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 순례길 1코스 말씀의 길(1)
명동 주교좌성당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은
명실 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2천 년 교회사 안에서 유례없이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됐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882년 명동은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된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이 때 신자들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정지 작업에 나섰는데
블랑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놀랄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명동 대성당의 정지 작업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는다.
그 사이 초대 주임 블랑 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약현(현 중림동약현)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코스트 신부가 1896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 신부에 이르러서야 성당 건축을 마무리짓고
드디어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기공 후 무려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 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소에는 1900년부터 기해 · 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되었다.
순교한 지 약 20일 후 7-8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 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
시복을 앞둔 1924년에 무덤이 다시 발굴되어 이들의 유해는
대부분 로마와 파리외방 전교회 등으로 분배되고
이곳에는 현재 그 일부만이 모셔져 있다.
이들 성인 외에도 지하 묘소에는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년),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1839년)와
무명 순교자(?-1839년) 1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또 병인박해 때인 1866년 3월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과 홍봉주 토마스의 시신은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성해실로 모셔지기 전 1909년
이곳 지하 묘소에 잠시 머물러 있기도 했다.
▲ 왼편으로 1889년에 완공된 주교관이 보인다.
명동성당 신축 공사가 시작되기 전 모습이다(좌)
명동성당 건립에 앞서 1888년 성당 구내에 처음으로 세워진 인쇄소 건물로,
경당 겸 사제 숙소로 쓰였다(우)
1998년 5월 29일 축성 100주년을 맞은 명동 대성당은 신앙 자유의 상징으로서,
일제와 6.25 전쟁의 수난을 거쳐 70년대 독재에 맞서
민족의 양심과 지성을 지켜온 민주화의 성지로서 자리매김 하였다.
2002년 기존의 문화관과 부속건물을 합쳐
새롭게 문화관을 리모델링하여 문화의 전당으로 탈바꿈하였고,
그해 9월부터 심하게 훼손되고 부식된 외벽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문화재청과 함께 시작하였다.
이미 1974년과 1984년에 대규모 보수 공사를 진행했으나
이번에는 성당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낡은 벽돌들만 한 장씩 빼낸 뒤 새 벽돌을 끼워 넣는
고난도 보수 공사를 거쳐 2008년 말 공사를 위해 감쌌던 장막을 벗고
새 단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2010년에는 명동 대성당을 보존하고
열린 광장을 조성하며 사목 지원공간을 확보하여
신자들은 물론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기 위해
성당 일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명동성당 종합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어 2011년 9월 16일 성 김대건 신부 순교일에 맞춰
명동성당 종합계획 1단계 기공식을 갖고 3년간의 공사에 들어갔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9월 7일)]
■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 수표교 인근
한국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베드로, 1756-1801년)이
1784년 겨울, 수표교(水標橋) 인근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년)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사도 요한) 등에게
세례식을 베풀면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평신도에 의한 자발적인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시작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2011년 8월 28일 현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105 건물 앞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 청계천변 인도에 기념표석을 건립하였다.
1784년 당시 이벽의 집이 서울 수표교,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15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기록에 근거해
그 근처에 기념표석을 건립한 것이다.
기념표석은 가로 98㎝, 세로 75㎝, 높이 20㎝ 기단석에
가로 75㎝, 세로 75㎝, 높이 76㎝의 화강석 빗돌을 올리고 오석을 붙여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라는 사실을 밝혀놓았다.
기념표석에는
“1784(정조 8)년 겨울, 수표교 부근 이벽(李蘗, 1754-1785)의 집이던 이곳이
세례식이 최초로 거행되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터이다.”
라는 내용이 담겼다.
기념표석 근처에 있는 수표교는 청계천 복원 사업 당시 새로 놓은 다리여서
옛 수표교와는 역사적 관련이 없다.
1441년(세종 23년)에 설치되어 1749년(영조 25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원래의 수표교는 청계천 수위를 재던 다리이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2011년 9월 26일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기념표석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출처 : 관련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3년 6월 7일)]
■ 명례방 공동체와 명동 대성당
100년 전인 1898년 5월 29일.
서울 남부 명례방(지금의 명동)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 대성당(사적 제 258호)이 축성된 날이다.
당시 대성당의 건립은 지난 1세기 동안 박해를 받아 온 한국 천주교가
완전히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뾰족집'의 상징인 종탑은 이후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에게 평화의 의미로 이해되어 왔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민주화의 요람이요
억압받는 민중들이 해탈을 염원하는 장소로 여겨져 왔다.
바로 이곳의 복음사는 200여 년 전에 형성된 신앙 공동체로부터 시작된다.
1784년 봄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그 해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의 집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가
곧 명례방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성당 서쪽에 자리잡고 있던 명례방 마을에는
당시 김범우(토마스)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벽의 집이 비좁아 집회 장소로 적당하지 않자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1784년 늦게 형성된 '명례방 공동체'는 이듬해 봄까지 유지되었으나,
형조의 아전들에게 공동체의 집회가 발각됨으로써
김범우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를 당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을사년(1785)의 사건으로,
갓 태어난 한국 천주교회가 얻은 최초의 시련이었다.
명례방 공동체는 이렇게 하여 와해되고 말았다.
이어 김범우는 유배된 지 얼마 안되어
형벌로 인한 상처가 덧나 배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4-25).
이승훈,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됐으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형조 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각돼
김범우가 경상도 단장으로 유배되면서 해체됐다.
김범우의 죽음은 앞으로 한국 교회가 얻게 될 수많은 혈세(血洗)
곧 '피의 세례'를 예견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주춧돌이 순교자들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가장 아래에 있는 주춧돌은 바로 김범우와 같은 초기 희생자들이었다.
좌포도청터
좌포도청터 입니다.
조선시대 한양과 인근지역의 방범과 치안을 담당하던 기관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박해의 역사 살아있는 장소입니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 병인박해 등의 역사가
벽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치는 종로3가역 9번출구앞입니다
광희문 성지
조선의 사소문(四小門)중의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었다.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박해당시 치명한 순교자들은 모두 광희문 밖으로 내던져 졌는데,
그때마다 문 밖은 굴러 떨어진 시신이 너무 많아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그의 가족이나 친지에 의해 남녀 구별에 따라
옷을 달리 입히고, 동여매서 거적으로 싸는 정도로 겨우 매장되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 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던 것이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현재는 퇴계로와 을지로 길이 만나 왕십리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온갖 사연을 간직하고서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서있는 광희문은
돌 하나하나마다, 풀섶의 풀 한 포기마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감동을 간직하고 있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 꼽히는 곳은
바로 남한산성의 수구문이다.
남한산성 동문 한켠 산비탈 아래에는
사람 두어 명이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살아서 들어간 동문'은 곧 '죽어서 나온 시구문'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광주뿐만 아니라 인근 지방인 양주, 이천 등지의 교인들은
체포되자마자 오랏줄로 꽁꽁 묶여 바로 이 동문으로 들어갔다
죽어서는 수구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