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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 - 무왕 상나라를 멸하고 주(周) 나라를 건국하다!
주(周) 나라는 고대 상(商) 나라 다음 왕조이며 기원전 1046년~ 기원전 256년간 존재 했으니
상(商, 은) 나라를 이었으니 그 이전의 하(夏)· 상(商) 과 더불어 삼대(三代) 라고 하는데...
공자의 말처럼 요(堯)·순(舜)의 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理想) 의 치세(治世) 라고 일컬어집니다.
주(周)나라는 왕실 일족과 공신을 요지에 두어 다스리도록 하는 봉건제도로 유명한데
봉건이란 말의 원래 뜻은 주나라의 국가체제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BC 11세기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호경(鎬京: 西安 부근)에
정하여 주왕조를 건설하였을 때... 나라의 기초를 굳히기 위하여 실시한 제도 였습니다.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주 왕실은 점차 영토가 확대되면서 주민을 효율적
으로 다스리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는데.... 당시의 기술 수준이 낮아 간접
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하여 봉건제도를 창안했으며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봉건제도에 혈연적 특색을 가미한 종법제도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800~700년 경이니 고조선이 발달하고 송화강 유역에 부여, 그리고 한반도
중남부에 삼한(三韓)에 의한 진(辰)이 성립하는데.... 상(商) 나라의 제후국에 불과하던 서쪽의
주(周)족이 눈부시게 성장하여 마침내 상(商, 은)을 멸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주나라의 청동기 문화가 강소, 안휘, 호북 등 양자강 유역에서도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상의
지배기에 황하 중하류 지역에 그치던 중국의 영향력이 주나라에 이르러 양자강까지 확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주나라 때에 중국 중심의 천하관과 화이(華夷)의 관념이 생겨
나고 천명사상이나 혈연 중심의 예(禮)문화가 자리 잡는 등 중국문화의 뼈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주(周)나라는 서주(기원전 1046~ 770년)와 동주(기원전 770~ 256년)로 구분되는데
이는 견융(犬戎) 의 침입으로 수도를 호경 (鎬京, 서안) 에서 동쪽의 낙읍
(洛邑, 낙양) 으로 옮긴 것을 기점으로 나눈 것이니.... 즉, 도읍이 서쪽의
호경에 있었던 시기가 서주 시대아고, 동쪽의 낙읍에 있었던 시기가 동주 시대 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주족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니 그의 어머니 강원은 들에서 바위에 새겨진
신의 발자국을 밟은 후 이상한 기운을 느껴 그를 잉태했다는데.... 그는 어려서 부터
삼과 콩을 재배하기를 좋아했으니 놀랄만큼 결실이 좋아서 사람들은 그로 부터
농사의 기술을 배웠다고 하니 농업 생산력이 풍부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 입니다.
주족은 섬서성 서안 비옥한 관중평원에서 농업의 기틀을 닦으면서 성장했으니 농경에 적당
할뿐 아니라 천연의 요새이며, 또한 감숙 방면으로 부터 서방문화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니 전국을 통일한 진(秦)도 이곳에서 성장했으며 후직의 10대손인 고공단보
때에 기산 아래 주원(周原)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주(周)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하니
주의 청동기가 많이 나는 곳인데, 3개의 담장과 뜰로 이루어진 왕궁 유적도 발굴되었습니다.
갑조궁실터는 섬서성 치산현 봉추촌에 있으니 서상실 남쪽 두번째 방의 고실에서 갑골이 발견
된 것으로 보아 이 방은 종묘였던 것으로 보이니 고공단보의 아들 계력때 주의 국력은
성장하여 상의 경계를 사기에 이르렀으니 계력은 상 왕실에 살해되었지만... 아들 문왕은
태공망 여상의 보필 속에 비약적 발전을 하였으니 상나라는 서백의 칭호를 주고 회유
하려 했지만 문왕은 상나라 정벌계획을 수립했고 아들 무왕에 이르러 이 계획은 실행됩니다.
마침 상의 주왕이 동방의 대정벌에 나섰으니 기회를 포착한 무왕은... 기원전 1046년에 갑사
45,000명과 결사대 3,000명을 이끌고 출진해 맹진을 건너 여러부락의 군대와 합세해
“목야의 결전” 에서 상의 대군을 격파하자, 전쟁에서 패한 주왕은 조가(朝歌)의 궁전을
불사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주왕은 달기와의 사랑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고
전해지는데 상의 계속된 무력정벌과 지배층의 화려한 생활이 국력을 피폐하게 했다고 봅니다.
