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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니
김 문 수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이 마치 액자에 낀 그림 같았다. 치과의 김성준(金成俊)은 그 창 쪽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쪽 입꼬리 부근의 덧니를 살짝 드러냈다간 이내 감추어버리곤 하는 매혹적인 어떤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로 팔을 뻗어 다이얼을 돌렸다. 퉁화 중임을 알리는 신호가 귀를 어지럽혔다. 벌써 다섯 번째인가 되풀이 돌리는 다이 얼이건만 수화기에서 울려오는 소리는 매번 그 모양이었다.
“도대체 ‘통화는 간단히’ 하나도 못 지키니…….”
그는 담배를 뽑아 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그의 눈길이 벽시계 위를 잽싸게 더듬었다. 5시 10분이었다. 바로 그 시계가 5시 10분 전을 가리키고 있을 때도 전화는 통화 중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짧게 잡는다 해도 통화가 20분이나 계속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그는 방 안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헛기침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초조할 경우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는 잠시 후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마지막 다이얼이 제자리를 찾기가 바쁘게 예의 그 삐익삐익 거리는 단조로운 금속성 음향이 마구 그의 고막을 쳤다. 그는 마치 불덩어리라도 내팽개치듯 냅다 수화기를 집어던지고는 의자 등받이에다 깊숙이 상체를 묻었다. 그러고는 아내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며 씨근거렸다.
“한번 전화기 앞에만 앉았다 하면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으니, 이런 젠장할!”
그는 푸우, 담배 연기를 내뿜어 아내의 환영을 뭉개버리고 창 밖으로 눈길을 옮겼다.
빌딩과 빌딩 사이로 이어진 푸른 하늘과 장상(掌狀)의 잎새들로 장식된 진초록의 가로수, 로터리의 분수 등이 그에게 마티스의 여름 풍경화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그런 재미스러운 창 밖의 풍경도 그의 짜증을 눅이지는 못했다.
얼마 후, 그는 전화기 앞으로 팔을 뻗다간 이내 멈추고 말았다.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아내와의 전화가 연결된다면 용건은 뒷전인 채 고래고래 악만 써대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대신 인터폰의 키를 눌러 미스 리를 불렀다. 그녀는 그의 진료업무를 돕는 보조원이기도 하거니와 막내처제이기도 했다.
“부르셨어요?”
상냥하고 탄력 있는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방으로 들어섰다. 목소리 뿐만 아니라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마치 팽팽한 공 같았다. 그녀의 발랄한 젊음이 김성준에게 다시 그 덧니를 살짝 드러내며 옷는 매혹적인 용모의 여학생을 연상시켜주었다. 그 여학생은 그의 옛날 짝사랑이었다. 군수의 딸이었기 때문에 남들은 그녀를 ‘사또’ 라는 별명으로 불렀지만 그는 ‘덧니’로 불렀다.
“형부, 왜 부르셨냐구요?”
덧니 여학생 대신에 미스 리의 꽃처럼 환한 웃음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제정신이 들자 잠시 잊었던 짜증이 다시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전화 좀 간단히 쓰면 입에 뭔가 고장이라도 나는 모양이지?”
“언니 얘기로군요.”
“그럼 누구겠니 ? 당장 전활 걸어서 뭔 놈의 수다로 그렇게 오랫동안 전활 잡아매놓구 있는지 알아보라구!”
그는 상표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도장 찍듯 재떨이에 꾹 눌러 끄고는 획 의자를 돌려 미스를 외면했다.
다른 용건은 없으세요?”
미스 리의 이런 질문을 받고서야 그는 깜빡 잊었던 생각을 되살릴 수가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아침에 벗어놓은 와이셔츠 주머니에 보면 명함이 있을 테니까 그 사람 전화번호 좀 알아줘. 빨리!”
