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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은 동서양을 넘어서, 정경시사 Focous 2023.12.02.
https://www.yjb0802.com/news/articleView.html?idxno=37331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은 동서양을 넘어서
심 의 섭 (명지대 명예교수)
성웅 이순신 장군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이 말은 왜선 133척을 12척으로 맞선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결의를 다지며 한 말이다. 칠천량해전 이후 충무공이 다시 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고 수군을 재정비한 결과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이 다였다. 그런데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참가하라"는 선조의 밀지가 떨어졌고, 충무공은 수군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조정에 강력히 건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의 눈부신 활약으로 조선 해군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592년(임진년) 5월 4일, 제1차 출전 이래 총 4차에 걸친 해전에서 적선의 격침과 나포가 207척이었고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한 적선은 152척이었다. 또 왜병 3만 3780명을 격살하였다. 이에 비해 조선 해군은 단 한 척의 전선 손실도 없었고, 인명 손실은 전상, 전사자를 모두 합하여 243명에 그쳤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계의 어떤 전쟁에서도 특히, 해전에서는 이런 기록은 없었다.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조선 해군의 대제독 이순신의 이 불멸의 기록은 세계 해전사에 영원히 신화로 남을 것이다. 적함선을 359척이나 격파하고 적군을 4만명 가까이 사상시키면서 단 한척의 아군 함선도 손상시키지 않은 해군장군이 역사상 있을까 싶지만 이순신은 정말 그랬다. 이순신은 23전 전승이라는 불멸의 신화를 만들었다.
1592년 7월 8일 아침, 이순신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견내량에 일본군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함대 73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와키자카의 휘하 전선 47척을 격파하였고 12척은 나포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한산도대첩이다.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단 13척의 배를 이끌고 물살이 험하고 협소한 명량해협으로 왜 함대를 유인한다. 이미 원균이 100여척을 칠천량 해전에서 잃어 남은 것이라곤 단 12척의 낡은 배와 전의를 상실한 100여 명의 수군들뿐이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배 한 척이 추가되어 13척이었다. 조선 13척, 왜군 333척.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엄청난 숫적 열세에도 굴하지 않고, 무려 30여 배가 되는 적을 궤멸시켰으니 이를 명량대첩이라 한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이다. 노량해전은 정유재란 당시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조명 연합수군이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운 전투이다. 1598년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안전한 철수를 보장해 달라며 명나라 장군 진린(陣璘)에게 뇌물을 보냈다. 이순신과 진린은 11월 19일 노량 앞바다(현재의 남해군)에서 본국으로 도망가는 왜선 500여척을 공격하여 왜선 450척 가까이 침몰시켰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과 와키자카야스하루(脇坂安治) :
와키자카야스하루는 조선 육군과의 용인전투에서의 승리한 명장이다. 적장 와키자카는 이순신 장군에게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에서 연이어 대패를 당한다. 와키자카는 당시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에게 대패를 당한 자멸감과 충격에서 6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 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했다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 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라고 적었다. 일본군 1500명으로 5만 명의 조선군을 물리친 용인 전투를 경험한 일본의 명장 와키자카는 이처럼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1500명의 수군을 이끌고 싸운 한산도 해전에서 대패한 인물이 바로 와키자카이다. 그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었다(2004년 9월 4일부터 2005년 8월 28일까지 방송되었던 KBS 1TV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와키자카의 흉중이 김명수의 독백으로 나온다.)
“내가 제일 두려운 사람은 이순신이고,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흠모하고 숭배하는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역시 이순신이고,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바로 이순신이다.”
그는 이순신이 지휘한 한산도 대첩에서 패배한 뒤 고국으로 돌아간 뒤 매일 서재 은밀한 상자 속에서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한 점을 꺼내놓고 비밀스러운 의식으로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400년이 지난 지금도 후손들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심과 위대함을 기리는 행사나 탄신제에 참여한다.
이순신 장군과 도고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8일, 일본함대가 뤼순군항(旅順軍港)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905년 9월 5일에 강화를 하게 된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의 결과로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일본은 이 조약을 계기로 한반도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고 요동반도와 사할린 남부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1905년 5월 27일 사쓰마번 도고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 1848~1934) 사령관은 대서양과 인도양을 돌아 중국해를 거쳐 온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 해전 직후 일본 정부는 미국에 중재를 의뢰하였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동부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에 포츠머스 협정을 강요 했던 것이며 그 후 가쓰라다로 총리와 미국육군 장관 태프트 간에 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 이 갈라먹는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 하였다.