목야대전(牧野大戰) 이전의 상황을 보자면 사기(史記)에는 상나라의 마지막 왕 제신은
흉악한 폭군이었다고 하는데.... 제신은 주지육림·포락지형 등의 혹형을 만들며,
주(周)나라의 제후인 희창을 잡아 가두고, 그의 장자 백읍고를 요리해서 먹게
하는 등 잔악한 행동을 벌였으며 또한 각지를 정벌하여 원성이 가득해졌다고 합니다.
희창은 상(商)나라에서 풀려나 주(周)나라에 돌아온 후에는 인근 나라를 병탄하여 국력을 강화
하고, 또한 상나라에 원한이 깊은 제후들에게 손을 써서 교유하며 주나라의 국력을
강화시키지만 상나라를 공격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고는 풍(豊)으로 천도한후
행정을 개혁하고 위수 남쪽에서 낚시하는 범상치 않은 인물을 찾았으니 바로 강상 이었습니다.
문왕은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인 태공 계력도 현인을 목마르게 찾았기에 “태공이 당신을 기다린지
오래도다!” 라고 말했다니, 여기서 유래해 강상은 “태공망(太公望) 또는 강태공(姜太公)”
으로 불리었다는데.... 희창은 스스로 “문왕” 이라 칭해 상나라를 타도할 생각을 비쳤지만 이미
노령이었으니 그가 죽은 뒤 아들인 발(發)이 주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무왕(武王) 입니다.
주(周) 무왕은 혁명(革命)을 선언하니 오늘날 “혁명”이란 단어의 유래인데..... “아! 우리 우방의
총군(冢君), 어사(御事),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아려(亞旅), 사씨(師氏), 천장부
(千夫長), 백장부(百夫長) 와 용(庸), 촉(蜀), 강(羌), 무(髳), 노(盧), 팽(彭), 복(濮)의 사람들아.
너희 과(戈) 를 들고 너희들의 방패를 나란히 하며 너희들의 모(矛)를 세워라. 내 맹세할지어다.”
혁명을 선언한 무왕의 군대는 상나라의 허를 찔러 공격을 시작하고 여러 제후들이 가세하여 순식간에
대군이 되었으니 상나라는 곧 멸망할 듯이 보였지만 무왕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한 차례 군사를
물렸다가 몇년후, 무왕은 다시 상나라를 공격하니 주원(周原, 중국 섬서성 푸펑(부풍)현에서 시작해
풍호(豊鎬, 시안)를 통해 관중 분지를 지나고 중원으로 들어가 낙양을 지나 맹진(孟津) 에 도달합니다.
주나라 군대는 맹진(孟津)에서 황하를 건너려 했으나 폭풍이 불어 강을 건널수 없었으니 무왕은 분노해
황하의 신 하백에게 "천명은 이미 내려졌다, 어째서 방해하는가"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신에게
호통을 친 탓인지 폭풍우가 멎어 강을 건널 수 있었으니 배 안에 뱅어가 뛰어들어 왔는데 흰색인 뱅어는
상나라를 상징하는 색이니 상서롭게 여겨졌으며 무왕은 하북 평원을 따라 진군하며 목야에 이르렀습니다.
주무왕은 최소 900km 이상을 대군을 이끌고 행군했는데... 기원전 1000년경 상고시대에 청동기
무기를 들고 숲과 습지로 가득했던 북중국의 자연조건을 행군해야 했으니 사서에 따르면
상나라의 요새나 저항군을 만나면 깨뜨리고, 중간 중간에 합류하는 제후들도 다독여야 했습니다.
그 고생이 말도 못했으리라 여겨지는데 이렇게 주(周)나라 군대와 상(商)나라 군대가 기원전
1046년 2월 5일 상나라의 수도 조가(朝歌) 에 가까운 목야(牧野) 에서 마주치자
또 다시 폭풍우가 불었지만....... 무왕은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무찌른 명조
(鳴条) 전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니 이것은 상서로운 일' 이라고 군사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사기 주(周)본기에 상나라는 70만을 동원했으며 주나라는 동맹국의 군대를 더해 40만이었다지만
많이 과장된 숫자로 여겨지는데, 실제로는 십수만에 이르는 상나라 군대에는 비전투요원과 복속
된 작은 국가의 군대에 노예까지 섞여 있어 질이 나빴으니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주나라 군대에게
길을 열어주거나 도주하며 또 아예 창을 거꾸로 들고 뒤에 있던 본진을 공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문학가인 궈모뤄(郭沫若)는 이 병사들 가운데 노예들 까지 섞여 있었다고 추측
하며 제신은 이런 병사들을 앞에 세우고 자신이 믿는 상나라의 정예병은 뒤에 배치
했을 것이라고 보았는데, 당연히 평소 불만이 많았을 노예나 항병(降兵)들은 주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상나라 군대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강태공이 음모를 써서 계략을 꾸며 두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는데 연구에 따르면 상이
주변과 느슨한 속국관계를 이뤘는데 이 연결성이 상당히 취약했다는 점은 지적되고
있으며 전투는 상나라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고 이 한번의 싸움으로 상나라는 궤멸됩니다.