김성준은 미스 리가 방에서 나가는 기척과 함께 혹시 또……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명함이 주머니에 들어 있는 채로 세탁기 속에 들어간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랜 옛날의 일 하나를 되살려놓았다. 그것은 결혼 1년쯤 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무렵 대학병원 치과에서 레지던트로 일했던 그는 경제적으로 늘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남에게 차 한 잔, 점심 한 끼를 대접하는 것조차도 망설여지던 그런 때에 20여 장이나 되는 식권이 와이셔츠와 함께 빨려버린 것이었다. 비록 시중의 가격보다 싼 구내식당의 식권이라고는 해도 20여 일치의 점심값이니까 결코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식권의 크기라는 것이 기차표 정도에 불과했고 또 그 지질도 모조지여서 두께가 나가지 않았으나 그것이 한두 장이 아닌 20여 장에 이르고 보면, 물에 담가지기 전에 능히 발견될 수 있는 부피였다. 설사 어찌어찌하여 잘못 물에 담갔다 해도 그것은 빨리기 전에 꺼내어졌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 식권들은 빨리 말린 와이셔츠 주머니 밑부분에 시룻번 럼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러한 아내의 신경을 동아줄로 비유하여 나무라자 그의 아내는 오히려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였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현금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휴지처럼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넣어둔 채로 빨라고 내놓았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언쟁은 굴리는 눈덩이처럼 시간이 갈수록 걷잡을 수가 없이 커졌다. 대수롭잖게 시작된 말다툼이 종단엔 주먹다짐과 이혼 문제로까지 크게 확대되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아내에 대한 불만이 일 때마다 그때 이혼을 만류했던 가까운 주위 사람들이 원망스러웠고 당시의 우유부단했던 자신의 태도가 무척 이나 후회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의 뇌리에서는 그런 생각들이 유리창 바깥만을 고집하는 갇힌 벌처럼 분주했다. 설마 명함이야 크고 빳빳하니까……어쨌거나 그때 헤어졌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만 내가·….
김성준은 벽시계로 눈길을 보냈다. 5시 15분이었다. 그는 다시 방안을 거닐며 큼큼큼 헛기침을 만들어 날렸다. 배명기(裵明基) 그 친구, 콩밭에다 서슬 칠 작잔데…… 그는 배명기가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다 못 하여 다른 데에 약속이리도 했다면 낭패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가 필요한 것은 배명기의 전화번호였고 또 그와 통화를 하는 일이었다.
배명기는 그의 중고등학교 동창생이었다. 중학교 때에는 서로 수석을 다투었던 경쟁 상대였지만 고등학교 진학 후부터는 이과와 문과로 서로 갈리는 바람에 경쟁 상대였지마는 불편한 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다. 배명기가 문과반의 수석이었고, 그는 이과반의 수석이었으므로 중학생 때처럼 서로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격려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동성연애를 한다는 놀림까지 받을 정도로 그들은 늘 붙어다녔고 또 그만큼 친밀한 우정으로 맺어져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한 후부터는 서로 만나는 회수가 뜸해졌다. 배우는 것도 달랐거니와 배우는 곳 또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치고 하는 사이에 그들은 완전히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그렇게 연락이 끊긴 채 그들은 어느덧 불혹의 나이를 넘긴 것이다. 다만 풍문으로만 어렴풋이 서로의 근황을 알 수가 있었으나 서로 사는 일에 골몰하여 그냥 그런 채로 지내왔다. 김성준은 매명 기가 고시에 다섯 차례나 낙방한 뒤, 뒤늦게 어떤 종합상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오래 전에 들었고 또 배명기는 김성준이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도 돈과 주변머리가 없어 개업을 못 하고 빌빌댄다는 소식을 접한 지가 오래였다. 그러한 그들이 지난밤 무교동에서 해후를 하게 된 것이다.
협회 월례회를 마치고 몇이 어울려 무교동으로 들어서던 김성준이 우연하게 배명기를 발견한 것이다. 동료로 보이는 한 사내와 함께 코가 큰 외국인을 가운데다 세우고 뭐라 떠들며 낄낄대는 것을 본 것이었다. 키가 큰 외국인을 가운데에 세운, 뫼 산(山) 자 같은 기이한 형태가 아니었다면 그는 그냥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아니, 이게 누구야? 명기 너, 아직 살아 있었구나!”
“임마, 난 네 녀석이 죽은 줄 알았어. 어쨌든 살아 있으면 결국은 이렇게 만나게 마련이다. 그렇잖니?”
두 사람은 서로 달려들어 아무렇게나 상대의 손을 모두어 잡고는 마구 흔들어댔다.
“그건 그렇다만 넌 형님이 보고 싶지도 않던?”
“형님 좋아하네. 네 녀석 따위야 이빨이나 아파야 마지못해 생각나는 그런 존재야. 주제를 알라구!”
“이런 버릇 없는 놈! 너 당장 내 병원으로 가자. 이빨 뽑을 때 쓰는 집게로 그 버르장머리없는 혓바닥을 쑥 빼줄 테니!”
“허 그 녀석, 가만 듣고보니 개업했다는 애길 그 따위로 하는구나! 그래, 네놈 병원이 어디냐?”
말끝도 채 맺지 않은 배명기는 어느 결에 꺼냈는지 자기 명함을 건네주었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어도 이 녀석 두뇌회전은 여전하구나, 김성준은 이렇게 생각하며 배명기로부터 명함을 받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배명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기브 앤 테이크도 몰라? 받았으면 줄 줄도 알아야지.”
