이 숨 쉬고 있다.
그리고 구림 마을을‘자연책(自然冊)’이라고도 한다. 주변에 수려한 경치들이 병풍처럼 펼쳐져있어서다.『남쪽 고을에 그림 같은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오르지 않고 이 산에서 오르더라』최초 한문소설을 지은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월출산에 대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수려한 월출산이 있다.
구림 마을은 뒤로는 월출산이 앞으로는 바다가 흐르던 곳의 남도의 젖줄 영산강, 영산강의 부드러운 갯벌, 구림 마을 서쪽은 왕인이 일본으로 떠난 상대포가 있다면, 동쪽은 한없이 구불거리는 돌담길, 그 길에는 호은정, 죽림정, 국사암, 죽정서원, 동계사, 육우당 최근에 지어진 상대정까지 누정과 재실이 한가득, 구림도로가엔 벚나무 가로수 등 수려한 자연 풍경과 함께 조성되어있다.
대동계와 회사정으로 유명한 구림 마을은 다양한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어 자연과 함께 역사와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영암군의 문화유산 중 약 40%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을 정도로 문화유산 보고이다.
이곳은 450여년 전통의 대동계가 현존하며 백제 왕인박사, 신라 말 도선국사, 고려 초 최지몽 선생 그리고 1555년 을묘왜변 최경창, 1589년 기축옥사 조기서, 1592년 임진왜란 박공량, 1693년 이순신을 도운 연주현, 조선 후기 실학의 새로운 싹을 틔운 박서체와 박태초 등이 있었고 3.1독립운동 때 의기를 모은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또한 앙주최씨, 함양박씨, 창녕조씨, 해주최씨, 연주현씨 등 대표 다 성씨가 살고 있으며 인근에 반남박씨, 천안전씨, 남평문씨 등이 있어 성시별로 문중과 관련된 여러 유적이 전하고 있다.
영암 죽정 마을뿐만 아니라 조승수 종택, 고죽관, 회사정, 죽정서원, 죽림정, 호은정, 간죽정, 대동계사, 육우당, 국사암, 도갑사 등 많은 문화유산과 함께할 수 있다. 국보 제76호 이순신 장군과 현덕승 간에 오고 간 서간첩의 글귀인‘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가 새겨져 있는 이순신 장군 어록비가 있어 호남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영암 구림 회사정과 대동계는 연관성을 가진 문화유산이다. 보편적 가치성을 띤 대한민국의 보고이다. 이것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여겨도 손색이 없다. 대부분의 정자(누정.누각)들은 홀로 조성된 느낌이 강하는데 구림 회사정은 자연과 사람과 마을 등을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진 게 특징이며 독보적인 회사정이라 볼 수 있다. 특히 회사정은 거대한 촌락(村落)을 이루고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게 의미가 다르다.
구림 마을은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예전의 마을 풍경을 잘 보전하고 전승하고 있으며 마을길을 걷노라면 집집마다 옛 풍습이 향취로 자극하고 있다. 또한 담장마다 마음의 경계를 허물게 한다. 낮은 돌담장은 집안의 생활상을 살며시 엿보게 해주고 있다. 돌담길은 자연의 연장선이다. 저 월출산의 바위와 돌멩이가 이곳 구림 마을까지 굴러와 월출산의 정기를 이어주게 하고 있고 그 기운을 같이하고 있다. 월출산의 기암괴석에 서있는 소나무는 구림 회사정의 소나무 수림이 되어 월출산 자연은 어느 곳에서나 함께 존재한다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돌담길을 걸면서 회사정에 앉아 쉬어가고자하는 나그네에게 손을 기꺼이 내미는 구림 마을사람들, 정은 물처럼 흐르고 사랑은 꽃처럼 피어나고 하는 구림 마을의 정서는 당신의 삶을 아름답게 한다.
회사정에 모여 대동계를 연 풍속은 지나가는 나그네라도 그 모임에 함께하게 하여 울력이 아니더라도 논할 수 있는 게스트의 자격을 부여하고 있는 구림 마을은‘열린향촌’이다. 회사정이 다른 정자와는 달리 칸과 칸 사이가 넓은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겠다는‘수용(受用) 정신’에서 입각해 정자의 규모를 크게 잡았다.
