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성소(聖所)가 된다. 대부분의 마을이 뒷산 중턱쯤에 산신당을 갖고 있고, 마을 입구에는 서낭당, 장승, 솟대, 탑, 선돌, 당수나무 등이 두세가지씩 복합되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마을이 지니는 종교적 성소로서의 성격은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마을사람들은 그들 삶의 터를 예측이 가능한 질서와 조화의 규칙적인 세계로 인식하고, 또한 그러한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해 가능한 규칙적인 세계란 신(神)에 의하여 축복과 보호를 받는 신성지역을 의미하며, 그것은 동시에 세계의 중심을 뜻하기도 한다. 오직 신성한 장소만이 의미가 있고 정주(定住)할 수 있고 그것들만이 진정한 장소인 것이다. 곧 어떠한 장소가 정화(淨化)되고 신성화되었을 때 마을이 탄생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알지 못하고 개척되지 않은 새로운 땅에 정착한다는 것은 천지창조의 행위와 동등하다. 마을이 생기면서 동서남북으로 마을신이 자리를 잡고 마을을 수호하기 시작했다든지, 섬마을의 경우 입도(入島)와 더불어 마을 사람의 공동작업에 의하여 제당(祭堂)을 깨끗한 성역에 건립하는 것 등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또한 마을의 지형을 풍수에서 보아, 그것에 맞는 어떠한 조치를 취하는 것도 자신의 정주공간을 질서와 안정의 세계로 만들려는 배려인 것이다. 가령 마을이 행주형국(行舟形局)이라서 반드시 돛대를 세워야 한다든지, 뱀의 형국이기에 뱀머리에 해당하는 곳을 선돌로 눌러 놓는다든지, 노인형국이라 지팡이를 꽂아야 한다든가 하는 조치는 그러한 사례이다.
이에 반해서 마을의 바깥은 세속적이고, 위험하고, 비인간적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마을 입구는 신의 보호를 받는 마을 내부와 그렇지 않는 외부를 차단하는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 지역이 된다. 이런 곳일수록 여러 잡귀와 부정이 침입하기 쉽기에, 여기에 장승?솟대 등의 여러 신앙대상물을 세운다. 그리하여 마을 밖에서 오는 액을 막고, 아울러 마을 안의 복이 흘러나가는 것도 막는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먼길을 떠날 때나 오랜 타향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마을입구의 신앙 대상물들에 인사를 고(告)했으며, 심지어 여기서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자 하였다. 또한 결혼 후에 새 신부가 마을로 들어올 때, 이곳에 북어, 술, 떡 등을 진설하고 절을 하고야 들어갈 수 있었다. 상여도 이 곳 만큼은 피하는 것이 상례이다. 간혹 한밤중에 처녀들이 이웃 마을로 마실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도 이곳 장승이나 당수나무가 보일 때부터였다. 돌림병을 막으려고 디딜방아 뱅이를 하는 경우에도, 아낙네들이 디딜방아를 훔쳐서 상대방의 마을입구만 벗어나면, 그 마을 사람들도 디딜방아의 반환을 요구하지 못하였다. 소도둑이 밤새 도망을 갔으나, 날이 밝아 살펴보니 장승이 있는 마을 입구였다는 흔한 이야기도 모두 마을 입구가 갖는 종교성과 경계성(境界性)에 관한 사례이다.
마을 입구가 마을의 내부와 외부를 차단하고 연결하는 대표적인 장소이지만, 또한 마을의 외곽 둘레도 경계선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물론 마을의 외곽 둘레가 모두 울타리로 둘러진 것은 아니지만, 마을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상의 경계선을 상정(想定)하는 것이다. 호남지방의 당산제에서 ‘오방돌리기’라 하여 줄다리기를 행하기 전후에 어깨에 줄을 메고 마을을 한바퀴 도는 것이나, 또는 횃불을 들고 마을 주변을 도는 것은 마을의 경계를 마을 입구뿐만 아니라 마을의 외곽 둘레로도 확장함으로써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보장하려는 의미이다. 일부의 마을이 동제(洞祭)시에 금줄을 마을전체의 주변에 드리우는 것이나, 장승을 동서남북 사방에 세우는 것도 그러한 뜻에서 이다.
요컨대 종교적 성소(聖所)로서 마을을 구성하는 일은, 그들의 정주공간을 신의 보호를 받는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가꾸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2. 마을신앙의 이중(二重) 구조
마을신앙은 상당신(上堂神)과 하당신(下堂神)에 대한 신앙으로 구성된다. 상당신은 마을 뒷산의 조용하고 그윽한 곳에 모신 산신(山神)이 되며, 하당신은 마을 입구에 모셔져 있는 장승, 솟대, 선돌, 탑, 둥구나무 등을 말한다.
