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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영『柳仲郢, 1515년(중종 10)~ 1573년(선조 6)』의 묘갈명(墓碣銘) 노수신(盧守愼)
有明朝鮮國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柳公墓碣銘。幷序。
고(故) 유공(柳公)은 풍산(豊山)의 저명한 성씨(姓氏)이다. 그 처음에 유백(柳栢)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고려 말에 벼슬하였으며, 유난옥(柳蘭玉)과 유보(柳葆)는 모두 높은 관직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이르러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유종혜(柳從惠)가 하외촌(河隈村)에 들어가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마침내 이곳이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전서(典書)가 유홍(柳洪)을 낳았는데 유홍은 우군 사정(右軍司正)을 지냈으며, 사정(司正)이 유소(柳沼)를 낳았는데 유소는 선략 장군(宣略將軍) 충무위 부호군(忠武衛副護軍)을 지냈고 통훈 대부(通訓大夫)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유자온(柳子溫)을 낳았는데, 유자온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학문과 행실이 세상에 이름나서 통정 대부(通政大夫)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증직되었다. 형조 참의가 유공작(柳公綽)을 낳았는데, 유공작은 통훈 대부(通訓大夫) 간성 군수(杆城郡守)를 지냈으며 가선 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이분이 연안 이씨(延安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씨는 교수(敎授)를 지냈고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된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형례(李亨禮) 집안 출신이었다. 정덕(正德) 을해년(乙亥年, 1515년 중종 10년)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諱)는 중영(仲郢)이고, 자(字)는 언우(彦遇)이다. 어린 나이에 능히 뜻을 세우고 학업을 닦았다.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 성균 교수(權知成均敎授)가 되어 삼읍(三邑)을 교수(敎授)하였는데, 적다고 하여 적게 여기지 아니하고 이르는 곳마다 마음을 다하여 훈회(訓誨)하니, 식자(識者)들이 추중(推重)하여 원대한 기량(器量)으로 여겼다.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에 양현고 직장(養賢庫直長)을 겸하였는데, 편안하고 조용하면서 사리에 밝고 통달하니, 나날이 경탄(敬憚)을 받았다. 학전(學田)의 결손(缺損)이 많은 것을 알고 문서를 살펴 쇄출(刷出)해서 부상(富商)에게 따져 물으니 말이 호조[度支]를 침범하였는지라, 호조에서 성내어 아뢰어서 세 자급(資級)을 강등하였으나, 마침내 토지는 전학(田學)으로 돌아갔다.
정미년(丁未年, 1547년 명종 2년)에 박사(博士)에 임명되었는데, 친구들이 공론(公論)을 가지고 공에게 이르기를, “의당 사관(史館)에 재직한다면, 여러 선생들을 방문하여야 한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공이 일찍이 공사(公事) 때문에 윤원형(尹元衡)을 찾아가서 항론(抗論)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파면되었다.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에 다시 박사가 되고 전적(典籍)에 승진하여 전중(殿中)과 민부(民部)를 거쳤는데, 평판이 높았다. 경술년(庚戌年, 1550년 명종 5년)에 새로 옮겨가 사는 사람들을 추쇄(推刷)하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몇 달만에 나라의 은혜와 위엄이 크게 행해졌다.
전(前) 감사(監司) 이해(李瀣)가 무고(誣告)를 당하여 심리(審理) 중에 있었는데, 언자(言者, 사간원(司諫院)을 지칭한 것임)가 ‘공이 이해를 편당(偏黨)하고 비호하니, 함께 아울러 국문(鞫問)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국문하기를 중지하고 파면만 시켰다.
신해년(辛亥年, 1551년 명종 6년)에 추대(秋臺, 사헌부(司憲府))의 낭중(郎中)에 승진하였는데, 옥안(獄案)을 기록하는 일이 정체(停滯)됨이 없었다. 임자년(壬子年, 1552년 명종 7년)에 관서(關西)에 감군 어사(監軍御史)로 나갔는데, 곤궁한 것을 소복시키고 장오(贓汚)를 금지시키니, 여러 진(鎭)들이 이 때문에 숙연해졌다.