어떤 정자들은 정자에 방을 두고 있는데 회사정은 방이 없다. 사면으로 확 트인 구조다. 이것은 사방의 자연을 다 품어 들이겠다는 뜻이요, 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선을 가리는 일에 최소화했다.
정자에 사람들만 모여 정사를 논하거나, 쉬면서 좌담을 하거나, 귀빈과 술 한 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하거나 또는 경축일에 잔치를 벌이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주변의 월출산, 영산강과 산새, 물새, 곤충, 짐승과 나무, 꽃 등도 끌어들여 함께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둥을 최소화한 것이며 칸과 칸 사이를 넓게 하여 그만큼 수용자들을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했다.
회사정의 소나무는 회사정의 한 부분이 되어주면서 오래된 수령(首領)도 있지만, 키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용(龍)이 승천하는 듯이 구부러진 수형(樹形)은 작품답다.
어떤 소나무는 회사정을 굽어보고 있고 어떤 소나무는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어떤 소나무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굽어보고 있다. 어떤 소나무는 냇가를 굽어보면서 냇물과 그 안에 잇는 물고기들과 대화를 하는 듯하다. 어떤 소나무는 새들의 쉼터가 되어주겠다고 어깨를 내주고 있다. 어떤 소나무는 회사정과 마을을 지키겠노라고 수호신으로서의 서있다.
회사정을 감싸고 있는 소나무, 우리 조상들이 사랑한 소나무는‘장수, 영원, 절개, 지조, 군자와 정화의 상징, 귀신을 쫓고 반듯한 선비를 상징’하는 소나무이기에 조상들은 금줄, 결혼식 장식, 장례식 관에 이르기까지 소나무를 널리 사용했다.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나무 1위인 소나무의 모습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며 한국인의 마음속 풍경의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 소나무가 없다면 그것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아닌 것이다.
동양을 대표하는 나무는‘소나무’이고 그래서 동양을 소나무 문화권이라고 한다. 소나무는 중국에서도‘장수, 용기, 성실, 역경’에 굴하지 않는 자세를 상징하고 공자의 덕(德)을 표지했으며, 일본에서도 학(鶴)과 흰 수사슴과 함께 묘사되면서‘장수’를 상징하였다.
또 그리스에서도 재우스 신의 표지로 상징될 만큼 튀르소스의 지팡이 꼭대기에는 솔방울이 달려있다. 그래서 디오니소스가 괴물 타이탄에게 먹히고도 다시 소생할 수 있었던 것은 소나무가 가지는‘불사(不死)’의 힘 때문이었다.
소나무에 인격과 신성성을 부여한 것은 우리의 경우도 그러하다. 민간과 도교에서‘영원불멸(永遠不滅)’을 상징하는 생물 중의 하나였고 장대한 노송은 하늘의 신들이 땅에 내려올 때 이용한다고 믿었듯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영물(靈物)’로 어겼다.
그리고 겨울에는 눈 속에서도 변치 않는 푸름은‘군자의 덕(德)’을 상징했고 애국가에도 등장하면서 국난의 시기에‘민족정신(民族精神)’을 일깨웠다.
꽃 중에 일품은 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피어 생명의 봄을 알리는 매화로, 나무의 일품은 사시사철 푸름으로 지조를 잃지 않는 소나무를 뽑았으니 소나무는 정신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예사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가 바로‘소나무’였다.
소나무는 이처럼 정신적인 문화 상징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함께해온 나무이기도 했다. 한국인은 소나무와 같이 나서 소나무와 같이 생을 마무리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소나무는 생활의 반려자였다.
식물에는 저마다 자신의 몸을 위해한 미생물로부터 보호하는 피톤치드라는 물질을 발산하는데 소나무는 보통의 나무 보다 10배나 강하다고 한다. 선승 등과 같은 수행인들이 솔잎과 콩가루만 먹으면서 물만을 마셔도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솔잎 속에 들어있는 옥실팔티민산이라는 물질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 회사정의 소나무는 수행하는 선승들처럼 대동계의 정신을 맑게 하는데 역할을 띠었다.