주나라 군대는 제신을 쫓아 조가(朝歌) 까지 쳐들어 가자 제신은 왕궁에 불을 지르고
녹대에 올라 불속에 뛰어들어 죽었으며, 무왕은 제신의 시신에 세개의 화살을
쏘고 도끼로 목을 쳐서 잘라 벌했다고 하며.... 이로서 상(商)나라는 멸망
하고 이후 혁명군의 맹주였던 주나라가 천자국이 되어 제후들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천하장사 악래(惡來) 역시 이 싸움에 출진했으나 죽었다고 하는데, 사기 주(周)본기
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주(周)나라와 함께 한 제후군은 용(庸)·촉(蜀)·강(羌)·
모(髳)·미(微)·노(纑)·팽(彭)·복(濮) 등이며 상서에 따르면 주왕(紂王)을
제거한 날의 간지는 갑자(甲子) 였다고 하는데...... 청동기 명문에서도 확인됩니다.
제신은 상나라의 군대를 동방으로 출진시키고 있었으니 목야의 싸움에서 노예나 항복한 병사
를 동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데, 상서 목서에서 주무왕은 제후들과 동맹을 선언하면서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 상나라의 군주는 여자 말만 듣고 현명한 사람의 말을
멀리하고…" 라는 발언을 했으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은 여기서 기원한 것입니다.
순장이나 갑골문에 등장하는 각종의 형벌이 말해주듯이, 상 왕실의 잔혹하고
야만적인 지배는 백성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으며..... 또한 상(商)나라
사람들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멸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실제로 상(商)
을 정복한 주(周) 는 이를 경계하여 음주를 특별히 단속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1046년에 상을 멸망시킨 주 무왕은 그 땅을 패, 용, 위 세나라로 나누어 주왕의
아들 녹부(무경)를 패에 봉하고 자신의 아우 관숙선에게 용을, 채숙도에게 위를
다스리게 했다는데 관숙선의 이름은 선으로 관나라에 봉해졌고 채숙도의 이름은
도로 채나라에 봉해졌기 때문에 관나라 숙부, 채나라 숙부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후
상나라의 여러제후국을 거두니 소국 99개를 정복하고 제후 652명을 복속시켰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주(周) 무왕(武王)은 서쪽으로 돌아가 통일된 중국 주나라의 도읍을 호경
(산시성 서안시 서북)으로 옮겨 주 왕조를 개창했는데... 그로부터 2년 후 주 왕실
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으니 주의 지배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원전
1042년에 무왕이 갑자기 죽고 그의 13살 어린 아들 성왕이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주의 지배력을 공고히 한 사람이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인데 동방 거점인 낙읍을 제2의 수도로
건설하고 상의 잔존 세력의 반발을 평정했으며, 주례(周禮)를 제정하고 예악을 만들고 3년간의
대 동방원정을 감행하여 주를 명실상부한 중원의 지배자로 부상시켰지만 그러나 그는 끝내
왕위에 오르지 않고 성왕을 슬기롭게 보좌함으로써... 훗날 공자로 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주공 단이 섭정을 하니 아우인 관숙과 채숙은 그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여겨 유언비어를
퍼뜨리니 무경도 상나라를 되찾을려는 욕심에 두사람과 결탁하고 서, 엄, 박고, 웅, 영의
제후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니... 주공은 3년만에 반란을 평정하고는 상의 잔여세력의 반란
을 막기위해 제후들의 힘을 빌려 이락 지역에 새로운 도읍을 세우게 하니 바로 낙읍(낙양)입니다.
상나라에 충성하는 백성들은 낙읍으로 옮기고 통제하는데 투항한 상나라 귀족 미자에게는... 옛 도읍
송을 분봉해 상을 잇게하고 무왕의 아우 강숙에게 위나라를 세우게 하고 상나라 백성 칠족(도씨,
시씨, 번시, 기씨, 번씨, 기씨, 종규씨)을 하사햇으며 주공의 맏아들 백금에게 엄나라의 옛 땅을
분봉해 노나라를 세우게 하고 상나라 백성 6족(조씨, 서씨, 소씨, 삭씨, 장작씨, 미작씨)을 하사합니다.