동조(冬曹, 공조(工曹))로 옮겼다가 종부시(宗簿寺)ㆍ장악원(掌樂院)의 첨정(僉正)에 승진되었고,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옮겼다. 계축년(癸丑年, 1553년 명종 8년)에 군적(軍籍)을 고쳐서 만들 때에 호남(湖南)에 사신으로 가서 부정을 적발하기를 귀신처럼 하여 군사의 정원이 이미 채워졌음에도 머슴과 거지[傭丐]들은 모두 탈락(脫落)하니, 모두가 ‘알찬 장부[實簿]’라고 칭찬하였고, 여러 도[諸路]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그해 9월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는데, 윤원형에게 빌붙어 아부하는 자가 대장(臺長, 사헌부 장령과 지평(持平)의 별칭)이 되어 세력을 믿고서 망령되이 개작(改作)하는 일이 있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묻지 못하였다. 공은 일을 만나면 반드시 간쟁하고 절대로 아첨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를 위태하게 여겼다.
징군『徵君, 징사(徵士)의 존칭』 이희안(李希顔)이 고령 현감(高靈縣監)이 되었는데, 관찰사[廉使] (정언각(鄭彦殼)이) 그를 해치고자 하여 갑자기 곧장 가버린 상황을 추궁토록 청하니, 공이 아뢰기를, “이희안(李希顔)이 유일(遺逸) 출신으로서 관직을 버리고 죄를 얻은 것은 선비에게 보일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다. 율려(律呂, 음악(音樂))의 학문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개연(慨然)히 이것을 바로잡을 뜻을 가지고, 음악의 어둡고 밝은 음률(音律)을 고증하여 바로잡고, 음악을 가르치고 감독하는 것을 상을 주거나 벌을 주니, 음악이 거의 일변(一變)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에 달량포(達梁浦)에 왜구(倭寇)의 경보(警報)가 있자, 이남(二南, 경상도와 전라도)이 크게 진동하였다. 공이 순찰사(巡察使) 조광원(曺光遠)을 따라서 영외(嶺外)로 나갔는데, 조광원은 재주가 용렬해서 공이 아니면 언제나 한번도 호령을 제대로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데 사람들이 경탄하고 복종하였다.
그해 12월에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승진하였는데, 기율(紀律)을 일신(一新)하니 성(城)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숨을 죽이고 중국 사람[唐人]들은 관노(官奴)의 집에 숨었는데, 마침 공이 이르자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공이 명령을 내려 이들을 수색하여 체포하고 형틀에 묶어서 압록강(鴨綠江) 연안의 진보(鎭堡)로 보내니, 진보의 관원이 문책을 받고 부끄러워하며 사죄하였다.
소관 부서에 신칙(申飭)하고, 공이 이어서 압록강을 따라 매복(埋伏)을 설치하여 위아래에서 서로 망보게 하고, 순군(巡軍)을 설치하여 왕래하게 하니, 국경(國境)이 편안해졌다. 향교(鄕校)가 무너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 점차 수리하여 더욱 성대해지니, 한가한 날에는 선성(先聖)을 배알하였다.
여러 유생(儒生)들에게 강론(講論)하고, 다시 영묘(英妙)한 유생들을 골라서 그들에게 빈집을 주었다. 달마다 그 공부한 것을 물어서 잘한 사람은 더불어서 술을 대작(對酌)하기에 이르렀으나, 잘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회초리를 때렸다. 보고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 교화(敎化)에 따랐으며, 그 후에 학당 앞에 비(碑)를 세워서 이것에 의하여 공을 사모하게 되었다.
병진년(丙辰年, 1556년 명종 11년)에 요동(遼東) 지방이 굶주리게 되자,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백호(百戶) 2인을 파견하여 자문(咨文)을 보내고 양식(糧食)을 요구한 다음에 바로 서울[都城]로 가기를 요청하였으나, 공이 완강히 거절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화를 내고 연회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의 말이 완곡하고 뜻이 정성스러우니, 곧 그들의 환심을 얻게 되어, 그들이 드디어 돌아갔으므로, 나라가 무사(無事)하였다. 그때에 관내(關內)의 기찰(譏察)이 이미 엄해지자,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의 모함을 받았는데,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비방(誹謗)을 하여 반드시 공을 죄에 연루(連累)시키고자 하였다.
두 사신(使臣)이 있어서 돌아오다가 의주(義州)에 이르니, 역관(譯官)들이 물목(物目)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목사(牧使)가 사사로이 무역한 것입니다. 간혹 공무역(公貿易)에도 힘써야 하므로, 부마(駙馬)의 물화가 강(江)을 건너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모조리 취하여 관가에 몰수(沒收)할 것이 자명(自明)합니다.”라고 하였다.