이즈음 민속신앙의 쇠퇴로 인하여, 상?하당 중 하나만 모시는 마을이 많으나, 원래는 거의 모든 마을에서 상?하당신을 함께 위하였다. 상당을 구성하는 산신은 마을 전체의 안녕과 질서를 위하여 믿어지는 최고의 신이기에, 사람들은 그를 존경은 하나 어렵게 생각하며, 그해서 아주 정중하며 조용한 가운데 모신다. 닭소리, 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찾아서 모시게 되는 이른바 ‘정숙형(靜肅形)’제의인 것이다. 그가 깃들여 있는 곳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시끄러운 곳이 아니라 울창한 숲 속에 항상 적당한 어둠과 조용함이 깔려있는 곳으로, 마을의 최고신답게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마을 뒷산 중턱이나 또는 꼭대기에 자리한다. 그리고 이 산신제에는 제관, 축관, 유사 등 남성들로 구성된 제의 집행자만이 참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일체 금지된다. 특히 여성들은 엄격히 통제된다. 산신제가 치러지는 동안에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불을 환히 밝히고, 제관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온 마을 사람들은 마음을 졸이면서 아무쪼록 무사히 신신제가 잘 치러지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한편 하당을 구성하는 장승, 솟대, 탑, 선돌, 당수나무 등에 대한 제의는 일반적으로 ‘거리제’라 지칭한다. 때에 따라서는 아무 신체(神體)도 없이 마을 입구에서 치러지는 제의도 거리제라 한다. 따라서 거리제에는 장승제나 탑제도 당연히 포함된다. 곧 거리제에서 ‘거리’란 마을 입구를 뜻한다. 마을 입구는 마을 안의 신성과 질서의 세계와 마을 밖의 부정과 무질서의 세계가 경계 지워지며 동시에 접촉되는 공간이기에, 이러한 곳에 여러 신앙물을 건립하여 마을 밖의 부정을 막으며 마을 안의 재복(財福)이 흘러나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하당의 신들은 그것이 장승이든 솟대이든, 또는 탑이나 선돌이든, 모두 마을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관계를 맺고 있는 실질적인 하위의 신이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들 하당신들이 마을의 주신(主神)인 산신보다도 더욱 친근하며 밀접한 신앙대상이 된다.
따라서 거리제는 산신제의 정숙형 제의에 비하면, 잔치분위기 그대로이며, 새해에 대한 희망과 흥분, 그리고 놀이 속에서 치러진다. 그리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을 사람 누구든 나와서 흥겨운 놀이마당을 연출한다.
3. 산신당
마을 전체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 최고의 신인 산신은,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마을 뒷산이나 부근의 산 중턱쯤에 위치한다. 산신당에서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나, 반대로 평지인 마을에서는 산신당의 위치가 대충 확인되든지 아니면 아예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앞서 지적한대로, 울창한 숲 속에 항상 적당한 어둠과 조용함이 깔려 있는 곳으로, 평소에는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다. 무단(無斷) 출입은 물론 근처의 나무나 돌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신벌(神罰)로 알려진 동티가 난다. 심지어 어떤 할머니들은 산신당의 위치를 외부 사람들에게 일러주는 것조차 마음에 꺼려한다. 특히 일부 섬 지방의 경우는 외지 사람들이 산신당에 접근하는 것을 일체 불허한다.
산신당은 마을 뒷산이나 부근의 산에 있는 고목(古木)이나 괴암(怪岩)을 자연 제당으로 모시기도 하고, 아예 당집을 지어서 산신을 모시기도 한다. 산신당은 이렇게 자연제당과 당집의 두 형태로 나눌 수 있는데, 시간적으로는 자연제당이 보다 앞서는 형태로 여겨진다. 그러나 어떤 행태이든 나무, 바위, 샘은 산신당을 꾸미기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 이중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샘인데, 이 물로 제관들은 목욕재계하고 조라술을 담그고, 떡을 찌고, 메를 짓고, 탕을 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신당이 산정(山頂)에 별로 없는 실제적인 이유가 이 샘물의 확보에 있다. 물론 이 샘이 찾아지지 않는 어쩔 수 없는 경우는 마을로부터 물을 길어와야 한다. 이때 마을사람들이 공동우물을 쓰는 것은 엄격히 통제된다.
자연제당의 경우는, 백지나 짚, 그리고 돗자리를 깔든지, 또는 수수깡이나 옥수수대로 발을 엮어서 그 위에다 제물을 차린다. 제기도 그 부근의 바위 틈새에 잘 보관하거나 막돌로 쌓아놓아 다른 사람의 손타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제물을 마련하기 위한 노천(露天)부엌을 마련한다. 때로는 산신에게 바친 소의 뼈를 파묻는 바위 그늘도 지정되어 있다. 제관들은 이곳에서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제를 지낸 후, 새벽닭이 울 때까지 추위를 참아내며 기다린다.
당집제당의 경우는 한 칸 짜리와 두 칸 짜리가 있는데, 한 칸 짜리의 당집에는 산신 신위(神位)와 산신도가 있기도 하고, 그리고 시루 속에 보관된 제기를 한옆에 두기도 한다. 그리고 산신이 할아버지 신이면 바지?저고리 등 남성 용품을, 할머니 신이면 치마?저고리, 비녀 등 여성 용품을 폐백으로 바쳐 놓는다. 두 칸 짜리 당집에는 여기에 덧붙여 한 칸을 부엌으로 쓰는데, 이곳은 제관들이 추위를 피하며 쉬는 곳으로도 쓰인다.
그런데 이 산신이 있는 산을 흔히 당산(堂山 : 특히 호남지방)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종교적 상징에서 보면, 천산(天山)이라 할 수 있고, 산신은 천신(天神)인 것이다. 천산과 당산, 천신과 산신은 대우주(Macrocosmos)의 상징성을 마을이란 소우주(Microcosmos)로 축약했을때, 나타나는 관념이다. 따라서 산신은 세계를 주관하는 천신의 소우주화이며,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듯 보이는 천신을 마을이란 실제의 소규모 정주공간안으로 끌어들여, 마을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인격을 지닌 주신(主神)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산신은 처음에는 어떤 형체도 없이 막연히 관념상으로만 최고의 마을신으로 여겨지다가, 점차 백발의 노인이나 호랑이라는 특정 인물이나 동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때로는 호랑이 자체가 산신으로 관념되기도 하지만, 또한 많은 경우 호랑이는 산신의 사자(使者)나 운반체(運搬體)정도로 여겨진다. 이 보다 시간적으로 후래에 나타나는 산신에는 실제의 역사적 인물이, 그것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등장하기도 한다.