저 낭떠러지에 버티고 서있는 소나무로부터 옛사람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그가 지조를 지키려는 선비였다면 '의연함' 이었을 것이고, 그가 용맹한 장수였다면 위태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 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소나무가 '의(義)와 충(忠)' 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구림 회사정에 자라나고 있는 소나무는 자연적으로 자라난 소나무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심어 자라난 소나무라고 볼 수 있다. 회사정에서 동계를 논하려는데 있어서 그 향약 정신의 의미를 더 살리기 위해 소나무를 식재했으리라 판단된다. 마을 사람들은 회사정을 더 운치 나게 하기 위해 의미가 깊은 수종인 소나무를 선택하여 정자와 함께 '어울림' 을 연출했다고 보여 진다.
나비는 너울너울 춤을 춘다. 회사정 뜰에 꽃이 유혹해서다. 물고기는 물갈기를 찬다. 회사정에 모인 사람들이 조잘거려서다. 그래서인지 참새도“짹짹”뒤질세라 조잘 거린다. 소나무 위로 한 마리 학이 날아든다. 백로도 날아드는 회사정의 소나무 숲은 십장생(十長生)이 된다. 민화와 한국화가 따로 없다.
소나무에 에워싸인 회사정은, 동계를 논했던 회사정은 어떨 때는 쉼표를, 어떨 때는 감탄사를, 어떨 때는 물음표를 찍는다. 열심히 일을 하는 분에게 잠간 쉬었다하고 쉼표(,)를 해주고, 일을 참 잘한 분에게 감탄사(!)로 표시해주고,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는 분에게 마침표(.)를 해주고, 궁금하게 하는 분에게 물음표(?)를 던져주며 답을 내준다.
대동계를 논했던 회사정은‘보편적(普遍的) 가치’가 있다. 보편적 가치란‘여러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이다. 생명, 자유, 정직, 신뢰, 평화, 평등이 육체적 쾌락, 개인적 즐거움, 금전적 욕구보다 보편적이다.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화. 평등 등과 같이 대부분의 사람이 의견을 같이 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자라고 한다.
회사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었기에 소통의 장(場) 이것은 너와 나의 인간적인 '교류' 였으며, 산실의 장 이것은 우리 모두가 낳은 '희망' 이었으며, 상생의 장 이것은 서로가 살아가기 위한 '공존' 이었으며, 발전(번영)의 장 이것은 다 같이 잘사는 '영화' 였다.
회사정과 소나무는 상관의존관계로 의미에 맞게 서로 가치를 띠게 했다. 회사정과 대동계는 보편적 가치를 띤 우리가 지켜가고 이어가야할 정신적.행동적 문화유산이다.
장자가 주로 선비들의 쉼터로서 존재하면서 논쟁을 벌인 곳이었다. 국내 곳곳에 있는 정자들을 보면 어느 특정인을 위한 세워진 정자가 대체적이다. 요즘 같은 우산각이 아니었기에 누구나 정자에서 지낼 수가 없었다. 상류계층이 아니면 절대 정자에 자리하지를 못했다. 신분에 따라 정자가 지어졌고 역할을 띠기도 한다.
그런 반면에 영암 군서면 서구림리 서호정 마을에 있는 회사정은 마을 사람은 물론, 귀빈이나 지나가는 나그네라도 제한을 두지 않고 이곳에서 쉬어가게 하고 모여 덕담을 나누게 하고 심지어 가무(歌舞)가 있는 잔치를 벌이게 했다. 회사정을 지은 주목적은 향약이라는 동계를 의논하기 위함이었기에 마을 사람들이라면 어느 누구나 이 누각(회사정)에서 회의를 같이 하거나,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놀 수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구림 회사정은‘수용정자(受用亭子)’라고 할 수 있으며 회사정은‘포괄적, 광의적, 상호적, 보편적, 공동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회사정이란 이름은 한문 풀이 그대로 모일 회(會), 모일 사 또는 단체 사(社)의‘어떤 단체가 정자에 모인다’라는 뜻이다. 모임을 위해 정자에 모인다는 뜻에서 지은 회사정(會社亭), 회사정의 회사(會社)의 어원은 살펴보면 이렇다.