배명기가 손을 내밀자 한 옆에 떨어져 그들을 지키고 있던 그 외국인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배명기는 외국인에게 찡긋 눈짓을 보내고 나서 너스레를 떨었다.
“저 미국 녀석은 말이야. 우리 말은 개뿔도 모르는 녀석이 내가 즈네 나라 말 좀 썼다고 꽤나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야. 그건 그렇고 어서 명함이나 한 장 달란 말야.”
“마침 명함 가진 게 없어.”
“그럼 낼 다섯시에 내게 전활 해. 그 전에는 전활 해도 자리에 없으니까……. 저 녀석을 데리고 다니며 꼬셔야 하거든.”
배명기는 미국인처럼 오른쪽 엄지로 코브라의 대가리를 만들었다간 그 미국인 쪽으로 눕혔다.
“코 큰 놈만 상대하시는 부장님한테 연락해봐야 나 같은 놈은 찬밥이지 뭐. 안 그래?”
“야 이 녀석아, 애국잘 그렇게 함부로 꼬집는 게 아냐! 내가 저 친굴 잘만 꼬시면 딸라가 얼마나 떨어지는지 아니 ? 어쨌든 긴 얘긴 낼 만나서 하기로 해. 딸라 얘기가 아냐, 사또 얘기야 사또!”
“사또라니, 덧니 말이야?”
그는 깜짝 놀라 눈부터 키웠다.
“그래, 덧니가 있는 델 알아. 그럼 낼 다섯시에 꼭 전화해. 저 친구가 너무 오래 기다려서·…·.”
배명기는 벌써 그 일행과 어울려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제서야 김성준도 자기 일행이 저쪽 양품점 앞에서 발이 묶여 서성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어젯밤, 배명기와 헤어질 때의 장면을 눈앞에 그리며 중얼거렸다. 그 친구 성질이 얼마나 급한데, 콩밭에다 서슬 칠 만큼 급한 성민데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을라구? 그는 또다시 큼큼큼 헛기침을 토해냈다. 시침과 분침이 예각을 이루고 있는 벽시계의 문자판 위에서는 빨간 초침이 한껏 부지런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거의 동시에 도어가 밀쳐지며 미스 리의 얼굴이 나타났다.
“몇 번이야? 이리 줘!”
그는 미스 리를 향해 퉁명스레 물으며 손을 내밀었다. 배명기의 전화번호가 적혔을 쪽지 따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직 통활 못 했어요.”
“아직도?”
그는 돌이라도 씹은 듯이 잔뜩 일그러뜨린 얼굴을 한동안 흩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전화부텀 받으세요. 어디시냐니깐 그냥 친구분이시라고만 그러세요.”
그는 치솟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뜻밖에도 배명기였다.
“야, 이 친구야. 전활 한댔으면 해줘야지!”
수화기를 통해 울려오는 배명기의 볼멘 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리구 거 뭔 퉁화가 그렇게 길어! 전화루 진찰하구 전화루 다 치료하구 그러나?”
김성준은 배명기의 소나기 같은 공격이 뜸해진 틈을 타서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게 됐어. 실은 말야, 아침에 옷을 갈아입으면서 네가 준 명함을 깜빡 잊고 그냥 나왔지 뭐야.”
“이유가 안 돼 ! 치과의사 집에 전화가 없을 리도 없잖아?”
“그러잖아도 네 녀석 전화번홀 알려고 삼십분도 더 되게 전활 붙잡고 씨름하는 중이 었어. 어찌나 울화가 치미는지…….”
그는 또다시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흙바람을 일으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그런 얼굴로 아내의 얼굴을 바꾸어 만들며 그는 계속 입을 놀렸다.
“그러나저러나 내 전화번혼 어떻게 알아냈누?”
“야, 이 친구야. 내가 너처럼 맹꽁인 줄 아니?”
“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야, 전화번호분 뒀다 삶아 먹자는 물건이냐!”
그는 배명기의 말을 듣는 순간 이차 싶었다. 전화번호부를 이용했다면 배명 기와 제시간에 통화가 됐을 것이 아닌가. 이젠 머리까지 굳어버린 거지 뭐야. 그는 그것을 나이 탓으로 돌렸다. 기계가 낡으면 점차 그 기능이 저하되듯 이제 자신의 신체 각 부위에도 노후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것은 처음 품게 된 생각이 아니었다. 이미 3개월 전부터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지난 봄, 막내동생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예식이 올려지기 전이었으므로 그는 식장 밖에서 하객들과 환담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고종 누이가 다가와 그가 메고 있는 카메라를 장난스럽게 툭 치며 말했다.
“보아하니 카메란 최급인데 사진 찍는 기술은 어떤지 모르겠군.”
“물론 기술도 일류죠!”