하나의 자연마을은 하나의 특정 산신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몇 개의 마을이 하나의 산신을 위하기도 한다. 그리고 만일 어떤 마을에서 파생된 작은 마을이라 한다면, 일단 큰 마을에 가서 산신제를 모신 다음에, 자기 마을인 작은 마을에 와서 다시 모시는 경우가 있다. 한편 특이하게는 마을의 산신들이 서로간에 친인척 관계를 형성하여, 각기 다른 마을의 산신이 내외지간이나 부자(父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마을 사이에 어떤 혈연적 및 지연적 관계, 그리고 시간적 선후의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4. 서낭당
서낭당은 막돌로 일정한 모양 없이 자연스럽게 쌓아 올린 신앙대상물을 일컫는다. 그러나 지나는 사람마다 돌을 던져 쌓았기 때문에, 그 생김새는 대체로 작달만한 원추형으로 되어있다. 이런 서낭당은 대개 마을 입구나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는 고개 마루에 위치한다. 그런데 서낭당에는 반드시 큰 나무가 한?두 그루라도 있거나, 또는 숲이 우거져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러한 자연제단에 더욱 치성을 드리려면, 드문 사례이기는 하나, 신당처럼 꾸민 서낭당을 짓고, 성황당(城徨堂)이라 쓴 현판(懸板)을 걸기도 한다.
서낭당은 마을의 다른 신앙대상물보다 특히 경계신(境界神)으로서 역할이 강하다. 어떤 고개 마루에 있는 서낭당은 하나의 지역과 다른 지역을 지리적으로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경계표시이며, 마을입구에 있는 서낭당은 마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표시가 된다. 마을입구의 서낭당 경우에도, 그것은 장승이나 솟대, 탑 등 보다도 조금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마을의 전진기지(前陣基地)로서 충분한 기능을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장승과 솟대 등은 오히려 마을의 후방기지로 볼 수 있다. 곧 서낭당은 마을과 마을 사이의 경계표시로서, 또는 마을의 안과 밖을 구획짓는 기능을 하는 것인데, 이렇게 인간의 정주공간을 경계 지우는 실제적인 장치가 가장 원시적으로는 돌무더기로 표현된 것이다. 한국 고대 사료(史料)에 간혹 발견되는 ‘적석위표(積石爲表)란 표현도, 돌을 쌓아 경계표로 하는 전통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일러준다.
그런데 이런 경계표시는 동시에 종교적인 숭배와 그 의례대상이 되기도 한다. 경계표가 최초의 원시제단(原始祭壇)이라는 종교인류학의 고전적인 견해도 서낭당을 이해하는데 유효하다. 실제로 서낭당을 지나는 사람들은 왼발로 세 번을 구르고, 침을 뱉으며, 돌을 던져 얹는 신앙행위를 한다. 서낭당을 그냥 지나가면 무엇인가 해를 입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길손이 지닌 무슨 물건이라도 바치고 일정한 종교적인 행위를 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바칠 것이 마땅치 않으면 돌이라도 던져주어야 한다. 발을 구르는 것은 서낭신의 위해(危害)에서 다소 벗어나보려고 하는 노력의 표현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지만, 확실치가 않다. 침을 뱉는 것은 서낭신을 능멸하는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길손의 영혼을 바치는 종교적 행위로 생각된다.
고대사회에서는 침을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로도 여겼다. 침에는 인간 영혼의 극히 작은 부분이 들어있게 때문에, 그것을 신들에게 바침으로서 인간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개인이나 집안에 재난이나 우환 등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또는 칠월칠석에 대개 부녀자들이 간단한 제물을 마련하여 치성을 드리는데, 어린아이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서낭당 나무에 헝겊 조각을 폐백으로 바치기도 하고, 장사를 잘되게 해 달라고 짚신을 걸기도 한다.
무당이나 경객(經客:讀經쟁이)등이 당주네 식구들과 함께 와서 서낭제를 지내기도 한다. 또한 가끔은 음력 정월 초순께 마을 전체를 위한 동제(洞祭)를 여기서 모시기도 한다.
한편 전통 혼례에 있어서, 신랑의 초행(初行)길이나 신부의 신행(新行)길에 서낭당을 만나면 서낭당에 음식물이나 무색 헝겊을 던지거나 매달아 놓으며 또는 헝겊 주머니에 소금을 달아 서낭당에 걸어놓기도 한다. 때로는 바가지에 명태 대가리를 담아 서낭당에 바치고 간다.
그런데 이 돌무더기 서낭당은 만주와 몽골, 시베리아 일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서, 그것이 한국의 고유한 신앙만이 아니라, 북아시아 전역에 걸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신앙대상물임을 알 수 있다. 곧 몽골의 경우 서낭당과 외형상 유사한 오보(obo)도 경계표시인 동시에 신역(神域)인데, 어떠한 경우에도 이곳을 넘어 함부로 침입치 못하고, 이 부근에서는 어로와 수렵 등이 금지된다. 그리고 길손이 이곳에 돌은 얹는다든지, 헝겊이나 가죽 조각을 폐백으로 바치는 것 등, 그 신앙행위도 유사하다.