기원전 1035년에 성왕이 친정하자 주공 단이 정권을 찬탈하려다가 발각되어 초나라 땅으로 도망쳤다가
훗날 성왕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듣고는 주나라로 돌아왔지만, 이후로는 대권을
독점할 기회를 다시는 잡지 못했고 그러다가 그해에 홧병으로 죽으면서 주나라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지만 성왕은 그를 주나라 밖인 필 땅에 묻었으니 주 왕조의 충신에서 지우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주 왕실은 점차 확대되는 영토와 주민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는데 아직
청동기 단계에 불과한 당시의 기술 수준에서 방대한 영토를 중앙에서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수도 호경은 너무 서쪽에 치우쳐 있는지라 어차피 간접통치를 할 수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면 각 제후들을 포섭하고 통제하여 반란에 쐐기를 박을 수 있을까?
이때 창안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통치제도가 바로 봉건제도(封建制度) 이니
봉건제도란 직할지를 제외한 전국의 확장된 영토에 왕실의 혈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제도로.... 제후는 주(周)나라 왕에 의해 봉해져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지원했으나 지역의 내정에는 간섭을 받지 않았습니다.
종친들은 수도 가까이 분봉해 울타리를 삼고 공신이나 하 · 상의 후예들은 변방에 분봉하였으며 천하
는 왕의 땅이라는 왕토사상을 널리 유포시켰으니 생산력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나라가
광대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유효하게 행사할수 있었던 것은 봉건 제도라는 통치 제도가 마련
되었기 때문인데 주나라는 정치 제도에 획기적인 진전을 이룸으로써 800년간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주 왕실을 공고히 하기위해 봉건제도에 혈연적 특색이 가미되었으니 종법제도(宗法制度)로 계약으로
맺어지는 서양의 봉건제도와 구별되니, 왕과 제후는 정치적인 군신관계일 뿐 아니라 본가와 분가
의 관계, 즉 공동의 조상을 모시는 한 집안임이 강조되었으니 왕은 제후들에게 군권을 상징
하는 무기와 관복을 제공하였고 제사라는 신성한 의식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군신 관계를 확립합니다.
기원전 1042년에 성왕의 뒤를 이어 강왕이 오르는데 서쪽 귀방(鬼方)을 정벌하고 동쪽을 순시하는
것을 제외하면 나라의 재산을 축내지 않았으니.....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동이, 북적, 남만,
서융을 복종시키며 감옥이 비었다니..... 역사학자들은 두 왕을 일컬어 “성강의 치세” 라고 부릅니다.
그 아들 소왕은 전쟁을 좋아했으니 형초지역의 초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기원전 985년 소왕은
군대를 이끌고 한수를 건너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는데, 8년후 다시 초나라에서 반란이 재발
하자 한수를 건너는데 사공들이 바닥에 아교를 붙인 배에 태웠으니 강복판에서 아교가 녹아 배가
침수하자 소왕은 물에 빠져 죽고 주나라 군대가 절반이나 죽고 후퇴하니 주나라는 기울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976년 목왕은 기원전 965년에 유목민족인 견융이 조공을 바치지 않자 정벌에 나섰으니
왕 다섯명을 사로잡고 생포한 포로는 태원으로 이주시켰으며, 기원전 961년에는 서쪽 창해
에 이르니 왕복 천리나 되는 고된 행군도 서방 낙원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꺽지 못한 것인데
조보가 훈련시킨 여덟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서왕모의 나라까지 갔으니 국력을 소진합니다.
기원전 878년 여왕이 즉위햇는데 기근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졌지만 귀족들은 주색에 빠져
지냈는데 기원전 844년에 산과 숲이며 내와 못을 왕의 소유지로 강점하고 평민이 사냥
이나 어로를 못하게 하는 전리(專利)를 강행하니, 백성들의 원망과 불만이 하늘을 찔러
마침내 기원전 841년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니 여왕은 체(산시성 휘저우) 땅으로 쫃겨갑니다.
태자 정은 소목공(召穆公)의 집으로 숨으니 백성들이 둘러싸자 소목공은 자기 아들을 태자로 꾸며
내주어 태자를 살렸는데, 소공(소목공)과 주공이 함께 정사를 처리하면서 연호를 공화(共和)
로 하니 이 기원전 841년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명확하게 연대가 기록되기 시작한 시점이니,
공화 14년 기원전 828년에 여왕이 체에서 죽고 태자 정이 왕에 오르니 선왕으로 공화는 끝납니다.