그가 한껏 뽐내자 고종누이가 다시 젠입을 놀렸다.
“과연 그 말을 믿어도 될까?”
“좋습니다. 솜씨를 봬드리죠.”
그는 케이스를 열고 카메라를 꺼내며 광선과 배경을 살핀 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몇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조리개를 열고 거리를 조정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파인더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은 영 초점이 맞지 않았다. 아무리 조정해도 피사체는 마치 자욱한 안개 속에 묻힌 듯 뿌옇기만 했다. 얼마 동안을 끙끙대며 카메라를 조작했으나 헛수고였다.
그때 식당 안으로부터 곧 예식이 올려진다는 사회자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그 방송에 꼬리를 이어 고종이, 일류라는 기술이 뭐 그러냐고 비아냥거렸으므로 그는 급한 대로 그냥 셔터를 눌러버리고 말았다. 그 한 컷뿐만이 아니라 그날의 촬영은 모두 그 모양이었다. 카메라에 어떤 이상이 생기지 않은 다음에야 그토록 철저하게 초점이 맞지 않을 까닭이 없었으므로 그는 식이 파하는 대로 D. R 점으로 가 카메라의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 그러나 상점 주인은 카메라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거 참 이상한 노릇이군요.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십시오.”
그가 이렇게 못 미더운 투로 말하자 상점 주인은 카메라를 조작한 뒤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손님, 여기 제가 선 자리로 와서 파인더로 저 화분을 보십시오.”
김성준은 상점 주인이 시키는 대로 그가 섰던 자리로 가서 파인더에 들어온 출입구의 영산홍 화분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 진분홍의 영산홍 꽃송이들은 마치 반투명의 유리 저쪽에 있는 것인 듯 번져 보였다.
“어떻습니까?”
“초점이 맞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카메라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 손님 눈에 이상이 있는 겁니다.”
상점 주인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눈이 침침했던 것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는 그러한 증상을 단순하게 간밤의 과음 탓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D. P. 점에서 나온 그는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마침 그곳에서 기본 요금밖에 나오지 않는 가까운 곳에 친구의 안과병원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시기능 검사의 결과는 노안이었다. 수정체의 탄성과 굴절력이 감퇴되기 시작하여 원근에 의한 초점 거리 조절력이 약해졌다는 것이었다. 친구의 그러한 진단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아니, 이제 겨우 사십 대인데 노안이라니?”
“이보라구, 꺾어진 마흔이면 분명히 청춘은 아닐세.”
“그래두 거 노안이란 말 말구 다른 말은 없나?”
“욕심 부리지 말라구. 자네나 나나 이제 내리막길을 굴러가고 있는 거야.”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 그는 입버릇처럼 내리막길이라는 낱말을 되뇌곤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지난 세월이 아쉽기만 했던 것이다. 마치 치과병원을 개업하기 위해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허비한 것 같았다.
“아니, 이 친구가 전활 받다 말고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배명기의 투덜대는 소리에 그는 퍼뜩 제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그런데 왜 가타부타 대답이 없느냔 말야. 선약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아냐, 아냐!”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외치듯 대답했다. 배명기가 만날 일을 뒷날로 미루며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일곱시에 만나자구, 알았지?”
배명기는 자기 회사 극처의 다방을 약속 장소로 정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김성준이 광화문에 있는 그 다방에 도착한 것은 약속 시간 10분 전이었다. 그런데도 배명기는 벌써 나와 있었다. 출입구와 마주 바라보는 자리에서 석간을 뒤적거리고 있던 배명기가 신문에서 뗀 눈을 그의 얼굴로 옮기며 말했다.
“나야 내 동네니깐 일찍 나와 앉았지만 넌 뭣 땜에 이렇게 일찍 나온 거냐?”
그 말이 마치, 옛 애인의 얘기를 듣는 게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라고 비아냥대는 것으로 느껴졌으므로 그는 적잖이 겸연쩍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엉뚱한 곳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도대체 얼마나 거창하게 한턱을 내려구 바쁘신 몸을 오라 가라 하는 거냐?”
“거창한 한턱은 아니지만 보신을 시켜주려구. 그러나저러나 그거 먹을 줄은 아는지 모르겠군.”
“먹을 줄 아는 정도를 넘어서 즐기는 편이야.”
“혹시 개고기가 이빨에 이롭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증명된 바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런 것이 증명되었다면 네 녀석이 개백정이라도 되겠다는 거야 뭐야?”
“허 완전히 밑진 장사로군. 역시 치과의사 이빨이라 잘도 풀어 뜯는구나!”
그들은 20년도 넘는 세월을 격하여 모처럼 무릎을 마주했으나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농담을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의 그러한 농담은 변하지 않은 우정을 서로에게 확인시켜주려는 잠재의식에 뿌리를 둔 것인지도 몰랐다. 배명기가 계속해 이죽거렸다.
