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열쇠
2024.01.28.(주현후제4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3/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1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16/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18/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19/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20/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21/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누가12:13-21)
들어가는 말
도당동 어린이공원에서 아이들을 만난 지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당시 초등학생들은 이미 청년들이 되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미연이도 초등학교 3학년 즈음에 공원에서 만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난 8일 미연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5년 간 신장 투석을 이어오다 지난 크리스마스 전날,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후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투병생활을 하면서 두루두루 식당 앞 양지바른 곳에 거의 매일 나와 앉아 있던 모습을 보았었는데,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연이가 들러서 아버지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쳐 버렸을 것입니다.
미연이를 비롯한 네 딸들은 불치병으로 인한 오랜 투병생활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너무나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고인은 50대 후반이었습니다. 저보다 한두 살 아래였기에 이분의 죽음이 저에게는 남일 같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은 저에게도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생각해보니 학창시절도, 군대시절도, 그리고 30대도, 40대도, 50대도 지나갔습니다. 아무리 설레었던 시간도 결국은 지나가고 아무리 안 올 것 같은 시간도 결국은 지나갑니다. 결국은 죽음의 시간도 다가올 것입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은 짧을 수도 있고, 나름 길 수도 있겠지요.
죽음 앞에서
사실 우리는 누구도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가 인생의 평가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생이 끝날 수도 있지만, 막연히 더 살겠거니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짧은 생을 산 사람은 세상에 더 많은 흔적을 남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억울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한 사람의 생애를 보고 삶을 평가하곤 합니다. 권력자의 삶을 살다가 온 국민의 배웅을 받는 죽음도 있습니다. 대단한 부를 일구어낸 삶을 살다가 호사스럽게 치장된 죽음도 있으며, 명예로운 삶을 살았다는 기념비를 남기는 죽음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잘 살았다고 평가받을 만합니다.
이들은 우리를 부럽게 하고 우리가 도달하고자 애쓰는 사회적 가치기준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기준에 비추어보면 능력이 모자라고, 의지가 부족하며, 기회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남아 있는 시간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기준으로 볼 때, 우리 대부분은 그저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가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를 시인하는 것’이 그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며 하늘나라의 열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인해야 하는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신 ‘인자’도 아니며, 과거의 예수님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동일시하셔서 지금도 여기에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 그리고 소외된 이웃들을 예수님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치기준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는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시간과 재산이 필요한 사회적 업적과는 상관없이, 현재적인 기준만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과 함께 하고 있는 예수님을 시인하고 있습니까?’
하늘나라의 기준
이것이 예수님 친구들의 삶의 기준입니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몰려든 우리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을 비집고 들어와 묻습니다.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13) 이 사람도 잘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인에게 있었습니다. 형이 자신에게도 정당하게 유산을 나누어 준다면, 각자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을 가지고 잘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에게는 열심도 있었을 것이고 야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인생의 업적을 이룰 기회를 형이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14) 그에게 예수님은 선생님, 즉 ‘랍비’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랍비’는 법적 사건이나 유산 분쟁을 처리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올 하나님 나라의 심판자인 ‘인자’이심을 분명히 하셨지만, 그는 예수님이 현실 세계의 랍비이길 원했습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문제 해결사, 우리의 이익을 실현시켜주시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누구도 나를 그렇게 세우지 않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의 기대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비록 신자들의 빗발치는 요구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이렇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15) 일단 재산은 탐욕으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재산은 생명을 이루는 요소가 아닙니다. 여기서 생명은 길고 짧은 목숨,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한 인간의 영원한 본질이자 가치판단의 기준입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생명은 재산으로 가치가 규정되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이란 재산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부요함
예수님은 이 진리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면, 무병장수할 것’이라는 기독교적 통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 어떤 부자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17) 그에게는 자신의 삶의 가치가 소출만큼이나 풍성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혼잣말을 합니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18) 부자는 자신의 소출을 자신이 일군 자신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쌓아두고자 합니다.
우리 성경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고 하면서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19)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성경을 통해서 보면 부자는 ‘자신’에게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다고 말하면서, ‘너는 인생을 태평하게 여기라’(take life easy)고 합니다. 우리 번역에 ‘마음 놓고’ 혹은 ‘평안히 쉬고’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부자는 인생, 즉 생명(life)을 자신의 부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한 사람에게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즉 재산은 생명의 구성요소가 아니라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 비유에 하나님을 등장시키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 다시 한 번 드러나는 것은 재산과 생명이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전함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21) 재물은 생명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가는 말
먼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거두는 자, 생명의 주인으로 등장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부자를 심판하시고 그에 따라 생명을 거두어 가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갈 인자로서 아직 오지 않은 심판자이시므로, 지금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심판자로 등장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여기서 하나님을 현실의 심판자로 등장시킵니다. 그래서 현실 세계를 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수많은 모순이 보이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일찍 죽고, 악인이 오래 사는 이유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찾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삶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그 결과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면 있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볼 때,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예수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든 부자가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면, 그를 언제 데려가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이 그를 데려간다고 해도 그의 생명은 하나님 나라에 부합할 것입니다. 생명의 본질적 문제는 오래 사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예수 함께 하느냐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부요함이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동일시하신 타인에게 부요함입니다. 타인을 위한 삶이 곧 하나님 나라의 열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