권귀(權貴)들이 하절사(賀節使)에 부쳐 보낸 크고 작은 물화가 길을 가득 메웠는데, 대동 찰방(大同察訪) 곽간(郭趕)이 그 불법한 것을 적발한 것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이어서 탄핵을 당하여 파면되었는데, 공의 지시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여 거듭 원망을 받았다.
기미년(己未年, 1559년 명종 14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다. 바야흐로 삼가(三家, 윤임(尹任)ㆍ윤원형(尹元衡)ㆍ이양(李樑)을 가리킴)의 교횡(交橫)으로 늙은 뿌리가 자못 깊었는데, 사류(士類)들이 연(燕)나라로써 연나라를 치게 하고자 하니, 공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그 사람은 어리석으니, 반드시 나라에 흉환(凶患)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신유년(辛酉年, 1561년 명종 16년)에 상복을 벗은 다음에 관압사(管押使)로서 연경(燕京)에 갔다.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에 연경에서 돌아와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갑자년(甲子年, 1564년 명종 19년)에 외방(外方)으로 나가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죄인을 재판할 때는 관대하였고, 범인을 체포하여 다스릴 때는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힌 자 4, 5명의 괴수(魁首)들을 용서하지 않았고, 부역(賦役)은 다소 공평함을 얻었다.
문헌당(文憲堂)1)에서 학전(學錢)을 계속 이어대지 못하자, 범죄를 단속하여 속포(贖布)를 거두어 1천 곡(斛)의 곡식을 만들어 이것을 저장하고 그 이름을 ‘작성고(作成庫)’라고 하였는데, 학도(學徒)들이 많이 모여들어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는 소리가 날마다 들렸다.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 봄에 정주 목사(定州牧使)가 되었는데, 자세가 더욱 해이하지 않았다.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 겨울에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는데, 퇴계옹(退溪翁, 이황(李滉))이 병풍에 글을 써서 그 뜻을 전하기를, “대각(臺閣)에 남아도는 사람들에게 부탁의 말을 많이 하기가 어려웠고 구학(溝壑, 도랑)의 많은 병자(病者)에게 다시 관심을 기울이네.
풍류(風流)의 낙사(洛社)에서 때때로 풍광(風光)을 다 보고, 넓고 큰 천문(天門)에서 홀로 옷깃을 어루만지네. [臺閣剩員難寄足 壑溝多瘠更關心 風流洛社時看盡 曠蕩天門獨撫襟]”라고 하여, 그가 공을 무겁게 여기고 아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이 부임함에 미쳐서, 주(州)에서 죄를 짓고 연수(淵藪, 사물(事物)이 많이 모이는 곳)로 도망한 사람들을 크게 수색하여 찾아내어 그 주인(主人)에게 돌려준 것이 거의 수백 명이었다. 원망과 욕설이 사방에 유포되자, 가인(家人)들이 매우 두려워하니,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나를 동요시키고자 하지만, 또한 동요되어서 오는 자들을 낸들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처음에 조세(租稅)를 아산(牙山)으로 운반하여, 바다로 조운(漕運)하다가 여러 번 폭풍에 패몰(敗沒)되어 문득 다시 조세를 거두었는데, 공이 육지나 강 쪽으로 운반하는 것과 어느 것이 이익이 되고 병폐가 되는지를 비교하여 거론하고, 방백(方伯, 관찰사(觀察使))에게 강제하여 조세를 옮겨서 육지로 운반하게 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큰 화(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州)의 선비들이 서원(書院)을 창건할 것을 도모하여 이미 재목(材木)을 모으고 백성들을 거듭 역사(役事)시키니, 공이 이것을 탄식하고 자제(子弟)들에게 가르쳤으나, 부형(父兄)들이 기뻐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재력을 출원하여 두세 번 이것을 축조하고 그 지명에 따라서 이름을 ‘유정 서원(有定書院)’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공은 별도로 학교의 규칙을 세워서 그 인방(引枋)에 붙이고, 다시 집을 3칸 지어서 장차 목은(牧隱) 이색(李穡), 충암(冲庵) 김정(金凈),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와 같은 지방의 현인(賢人)을 봉사(奉祀)하려고 하였는데, 그 의논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채 그 고을을 떠났다.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년) 봄에 참지(參知)에 임명되어, 숙위(宿衛)가 크게 허술한 것을 감찰하였는데, 과정과 명색(名色)이 다단(多端)하였으므로, 곧 그 경중을 조정하였고, 서리(胥吏)들이 군기(軍器)를 거두어들이고 병정(兵政)을 늦추는 일을 대략 거행하였다. 그해 가을에 승지(承旨)에 임명되어, 경악(經幄,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 학문을 밝게 일으킨 것이 많았다.
