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성>
아이는 벧엘 동편 에브라임에 있었던 성읍 이름으로써 히브리어로 (하아이), (아야), (아야트) 등 여러 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으며, 영어로는 Ai로 표기된다. 그리고 이 지명은 '폐허더미', '황폐한 소산'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1. 성서상의 자료
창세기에는 아이와 벧엘 사이에서 그의 장막을 쳤다는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창12:8, 13:3) 여호수아 7-8장의 기사에 의하면, 아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취한 후에 공격할 다음번 성읍이었다. 옛터는 황폐해진 반면 부근에 이스라엘의 성읍이 같은 이름으로 생겨났다. 이사야는 아얏을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행군하는 도중에 빼앗은 성읍들 중 최초의 것으로 이야기한다.(사10:28)
그 위치는 고대의 아이와 거의 같은 곳이었다. 바벨론 유배에서 풀려나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벧엘과 아이 사람도 223명이 있었다.(라2:28, 근데 느7:32에는 이 숫자가 123인으로 나와 있음) 그 다음 세기에 이르러 벧엘에 가까운 아야에는 베냐민 사람들이 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느11:31)
2. 고고학적 증거
고대의 아이의 위치는 벧엘(현대의 베이틴 Beitin)에서 동남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엣-텔(et-Tell)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가르탕(J. Garstang: 1928), 마르켓 크라우스(Marquet-Krause: 1933-1935), 사무엘 예이빈(S. Yeivin: 1936), 칼라웨이(J. A. Callaway: 1964-1972)에 의해 발굴된 이 유적지에서는 정교한 방어방식과 사당 및 갖가지 그릇들이 발굴되었다. 이 성읍은 B.C 3000년경에 세워졌다가 늦어도 B.C 2000년경에 멸망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 초기 철기시대(B.C 1200년 이후)에 보다 작은 새로운 거주지가 생겨났고, 약 10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땅은 이스라엘 정복시에는 (B.C 13세기) 전혀 사람이 살지 않은 버림받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타난 여호수아서의 기록은 사실과는 다른 기사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언급한 포로기 이후의 도시는 엣텔 남동 1.6km 떨어진 키르벳 하이얀으로 확인되었다.
3. 여호수아서의 정복기사에 대한 문제
여호수아 8장에 언급된 아이의 정복에 대해 올브라이트(Albright)는 아이의 정복이 벧엘의 정복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견해는 여호수아 8:17에 있는 아이의 방어에서 벧엘 장정들이 참여한 것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약화된다. 노트(Noth)는 여호수아 8장이 전설적이고 원인론적이어서 비역사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이의 정복기사는 사실과 다르며, 여호수아서의 신학적 입장에서 기술한 윤색된 기사로 봐야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