이렇듯 서낭당은 마을과 마을을, 그리고 마을의 안과 밖을 경계 지우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길손의 여행 축원과 한 가정이나 마을을 위한 신으로 모셔진다. 그리고 이러한 서낭당은 고대로 소급되는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또한 그것은 비단 한국 의 고유한 신앙만이 아니라 북아시아 전역에 걸쳐 나타나는 보편적인 민속신앙의 하나라 할 수 있다.
5. 탑
탑은 서낭당과는 달리 막돌을 이용해서 원뿔대 모양으로 쌓은 마을의 신앙대상물이다. 탑은 이렇게 원뿔대 모양을 기본으로 하면서 세워진 위치, 마을의 규모, 남?여성 탑 등의 차이에 따라서 약간의 변형이 이루어진다. 탑은 기본적으로 기단부, 탑, 본체, 탑윗돌로 구성되며, 때로는 탑안에 어떤 내장물을 넣기도 한다. 기단부는 탑을 견고하게 유지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터를 말하며, 탑 본체는 막돌로 원뿔대 모양으로 쌓아올린 부분을 지칭한다. 탑윗돌은 다 쌓은 탑위에 세워놓은 조그만 선돌로서 모든 마을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다 가늘고 길며 뽀족한 탑윗돌은 남자 탑에 올리고, 그리 길지 않고 다소 펑퍼짐하며 끝이 둥그스런 탑윗돌은 여자탑에 세워서 탑윗돌이 탑의 성별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때로는 마을의 어떤 희망 사항에 따라서 탑 안에 내장물을 넣는 경우도 있다. 가령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탑안에 숯이나 솥을 넣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오곡단지, 밥주걱, 쇠스랑 등을 넣으며, 일반적인 제액초복(除厄招福)을 위해서 특정 부작(符作)을 넣는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원뿔대 모양의 돌무지’는 흔히 탑이라고 불려지나 다시 성(性)이나 세워진 위치나 규모 등에 따라서 할아버지탑, 할머니탑, 남자탑, 여자탑, 내외탑, 바깥탑, 안 탑, 큰 탑, 작은 탑 등으로 불려진다. 그리고 존경이 담긴 표현으로는 어른, 어르신네, 거리 산신님 등이 있다. 탑이 세워져 있는 곳을 탑거리, 탑선거리라고 부르며, 탑을 모시는 의례는 탑제 또는 탑고사라고 한다. 그런데 탑이 아닌 선돌도 때로는 그냥 탑이라고 부르는 수도 있으며, 반면에 탑을 탑장승, 적석(積石)장승이라 하여 탑에 장승이란 명칭을 부과하는 수도 있다. 이것은 아마도 산돌, 장승, 탑이 모두 거리제의 대상이 되는 하위신들이기에 서로 혼동하여 사용하는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들 탑을 쌓게되는 동기는 마을의 다른 신앙대상물의 경우에 비해서 특징적이다. 곧 다른 신앙대상물이 마을사람들의 자발적인 의지에서 세워진다면 탑은 거의가 무당이나 지관 등 종교전문가의 권유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점이다. 지관은 항상 그의 전문지식을 이용하여 구체적인 풍수론에 의거해서 재앙의 원인과 대책을 제시하는데 비해서 무당은 다소 막연히 재앙을 막는데 탑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리고 일부의 사례를 보면 무당이 탑제의 제관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또는 사람들이 탑에 무수히 촛불을 밝히고 탑돌이를 하는 등 불교의례와 유사한 점이 있어서 흥미롭다.
탑은 서낭당과는 다르다. 우선 그것의 위치, 형태, 기능 등이 다르다. 그러나 돌과 돌무더기 계통의 민속신앙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발생상의 어떤 상관관계가 있으리라 추측된다. 우리 민속신앙의 한 갈래에는 돌을 쌓는 행위 자체와 그 쌓아진 돌에 대한 어떤 신앙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곧 탑은 아마도 돌을 쌓는 행위자체를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또한 그렇게 쌓아올린 대상물을 성소(聖所)로 믿는 우리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돌이 지니는 영원성과 불변성은 인간에게 성스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더구나 거대하며 기묘하게 생긴 바위나 음습한 바위그늘은 신령이 내리기에 알맞는 장소였다.이러한 신앙대상물로서의 자연적인 바위나 돌에 대한 신앙을 인간의 정주공간안으로 옮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선돌을 우뚝 세우거나 돌을 하나하나 정성껏 쌓아 올려서는 상징적으로 하늘과 지상을 연결시키는 인위적인 탑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탑은 이러한 신앙적 배경에서 생겨났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탑에 대한 원초적인 신앙이 그후의 여러 종교현상들과 어우러져 탑 신앙 안에는 몽고 초원의 오보(obo)와 계통을 같이하는 서낭당 요소와 조산(造山 또는 朝山)탑으로 대표되는 풍수신앙의 요소, 그리고 환히 촛불을 밝히고 탑돌이를 하며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불교적 요소까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여러 종교요소들은 서로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훌륭히 조화되어 탑 신앙을 구성한 것이다.
6. 장승
장승은 마을의 제액초복(除厄招福)과 풍농(豊農)을 위하여 나무나 돌에 사람의 모습을 조각하여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운 신앙대상물을 말한다. 장승도 다른 신앙대상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 개인의 발원에 의한 작품이 아니라 모든 마을 사람들의 신에 대한 관념과 미적(美的)감각이 어우러져 이루어낸 공동의 신앙적 작품이다. ‘무계획의 계획으로, 무기교의 기교’로 만들었다고 할 만하다.
