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조선시대 외명부에 대해 언급하자면..
공주 : 왕의 딸로 욍비의 소생
옹주 : 왕의 딸로 후궁의 소생
부부인 : 왕비의 어머니. 정1품
봉보부인 : 왕의 유모. 종1품
군주 : 왕세자의 딸로 세자빈의 소생. 정2품
현주: 왕세자의 딸로 후궁의 소생. 정3품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인조와 첫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 사이엔 아들만 6명이었는데, 첫째가 소현세자, 둘째가 봉림대군, 셋째는 인평대군, 넷째는 용성대군 그리고 다섯째와 여섯째는 태어난지 얼마안가 죽고맙니다.
효명옹주에 대해 얘기하려면 인조와 그의 후궁 귀인 조씨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하지 않을수가 없는데..
달콤님들도 아시다시피 인조 14년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는 궁을 버리면서까지 남한산성으로 피난갔지만 결국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를 하는 치욕을 겪고 큰 아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작은아들 봉림대군을 청에 인질로 보내게 되져..
삼전도에서의 항복 이후 창경궁으로 돌아온 인조는 왕비도 없고, 대비도 없고 어린 자녀도 없는 궁에서 아주 음산하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쁘고 총명한 한 나인에게 그만 맘을 뺏기고 말았는데... 그녀가 바로 후궁 조씨 되겠습니다..
조씨는 원래 인열왕후의 궁녀로 뽑혀 들어온 여자로, 왕실의 관행으로 볼땐 10살 정도에 궁에 들어왔을 겁니다
그러나 전쟁의 난리통을 겪고 다시 궁으로 돌아왔을때 조씨는 10대 후반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숙해 있었는데
인조는 젊고 총명한 조씨에게 빠져들었고 그해 겨울 효명옹주는 태어나죠
늦은 나이에, 큰 자식들을 청나라로 인질을 보낸 인조가 고명딸을 봤으니 얼마나 이뻐했겠습니까?
드라마에선 인조가 효명옹주에게 시큰둥하던데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조와 조씨는 효명옹주의 무병장수를 위해 오만가지 물건을 수집하는가 하면 혼례에나 쓰는 족두리나 모자 등 치장물을 옹주에게도 만들어주거나 벼락맞은 나무를 수집하는 등 정말 지극정성이었습니다.
효명옹주의 보모는 옹주의 손발톱을 깍은 후 버리지 않고 부적에다 잘 싸서 보관하곤 했는데 그게 옹주에게도 습관이 되어 다 자라서도 자신의 손톱 발톱을 깍아 부적에 싸서 보관하고 그랬다는군요.
암튼 옹주가 무럭무럭 잘 자라자 인조의 편애했고 그 편애는 후궁 조씨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왕이 후궁을 편애하면 대개 끝이 좋지 않기때문에 신하들은 왕비를 들일것을 권하게 되고 우여곡절끝에 15세의 어린 왕비를 맞아들이게 되니 이가 바로 장렬왕후 조씨가 되겠습니다.
효명옹주의 생모 숙원 조씨와 장렬왕후 조씨는 적대적인 관계가 될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숙원 조씨가 우세했지만 이 우세한 상황을 지키기 위해선 잠시도 방심할수 없었기 때문에 온갖 중상모략과 음모술수 등을 마다하지 않고 행하게 됩니다.
이 무렵 인조에게 푸르스름한 땀이 나거나 머리가 지끈거리는 증상, 불그죽죽한 소변을 보는 등 이상한 증세가 나타납니다.
이것에 대해 인조와 숙원 조씨는 "저주"를 의심하게 되는데, 당시 숙원 조씨가 임신중(큰아들 숭선군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곤란할 사람이 저주했다 생각하는데 의심의 대상이 바로 장렬왕후 조씨와 소현세자의 빈 강씨로 압축됩니다.