“요 근처에 보신탕을 아주 잘 하는 집이 있는데 우리 그리루 가자구. 개고길 즐긴다는 푼수로 봐서 네 녀석 그쪽 실력이 짐작된다.”
“얼씨구, 네놈이야말로 그쪽 힘을 순전히 보신탕에다 의존하는 모양인데……공연히 물귀신처럼 애매한 사람 끌어들이지 말라구.”
그의 반격에 배명기는 껼껼껼 너털웃음을 쏟은 후 입을 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꽤나 즐겨댔다구. 그런데 어머님이 어떻게 아시군 못 먹게 하시는 거야. 그 까닭인즉 부처님께서 전생에 개였다는 거야.”
배명기는 하던 얘기를 잠시 멈추고는 엽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재미난 설법을 하셨는데 그 얘기는…….”
아득한 옛날, 인도에 꽃놀이를 즐기는 한 임금이 있었다. 어느 날 임금이 꽃놀이에 타고 나갔던 수레를 마부들이 깜빡 잊고는 차고에 넣어 건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에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으므로 수레에 달린 가죽이 비에 젖어 퉁퉁 불었다. 그러자 그 가죽을 궁중에 있는 개들이 몰려들어 모조리 뜯어먹고 말았다. 이튿날 그 얘기를 들은 임금은 화가 잔뜩 나서 모든 개들을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신하들이 궁중에 있는 개들은 그냥 놔두고 궁 밖의 개들만 보는 족족 잡아 죽였다.
그러자 개의 우두머리가 몰래 궁중으로 숨어들어 임금에게로 갔다. 그리고는 억울한 사정을 낱낱이 고한 뒤, 죄를 진 개만 벌할 것을 요구했다. 임금은 우두머리 개에게 어떻게 죄진 개를 가려낼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우두머리 개는 자기에게 그 일을 맡기라고 말한 뒤 궁중에 있는 모든 개를 한자리에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궁중의 개들이 모두 모이게 되자 우두머리 개는 이상한 풀을 뜯어다 그들에게 먹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임금의 수레에 달렸던 가죽을 뜯어먹은 개들은 모두 그 가죽을 토했다. 그것을 보고 크게 뉘우친 그 임금은 그 후부터는 절대로 죄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일이 없게끔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부처님은 말씀을 끝낸 뒤 그 우두머리 개는 전생의 나요, 또 여러 개들은 나의 권속이다라고 하셨대. 그러니 독실한 불자인 어머니께서 가만 계실 리가 없지.”
배명기의 긴 얘기를 듣고 난 그는 불만이 그득한 목소리로 따지듯 말했다.
“야,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 가지구 겨우 개고기 타령이라니 거 너무하잖아?”
“그게 다 네 녀석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니?”
김성준이 정색을 하며 반문하자 배명기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히며 난색을 띠었다. 그것은 어쩌다 기밀을 누설하고 나서 당황해 하는 그런 표정과도 같았다.
“나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구?”
그가 다시 다그쳐 묻자 배명기는 굳혔던 표정을 풀며 잰입을 놀렸다.
“네 녀석 보신을 시켜주려니까 자연 그런 얘기가 나올 수밖에…… 하기야 내가 왜 네 녀석 속맘을 모르겠니! 네 녀석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가 사또 얘기라는 걸. 하지만 말이다, 옛말에도 있듯이 단풍도 떨어질 때 떨어지는 법이야.”
배명기의 얘기에 무렴해진 그는 대꾸를 잃고 말았다.
“설마하니 너 아직까지도 사또를 못 잊어 하는 건 아니겠지?”
“못 잊어 해서 안 될 이유도 없잖아?”