마을사람들은 장승을 세워 먼저 마을 밖으로부터 침입할지 모르는 잡귀잡신(雜鬼雜神)과 재액(災厄)을 막아내기 위하여 장승을 가능한대로 무사(武士), 장군(將軍), 역사(力士), 문수(門守) 등을 흉내내어 아주 무섭게 표현하려고 애는 쓰지만 결국 마을 사람들의 심성이 그렇듯이 장승도 소박하고 푸순하게 만들어진다. 무섭게 보이려는 속마음의 또 다른 한편에는 마음씨 좋은 시골 노인네의 속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표독스럽지 못한 표정과 기대하는 액막음의 기능이 서로 어울리지 않음을 고려했는지 장승의 몸통에 장군이니 신장(神將)이니 하는 명문(銘文)을 새긴다. 가령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 천상천하축귀대장군, 동서남북축귀대장군, 금귀대신, 금호장군(天下大將軍, 地下大將軍, 天上天下逐鬼大將軍, 東西南北逐鬼大將軍, 禁鬼大神, 禁護將軍)’이라고 묵서(墨書)하거나 새긴 것 등이 그것이다.
장승은 대개 하나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남장승과 여장승을 마주보게 하거나 나란히 세우는데 이는 우리의 신앙대상물이 대개 한쌍의 부부신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어떤 장승에는 몸통에 부근의 주요 고을까지 가는데 소요되는 거리를 리(里)를 단위로 기재하여 이정표(里程表)역할도 하게 된다. 가령 ‘한양 사십리, 광주 이십리(漢陽 四十里, 廣州 二十里)’와 같은 경우이다. 한편 장승으로도 방위를 알수 있다. 대체로 남장승은 동쪽으로, 여장승은 서쪽으로 모시기 때문에 해가 가리워져 흐린 날에도 길손은 짐짓 방향을 알수 있다. 또한 마을에 따라서는 사방(四方)에 장승을 세워서 동방청제대장군, 서방백제대장군, 남방적제대장군, 북방흑제대장군이라고 하기 때문에 역시 사방을 금새 알아 차릴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장승은 마을의 입구나 사방, 그리고 길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사찰의 입구나 사방에도 세워져 사찰의 영역을 가리는 기능도 한다. 물론 불교사찰을 외부의 재액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장승이 있는 그 안쪽의 영역은 그 소유 및 관할권이 사찰에 있다는 표시로 그 안에는 어로, 사냥, 채집 등 어떠한 경제적 행위나 다른 종교적 행사가 금지된다. 따라서 장승은 기본적으로 마을 수호를 주된 기능으로 하면서 한편 경계표와 이정표로서의 역할도 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장승제’를 지내는데 먼저 깨끗한 사람들을 손 없는 방위의 산으로 보내 장승을 만들 나무를 벌채한다. 이 때에 산신에게 간단한 제를 올려 벌채할 것을 고한다. 나무를 잘라 마을로 돌아오면 사람들이 풍물을 치면서 마중을 나와 맞이하고 이어서 눈썰미와 손재간을 가진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까뀌와 자귀, 톱, 낫 등으로 깎고 다듬고, 붓으로 먹을 묻혀서 눈과 수염, 코 등을 솜씨껏 그려내고 그리고 몸통에는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이라 정성껏 쓴다. 요란한 풍물소리와 여러사람들이 거드는 한마디씩의 간섭, 그리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마을을 지켜낼 장승을 깎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넉넉하다. 장승이 뜻한 바대로 잘되지 않았을 때도 상관은 없고, 한바탕 웃음소리에 새로 깎은 장승은 사람들의 마음을 풋풋이 적신다. 이렇게 해서 올 한해 마을사람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함께 하며 그들의 ‘마음의 집’이 될 장승은 태어나는 것이다.
7. 솟대
솟대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대상물을 일컫는다. 이러한 솟대를 마을 사람들은 음력 정월 열나흗날, 동제 모실때에, 마을의 안녕과 수호(守護) 그리고 풍농을 위하여 마을 입구에 홀로 세워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장승, 선돌, 탑, 당수나무 등과 함께 세워져 마을의 하당신(下堂神) 또는 상당신(上堂神)이나 주신(主神)으로 모셔진다.
솟대의 새는 대개 오리라고 불리우나 일부 지방에서는 까마귀라고도 부른다. 그밖에 기러기, 갈매기 등으로도 관념된다. 하여튼 솟대의 새는 철새이자 물새인 ‘오리’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에는 많은 종교적 상징성이 깃들인다. 가령 철새는 일정한 시간을 주기로 하여 날아 갔다가 다시 오는 행위를 해마다 반복하는 것이기에 고대인들은 오리를 인간 세계와 신령의 세계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신조(神鳥)로 여겼다. 또한 오리의 잠수(潛水) 능력은 샤머니즘의 삼층 우주관에 있어서 천상계와 지상계, 그리고 지하계(水界)를 꿰뚫는 신력(神力)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천상계와 지상계만 넘나들수 있는 일반의 새들에 비하여 삼계(三界)를 넘나드는 오리는 더욱 신성시되었다. 시베리아 샤만이 오리 모습의 의상(The Costume -Duck)을 입고 굿을 했던 것은 바로 그 같은 종교적 상징성을 이용하고자 함이었다.