숙원 조씨는 자신의 단골 무당인 앵무를 불러 저주물을 찾게 하는데, 인조가 머무는 궁 여러곳에서 많은 저주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목대비 김씨의 궁녀들과 세자빈 강씨의 궁녀들이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이 궁중사건으로 인조와 숙원 조씨의 유대관계는 더욱 강력해졌고, 훗날에는 이 저주물을 이용해 인조가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를 의심해 죽이게까지 합니다.
숙원 조씨는 숭선군을 무사히 출산하였고 인조는 정3품의 소용의 지위를 줍니다.
연이어 둘째아들 낙선군을 낳자 소의를 거쳐 마침내 종1품의 귀인이 되었습니다.
조귀인에 대한 인조의 변함없는 애정은 효명옹주에게로 갔고 옹주의 어린시절은 그야말로 축복받은 시간이었지요.
효명옹주는 생모 조귀인을 닮아 영리하고 욕심도 많았고 독점욕도 강했고 게다 성격도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생모 조귀인이 장렬왕후와 세자빈 강씨, 새로 등장하는 후궁들과 끊임없이 투쟁하고 악다구니를 쓰는 동안, 옹주는 인조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며 안정적이고 호화롭게 보냈습니다.
옹주가 입은 비단 옷에는 악귀들이 오지못하도록 붉은색의 주사를 발랐고, 향기로운 향이 나도록 중국에서 수입한 향주머니를 차고 다녔으며, 귀기를 물리친다고 동남아에서 수입한 백단향을 차기도 했습니다.
또 세수를 할때는 피부미용을 위해 녹두미누를 사용했고, 입에서 나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검은색의 나무열매를 물고 있었는데 옹주가 말을 할때면 입에서 향기가 났다고 하네요... 또한 모시로 만든 잠옷을 입고 자기도 했구요.
옹주에겐 두명의 남동생이 있었지만 남동생들보다 훨씬 똑똑했기 때문에 인조와 조귀인이 효명옹주를 편애했다 합니다.
특히 큰아들 숭선군은 어리석고 말이 어눌하고 말을 할땐 입을 헤벌리고 다녀서 조귀인이 몹시 미워했는데 나인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때리거나 머리를 때리기도 했고, 심지어 얼른 죽으라는 말도 했다고 합니다.
효명옹주가 9살때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인조가 또 아프기 시작합니다.
조귀인은 또다시 "저주"를 주장하여 그 의심은 세자빈 강씨로 집중되고 결국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2개월만에 세상을 뜨게됩니다.
그리고 또 얼마안가 조귀인의 저주 주장으로 세자빈 강씨도 결국 인조의 손에 죽게됩니다.....
인조는 후계자가 죽게되자 소현세자의 큰아들인 원손을 제외하고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게되는데, 이와 같은 결정에는 낙흥부원군 김자점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인조는 그러한 결정에 동조해준 김자점을 깊이 신임하게 되었고 김자좜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인조가 세자빈 강씨를 사사했지만 그것을 조장한 사람은 조귀인과 김자점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한 배를 탄 입장이었습니다. 게다 봉림대군의 후계구도를 확립한 사람도 바로 이 두사람이었구요.
인조는 호명옹주가 11세가 된 해에 결혼을 시키기로 정하고 부마간택을 하도록 합니다.
그 부마간택에서 최종 선발된 사람은 정태화라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조귀인은 정태화의 아들보다는 김식의 아들을 더 맘에 들어했습니다. 김식은 김자점의 아들, 즉 김자점의 손자를 사위로 삼고 싶어했지요.
조귀인은 김자점과 결탁해 간택단자를 조작하여 다시 내게 하고 마침내 김식의 아들 김세룡을 효명옹주의 남편으로 들이게 됩니다.
조귀인 입장에서 보면 자신과 효명옹주의 앞날은 탄탄대로였습니다.