상형문자에서 회(會)자는‘모이다, 만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會자의 갑골문을 보면 뚜껑과 받침 사이에 음식이‘會’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음식을 보관하는‘찬합’을 그린 것이다. 會자는 이렇게 찬합이 결합하는 모습으로 그려져‘모이다’나‘모으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사물이 결합하는 모습의 會자는 후에 사람 간의 만남이나 만남의 시간과 관련된 의미를 파생시키게 되어 지금은‘만나다’나‘시기’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會는 윗부분은 지붕을, 중간부분은 창고를, 아랫부분은 창고의 문(口)을 그렸다. 창고는 고대 중국에 농경사회였던 점을 감안할 때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였으니 곡창(穀倉)에는 여러 종류의 곡식을 함께 저장해 두었을 것이고, 이로부터‘모으다’라는 뜻이 생겨났다. 따라서 회의(會議)나 동문회(同門會)처럼 회는 곡식을 창고에 모으듯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상형문자에서 사(社)는‘모이다’나‘행정단위, 토지 신’이라는 듯을 가진 글자이다. 社자의 갑골문을 보면 보일 시(示)자와 흙 토(土)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示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그린 것으로 여기에 土자가 결합한 社자의 본래 의미는 토지의 신이었다. 신에게 제사를 지낼 떼는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제물을 바친다. 그래서 社자는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후에‘모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두 한자들을 살펴보아 회사의 모여 있음의 주체는‘사람(人)’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로 회사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즉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마을 지키고 있는 주민들에게 당신은 회사정을 나가십니까? 물었을 때 나올 수 있는 답변을 가늠하여 열거해보면『집안이 잘되기 위해서, 마을이 잘되기 위해서, 농사가 잘되기 위해서, 자식이 잘되기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먹고 살아야 되니까, 마을 사람들과 화합과 단합을 위해서, 협동심을 키우기 위해서, 협력을 위해서, 상부상조하기 위해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서로 의지하고자, 마을을 가꾸기 위해서, 마을 발전을 위해서, 마을 미래를 위해서, 세상 밝게 하기 위해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자아실현을 위해서, 꿈과 희망을 키우기 위해서, 마을 사람과 마을이 위대해지게 하기 위해서』하는 등의 답변이 나올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일반론적인 사람들 기준으로 회사(會社)에 대해 정의를 내려 본다면, 회사란 개개인이 협동심을 통해 집과 마을이 평화롭고 영화롭고 아름다운 마을로 가꾸어나가기를 바라는, 먹고 살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장소, 즉 회사정(會社亭)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정의를 합친다면 회사(회사정)란 개개인이 많은 재물을 모으고 환경이 윤택하고 가정이 넉넉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함축할 수 있는데 재물, 즉 경제력이 있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개인의 삶을 고려한다면 회사(회사정)는 사실상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 촬영지인 아프리카 밀림과 같은 사람의 왕국이자 사람들의 생태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를 거꾸로 하면‘사회(社會)’가 되기에‘회사가 사회이고, 사회가 회사’이며‘회사생활이 사회생활이고, 사회생활이 회사생활’이라 하겠다. 그래서 회사(회사정)생활은 사람의 생태계이기에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마을 발전과 가정의 평화를 위한다면 회사는 선택이 아닌‘필수’이며 그 정도의 힘들음은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 즉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함께했다.
회사가 아름다운 사회를 가꾸고 만들어 개인의 삶을 영화롭게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가치성을 띤 구림 회사정은 보배롭다고 할 수 있다. 회사정에서 논했던 구림 대동계는 향약(鄕約)측면서 볼 때 지방문화재를 넘어‘대한민국 또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의 참고서이자 지침서’이다. 밝은 세상을 열개한 참된 교본(敎本)이라 할 수 있다.