계유년(癸酉年, 1573년 선조 6년) 3월에 병으로써 교체되어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었는데, 다시 승지(承旨)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6월에 또 사직하였다. 병환이 심해지자 오히려 순순(諄諄)하게 국사(國事)를 말하였는데, 7월 13일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해 11월 8일에 본부(本府)의 서쪽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의 자질과 성품은 방정(方正)하고 굳세었으며, 마음을 쓰는 것이 온화하고 후(厚)하였다. 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도량도 넓고 컸으며, 일을 처리하는 것도 상세하고 신중하였다. 교묘한 속임수와 잘못 비뚤어진 생각을 마음에서 없애고 간편하고 정직하며 자애롭고 성실한 기운이 얼굴에 넘쳐흘렀다.
집에 있을 때에는 별로 말이 없었고, 스스로 장중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아랫사람에게 임하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었는데, 추위와 더위에도 폐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반드시 빈객과 자제들과 더불어 고금(古今)의 사실들을 토론하였는데, 화기 애애한 가운데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며, 혹은 새벽에 닭이 울 때까지 이르니, 더욱 정밀한 광채를 드러냈다. 평생토록 해이하지 않았고, 가매(假寐, 어렴풋이 잠들음)하면서 능히 하루라도 소홀하게 밤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사람들 가운데 일을 꺼리는 자를 격려하되, 문정(門庭)에서 정숙하고 어리숙한 모습으로 관직에 임하여 서리를 속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긴급하게 여기고 형벌을 너그럽게 하고 은혜를 크게 베푸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일상의 정사는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을 권장하며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며 때때로 마부를 물리치고 순시하고 자순(咨詢)하였으므로, 궁벽한 곳에 있는 자의 성명(姓名)까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항상 생각이 변방의 일에 미쳤는데, 무릇 산천(山川)과 성지(城池)와 무기와 군량미 저축 등을 상세하게 마련하여 미리 준비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절제(節制)가 준엄하고 밝았으며 항오(行伍)를 가지런히 정비하니, 감히 문란하고 소란스러운 자가 없었다. 풍화(風化)에 더욱 존심(存心)하고 인재(人材)들을 아끼고 보호하여 후학(後學)들을 성취시키니, 선비들이 많이 감동하여 분격하였다.
제사를 받들 때에는 기일(期日)보다 앞서 희생을 고르고 폐백(幣帛)을 갖춘 다음에 기일에 이르기까지 묘당(廟堂) 아래에서 재계(齋戒)하면서 묵었으며,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대로 공경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집안의 의례(儀禮)는 한결같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를 따랐으며, 비록 당세(當世)에 시행하기 어려운 예(禮)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깊이 연역(演繹)하여 힘써 이것을 지켰다.
제사상의 그릇의 수와 그릇의 줄은 스스로 정해진 법식이 있었는데, 아래로 비복(婢僕)에 이르기까지 관습으로 이것을 따르고 지켰다. 친구를 도와줄 때에는 은혜로운 뜻이 두루 흡족하였고, 남과 사귀는 정이 열리고 깊어서 우연히 서로 부담을 가지고 있더라도 조금도 그런 낌새를 말씨와 모습에서 보이지 않았다.
집안의 친족이 전사(田舍)를 훔쳤으나 공은 돌아보지 않고 이 사실을 숨겼으며, 고향 사람이 그 땅을 도둑질하면 공은 그 절반을 다시 나누어 그들에게 보태주었다. 무릇 백성들 가운데 상례(喪禮)가 있으면 공은 기강(紀綱)에 제대로 미치지 못할까봐 고민하고 걱정하였다.