이 전쟁의 주역은 해군의 도고헤이하치로와 육군의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다. 이 전쟁의 승장은, 해군에서는 도고헤이하치로이며, 육군에서는 노기마레스케다. 육군의 노기는 여순 요새 공략, 봉천전투 등 결정적인 중요한 승부처에서 역전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도고 헤이하치로와 노기마레스케는 세계적 명장으로 떠올랐고, 일본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열강 반열에 확실하게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의 국민작가라 일컬어지는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이순신장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다(産経新聞 연재, 1968~1972).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도고함대’가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물리치자 도고제독에게 부하가 “제독께서는 넬슨제독과 이순신 장군을 능가합니다.”라고 아양을 떨자 도고제독은 이렇게 말했다. “넬슨제독은 군신이 아니다. 세계해군역사에서 군신은 이순신장군 딱 한 사람뿐이다. 이순신장군과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도 못 된다.” 아래는 도고헤이하치로와 지기였다는 한국인 사업가 이영개가 도고 본인에게서 들었다는 말이다(藤塚明直, アドミラル李舜臣を讃ふ, 慶熙 第8号(京城公立中学校同窓会),1977).
‘저는 예전에 토오야마 미쓰루옹과 함께 도고씨의 저택을 방문하여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저와 친한 한국인 이영개씨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원수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네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제 스승이십니다.”라고요. 무릇 제독이란, 쪽빛 바다의 깊은 곳에 가라 안는 중후감이 있고, 밑에서 위로 오르더라도 적요함을 감당한 데가 있다. 제독 이순신도 이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도고는 ‘자신은 넬슨에 비교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순신은 나를 넘어서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략) 메이지 38년 5월 27일 새벽, ‘적함 발견’이란 경보를 접하고, 연합함대는 진해만에서 출동했는데, 전함대가 앞바다로 나오자마자, 각함의 장병들은 멀리 서쪽을 바라보며 이순신에게 진혼의 예를 올렸다. 이 제독은 1598년 11월 18일 새벽, 남해도 북쪽의 수로에서 잔적을 소탕하다 유탄에 왼쪽 어깨 아래를 관통당해, 해전 7년 연승의 제독은 숨을 거두었다. 이 제독을 스승으로서 잊지 않은 한, 일본해군에는 항상 영광이 있었다.
도고헤이하치로는 원수로 진급하였고,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순수한 군인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일본의 군신으로, 동양의 넬슨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심은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들었다고 전해진다(확실한 출처는 아직 미상).
▢ 러일전쟁 승리 축하연에서 신문기자와의 인터뷰 답변 요점
★ 넬슨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함대를 가지고 싸워 이겼다. 그러나 나와 나의 함대는 러시아 발트함대의 3분의 1 규모로서 이겼다.
★ 나는 위로는 황공하게도 천황 폐하로부터 아래로는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단결된 성원을 받고 나섰다. 이순신 장군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모함에 시달리고 죄인이 돼 고문까지 받았다. 겨우 목숨을 건진 채 풀려나서 그 궁지에도 굴하지 않고 명량,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최후의 해전에서 전사했다.
★ 나를 넬슨 제독과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이순신과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 넬슨제독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장수다. 영국의 넬슨은 군신(軍神)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이 못된다. 정복(征服)의 해군역사에서 군신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제독이 있다면, 그는 이순신뿐이다.”
★ 무릇 전쟁에서 군인의 몫은 1%요 국민의 단합된 힘이 99%다. 넬슨은 국민의 성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전쟁을 치렀고, 이순신 장군은 온갖 시기와 모함을 무릅쓰면서 싸웠다. 이 점 하나만 보더라도 나는 이순신 장군의 비교대상이 못되며 그 분이 보여준 전략도 내가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인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나는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
▢ 러일전쟁의 승리로 도고헤이하치로가 세계적인 영웅이 되어 있을 즈음, 미국 해군사관학교 4학년 생도들이 임관(任官)을 앞두고 일본을 방문한 때의 발언.