인조의 사랑을 받고 있고, 최고 권력가인 김자점과 사돈을 맺었으며 훗날 왕이 될 봉림대군은 자신들이 일등공신이니 앞으로의 여생은 정말 영화로울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인조와 조귀인의 편애를 받고 자란 효명옹주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었고 배려나 양보도 몰랐습니다. 옹주입장에선 당연하겠지만 당하는 사람들에겐 안하무인격인 성격이었습니다.
옹주가 혼례를 치른 후 잔치를 벌였는데, 인평대군 부인 오씨와 종실부인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윗자리에 오씨가 앉으려하자 효명옹주가 이를 밀치고 자신이 윗자리에 앉으려 했습니다.
인평대군은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으로 옹주보다 15세나 위였으며 정통 왕자인 인평대군 부인 오씨는 효명옹주에게 손위 올케였으며 나이로 보았을때도 자신이 위라고 생각했으나, 효명옹주는 자신이 인조의 편애를 받고 있으므로 오씨보다 위라고 우겼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인조는 효명옹주가 윗자리에 앉도록 해줍니다;;;;;;
원래 효명옹주는 오빠인 인평대군를 무시하고 꺼렸는데 그 일이 있고나서부터 오씨는 효명옹주에게 앙심을 품게 됩니다.
옹주의 안하무인격 행실을 지탱해준 큰 버팀목은 인조요, 그 다음이 조귀인과 김자점이고, 봉림대군은 준비된 버팀목이었는데 옹주는 이렇게 많은 버팀목을 믿고 제멋대로 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많아 보이던 버팀목은 인조가 승하하면서 갑자기 사라지게 됩니다.
인조의 뒤를 이어 봉림대군 즉 효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김자점을 귀양을 보내는데 이는 조귀인이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였져..
조귀인과 김자점이 온갖 악역을 무릅쓰고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만들었는데 막상 돌아온것은 배신이었지만, 효종입장에선 껄끄러운 조력자를 제거한것 뿐이었습니다.
효종은 조귀인도 멀리했는데 어느날, 조귀인과 효명옹주가 장렬왕후 조씨를 저주했다는 내용의 사건이 터집니다.
그 고발자는 바로... 장렬왕후 조씨..!
장렬왕후 조씨의 언니는 신익전의 부인이었고, 신익전의 딸이 조귀인의 큰아들 숭선군의 부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조귀인의 큰 며느리에게 장렬왕후 조씨는 이모가 되는 셈..
조귀인의 큰 며느리는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무시받고 홀대받아 불만이 많았는데, 그 와중에 조귀인이, 사위의 여종을 숭선군의 첩으로 들이겠다 하자 시어머니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첩을 들이는것으로 생각하여 이모를 찾아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장렬왕후는 그 여종을 불러 꾸짖는 과정에서 조귀인과 효명옹주가 효종과 대비 장렬왕후를 원망하며 무언가 수상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는데 그 수상한 일이 바로 저주라고 생각하고 곧바로 효종에게 이를 조사해 달라고 고변을 한 것입니다..
저주사건에 대한 과정은 잔혹한 고문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효명옹주의 몸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진술을 받게 됩니다.
- 궁중에서 잘 대우하지 않고 선물도 전과 같지 않아 임금을 없애고,
낙성위 김세룡의 아버지를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옹주가 귀인 조씨에게 말하니 조씨가 그러면 다행이라 답하였습니다....
효명옹주가 효종의 냉대를 받으며 살고 싶지 않아 효종과 대비를 저주했다는 옹주의 몸종의 진술은 상당히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으며, 효종은 조귀인과 그녀의 사위 김세룡을 사사하게 됩니다.
조귀인은 자신의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저주사건을 자주 이용했는데 업보를 받는 자신도 저주사건으로 죽음을 맞게 된것이지요..
효종은 효명옹주와 숭선군을 사사하지 않았는데 어린 이복동생일뿐더러 대단한 인물도 아니었기 때문에 7년간 귀양을 보냈다가
후에 한양으로 돌아오게 했지만, 더이상 옹주가 아닌 해도여자로 불리며 감시속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64세인 숙종 26년에 한명의 자녀도 없이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