공은 남의 잘못된 허물을 듣는 것을 싫어하였고 남의 사사로운 비밀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혹은 병졸이나 노예의 신분에 있더라도 또한 자주 그들을 덮어서 감싸주었다. 한마디의 좋은 말이나 행동을 남에게 얻어들으면 즐겁게 이것을 행하고 칭찬하여 말하였다. 오직 세속에 붙좇고 권세에 아부하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억지로 옛날의 지자(知者)들로 하여금 더욱 몸을 작게 만들뿐이었다.
일찍이 교리(校理) (유성룡(柳成龍)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학문을 흠모하였으나, 간혹 유환(遊宦, 원지(遠地)에 가서 벼슬함)에 걸려 늙어서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으니, 후회하더라도 어찌 미칠 수가 있겠는가? 너는 나이가 아직 젊고 길도 머니, 마땅히 네 아비가 절명(絶命)에 임하여 탄식하는 것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에 그 고신(告身, 직첩)을 보거든 이를 의심하고 경계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데 털끝 하나라도 허위(虛僞)가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대체로 공이 그 몸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따르려는 마음으로 자기를 단속하고 후손에게 내려 주는 도리가 이와 같은 데 이르러, 이에 더할 것이 없었다.
공의 부인 김씨(金氏)는 같은 부(府, 안동(安東))의 사람 진사(進士) 김광수(金光粹)의 딸인데, 3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 유문룡(柳文龍)은 일찍이 죽었고, 다음 유운룡(柳雲龍)은 업유(業儒)로서 공부하여 전함사 별좌(典艦司別坐)에 보거(保擧, 보증 천거)로 임명되었고 참봉(參奉) 이용(李容)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딸은 사인(士人) 김홍징(金弘徵)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유정보(柳正甫)ㆍ유순보(柳純甫)이고 그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다음 유성룡(柳成龍)은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에 선임(選任)되어 들어갔으니 바로 교리(校理)이며 현감(縣監) 이경(李坰)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공의 다음 딸은 사인(士人) 이윤수(李潤壽)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다음 딸은 사인 김종무(金宗武)에게 시집갔는데 1녀를 낳았으나 아직 어리며, 막내딸은 참봉(參奉) 정호인(鄭好仁)에게 시집갔다.
(유운룡(柳雲龍)ㆍ유성룡(柳成龍)) 두 효자는 나를 선친(先親)의 친구로 보아서,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 소개장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밝게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아! 공은 지금 세상의 강직하고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애석하도다.
공은 고집이 세고 남에게 굽히지 않아서, 능히 세상과 더불어 같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그런 뜻을 가지고 몰(歿)하였으니, 그 뜻을 얻도록 하려면 나라의 중요한 진(鎭)들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일을 맡겼어야 했는데, 어찌 곧 바로 임금의 뜻을 거스르고 한 시대에 원수가 되었을 뿐이겠는가? 그가 뜻을 얻은 것도 천명(天命)이고 그가 뜻을 얻지 못한 것도 천명이니, 그가 천명과 같이 뜻을 얻었다면 어땠을까?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공은 천하(天下)의 귀중한 호련2)(瑚璉)이고, 천하(天下)의 두려운 부월(斧鉞)이고, 천하의 일을 잘 처리한 귀책(龜策, 나라의 정책을 점치는 시귀(蓍龜))이로다. 하늘이 우리에게 큰 그릇을 준 것은 국가(國家)의 이익을 위해서였네. 하늘이 어찌 주었다가 어찌 빼앗아 가는가? 사람이 때로 하늘을 의지하지 못하겠네. 오직 후세에 이어서 빛남이 있어서, 백세(百世) 이후에 그 빛을 일으키기를. <끝>
[註解]
1) 문헌당(文憲堂) : 주세붕(周世鵬)이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있을 때, 해주(海州)에이 당(堂)을 세워 유생(儒生)들이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는 장소로 삼았는데, 많은 선비들이 모였다 함.
2) 호련(瑚璉) : 하(夏)나라와 은(殷)나라 때 종묘(宗廟)에서 서직(黍稷)을 담던 제기(祭器)인데, 옥(玉)으로 장식하였기에 귀중한 것임.