지금은 솟대를 구성하는 두 요소, 곧 장대와 새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분명한 의미를 부여하는 마을은 거의 없어서 원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솟대는 아마도 북아시아 샤머니즘의 문화권안에서 우주나무(Cosmic Tree)와 물새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매우 오랜 역사성을 지니는 신앙대상물로 생각된다. 이러한 솟대는 농경 마을을 사회 구성의 기초 단위로 했던 때부터 마을의 안녕과 수호를 맡고 농사의 성공을 보장하는 마을신의 하나로 성격을 굳혀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솟대는 풍수지리사상과 과거급제에 의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의 풍조가 널리 퍼짐에 따라서 행주형(行舟形)지세에 돛대로서 세우는 짐대와 급제를 기념하기 위한 화주대(華柱臺)로 분화 발전되어 갔던 것 같다.
솟대가 언제부터 농경 마을의 신으로 모셔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북아시아의 솟대와는 달리 우리의 솟대는 농경문화에 적합한 여러 다양한 형태와 기능으로 변모해 가면서 농경 마을의 신앙체계에 통합되어 갔으리라 추측된다. 솟대의 장대에는 원새끼줄이나 묵선(墨線)으로 용틀임하거나, 장대 자체도 용틀임처럼 비틀려 꼬인 나무를 베어내어 솟대를 세움으로써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비는 것 등은 솟대와 농경 문화와의 융합을 보여준다.
더욱이 철새류의 물새인 오리가 갖는 다양한 종교적 상징성이 마을의 특수한 사정과 관련된 간절한 희구에 따라서 어떤 하나의 상징성만이 강조되어 솟대의 기능 역시 다양해진 것으로 보인다. 가령 오리가 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져다준다든가, 홍수를 막아준다든가, 또는 홍수에서도 죽지않고 살아남게 한다든가 하는 역할을 한다. 이외에도 오리 솟대를 세우면 마을이 물 속에 있는 것처럼 되어 화마(火魔)가 얼씬거리지 못한다는 마을 사람들의 관념은 오리의 종교적 상징성이 마을에 따라서 얼마나 다양하게 변이(變異)되는가에 대한 좋은 자료이다. 이밖에도 새의 모양이나 머리 방향, 마리 수에 따라서도 다양한 의미가 부여된다.
이처럼 솟대는 마을신앙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신앙대상물이지만 그것이 지니는 역사성과 북아시아 솟대 신앙과의 관련성, 전국적인 분포와 농경 문화와의 다양한 융합 현상, 농경 마을에서의 액막이와 풍농의 기능, 급제 솟대와 행주형 지세의 솟대 문제, 새(특히 오리와 까마귀), 신앙의 의미 등을 고려하면 솟대의 전반적인 성격과 기능을 밝히는 일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민속 자료라 할 수 있다.
8. 당수나무
마을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을 지닌 신앙대상물은 당수나무이다. 당수나무 만큼은 장승, 솟대, 탑 등의 인위적인 것과는 달리, 자연그대로의 모습과 의미, 그리고 기능을 지닌 가장 원초적인 신앙물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당수나무에는 생우주적인(Biocosmic)인 리듬이 그대로 재현된다. 시간의 흐름,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싹이 트고, 잎이 돋아나며, 나무전체가 잎으로 무성하게 탐스러운 모습을 지니다가, 마침내 한?두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이윽고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점차 죽어간다. 그러나 새봄이 돌아오면 유한(有限)한 우리네 인생과는 달리 다시 생명의 기지개를 활짝 핀다. 나무는 달(月)과 함께 삶과 죽음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결코 소멸치 않는 재생(再生)’의 대표적 상징물이 된다.
특히 마을의 한 복판이나 부근에 있는 노거수(老巨樹)는 그 역사와 규모에 있어서 단연 마을 사람들을 압도하는 바 있다. 마을 사람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 왔고, 그들이 죽어서도 있게 될 당수나무의 시간성은 한 개인의 생존 시간을 초월해 있다. 또한 그 거대한 규모도 가히 외경(畏敬)스러운 것이다.
더욱이 마을의 역사 만큼이나 긴 세월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위함을 받아왔기 때문에, 곧 그들의 소망과 믿음이 깃들여있기 때문에, 당수나무는 보다 영험한 신령스러운 존재가 된다.
모든 마을에는 당수나무라 흔히 일컫는 신목(神木)이 있기 마련이다. 이 나무는 대개 오래되고 거대한 느티나무가 대부분이다. 또한 버드나무와 은행나무, 팽나무 등도 흔히 있다. 하여튼 둥구나무는 마을 입구나 한복판 또는 그 부근에 위치하는데, 보통 때는 그것이 마을에서 위하는 신목인지는 사실상 알기 어렵다. 장승, 솟대, 탑 등의 다른 신앙물은 누구라도 금새 그것이 인위적인 신앙상의 조형물임을 알아차리지만, 당수나무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당수나무는 여름에는 무성한 잎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서 마을사람들의 휴식처를 제공하고, 다른 계절에도 낮잠이나, 잡담, 바둑, 장기, 고누 등을 즐기는 장소가 된다. 그러나 일년에 한 두번, 가령 음력 정월 초에 왼새끼줄로 금줄을 두르면, 일상적인 세속(世俗)의 나무에서 대번 비일상적인 신령스러운 나무로 바뀌어 이른바 ‘거리제(또는 동제)잡숫는 당수나무’로 모셔진다. 이때만큼은 누구라도 접근치 못하고, 그에 대한 경외심은 어느 때 보다 드높다. 일상적인 시간에는 마을 사람들과 매우 친숙하고 격의 없이 보이는듯한 나무가, 동제(洞祭)기간에는 신목으로 환원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당연히 신앙상의 권위를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시간에도 당수나무와 친근은 하되, 어떠한 불경스러운 언행을 해서는 안된다.
