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illiam Waterhouse
1910년
이 화가의 그림은 언제나 신비롭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여성의 이미지가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미쳤던지 아니면 미쳐가고 있는 상황인지 이 그림의 오필리아는 나와 눈을 맞추고 경고한다.
더이상 자신을 쳐다보지 말라는 둥의 말투 같은 눈빛이다.
오필리아의 뒷 배경에는 다리가 있고 다리 위에 두명의 소녀가 있다. 그리고 물이 있다. 소녀들은 오필리아를 쳐다본다. 소녀의 눈에는 호기심이 넘쳐 흐르며 익살 스럽다. 하지만 오필리아의 눈빛은 소녀들의 익살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이처럼 그림 속에서 여러가지의 시선을 느낀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래서 내가 키오스 섬의 학살을 좋아한다...여러 사람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해맑아 장난끼가 느껴지는 시선을 뒤로 살기가 느껴지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은 더욱 그렇고 말이다.
눈 부실 정도의 하얀 피부를 드러낸 오필리아는 꽃을 한아름 안고 걸어간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건다.
외국인이라 말을 알아 들을 수는 없지만 왠지 서글퍼보이는 말인 것 같다..........
저러다 발이 미끄러져 죽음을 맞이 할 것이다.
우리는 정작 그녀보다도 그녀의 운명을 더 빨리 알고 이 그림을 본다.
그래서 그녀의 한 발 한 발이 조심그럽게 보여진다.
그녀는 성큼성큼은 아니겠지만 서서히 발을 뗀다.
언제 떨어질지 모름 강 가까이에서....

오필리아
어떤 의미에서 이 그림은 꼭 조각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물감의 질이 모래, 돌의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오필리아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다.
화환인지 풀인지 아니면 모래인지... 머리를 감싸주는 그것이 신비롭다.
오필리아의 이미지가 신비롭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림 속에서는 어떠한 힌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의 제목을 보기 전 까지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림이 꼭 사실적이고 힌트가 존재하고 설명적이라면 우리는 작가가 떠먹여 주는 것을 받아먹을 뿐일 것이다.
작가가 이 것이 오필리아라고 생각하면서 그렸다면... 분명 이 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오필리아가 아니라 작가의 의식에서 투영된 오필리아가 토해지고 있을 것이다. 작가가 표현해 둔 것을 읽는 것은 독자 나름의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이 그림이 현재로 오면서 재 평가를 받고 가지각색의 평가가 주어지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
이 그림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떠오른 생각이다.
오필리아
누구의 그림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런데 자주 접했던 그림이다.
좀 아이러니 하긴 하지만,
머리에 돋아난 것 처럼 풀은 머리 위에서 아주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보고 흔히 째려본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필리아의 시대뿐 아니라 현재 21세기인 지금도 보고 있는 듯한 눈빛이다.
꼭 세상을 초월 한 눈빛 같기 때문이다.
오필리아
오필리아
오필리아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들라크루아의 그림이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사람이 살아서 움직일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낭만주의 그림이기 때문에 감정에 호소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 아름다움이 숭고미와는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고통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오필리아는 나뭇가지를 붙잡으면서 자신의 죽음에 유예의 기간을 주고 있다.
내가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좋아하면서도 이 그림의 오필리아에 대해서는 별 다른 애착은 없다.
하지만 오필리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는 것에 다른 그림들과는 다른 감정이 읽혀진다. 그녀도 죽음 직전에는 망서리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물에 빠져 죽고자한 자살이 아니라 사고로 인해 물에 빠지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쳤다는 의미와 죽음이란 의미는 중첩된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즉 사고로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의미보다는 그녀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음이 이유가 되어 오필리아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그림에서의 오필리아는 죽음 직전 그녀의 정신이 돌아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손은 힘이 가득 들어가 있다.
죽기 싫어하는 그녀의 운명이 느껴지는 그림인 것이다.
오필리아
왜... 사람이, 특히 여자가 미치면 머리에 꽃을 꽂는 것일까?
이 사항은 동, 서양을 막론하는 것 같다.
왜 그런 것일까?
이런 질문은 누구에게 물어 봐야 하는 것이지....
오필리아
미술의 소재 중에서 꾸준히 사랑 받는 것이 오필리아 일 것이다.
오필리아는 두 가지 이미지로 수식이 가능한데,
햄릿과의 애절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미쳐버린 여자의 이미지이다.
흔히 그림에서 보면 오필리아의 아름다움을 그리거나 미쳐버린 오필리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그림의 오필리아는 John Everett Millais의 그림이다.
오필리아는 햄릿과 가족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은 미쳐버리고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이 그림에서는 물에 빠져 죽어버린 오필리아를 사실적인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녹색의 풀들과 물 속에 빠진 오필리아는 푸른색, 녹색의 개열에 가까운 드레스를 입은채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는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오필리아의 멍한 눈이 더 애절해진다.
햄릿이 미쳐버린 척 하는 것 처럼 어쩌면 그녀도 재정신으로는 살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친척, 정신을 놓아버린 척 하면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의 운명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神의 것이였을 테니까... 말이다.
오필리아의 그림을 볼때 마다 난 사람의 운명과 사랑에 대한 생각이 난다.
오필리아의 가녀린 운명에서 느껴지는 애절함 말이다.
어쩌면 이런 그녀의 삶이 미술을 하는 사람들을 손짓하는 매력일 지도 모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