공자(孔子)의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가 노(魯)나라의 자천(子賤)을 군자(君子)라고 말하자, 자공이 공자에게 자신은 어떤 인물인가
물었는데, 공자가 호련이라고 대답하였음. 이것이 유래가 되어 우수한 인물의 비유로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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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國朝人物考二十二
立巖 柳仲郢 墓碣銘 - 盧守愼 - 盧守愼
柳故豐山著姓。 其始有諱栢, 仕麗季; 諱蘭玉、諱葆, 俱達官。 至本朝, 工曹典書諱從惠, 入河隈村老焉, 遂爲世居。 典書生諱洪, 右軍司正; 司正生諱沼, 宣略將軍、忠武衛副護軍、贈通訓大夫・司僕寺正。 正生諱子溫, 擧進士, 有文行名世, 贈通政大夫、刑曹參議。 參議生諱公綽, 通訓大夫、杆城郡守、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聘于延安李氏敎授、贈通政大夫・吏曹參議亨禮之門, 以正德乙亥生公。 公諱仲郢, 字彦遇。 弱冠, 能辨志敬業。 庚子, 登第權知成均敎授。 三邑不以圭撮爲歉, 所至盡心訓誨, 識者推爲遠器。 丙午, 兼養賢庫直長, 恬靜明達, 日見敬憚。 知學田多缺, 按籍刷出, 格於富商, 語侵度支怒, 啓鐫三資, 竟歸田學。 丁未, 敍博士, 親舊以公論謂公宜在史館, 勸訪諸先生, 笑不應。 嘗以公事詣尹元衡, 抗論不撓, 罷。 己酉, 復爲博士, 陞典籍, 歷殿中民部, 藉甚。 庚戌, 監惟新, 居數月, 恩威大行。 前監司李瀣遭誣在理, 言者以公黨庇請竝鞫, 特命止罷。 辛亥, 進秋臺郞中, 錄讞無滯。 壬子, 監軍關西, 蘇枯拉贓, 列鎭爲之肅然。 移冬曹, 進僉正宗簿、掌樂, 轉副正軍器。 癸丑, 改軍籍, 使湖南, 發擿如神, 元額旣充, 傭丐盡落, 咸稱實簿, 爲諸路最。 九月, 拜掌令, 屬阿尹爲長, 妄事改作, 人不何問。 公遇事必爭, 棘棘不阿, 衆危之。 李徵君之爲高靈也, 廉使毒害之, 旋請究徑去狀。 公啓: “希顔起遺逸, 棄官得罪, 非所以示士。” 不納。 甲寅, 拜司諫。 未幾, 除掌樂正, 見律學亡, 慨然有釐正意, 昏曉考校, 敎督賞罰, 庶幾一變。 乙卯, 達梁有警, 二南大震。 公從巡察使曺光遠出嶺外, 光遠庸才, 非公莫可爲, 每一出號, 遠邇驚服。 十二月, 陟牧義州, 紀律一新, 城裏惵息。 唐人匿官奴家, 會公至, 不得出。 命搜獲之, 械送江沿堡, 堡官受責愧謝。 申勅所部, 公仍循江設伏, 上下相望, 置巡軍往來, 境上安之。 悼鄕校壞, 漸修益奐, 暇日謁先聖講諸生。 復揀英妙, 廩之空舍, 月叩其學善者, 至與對酌; 不善, 必夏楚之, 觀聽從化。 其後, 建碑學前以寓思。 丙辰, 遼東饑, 都司遣百戶二人移咨索糧, 要直抵都城, 以公牢拒, 恚不就燕。 公辭婉意誠, 便得其歡心, 遂行, 國以無事。 時關譏已嚴, 姦狡受齦, 飛謀釣謗, 必欲間染。 有二使回及州, 譯官呈物目, 曰: “牧使私貿也。” 或勉公自明, 不聽, 駙馬之貨過江, 悉取以沒官。 權貴賀節, 輜重塡道, 察訪郭趕發其不法甚宂, 仍被劾罷, 疑出公指, 重銜之。 己未, 丁內艱。 方三家交橫, 老根頗深, 士類有欲以燕伐燕。 公憂曰: “其人騃, 必凶于國。” 已而果然。 辛酉, 服除, 以管押使赴燕。 