회사정에 가졌던 구림 대동계, 대동계를‘대동회(大洞會)’라고 일컫기도 한다. 대동회는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의 회의이다. 촌락 성원들의 일상적 모임인 이중계(里中契), 촌락의 복리증진과 상호부조 등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대동계(大洞契)와 혼동하거나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들 조직의 구성원의 모두 대동회에 참석하는 성원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대동회는 흔히 동회(洞會).대동계(大洞契).동계(洞契).이중계(里中契)라고도 한다.
대동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당산제와 같은 제의(祭儀)와 결부된 것으로서의 제의를 마치고 음식을 나눠먹으면서 하는 회의이고, 다른 하나는 제의와 결부되어 있지 않은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인 마을 회의이다.
마을 회의는 동장이나 이장의 주관 하에 진행된다. 그 활동은 촌락의 역사적 배경과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촌락의‘임원선출, 예산과 결산보고, 신년 예산안, 공유재산 관리 대책, 규칙제정, 임금결정, 공부(公賦)의 대책, 임원보수 결정, 제반규칙 제정, 수리시설 농로 등의 공동개발 대책, 공동이익과 공동행위, 사회적 협동에 관한 문제’등이 토의되고 결정된다.
대동회는 촌락의 구성원들이 새해의 생산 활동에 앞서 당면한 현안 문제와 공동관심사를 논의하여 참여의식을 높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을 확인하고 상호부조 정신을 함양하여 사회적 협동을 증진케 하는 기능을 가진다. 이로써 촌락사회의 자치적 기능이 향상되고 나아가서는 전체 농촌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이렇게 여러 의미와 목적을 두고 쓰이는 정자는 드물다. 어쩜 영암 구림 회사정이 유일하다고 해도 잘 못된 표현은 아닐 것 같다. 대동계란 주제를 가지고 회사정을 세우고 회사정에서 의논하려고 했던 구림 마을사람들, 그들은 다른 지역처럼 정자 이름을 짓기를 지역의 자연 환경이나 사람의 호(號)나 인품 등을 빌어 지었지만 구림 마을사람들은 정자가 쓰인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연환경과 호가 아닌 목적에 따라 지었다. 의논을 하기 위해 모인 정자, 회사정(會社亭)
구림 회사정은 다른 정자와는 달리 육지와 바다의 사이에 건립되어있다. 육지에서 조금만 가면 국제무역항이었던 상대포가 나올 정도로 바다를 지척에 두고 자리했다. 이것은 회사정이 대동계를 연 장소로만 이용되지 않고 상대포를 통해 해외로 나가는 분들이나 들어오는 사절들에게 이곳 회사정에 잠시 머물다 가도록 하기 위해 배려차원에서 포구가 가까운 곳에 두었다.
회사정에서 잠시 머물면서 마을 유지들과 덕담을 나누거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이용됐다. 회사정은‘회의공간과 연회장’등으로 이용된 다목적 홀이었다.
구림 대동계는 정여립(鄭如立)이 만든 대동계의 이름과는 다르다. 구림 대동계의 대동의 동은 골 동 또는 마을 동(洞)의 동이며 정여립의 대동의 동은 한 가지 또는 함께 동(同)의 동이다.
오늘날의 자전을 보면 洞의 첫 번째 의미는‘골, 골짜기’인데 이는 물이 합쳐지거나 물이 모이는 곳이 골짜기이기 때문에 골짜기는 비어 있으므로 洞은‘비다, 공허하다’라는 의미를 갖게 됐고,‘비다, 공허하다’라는 의미로부터‘굴, 동굴’이라는 의미가 생겼다.
