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당신의 소식을 듣고 여러 날 망설였답니다. 난 한해를 마감하느라 무리한 탓에 독감으로 이주일째 신열로 고생하고 있었지요. 때마침 당신은 전화로 내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즈음 '광명진언'을 외고 있었고, 나의 진언이 당신에게 닿은 듯싶어 내심 흐뭇했지요. 당신이 거처를 옮겨 나와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에도 이내 달려가지 않은 날 서운해 하진 마세요. 나 또한 당신이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낯설고 힘겨운 길을 택하였는지 따져 물을 셈이니까요. 수행자로서 안정된 길을 가고 있다고 마음을 놓았는데, 하필 남들이 꺼려하는 낯선 곳으로의 구도를 자처했다니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오늘은 열일 제쳐두고 궁금증을 풀고자 달려갑니다. 시한부의 삶으로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생각하니, 두려움으로 발길마저 무겁습니다. 벗을 통해 그곳의 정보를 얻고, 환자들에게 필요한 약간의 물품도 준비합니다. 고아원, 양로원으로 자원봉사를 다녀보았지만 그곳에서 말씨나 행동거지를 어찌해야할 지 걱정입니다. 생(生)과 사(死)의 기로에 선 이들에게 번뇌와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으로 인도한다는 정토(淨土)마을. 어느 시골처럼 평범한 적막이 감도는 아담한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평생을 바쳐 올인 합니다. 그러나 정토마을에선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아닌 잘 죽는 법을 가르치는 성싶습니다. 불혹을 갓 넘긴 나에게 '죽음을 생각해보았느냐', '어찌 죽을 것인가'라는 선문답은 말문을 막히게 합니다. 정녕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입니다. 지금껏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만 고민하며 살아왔으니까요. 오로지 편안한 미래를 위하여 가족을 챙기는 속물인 내가 당신의 도량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정토에서 점심을 먹고 곡차까지 대접을 받고 나니, 당신과 동료 스님을 보기가 민망하더이다. 후원이 필요한 곳에서 밥을 축내고 있자니 내 양심이 발동했지요. 도울 일이라도 있는지 물었더니, 나의 행색을 보고 망설이다 종이기저귀 접는 일을 권유했지요. 남편은 직원을 따라가 엉클어진 기저귀가 들어있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둘러메고 나왔습니다.
나는 솔직히 일할 준비자세가 아니었답니다. 당신의 안부와 그곳의 실정을 보기 위함이었고, 봉사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검정 정장바지를 입고 있었으니까요. 그 일은 먼지를 터는 일로 시작되고, 기저귀를 넓고 곧게 폈다가, 부피를 줄여 작게 접어 환자가 바로 쓸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스크로 입을 가렸지만 날아오르는 먼지는 온 방안을 떠돌다 얼굴과 검정바지를 허옇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먼지가 검정바지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기저귀를 다루었지요. 하지만 양손으로 기저귀를 곧게 펴고, 양발로 기저귀의 처음과 끝을 누르고 있어야 접는 일도 수월했습니다. 손으로 먼지를 뗄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자 자포자기가 되더이다. 그제야 일의 속도가 붙기 시작했지요.
고봉스님, 겉으론 철없게 먼지 탓을 했지만, 속으론 어머니가 떠올라 그리움에 가슴이 저릿저릿 해졌답니다. 육신을 가누기 힘든 상황이 되었을 땐 어린애처럼 대소변을 기저귀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지요. 의식이 있어 누워있는 사람도 민망했겠지만, 그것을 치우는 사람도 번거롭고 힘들었습니다. 그 일이 오래 지속되자 내 표정에 드러난 불편함을 숨길수가 없었지요. 그 순간만큼은 다가올 어머니의 죽음을 정녕 꿈에도 생각지 못했답니다. 죽음을 맞는 단계가 적힌 '티벳의 사자의 서'처럼 마음의 준비가 있을 리 만무였지요. 내가 매만지고 있는 기저귀가 어머니의 온기가 살아있는 생의 마지막 증거물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지요. 그땐 미처 몰랐습니다. 좀 더 따스하게 미소 지으며 당신의 엉덩이를 어루만져주지 못했던 것이 후회됩니다.
내 부모의 병간호도 이토록 어려운데, 그 일을 당신은 자청하였습니다. 누구처럼 편안한 곳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생소한 곳으로 달려가 죽음을 준비하는 그분들을 위하여 마음의 길을 열어주시니 대단하십니다. 홀로 외롭게 투병하는 남녀노소와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식은 있으나 돌보지 않는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가 부르면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달려가 기꺼이 사랑을 실천하는 정토마을 봉사자들을 존경합니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다가올 죽음입니다. 다만 그곳에 계신 분들은 나보다 먼저 갈 뿐이지요. 나도 능행스님의 말씀처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떠나고 싶습니다. 다른 곳에서 그리운 이를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곳을 혐오시설로 오인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간사가 아닐는지요. 돌아오는 주말에 정토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감하는 사내직원과 마음을 나누러 갑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두려움 없는 이별을 위하여,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살기 위한 길이니까요.
■ 이은희씨는
▶충북 청주출생, 충북대경영대학원졸업
▶2004년 월간문학 등단
▶2004년 제7회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수상
▶2007년 제13회 제물포수필문학상 수상
▶2005년 '검댕이', 2007년 '망새' 수필집 출간
▶한국문인협회, 청주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제물포수필문학회, 충북여성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현재 (주)대원 관리이사로 재직 중.
▶주소: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산남동 1102번지 계룡리슈빌 아파트 112동 602호
▶전화번호: 043-294-1825, 011-463-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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