癸亥, 至自燕, 除刑曹參議。 甲子, 出按黃海, 剸裁有裕, 繫治爲民害者四五魁, 不饒, 賦役稍得平。 文獻堂學錢不繼, 檢得贖布, 作千斛穀貯之, 名曰作成庫, 學徒坌集, 絃誦日聞。 丙寅春, 宰定州, 益不解。 戊辰冬, 牧西原, 退溪翁題畫屛寄意云: “臺閣剩員難寄足, 壑溝多瘠更關心。 風流洛社時看畫, 曠蕩天門獨撫襟。” 其重惜如此。 比下車, 以州逋逃淵藪, 大括剔還其主, 殆數百人。 怨詈四布, 家人甚懼, 公曰: “彼欲動我亦動, 來者若之何?” 初, 租輓牙山, 漕海屢敗, 輒再斂。 公擧可興陸等江便, 利病較然, 强方伯移輸, 民始脫巨禍。 州士謀創書院, 旣鳩材而重役民, 公嘆此以敎子弟也, 父兄有不樂。 諸人出力, 二三築之, 因其地名命曰有定。 別立學規, 揭其楣, 復爲屋三間, 將以祀鄕賢如李牧隱、金冲庵、宋圭菴, 議未決而去。 壬申春, 除參知, 察宿衛太疎, 科色多端, 就爲輕重之, 胥戢軍紓, 兵政略擧。 秋, 除承旨, 入侍經幄, 多所建明。 癸酉三月, 病遞爲春官參議, 復除承旨。 六月, 又辭。 疾革, 猶諄諄語國事, 七月十三日終于正寢。 是年十一月八日, 葬府西子坐午向之原。 公質性方毅, 而處心和厚; 襟度洪大, 而應事詳愼。 機變枉曲之思絶於中, 易直子諒之氣溢於表。
家居也, 沈默自將, 莊恪下臨, 晨起衣冠, 寒暑不廢。 夜必與賓客子弟討論古今, 衎衎無倦, 或至鷄鳴, 彌露精采。 平生不解假寐, 不能一日漫過。 人之憚事者切厲之, 門庭之間, 斬斬悾悾。 官莅也, 以束吏恤民爲急, 寬刑大惠爲本, 日事備旱澇, 課耕種, 興水利。 時屛騶御, 巡視咨詢, 僻聚姓名, 罕有不識。 常垂意邊務, 凡山川城池, 兵革儲峙, 靡不詳練預辦, 節制峻明, 行伍整齊, 無敢紊越讙呶者。 尤存心風化, 愛護人材, 成就後學, 士多感奮。 奉祭祀則先期選牲具幣, 至日齋宿廟下, 祀典所載, 莫不致敬。 家儀一遵文公, 雖世所難行, 必深繹而力持之。 皿數盤行, 自有定式, 下至婢僕, 慣習循守。 接親友則恩意周洽, 交情開暢, 遇有相負, 無幾微見言面。 門族攘其田舍, 不顧而隱之; 鄕人竊其疆, 更割半以益之。 凡民有喪, 悶念經紀如不及。 惡聞人過惡, 恥言人陰私, 或在卒隷, 亦亟掩之。 得一好言行, 喜爲之稱道, 惟不肯趨附强合, 故知者愈少。 嘗囑校理曰: “吾夙慕學問, 間嬰遊宦, 老而無成, 悔怍何追。 汝年富道遠, 宜無若若翁。” 臨絶, 偶見其告身, 疑之, 戒以事君不可有一毫虛僞。 蓋其忘身徇國之心, 律己詒後之道, 至此而無以加矣。 夫人金氏, 同府人進士光粹女。 生六子: 長文龍, 夙逝。 次雲龍, 業儒, 保任典艦司別坐, 娶參奉李容女, 生二女三男: 女適士人金弘微。 男正甫、純甫, 餘幼。 次成龍, 擢丙寅科, 選入玉堂, 卽校理也。 娶縣監李坰女, 生一男一女, 幼。 次適士人李潤壽, 生一男一女, 幼。 次適士人金宗武, 生一女, 幼。 季適參奉鄭好仁。 二孝視予爲先友直而不華, 授介狀來, 俾明著之。 嗚呼! 公以當今强項, 猶昔倔彊, 不能與世俯仰, 溘然齎志而歿。 使其得志如持國、元鎭, 豈直忤於君讎於時而已? 其得志, 命也; 其不得志, 命也, 其如命何? 銘曰:
瑚璉也天下之貴, 鈇鉞也天下之畏, 龜策也所以處天下之事。 天與我器, 爲國家利。 奚與奚奪?人罔時倚。 惟紹有光, 百世其起。 <끝>
▲입암 류중영 묘 / 소재지 : 경북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산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