선왕은 주공과 소공의 보좌를 받으며 적전례를 폐지하고 산과 숲과 내와 못에 대한 통제를 느슨하게
하며, 윤길보를 보내 험윤을 태원 북쪽으로 내쫓았으며 융적을 굴복시키고 방숙을 보내
남쪽 형초를 진압하고 윤길보에게 남회이를 굴복시켜 조공을 받았으며 진중이 서융에게
살해되자 장공 형제에게 군사 7천을 주어 서융을 정벌하니 역사가들은 “성왕 중흥”이라고 부릅니다.
기원전 779년에 궁열이 즉위하니 유왕으로 아첨꾼 괵석부로 경사를 삼으니 백성을 분노에 빠트리고,
포사(褒姒) 를 총애하여 신후와 태자 의구를 폐하고 포사를 황후에 책봉한후 아들 백복을 태자로
세웠는데... 포사는 웃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유왕이 웃기려고 적이 침입하지 않은데도 봉화를
올리니 허겁지겁 달려온 제후들이 허탕을 쳤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니 그 모습에 포사가 웃었습니다.
제후들은 분노했으니 이후로는 봉화가 올려져도 도우러 달려오지 않았다는데 유왕 9년에 신나라 왕은
서융 및 주나라 제후인 회나라 왕과 연합해 반란을 준비해 기원전 771년 주나라 수도 호경을 침범
하니 봉화를 올려도 제후들이 오지 않는지라 크게 패하고 유왕은 도망쳤다가 리산산에서 잡혀 죽습니다.
융족은 호경을 약탈한후 포사등을 잡아 돌아가니 신나라, 노나라, 허문공은 원래의 태자
의구를 왕으로 옹립했으나, 괵공한은 왕자 여신을 옹립할 것을 주장하며 휴땅으로
가니 2명의 왕인데..... 이구는 이후 견융을 피하기 위해 동쪽 낙읍으로 천도하니
주나라 (平)왕으로 동주시대인데....... 여신은 기원전 760년에 문후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주(周)의 지배는 제사 의식으로 완성되는 것이었으나, 상나라 처럼 대규모 피의 제물 을
바치는 일은 사라졌는데, 이는 주의 문화가 보다 합리적으로 발전했다는 얘기가 되니
주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가 도읍의 중심에 자리 잡은 가운데, 주가 정복한 상의
제사도 중시되어 그들의 후손을 제후국에 봉하여 조상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습니다.
종법제도는 피라미드식 신분질서가 확립되고 예문화가 정착되는데 기여하였으니 정실 부인 맏아들
을 대종(大宗)이라 하고 나머지는 소종(小宗)으로 대종에 절대 복종해야 하며 왕은 천하의 대종
이며 왕위도 적장자 계승 원칙이 적용되게 되었으니, 제후는 또 자신의 봉국 안에서는 대종이
되는 것이며 가정으로 내려가도 마찬가지니 철저한 위계질서가 사회 전반에 걸쳐 확립되는 것입니다.
이는 주례(周禮)라는 엄격하고 치밀한 예절 규범의 제정으로 강화되었는데 의식주를
비롯해 일거수 일투족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따라 정해진 절차와 제약을 따르게
하는 독특한 중국의 예문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니.... 이는 중국의 오랜 제국들에
이어지고 중국인들의 윤리와 도덕으로 체화되어 중국적 생활방식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천명사상(天命思想)' 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유포 함으로써 주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했으니, 하늘은
주 무왕에게 상의 주왕을 멸하고 주 왕조를 개국하라 했으므로 상주 왕조의 교체는 무력 쿠데타
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반영한 '상주 혁명' 인 것이고 이 논리에 의하면, 백성들은 불가항력적
으로 주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주의 지배에 반항하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기원전 771년 유목민 견융의 침입을 받은 주나라 유왕은 여산 기슭에서 살해되고, 주 왕실은 도읍을
낙읍으로 옮겨 명맥을 유지하니 '주의 동천'이라고 하는데, 이때부터를 동주, 그 이전 시대를
서주 시대로 칭하며 동주는 다시 춘추와 전국으로 나뉘어져 '춘추전국시대' 로 불리는데 춘추시대
는 공자의 책 《춘추(春秋)》에서, 전국은 전한시대의 저술인 《전국책(戰國策)》에서 따온 이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