그는 이렇게 반문하며 오래 전에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 한 대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서양 사람들은 예로부터 부부간에 상대방을 ‘더 나은 반신(半身), 즉 better half라고 지칭했다는 것인데 그 뜻은 자기의 인생을 같이 이끌어나가는 반신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보다도 더 소중한 반신이라는 뜻이라 했다. 그는 생각했다. 만약 사또(덧니)와의 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서양 사람들의 그런 지칭대로 지금쯤은 아주 행복한 부부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가 그녀를 처음 발견한 것은 배명기의 집에서였으며, 그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처음으로 맞은 여름방학 때였다. 배명기와 그녀와는 외가로 먼 친척이 되는 동갑내기 동생뻘로 그녀는 집안 어른의 심부름올 왔었고 그는 배명 기와 수영이나 함께 갈까 하고 들렀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정원 앞 평상에서 배명기의 어머니와 마주 앉아 있었는데 덧니를 살짝 드러냈다간 이내 감춰버리는 그녀의 그 매혹적인 웃음이 순간적으로 강력한 전류처럼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던 것이다. 아니, 그것은 그야말로 큐피드의 화살에 의한 것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조그만 군청 소재지였으므로 그날 이후 그는 이따금 그녀를 먼 거리에서 보게 뒤는 수도 있었으며 또 운 좋게도 학교길 같은 데서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대할 수 있는 행운도 더러는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그런 우연한 마주침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랜 조사 결과 그녀가 군청과 붙어 있는 관사에서 책가방을 들고 나오는 시간이 일정하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등굣길을 군청으로 우회하는 코스로 바꾸었고 시간도 그녀가 집에서 나오는 시간에 맞추어 조정했다. 때문에 그는 매일같이 그녀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더없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그를 우울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날들도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날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긴 것일까, 아니면 병으로 앓아 눕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날은 해종일 온갖 걱정들에 묻혀 지내야만 했다. 그는 그녀의 포로였다. 그리고 그의 모든 생활은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녀와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학교에서 받는 수업도, 그 자신이 지녀야 하는 건강도, 심지어는 차 한 잔을 마시는 일조차도 모두 그녀를 위한 그리고 그녀와 연관된 행위였다.
그의 인생은 완전히 그녀 하나 때문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자신의 사랑을 그녀에게 전할 수가 없었다. 숱한 밤을 밝히며 쓴 사랑과 사연들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한 가닥의 연기가 어버리곤 했다. 그녀에 대한 자신의 깊고도 넓은 사랑을 그는 도저히 문자로 표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 그로서는 직접 그녀를 만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녀를 만나는 때를 대학 합격자 발표 후로 정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꼭 밝혀야만 될 것은, 의과대학을 지망하겠다던 애초의 뜻을 돌려 마감 기일이 임박했을 무렵 치과대학에다 원서를 접수시켰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도 그녀를 사랑하는 때문이었는데 덧니박이인 그녀와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려면 그러한 인(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면서도 절실한 기원이 작용을 했던 것이다. 다행하게도 의과대학만을 고집하던 아버지가 눈감아주는 식으로 “하기야 옛날부터 이를 다섯 가지 복 중의 하나로 쳤고 또 이가 자식보다 낫다는 옛말도 있기는 하니까”라고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배명기처럼 그가 지망 대학을 바꿔버린 까닭을 알았다면 아버지는 아마도 끝내 의과대학만을 고집 했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에게 고백을 들은 배명기도 그 놀라운 사실에 넋을 잃고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입을 놀렸는데 그렇게 흘러나온 말도 아직 자기의 귀를 의심한다는 투였다.
“아니, 그러니까 결국은 네가 사또의 덧니 때문에 치과대학에다 원서를 냈다는 얘기냐?”
“그렇다니까!”
“한 여자 때문에·…·너 정말 후회 않겠니?”
“천만에!”
“사랑의 힘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것인 줄은 정말로 몰랐다. 정말로!”
배명기는 몇 번이나 이렇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여 감탄을 하고 난 뒤에 사또에 대한 모든 것을 낱낱이 다 털어놓았다.
그녀에게는 이미 정해진 배필이 있었다. 그 사내는 그녀보다 세 살이 위였고 육군사관학교 3학년 생도였으며 그 생도의 아버지와 그녀의 아버지는 이 세상에 둘도 없이 친밀한 사이였다. 생도의 아버지는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직전 그들 두 친구는 자기네 아들과 딸을 배필로 정한다는 굳은 약속을 했다. 그러잖아도 아들을 가진 쪽에서는 예쁘고도 귀여운 친구의 딸을 탐냈고 딸을 가진 쪽에서는 잘생긴 모습에다 영리하기까지 한 친구의 아들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주석 같은 데서는 곧잘 며느리감이니 내 사위니 하고 서로 농을 나누곤 했었다.
지금도 그에게는 배명기로부터 그 얘기를 듣던 당시의 가슴 아팠던 일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사실 그때의 일을 가슴 아팠다는 한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아사 직전의 상태를 배고프다는 한마디로 표현해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배명기가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훈계조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야, 꿈 깨라구. 특히 여자 문제로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과 꿈의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가 없어. 특히 이 나이에. 왜냐하면 그게 곧 노화를 촉진시키는 그런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는 노화 촉진이라는 말에 찔끔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배명기의 말에 반기를 올렸다.
“천만에, 오히려 아직도 젊음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실패한 결혼 생활에 체념을 하는 그런 무기력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젊음의…….”
“그렇다면 넌 지금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거냐?”
“잔소리 말구 덧니 얘기나 좀 해봐라!”
