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일을 시키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사람을 칭찬하는 걸 봅니다.
이렇게 속고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어디 강도가 따로 있습니까? 강도는
그 사람 생명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돈만 빼앗으면 됩니다. 죽든지 살든지
그 결과는 나몰라 입니다. 영혼의 생명은 책임지지 않고 돈만 빼내는 것이 강도지요.
그 수법에 걸려 영적인 꼽추가 되어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 고생하는 이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을 이민교회가 받아서 ‘집사님은 한국에서 신앙의 훈련을 잘 받으셨어요.
참 충성스러워요’ 또 칭찬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교회에서 10년 15년 수고 많이 했으니 푹 쉬세요. 한 3년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말씀 받아보세요’ 이렇게 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한 3년을 받고 그 다음 5년 정도 숙성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서 생명의 영으로 꿈틀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생각 속에서,
내 맘 속에서, 내 의지 속에서 원래 갖고 있지 않았던 다른 힘이 역사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내 생각이 깨끗해지고 내 감정 속에
어지럽던 것이 정결해 지고 의지가 항상 똑바로 서고 의지에 강력한 힘이 실려요.
저는 분주해서 기도를 안 하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마음의 힘을 모아도
집중이 안 됩니다. 또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속이 상한 상태에서는 마음을
모으려고 해도 역시 집중이 안 됩니다. 사람이 오는 것이 싫어져요. 그게 너무
싫어서 시끄러운 곳에 가질 않습니다. 언제나 주를 바라보고 마음을 집중할
때마다 내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깨끗하게 정리되고, 주님께 친근하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놀라운 복을 우리는 항상 지켜야 합니다.
원래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선악이 서로 싸우는 겁니다.
선한 마음은 원함만 있을 뿐 행함은 없습니다. 내 속에 있는 지체 속에 있는
다른 한 법이 나를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 잡아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여기서의 구원은 새판을 깔아버려야 됩니다. 컴퓨터로 치면 포맷을 해야 합니다.
밀어버리고 새로 깔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거듭남이라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홍역이 빨리 와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노라 하는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욥기를 보면서 욥이란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
그의 신앙은 어떠한가를 통해 우리가 타산지석을 삼을 수가 있습니다.
1장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고, 그의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났습니다.
이것은 천연적인 모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 고넬료 같은 사람 바로 바울이 되기 전
사울 같은 사람은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될 것은 처음에는 거듭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욥은 42장에 가서야 비로소 ‘내가 귀로만 듣던 하나님 내가 눈으로 보았다’ 고백합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것보다 사람이 한번은 뒤집어져야
하고 한번은 왕창 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망하려면 빨리 망해야 해요. 죽을 때 다 돼서 망하면 이것 참 난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고 반복적용하면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경건의 훈련을 많이 해야 합니다.
신앙의 단계 중에 자기 발견이 있고 그 다음에 자기 확립이 있고 자기 건설과
자기 통제가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발견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신학에 대한 지식은 있는데 자기에 대한 고민이 없어요.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분의 존재를 믿고 섬기는 숭배적인 믿음은 있는데
그 엄청난 사랑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므로 신학은 있으나 영적인 확신이 없어요.
내가 무엇인가? 나의 존재가 무엇인가? 나의 구조악이 무엇인가?
내가 왜 이 모양인가 고민이 없습니다. 기껏 해서 고민하는 게 돈이 없어서
남편이나 아내문제 아니면 때를 잘 못 만나 그렇다는 것, 남이 몰라줘서 그렇다는 둥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늘 이런 생각을 해요. 스스로의 대한 자신의 정체감이 없어요.
늘 하는 말이 나는 비빌 인덕이 없어. 사실 인덕이 없다는 말은 덕이 없는 자신의 말입니다.
베풀면서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더 줘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품의
덕이 없어요, 사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일 뿐 내가 인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다음 2절, 3절은 욥의 소유물입니다.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4절 이하를 봅시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5절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폭죽을 터뜨리고 난리치고 음악을 털어놓고
흔들어대는 이런 잔치 날이 오면 흥청망청하므로 틀림없이 잘못됐을 것이기 때문에
그 이튿날 아침에 성결하게 되기 위해서 번제의 제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욥의 생활이 이렇습니다. 욥의 천성은 정직하고 강직하고 멋을 아는 사람입니다.
잔치에 푹 빠지다 보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욥 하면 경건입니다.
'욥의 행사가 이러하였더라' 항상 빈틈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농담도 안 합니다.
허튼 짓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6절을 보세요.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온지라”
7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여기저기 두루 돌아 다녔답니다. 삼하 24장에 인구조사 때에도 여기저기
두루 돌아 숫자를 세었습니다. 이런 일은 사단이 시킨 겁니다. 딤전5:13절에도
젊은 과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일을 만들며 쓸데없는 말을 하고 다닌다고
지적합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항상 사단처럼 두루 돌아다니며 일을 만듭니다.
9절, 10절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나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 말은 욥이 그럴 만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논리입니다. 욥이 그렇게 경건하게 살만하게 하나님이 보호해 줬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이므로 그걸 한번 없애 보라고 나오는 겁니다.
육신에 속한 신앙은 상황과 조건에 영향을 받으면 흔들립니다. 선교지에서 어떤 분이
‘목사님 어디 후원이라도 많이 받으셨습니까? 얼굴이 많이 밝아졌습니다’ 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사정 때문에 얼굴이 유들유들해진다는 것은 그것은 환경과 사정
탓이지 그건 신앙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서울에 가서 부흥회를 하면서 특급호텔에서 잠자고 부목사님이 태워 가고 오면서
좋은 것을 먹고 말씀 집회했는데 그 다음 날에는 현지로 돌아가서 페인트칠도 안한
집에서 자고 직접 차 끌고 가서 설교하고, 간단히 먹고 그리고 집에 가고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복감을 주는 것은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에도 쳐할 줄 알고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곳에 가서 '참 좋다'하는
그럴만한 조건과 상황이기 때문에 나는 좋아 이게 아니고, 그런 조건이 하나도
없어도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좋다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행을 위한 여행은 하지 않습니다. 다 그게 그거니까요.
예수님이 직접 땅에 오셨을 때도 세상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33년 동안 그분이 계셔도 이 땅에 살인 간음 도둑질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폭력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상황과 환경이 바뀌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대통령이 자기 고향에 나면 고향이 바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통령이 났다는 자긍심 하나 밖에 없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해서 우리 주변이 금방 새로워지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면 영광과 존귀에 대한 능력과 그 가치를
내가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이렇게 달라집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사단에게 욥의 환경을 파괴시켜 봐라 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 곧 존재는
손을 대지 마라. 그래서 13절부터는 욥의 주변이 다 무너지고 맙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
아멘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