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 그는 누구인가?
조선의 3대 청백리는 오리 이원익 대감, 허목 대감, 황희 정승이다.
임진왜란을 지켜낸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고, 이순신 장군을 지켜낸 사람은 영의정 오리 이원익 대감이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총지휘한 총책임자가 오리 이원익 대감이다.
오리 이원익 대감은 태종의 8째 아들 후손으로 1547년 명종때 검소한 집안에서 태어나 23세때 과거에 급제하여 도승지, 사간원 등 공직을 거치던 1592년 임진왜란 때 이항복, 유성룡, 이산해 등과 선조의 의주 피난 때 함께 하면서 평양 방어의 선봉장이었고, 한강 이남의 4도 체찰사(비상계엄사령관)가 되어 이순신, 윈균, 권율, 곽재우 등을 휘하에 두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총 진두지휘하였다.
이순신은 난중일기가 있고, 유성룡은 징비록이 있지만, 공이 가장 큰 오리 이원익대감은 기록을 남기지 않아 후대의 숨은 영웅으로만 남아있다. 군사전문가, 행정전문가, 윈칙, 청빈, 협치주의자인 영의정 오리 이원익 대감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64년간 공직 생활을 하였고, 그중 재상만 40년을 지냈으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 자리도 3대에 걸쳐 역임하고, 1634년 인종때 88세로 세상을 마감하셨다.
1597년(정유년) 2월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으로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 선조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국형장'이 열리게 되는데 200명의 문무백관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하옵니다." 하고 심지어 이순신을 발탁해 주고 진급을 시키는데 크게 힘을 써준 유성룡까지도 '公은 公, 私는 私'라고 하며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라는 문무백관들의 의견에 반대를 못했다.
이순신장군의 형 집행을 못한 이유는 당시에 영의정 겸 도체찰사 (국가비상사태 직무 총사령관)인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이 선조 임금의 어명으로 임진왜란의 전시 상태에서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전시상태에서 아무리 임금과 문무백관들이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라고 외쳐도 '도체찰사인 이원익의 승낙 없이는 선조도 어쩔 수 없었다.
오리 이원익대감은 거듭되는 선조 임금의 형 집행 재촉에도 "전하께서 전시 중에 신(臣)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 중에 삼도 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해임 못하옵니다."라는 이원익의 이 말 한마디에 선조도 체념하고, 드디어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형장'에서 문무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 없다."라며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당시에 문무백관 199대 1 즉 이원익 홀로 반대를 하여 이순신을 살려낸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만 떠받든 공복, ‘그가 있으면 온갖 사물이 제자리를 잡게 되는’ 소박한 그러나 비범한 조선의 대표 청백리 명재상 오리 이원익 대감을 통해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마음을 알아주는 딱 한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민(安民)이 첫째이고 나머지는 군더더기일 뿐 남에게 원망함이 없고, 자신에게 잘못이 없도록 하라. 뜻과 행동은 위와 비교하고, 분수와 복은 아래와 견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