당수나무는 다른 신앙물과는 달리 마을의 운명과 관련하여 여러 조짐을 나타내며, 특히 농사의 성공여부를 가리는 지표를 마련해 준다. 또한 대단히 영험하여서 마을 사람들의 여러 개인적인 소원을 이루어주며, 자신을 해친 자를 반드시 징벌한다. 가령 난리가 터질 무렵에 당수나무가 밤새 울었다든지, 나무를 베어 낸 사람들이 결국은 다 죽고 말았다든지, 고목이 되어 스스로 떨어져 버린 나무가지 조차 한밤에 관솔불 밝힌 것처럼 타올랐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거의 모든 마을에서 찾아진다. 특히 당수나무의 잎이 피어나는 여러 모양새에 따라서 어느 논에 물을 먼저 대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자연력(自然曆)의 역할’도 하며, 아울러 농사의 풍흉도 점쳐 본다.
9. 마을신앙의 의례구조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위하는 산신과 거리신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오로지 그들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신들에게 갖은 정성을 다하여 모심으로서, 그들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으려 한다. 마을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은 그들의 인간적인 의지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삶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이기 때문에, 신들의 애정어린 배려없이는 안정된 삶을 보장할 수 없다고 여긴다. 신들에게 흡족한 대접을 해드려야 하고, 조금이라도 결례되는 생각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과오는 곧바로 마을 사람들의 삶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지골을 맞는다’든지, ‘동티가 난다’든지 하는 말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일컫는다. 그래서 신을 모시는 일은 매사 조심스럽기만 하다.
어떻게 하면 신을 가장 정성스럽게 위하고, 그 신들도 마을 사람들의 정성에 감동하여 흡족한 은혜를 내려 줄 수 있을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최상의 신에 대한 대우는, 마치 하나의 인간이 그가 존경하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취하는 방식과 전혀 동일하다. 인간이 인간을 위하는 방식으로 신을 위하는 것이며, 그러한 대우를 신들도 가장 흡족히 여긴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점이 마을공동체 신앙의 의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원리이다.
손님을 놀러 오시도록 초대하면, 우리네는 원래 집안 구석구석을 깨끗히 청소해 놓는 것은 물론 가능하면 동구 밖이나 집 근처까지도 말끔히 치운다. 집안 주인을 비롯하여 식구들 모두도 깨끗히 몸단장을 하여 손님을 정성껏 맞으려 애쓴다. 이렇게 손님이 오시는 길목과 들어와서 며칠 머무르실 집안을 깨끗이 하여, 손님을 편안하고 유쾌하게 하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손님 역시 집안 식구들의 정성을 갸륵하게 생각한다. 손님에게는 평소에 잘 먹거나 입지 못하는 음식과 의복이 역시 정성스럽게 준비되어 제공된다. 때때로 손님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춤과 노래가 베풀어지고, 손님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여러 찬양의 말을 덧붙여진다. 이제 손님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고, 그래서 이때에는 아쉬운 청탁의 말도 할 수 있다. 더욱이 잘 보아 달라고, 손님이 가장 좋아하실 만한 음식과 의복, 그리고 물건 등을 선물로 바친다. 바야흐로 손님이 가실 때가 되었다. 아쉬운 작별을 인사와 함께 노자돈을 드리며 멀리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가 배웅을 한다. 그리고 집안에 되돌아 와서는 손님께서 우리의 대접을 잘 받고 흐믓해 하셨는지를 가름해 본다. 정성은 다했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치 않아, 생각만큼은 잘 모시질 못했다고 송구스러워 한다. 다음 기회에는 더욱 잘 모실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네 사람들의 손님 대접은 유난하다고 흔히 지적된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모시는 태도에는 그러한 전통적인 인간관계가 잘 반영되어 있다.
산신이나 거리신을 모시는 때가 되면 먼저 마을 구석구석을 대청소 하는 한편 제관집도 물론 청소를 해 둔다. 신이 마을에 오셔서 계시는 기간이기 때문에, 때 묻은 사람이나 잡신들은 일체 접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마을 입구에 금줄을 치고 황토을 뿌린다. 특히 제관 집 문 앞에도 금줄을 띄우고 황토를 뿌려 둔다. 이렇게 정화(淨化)된 마을과 제관 집에선 이제 신에게 바치기 위한 제물을 준비 할 수 있다. 제물을 아주 경건한 마음과 몸으로 정성껏 준비해야 되며, 이를 위하여 일체 나쁜 생각을 뿌리치고, 혹시나 음식에 머리카락 하나 침 한 방울 튈 까 보아서, 머리에는 수건을 두르고, 입에도 수건으로 가려서 조심한다. 제관도 항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수시로 목욕재계하는데, 소변을 보게 되면 얼굴과 손을 씻고, 대변을 보게 되면 목욕을 해야 하는 등 그 정성은 놀라운 바 있다. 따라서 엄동설한에 산신당에 올라가서 대소변을 보고 난 후 목욕하는 것이 힘들어서, 비록 배는 고파도 아예 금식(禁食)을 해 버리는 수도 있다. 깨끗한 제관이 깨끗하게 마련한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정성껏 모시고 나면, 마을에 따라서는 하당굿이라 하여 무당이 들어와 춤과 노래로써 신들을 한바탕 놀리고, 덕담을 늘어놓으며, 신들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신들이 마을 사람들의 제사에 흡족해 하면, 이제 그를 다시 원래의 장소로 모셔드리는 것으로 마을 공동체 의례는 끝이 난다.