김성준이 말머리를 돌리자 배명기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그의 주문에 순순히 응했다.
“너도 알지? 사또 남편이 육사 출신이었단 거 말야. 그 친구가 전사했지 뭐냐. 그야말로 장군감이었는데.”
“전사라니?”
“결혼한 지 오 년도 채 안 돼서 아마, 월남전에서.”
“그럼 덧니는?”
“차츰 알게 된대두 그러는군. 사똘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니?”
그가 냉큼 대답을 못 하고 있자 배명기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심정 내 모르는 바가 아니다만, 그러나 그건 손아귀에 넣을 수가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늘 소중하게 생각됐던 것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이루고 싶은 걸 거야. 하기야 바로 그 점에 낭만이 있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인생의 어리석음이 있는 것일 테지. 그러나저러나 이제 그만 가보자구!”
배명기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시계를 보기 위해 소매를 밀어올리고 있던 손으로 김성준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어딜 가자는 거야?”
“어딘 어디야, 부처님 고길 먹으러 가자니까!”
배명기의 대답은 기대에 찼던 김성준의 얼굴을 금세 실망으로 가득차게 했다.
“난 싫어! 네 녀석 생색 내는 꼴두 뵈기 싫거니와 또 부처님 고기 운운하는 바람에 입 맛도 싹 가셨어.”
그가 잡힌 손목을 뽑으려고 힘을 쓰자 배명기의 손아귀는 마치 수갑처럼 한충 더 단단히 그의 손목을 죄어댔다.
“나인 먹었어도 그 고집 하나는 옛날 그대로군. 잔말 말구 어서 따라오라구! 실은 말야, 보신탕집 주인이 네 녀석한테 진찰을 좀 받아야 될 형편이야.”
“아니, 더구나 술을 마시러 가는 것두 아니구 왕진을 가자는 거야?”
“님두 보구 뽕두 따자는 얘기야.”
배명기는 한층 더 완강한 힘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런 채로 다방을 나와 얼마쯤 앞장 서서 걷던 그는 어느 골목 입구에 이르러 문득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김성준의 손목을 감았던 손아귀에 힘을 썼다.
“자아, 다 왔어. 저 집이야.”
배명기가 턱짓으로 골목 입구에서 왼쪽 둘째 집을 가리켰다. ‘보신탕’이라는 희고 큰 글씨가 담긴 빨간 깃발이 엷은 바람기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이 보신탕으로 들어섰을 때, 문간 계산대 옆에 앉아서 껌을 질경대고 있던 아가씨가 배명기의 모습을 보자 반색을 하며 맞아들였다.
“아주머니 계시지?”
배명기가 그 아가씨에게 물었다.
“그럼요, 내실에 계세요. 배 선생님께서 오시면 그리루 안내하라구 그러셨 어요.”
“내실로?”
“네, 내실이 시원하걸랑요. 에어컨이 있어서요. 오실 시간이 지났는데 어째 안 오신다며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그때였다. 카운터 아가씨가 호들갑을 떨어대는 소리를 듣고 배명기가 도착한 것을 알아차린 모양으로 홀 안쪽에 붙은 방문이 열리며 한복으로 성장한 여인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이리루 오세요, 오라버니.”
“오늘은 웬일루 이렇게 칙사 대점이구?”
배명기는 여인을 향해 이렇게 한마디 던지고 나서 뒷전에서 머믓거리는 김성준의 귀 가까이에다 입을 대며 잰입으로 소곤거렸다.
“저 여자가 이 집 주인야, 어디서 본 것 같잖아?”
“…….”
김성준은 눈시울을 좁혀 여인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거리가 꽤나 떨어진데다가 조명까지도 흐려 고작 여자의 모습만을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내가 아는 여자야?”
김성준은 배명기만이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 알고말고, 여자 쪽에선 널 모르지만·…·.”
앞장 선 배명기가 내실 쪽을 향해 성큼성큼 발길을 옮기며 재빨리 말했다. 그때서야 그는 그녀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사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전 다방에서 했던 ‘님도 보고 뽕도 따자는 얘기’라던 배명기의 그 말이 그러한 확신을 갖게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순간 그는 심한 동계(動悸)를 느꼈다. 그러나 막상 내실에 들어가 그녀를 앞에 했을 때 그러한 동계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치 추위로 인해 일었던 소름이 뜨거운 난로 앞에서 일시에 죽어버린 꼴이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옛날의 그 ‘덧니’ 모습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성급했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혹시나 싶었으므로 그녀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마와 눈 언저리에 잡힌 선명한 주름과 검게 그을린 피부, 뿐만 아니라 그러한 얼굴과 걸맞지 않는 야단스런 화장은 아무리 애를 써도 옛날의 그녀와 전혀 연관이 지어지질 않는 것이었다.