★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조선의 수군을 지휘한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과 진린(陳璘) :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의 이순신 장군의 평가는 ‘이순신에게는 천지를 주물러 경영하는 재주와 무너지는 세상을 손보아 새롭게 한 공이 있다(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고 하였다. 이 말은 이순신은 천지를 경영하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이 재주와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것처럼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진인은 이순신 전사 직전 약 5 개월간 이순신을 직접 접하여 교유하고 느껴본 장본인이었고, 이순신의 영욕과 정치적 부침에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초연한 입장의 제3인으로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조선 사람들을 깔보고, 명나라에서조차 포악하고 거만한 평을 받던 장수의 인물평이란 점에서 그의 평가는 훨씬 돋보이고 있다. 이런 연유에서 그는 이순신 사후에나마 명나라 신종황제를 움직여 이순신에게 명나라 수군도독의 벼슬과 도독인을 포함한 팔사품을 내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양에 알려진 이순신 장군 :
영국 해군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Ballard, George Alexander)은 그의 저서인(일본 정치사에서의 해양의 영향, 1921)에서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 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라 기술했다.
이 책은 이순신에 대한 서구의 평가와 관련하여 국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다. 밸러드의 책에서 이순신은 서구, 특히 영국의 영웅인 넬슨과도 같이 묘사되었고, 수군 장수로서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밸러드의 이러한 서술은 단순히 이순신을 높이기 위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밸러드의 책은 분명 ‘한국사’가 아닌 ‘일본사’를 주로 다룬 책이었다. 그 책의 목적은 1920년대 일본이 영국에게 더 이상 동맹국이 아닌 ‘위협’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 그 위험성을 여론에 호소하여 해군성이 힘을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한 서사 구조로서 일본은 과거 해양의 중요성을 모를 때에는 조선과 같은 작은 나라에게도 패배하였으나, 해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이후에는 세계의 열강으로 변모하게 된 것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 구조 속에서 일본이 조선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서 언급되었던 것이 동양의 ‘넬슨’처럼 묘사되었던 영웅, 이순신이었던 것이다(석영달, 한일관계사연구).
서양에 이순신 장군 이미지를 전파하는 두 주인공으로 호머 베잘릴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와 조지 알렉산더 밸러드가 있다(석영달, 제임스 머독의 ‘일본의 역사’). 헐버트의 저서(1905 발간)와 밸러드의 저서(1921 발간)에 앞선 제임스 머독(James Murdoch)의 저서(1903 발간)가 있다. 머독이 먼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의 전설이 서술되었다. 머독은 1890년대 일본의 자료에 의존했는데 당시 일본은 서양 해군을 능가하는 일본 해군의 힘을 원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전설을 소환하여 넬슨과 비교하였다. 머독의 저서(1903)는 당시 매우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밸러드가 인용하여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가 서양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도가가 러시아 해군을 완파하여(1905) 일본인들은 더 이상 이순신을 넬슨 제독과 비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과 일본의 자학사관 :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서양문명을 배우기와 따라잡기를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은 영국의 넬슨과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알게 되면서 나폴레옹을 히데요시, 넬슨을 이순신에 비유하였다. 이순신과 넬슨은 각각 바다에서 나폴레옹과 히데요시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다는 공통점을 비교하였다. 서양에 필적하는 제독으로 이순신을 내세웠지만 러일전쟁에서 토고 헤이하치로라는 해군영웅이 등장하면서 이순신 내세우기는 수그러들었다(김준배, 일본언어문화, 2017.1).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자료에는 이순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미화하는 경향이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에 이어 도쿠가와이에야스 막부도 임진왜란을 다룬 내용의 출판을 엄격히 통제했지만, 서애 유성룡이 집필한 징비록이 1695년 일본에서 출판돼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읽혀지면서 평가가 달라졌다. 그 때부터 임진왜란의 전모가 알려졌고 이순신은 조선의 명장으로 인식되었다. 1900년대 초 일본 역사가 후지이노부오(藤井信雄)의 이순신 각서(李舜臣覚書, 古川書房, 1982)에는 일본 해군의 영웅 도고헤이아치로 제독이 이순신을 존경하며 스승처럼 여겼다는 기록이 있고, 일부 일본 전쟁사학계에서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시킨 도고의 전략 ‘정(丁)자 진법’이 이순신의 학익진에서 비롯됐다는 학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부 일본인들이나 전문가들은 러일 전쟁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도고헤이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 한다'거나 '나를 영국 해군제독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이순신이 제독이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가짜뉴스이고, '한국인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폄하하는 배경에는 일본 수구세력이 자학사관(自虐史觀)을 극복하려는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