10. 마을신앙의 기능
산신, 장승, 솟대, 탑, 선돌, 당나무 등을 중심으로 베풀어지는 마을의 신앙의례에는 마을 사람들의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신앙이 그대로 반영되어 미신 투성이의 신앙체계처럼 보인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정신수준이 열등한,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의 신앙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마을신앙을 이룩하고 존속시키며, 그것을 ‘마음의 집’으로 삼는 마을 사람들도 그들의 신앙을 열등한 미신이라고 비난하는 세련되며 고급스러운 사람들만큼이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다.
어떤 일정한 가치기준에 근거하여, 마을신앙이 우월한가 열등한가를 따지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자연, 역사, 문화환경 안에서 그러한 신앙의 내용과 형태를 발전시켜 왔는가를 먼저 차분히 이해하는 일이다. 흔히 마을신앙이 잘 지켜지는 마을이 그렇지 않는 마을에 비하여, 마을사람들의 공동체적 유대감을 통하여, 보다 건강한 공동체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은, 마을신앙에 긍정적인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단적으로 시사해 준다.
마을에서의 삶은 도시에서와는 달리 보다 공동체적 성격이 짙다. 지연이나 혈연에 의해 내부적으로는 결속력이 강하며, 외부적으로 다소의 폐쇄성을 지닌다. 한 개인이나 가정의 경제?사회적 행?불행도 개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마을 전체 차원에서 대부분 좌우된다. 우리 집 농사는 크게 성공을 했는데, 이웃 집 농사는 비가 오지 않아 결단났다는 상황은 설정되지 않는다. 또한 이웃집 아기가 마마에 결려 생사(生死)가 경각(頃刻)에 달렸는데, 우리 집 아기는 전혀 괜찮을 것이라고 마음놓지 못한다. 무서운 돌림병도 마을을 단위로 휩쓸어 간다. 그러니 이를 막기 위해 부녀자들이 디딜방아를 이웃 마을에서 훔쳐와 뱅이를 할 수밖에 없다. 음력 설에 집집마다 돌아가며 지신밟기를 하며 축원을 하는데, ‘그것은 미신이니 우리집 마당에선 놀지 마시오’하면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다. 명절에 모두가 일손을 놓고 새 옷을 지어 입고 시절음식을 해서 이웃간에 나누는데, 우리 집만 고고하게 평소의 생활을 혼자만 할 수 없다. 이러한 여러 공동체적 삶의 조건들이 바로 마을신앙을 형성시킨 배경이 된다. 곧 마을의 불행을 몰고올 액(厄)을 물리치고, 행운을 불러들이는데, 신앙의 내용과 형태가 집주(集注)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사람들은 같이 힘과 뜻을 모아서 장승과 솟대 깎을 나무를 산에서 모셔오고, 할아버지탑과 할머니탑을 쌓을 막돌을 이곳저곳에서 날라오고, 줄다리기를 준비하기 위하여 짚단을 모으고 줄을 꼬기 시작한다. 또한 가난한 살림이나마 정성껏 쌀 한되, 초 한자루, 동전 한닢 등을 내서 우리 마을신을 위한 제수(祭需)비용을 마련한다. 어찌 생각하면, 소박한 제상이라도 정성이나 믿음이 부족하다 하여 화내지 않고, 흠향(歆響)하시는 마을신들은 가난한 농부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양 겸손하기만 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정성스런 마음으로 부정한 행위와 사고를 일체 금지하고, 사소한 인간관계의 갈등도 풀어버리는 등 마을신들을 조금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 무척이나 조심한다. 산신제와 거리제가 치러지는 때만큼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몰입되는 경우는 없다. 마을 입구를 가로지르는 금줄과 그 사이사이에 너풀거리는 길지, 황토 흙 세무더기, 칭칭 금줄을 두른 당나무, 금줄을 두른 제관 집, 이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마을의 돌멩이 하나, 소나무 한 그루, 정겨운 참새와 까치떼 까지도 모두 거룩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각 가정을 지켜주는 신령은 그 집안의 조상과 성주, 터주 등의 집안 신령들이지만, 이러한 혈연성을 뛰어 넘어 마을공동체 의식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기능은 공동체 신앙에서 나온다. 거리제를 전후로 해서 벌어지는 지신밟기, 걸립, 줄다리기, 횃불놀이, 편싸움 등의 놀이를 통해서도 마을 사람들은 흥겨움과 신바람을 함께 느낀다. 한편 마지막으로 대동회의를 열어서 마을임원을 선출하고, 마을 공동사업을 의논하며, 상호부조와 품삯을 책정하며, 마을예산을 편성하고 결산한다. 또한 나쁜 행동과 생각을 하면 산신이나 거리신으로 부터 지골을 맞는다 하여,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마을사회를 통제하고 규범을 확인하는 관습법 역할도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을신앙이 인간의 이성이 미치지 아니하는 불확실한 현상세계를 어떤 형태로나마 설명한다는 사실이다. 마을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설명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유익하다.
마을신앙을 포함해서 우리네의 일반 민속신앙을 미신이라해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시각은 대단히 불성실한 위험한 인식태도이다. 어떤 기준에 의거하여 가치평가를 하기 전에, 우리의 자연, 역사, 문화 환경에서 언제 왜 그러한 신앙내용과 형태, 그리고 구조가 생성되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추적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일은 우리 자신의 문화 암호를 읽어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