“엎드리면 코 닿을 덴데 그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수?”
그녀가 잔뜩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실에는 이미 술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차려진 술상과 한복으로 성장한 주인을 번차례로 쳐다보며 배명기가 익살을 떨어댔다.
“오늘 술맛은 아주 각별하겠군그래. 이 푸짐한 안주에 곱게 차린 여자까지 있으니 말야.”
“아따, 오라버니두 참 싱겁수. 팽팽한 아가씨면 몰라도 다 늙어빠진 할망구야 외려 술맛만 떨구지 뭐.”
“모르는 소리, 음복술도 할머니가 따르면 맛이 다르다는 얘기 몰라?”
“어머머, 오라버니두 참!”
그녀의 웃음과 함께 오른쪽 입꼬리 부근에 덧니가 살짝 드러났다간 이내 숨어버렸다. 그 덧니가 잠시 김성준을 몹시 긴장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 덧니가 사라지기 바쁘게 역시 그렇구나 하고 속으로 중얼댔을 뿐 그냥 덤덤한 마음이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마음을 설레이게 했던 첫사랑(비록 짝사랑일망정)의 여인에 대한 감정이 이럴 수가 있으랴 싶어 자신을 책하기도 했으나 그래도 굳어진 가슴은 전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이런 정신머리가 있나! 내 외가 쪽으로 동생 뻘이야. 동갑인데 생일이 다섯 달 내가 빨라. 그리구 이쪽은 학교 동창인데 치과의사지.”
배명기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키며 소개를 시켰다. 수인사가 끝나자 기회를 놓칠세라 주인 여자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우리 오라버니께서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온다고 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요즘 이빨 땜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마침 잘 됐지 뭐. 술 취하기 전에 우선 환자 진찰부터 하라구 용?”
배명기가 그녀의 얘기에 꼬리를 달며 이렇게 부추겼다.
“뭘 그렇게 어정쩡하게 앉아만 있어. 환자 진찰하는 게 의사의 일이구, 다 늙은 처지에 내외를 할 것두 아니잖냐구!”
배명기가 김성준을 그녀에게로 밀어붙였다. 그는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환부를 묻고 입을 벌리게 했다. 그리고는 안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 환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가 앓고 있는 이는 오른쪽 입꼬리 부근의 바로 그 덧니였다.
원이빨과 덧니 사이에 끼는 음식 찌꺼기로 인해 생긴 충치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치수염 (齒髓炎)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부패한 치수로 인한 악취가 그녀의 숨결에 얹혀 그의 코끝으로 몰렸다. 그 역한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물었다.
“충치가 치수염으로 발전했어요. 그런 정도니까 상당한 기간을 충치로 고생하셨을 텐데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진통제로 살다시피 했어요. 어릴 때부터 이빨 뽑는 게 딱 질색이었거든요. 이 덧니도 그래서 얻게 된 거죠.”
그녀는 마치 무슨 자랑거리라도 늘어놓듯 말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치과엘 가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두면 이내 급성치근염이 속발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악골에 골수염을 일으키게 되고 끝내는 악골을 잘라내야 하는 수술까지 받게 되니까요.”
“악골이라뇨?”
그녀가 겁먹은 눈을 하며 물었다.
“턱뼙니다.”
“어머머, 턱뼈를 잘라내다뇨. 그렇게 됩 어떻게 하나요? 공연히 겁주시는 거 아녜요?”
그녀가 항의라도 하듯 따지고 들자 배명기가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겁을 주는 게 아니라 무슨 병이든 제때 제때에 손을 안 쓰면 호미로 막을 것이 가래로도 못 막게 된다는 얘기야.”
“네 맞습니다. 보십시오, 어릴 때 이빨 뽑는 게 두려워 그냥 두었기 때문에 덧니가 났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충치가 생겼고 또 그걸 안 뽑구 진통제로 견디다가 치수염으로까지 됐잖았습니까? 그런데 또 그걸 그냥 둬보십시오, 결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그 썩은 덧니랑 모두 뽑구 치료받으셔야만 합니다.”
“소시적부터 이 덧니를 모두들 매력적이라고 무던히들 부러워했는데…….”
그녀는 마치 도둑 맞은 보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듯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한마디 내뱉고 나서 그 말에 스스로 무렴하여 소녀처럼 귀밑을 붉히는 것이었다. 그러자 김성준은 오히려 냉기조차 느끼게 하는 단호한 어조로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내일 당장 치과엘 가셔야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미 그녀의 덧니가 옛날의 그 매력적인 덧니일 수는 없었다. 발치(拔齒)를 서둘러야만 하는 환부에 지나지 않았다.
―1985년
2016년 12월 29일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