공동(空洞)은 텅 빈 굴이라는 뜻이다. 골짜기는 깊게 파여 있다. 그러므로 洞에는‘깊다, 깊숙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골짜기를 멀리서 바라보면 위쪽과 아래쪽이 시원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에 따라 洞에는‘통하다, 트이다, 꿰뚫다, 관통하다’라는 의미가 생겨나고, 통하거나 트인 곳은 밝은 상태가 유지되므로‘밝다, 명백하다’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골짜기는 물이 흐르므로 사람이 마을을 이루어 산다. 따라서 동에는‘마을, 동네’라는 뜻이다. 오늘날 국내 지명에 읍면동(邑面洞)이 사용되는 이유는 동에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동구(洞口)는 원래 굴의 입구를 나타내지만 요즘은 마을의 입구를 나타낸다. 洞이 골짜기와 관련된 의미로 쓰일 때는 洞으로 읽고‘꿰뚫다, 관통하다’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통으로 읽는다.
구림 대동계(大洞契)와 정여립(鄭如立)의 대동계(大同系)의 계와 성격이나 목적은 다르다. 구림 대동계는 마을 또는 동리의 복리증진과 상호부조를 위하여 공유재산을 마련하고 관리하는 자치 조직, 동계의 조직을 이용하여 촌락 내의 길흉사와 공동 작업을 협동, 대동회와 더불어 촌락의 공동행사를 자치적으로 수행하여 촌락성원들을 결속시키는 기능이다. 대동계는 동리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이중계(里中契).동중계(洞中契).동리계(洞里契),촌계(村契)와 의미를 같이한다.
반면에 대동계(大同契)는 1589년(선조 22) 조선 중기 문신 겸 사상가인 정여립(鄭如立)이 만드는 단체로 정여립은 선조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쫓겨난 뒤 용감하고 힘이 있는 자들과 노비를 모아 계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대동계(大同契)이다. 매월 음력 15일 계원들이 모여 무술을 연마하고 술과 음식을 들었다. 1587년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명성을 높였으며, 이를 계기로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에 확대하였다.
계(契)는 한국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상부상조(相扶相助)의 민간협동체다. 삼한시대에까지 소급되는 공동체행사의 하나로 상호부조(相互扶助)라는 주된 목적 아래 취미 또는 생활양식의 공통분야에서 성립되는 것으로 공동유희(共同遊戱).제례(祭禮), 회음(會飮) 등이 성행하였다.
신라 때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계가 성립 발전하였으며 그 예로써 여자들의 길삼내기인 가배(嘉俳), 화랑들의 조직체인 향도(香徒) 등이 있었다. 또한 궁중경제와 사원경제가 지배계급의 모든 활동의 중심을 이루던 이 시대에는 궁중에서 보(寶)라는 것을 조직 경영하였는데 점찰보(占察寶), 공덕보(功德寶) 등으로 기부 받은 금전, 공동 각출한 재원 및 기본자산인 토지 등을 운영하여 그 이익으로 사회사업이나 대부(貸付) 등을 하는 조직이었다.
그 후 고려시대에도 보는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이익 사회적 조직이어서 공동사회적인 계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오서는 계(契)가 보(寶)를 닮는 등 비슷한 성격을 띠게 되었고 고려시대의 보는 공공사업의 경비 충당을 목적으로 기본기금을 설치하여 그 이식(利殖)으로 각종 사업을 운영하는 일종의 공공재단이었다.
그 종류로는 학보(學寶).제위보(濟危寶).금종보(金鐘寶).팔관보(八關寶).광학보(鑛學寶).경보(經寶) 등 종교상.경제상의 성격을 띤 것이었고, 사찰에 두었던 사설(私設) 금융기관인 장생고(長生庫)도 있었다.
계는 처음에 사교(社交)를 목적으로 하여 1165년(의종 19) 유자량(柳資諒)이 교계(交契, 후에 敬老會)를 조직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무신(武臣)의 난이 일어났던 의종 때에는 문무계(文武契) 등이 조직되어 문무간의 반목(反目)을 없애고 우호적인 교제를 하였으며, 동년자(同年者)끼리 동갑계(同甲契)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였다.
조서시대에 와서는 계가 다방면에 이용되어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그 조직과 목적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으나 모두 공동생활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조선 중기에 정여립(鄭汝立)의 대동계(大同系), 이몽학(李夢鶴)의 동갑계(同甲契) 등은 비밀결사를 위한 계였다.
