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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을 다녀오신 관정 큰스님
연당(한순남, 서울)
1) 관정 큰스님에게 물은 30년간의 연당 의문
2002년 10월 30일 청량리 금강선원 활안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국에서 오신 선지식을 친견해야 된다는 부름이었다. 중국에서 오신 관정 큰스님을 만나 뵙기 위해 선원으로 달려갔다. 큰스님은 “우리가 극락에서도 이렇게 법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깊숙이 남아있다. 나는 처음 법문을 들었을 때부터 스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모든 법문은 절실하게 여겨졌다. 영취사 등원 스님 안내로 관정 큰스님이 임시 거처하신 인사동 아미타사란 절을 알게 되었다.
2003년 2월에 관정 큰스님이 다시 오셔서 인사동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뵙고 삼배를 올렸다.
1배할 때는 “편안하세요.”
2배할 때는 “순조로우세요.”
3배할 때는 “성불하세요.”
이런 발원을 해주시는 스님은 처음으로 나에게 행복을 주는 발원이었다. 나는 30대 초반부터 30년 가까이 절에 다니면서 절에서 갖는 행사 가운데 천도의식에 관한 것이 궁금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달마도를 그려 소장하는 문제도 궁금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여쭤보고 싶었다. 극락을 다녀오셨다니 얼마나 잘 아실까 하고 생각했다.
<문> 큰스님! 천도재를 하면 천도가 되는 것입니까?
<답> 천도재를 지내면 마음이 편하려고 지내기도 하고, 영가가 천도 되기도 합니다.
<문> 달마도를 간직하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됩니까? 이 달마도를 한번 봐주십시오. 이 달마도는 제가 꿈에 선몽을 받아 그리는 달마도입니다.
<답> 이 달마도는 특별한 달마도입니다. 받아 잘 간직하면 무슨 도움이 돼도 도움이 됩니다.
<문> 사람들이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도 몇 년이 지나면 흐지부지하게 되는데, 저는 언제까지 달마도를 그려야 합니까?
<답> 죽을 때까지 그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주세요.
‘아! 죽을 때까지 그려야 되는 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등원 스님이 들어오시며 ‘큰스님에게 뭘 그리 따져 묻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큰스님이 벌떡 일어나 나가시면서 ‘화장실 다녀오면 질문하라’고 하셨다. 나갔다 오시더니 ‘왜 소리를 질렀냐?’고 물으셨다.
“스님 힘드신데 묻는다고 나무랐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고 그날은 그 정도만 여쭙고 마쳤다. 우리 대화를 함께 들으시던 스님들이 큰스님께 여쭈었다.
“연당 보살이 꿈에 선몽을 받고 그린 달마도가 특별해서 도움이 된다 하셨는데, 한국 돈으로 치면 어느 정도 가치가 있습니까?”
“천만 원 가치가 있다.”
2) 마정수기
2002년 처음 친견한 이후 관정 큰스님이 오실 때마다 찾아뵈었다. 옥수수를 좋아 하셨다. 옥수수나 당근, 토마토 주스 1컵씩 들고 갔다.
큰스님께 천도재를 부탁하기도 했다. 극락에 국적이 있고 극락을 왔다 갔다 하시는 분께 조상천도를 부탁하지 않으면 누구한테 하랴 생각하고 천도재를 부탁드렸다. 그리고 나 자신도 큰스님 만날 수 있을 때 업장 소멸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정성을 모아 마정수기를 받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에서 꽉 찬 숫자가 9라고 들었다. 자금성도 9,999명을 거느렸다고 하니 나도 마정수기를 9번 받겠다고 결심하고 찾아 뵐 때마다 수기를 받았다. 마정수기를 주실 때 3번까지는 경문을 외는 숫자가 3백자 4번부터는 4천자라 하셨다. 채식만 하신다고 들었다. 기어이 9번 마정수기를 다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앉아 있는데, 큰스님이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움츠려들며 생각을 다시 했다.
‘이것은 내 생각이었구나! 큰스님께선 나 자신이 한계를 긋고 자만하는 마음을 읽으신 것 같았다.
그 후로 오실 때마다 정성을 기우려 최선을 다했다. 11번을 받았다.
내가 좋은 것을 가족들에게도 주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갖는 바람이고 욕심일 것이다. 그래서 아들네 식구들과 딸네 식구들도 모두 데리고 가서 마정수기도 받고 계도 받았다. 당시 6살이던 친손녀 유혜련이는 굉혜라는 법명을 받았고, 5살이던 친손자 유혜광이는 굉광이라는 법명까지 받았다.
3) 우리 집 방문
나는 관정 큰스님을 우리 집에 모셔 공양을 한 끼 올리고 싶었다. ’옛날 부처님께서 쉬고 간 자리는 후세에 절이 들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자리가 되었다‘는데 나도 집에 모셔서 한 끼의 공양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그동안 나는 이사를 자주 다녀서 너무 힘들었는데, 이제 좀 안정된 자리를 잡았으니 저의 집에서 관정 큰스님 공양 대접을 하고 법문도 듣고 싶었다. 주지 등인 스님에게 제 뜻을 말씀 드리고 모실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십사하고 부탁드렸다.
“관정 큰스님이 아직 개인집에 가본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보살님이 정성을 다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번 대구에서 열린 법회가 끝나고 올라오시면 시간을 여쭈어보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시간을 내어 우리 집을 방문하시겠다는 연락이 왔다. 「극락세계 유람기」에 보면 큰스님이 극락 가셨을 때 제일 생각난 음식이 하얀 쌀밥에 배추 된장국이라고 하셨기에 그렇게 준비했다. 그리고 강남에서 친구가 다과를 조금 만들어 왔다. 저녁 공양 드실 시간 무렵 등원 . 등인 스님과 통역관이 큰스님을 모시고 우리 집에 도착하셨다.
차에서 내리시어 큰스님과 손잡고 우리 집 계단을 내려오시는데 아기 손을 잡고 내려오는 것 같았다. 현관에 들어오시더니 집안을 휙 한번 돌아보셨다. 우리 집에는 관정 큰스님께서 극락에 다니면서 계속 보아온 관세음보살님을 그려서 주신 것을 모셔 놓았다. 그 그림은 스님 보따리 밑에 깔린 것을 꺼내주셨는데, 뒷면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 보관하셨기 때문에 표구사가 표구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래도 조금도 다친데 없이 표구를 정성스럽게 해놓은 관세음보살상을 바라보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방으로 모시고 들어가 저녁 공양을 하신 뒤 마루로 나오셔서 법문을 하셨다.
“이 집이 공덕이 무량한 집입니다. 이 집에서 기도하면 성불도 할 수 있는 집입니다. 절에 갈 때는 조용한 곳을 찾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나는 큰스님의 말씀을 들을 때까지 이 집이 조용하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았는데 스님 법문 듣고서야 조용한 집 인줄 알았다. 그렇고 보니 옆으로 뒤로 차가 다녀도 차 소리가 안 들렸고, 매연도 없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이렇게 꿈을 꾼 것처럼 관정 큰스님과 일행은 떠나 가셨다.
나모아미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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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무량공덕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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