조선 중기에도 친목과 공제(共濟)를 목적으로 한 종계(宗契).혼상계(婚喪契) 등으로 성황을 이루었는데 점차 경제적인 곤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호포계(戶布契).농구계(農具契) 등이 성립하였다. 그 역사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특히 세도정치(勢道政治)에 따른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정치가의 해이는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더욱 조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듭된 천재(天災)와 질역(疾疫)은 농민들을 더욱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이와 같이 사회의 불안이 고조되어 감으로써 화적(火賊).수적(水賊)도 성행하여 농민은 수령(守令).향리(鄕吏)의 주구(誅求)와 토호(土豪)들의 전횡 속에서 기근과 질역에 시달렸다.
이러한 비참한 역경 속에서 농촌경제의 곤란을 공동의 노력으로 타개하기 위하여 상호부조의 게가 발달하고 공동 작업을 위한 두레가 발달하였으며, 만성적으로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구황작물(救荒作物)인 고구마.감자 등의 재배도 성행하였다.
계의 성격은 조합(組合) 또는 종친회(宗親會).사설금융기관의 성격을 띤 것으로 그 종류를 보면 친목.단결을 위한 계로서 종족일문(宗族一門)의 종계(宗契) 등이 있고, 동년자의 동갑계, 동갑의 노인의 친목을 위한 노인계(老人契), 동성자의 화수계(花樹契) 등이 있었다.
또한 공제(共濟),구제(救濟)를 위한 게로서 혼인과 장례 등 일시적으로 많은 돈이 드는 경우를 위하여 혼상계(婚喪契), 제야에 필요한 세찬계(歲饌契).위친계(爲親契).학계(學契) 등이 있었고, 인보단결(隣保團結)을 위한 계로서 동계(洞契).이갑계(里甲契), 계급의 운영에 의한 수입으로 세금을 납부하고자하는 호포계(戶布契), 군포(軍布)의 공동 납부를 목적으로 하는 군포계(軍布契) 등이 있었다.
특히 농사를 위한 계로서는 둑의 축조.수리(水利)를 목적으로 한 제언계(堤堰契)를 비롯하여 소유 토지를 공동 경작하여 그 수확을 계원이 분배하는 농계(農契), 소의 공동 사용을 목적으로 한 우계(牛契), 농구의 공동 구입.공동 시용을 목적으로 한 농구계(農具契) 등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계의 성격과 다양한 계의 종류를 볼 때 구림동계도 이 모든 계의 성격과 의미를 포함하기에 대동계를 열 장소를 정해 마을 냇가 옆 숲에 정자를 세워 이름 하여 장자 이름을 '사업을 위해 모인다' 는 뜻으로 회사정이라고 정자의 현판을 붙여 이곳에서 1년에 두 차례 정도 총회(總會)를 가졌다. 총회는 1년간의 운영 내용과 회계 보고하는 자리이자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동제(洞祭) 등 마을의 소사를 의논하며 이장이나 마을 임원 등을 선출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대동계는 총회가 열리는 날은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여 함께 나누는 마을 잔칫날이기도 하였다.
마을 이익은 물론 발전과 단합을 위한 공동체를 이루고자 마을에 거주하는 구성원들은 자발적 또는 의무적으로 대동계에 가입하는 것이 관례으며, 구림 대동계는 유사(有司)를 두 명에서 네 명 정도 정하여 1년 동안 대동계의 운영을 맡겼다.
회사정은 구림 마을 나름대로의 회사(會社) 성격을 한 조직체이며, 회사는 사회의 성격을 띠어 사회구성원(社會構成員)으로서의 성향을 달리했다. 회사정은 사회단체(社會團體)이면서 기업체적(企業體的)인 성격을 갖고 운영해갔다. 또 정치.행정.사회.문화로 분류해보면 정치적으로는‘입법제도(立法制度)’였으며, 행정적으로는‘자치제도(自治制度)’였고, 사회적으로는‘공동체제도(共同體制度)’였고, 문화적으로는‘미풍양속제도(美風良俗制度)’였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