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총 14장의 장편소설이며
1~9장까지는 아래에 연재되어 있습니다.
1/사랑, 장마로 오다
2/치명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3/첫 키스의 향기
4/철길이 닿는 바다
5/검은 그림자
6/굴레의 사슬
7/연못둥지과수원
8/안개 속의 덫
9/뒤틀리는 운명들
10/색깔이 다른 피
11/성(城)을 떠난 사막
12/장남들의 곡예비행
13/보이지 않는 길
14/연리지(連理枝)를 꿈꾸다
<10장 열번째 이야기>
색깔이 다른 피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진영은 진수의 이야기를 듣고 몹시 슬퍼했다. 하지만 그녀의 슬픔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볼 수 없는 공간에서 홀로 슬퍼하는 느낌조차 감지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진영은 이미 오래전부터 낌새를 감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 흉한 몰골로 살아가야 하는 불행과 설암으로 겪어야 할 고통을 스스로 절단한 것에 대하여 남겨진 사람들의 입장을 중요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늦가을이 되자 진수의 무덤은 더욱 스산한 바람과 낙엽들로 뒹굴었다. 정라의 편지는 가끔, 짤막한 안부 정도의 소식만을 전해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출소하였고, 정호는 어쩌면 제대가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대학 구내식당에 나가고, 그녀는 또 새로운 직장으로 옮겼다는 소식 정도였다. 일상은 무료함의 연속이었다. 무료함은 정라를 더욱 그립게 만들었다. 상경을 결심했다.
정라를 만난 곳은 종로2가 레스토랑이었다. 반지를 주려다가 거절당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장소였지만 그녀가 편하게 여기는 장소인 듯했고 달리 마땅한 장소를 알고 있는 처지도 아니어서였다. 약속장소에는 그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상투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두 줌 전에 왔어.”
그렇게 응답하는, 완숙해진 숙녀의 착한 눈썹에 시선이 멈춰졌다. 밝은 곳은 밝고 어두운 곳은 어두운 극명한 음영에 그녀의 눈썹은 더욱 선명했다. 나는 그녀의 섹시한 눈썹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맞은편 자리에 어색하게 걸터앉았다.
“이제, 시집가두 되겠다!”
그녀를 보고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였다. 성숙한 티가 물씬 젖어 사랑스럽다는 표현이 고작 그거였다. 그녀가 앙증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두 시집가라구들 난리여. 얼마 전에는 억지루 선까지 봤는걸!”
이건 또 뭐람, 선을 봤다니? 지구가 뒤집혀 거꾸로 돌아갈 말이었다. 그런데 정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그것도 당당하게 지껄이고 있는 게 아닌가. 갑자기 더워진 핏덩이가 정수리로 치솟았다.
“어떤 눔인데 선까지 봐?”
“어머, 얘가 왜 이래. 억지루 끌려간 걸 가지구 질투하기는…….”
“그렇다구 해두, 아무 감정없이 선을 보구 그러니? 여자들은…….”
“여자들이라니? 괜히 화까지 나려구 그러네. 별일두 아닌 걸 가지구 과민반응이다 얘!”
그녀가 되레 정색을 하며 말문을 막았다. 나는 짧은 순간 생각했다. 아무리 술에 노예가 되었다손 치더라도 낯선 여자의 알몸까지 더듬었던 주제에 기껏 선만 본 그녀를 질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미 먼 과거 속으로 감추어놓았다고 해서 잊어질 일이었는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에 저절로 꼬리가 내려졌다.
마침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온 여주인이 아니었다면 어떤 구실도 명분 없을 뻔했다. 나는 정라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전처럼 맥주를 포함한 스테이크를 주문하는 일로 수치를 모면했다.
“오늘은 전처럼 술 많이 먹지 않기다. 니 술 먹는 거 보면 가끔 무서워질 때가 있어!”
정라가 지난 일을 기억해내며 술 단속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놈과 선을 봤다는 사건만으로도 술의 통제가 가능할지 의문시되는 일이었다. 어쩌면 질투를 참아야 하는 인내의 수위만큼 술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부러 딴청을 피웠다.
“참, 나 서울루 와서 직장 다니게 될지두 몰러.”
불쑥 내뱉고는 능청스럽게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것은 분명 그녀가 선을 보았다는 발언에 대한 반항일 터였다.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음표를 던졌다.
“무슨 이야기여? 과수원은 어쩌구?”
언제부터인가 진영의 단순함과 석우의 방관으로 과수원 일에 흥미를 잃었었다. 석우의 태만이 날로 심해지는 것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면 어떨까를 짬짬이 생각했었다. 어쩌면 내가 자리를 비워주어야 석우의 설 자리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결심이 굳어지던 중이었다.
“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어. 아버지두 있구, 석우두 있잖어. 내가 있으니까 형이 오히려 밖으로 나도는 것 같어. 그냥 먼저 올라와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여!”
“하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으니까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들보다는 길이 많겠지 뭐.”
그동안 생각만 맴돌던 서울행은 정라 앞에서 공식화되어 버렸다. 나는 왜 진즉에 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지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멀리서 애달프게 조바심내지 말고 가까이에서 감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겨우 깨달은 것이다. 불쑥 떠올라 또 말했다.
“참, 석우 형 결혼했다!”
“하마? 신부가 이뻐? 어디 살던 여자여?”
“하마는 무슨, 석우두 이제 스물아홉이여! 진영이 알지. 신진영!”
갑자기 굳어지는 그녀의 얼굴빛이 역력했다. 석우와 진영의 결혼 자체에 의구심이 생긴다는 표정이었다.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커플, 아직 결혼하기에는 어린 진영의 나이, 내가 느끼는 감정과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다를 리 없었다.
“어떻게 된 겨? 진영이 나이가 지금 몇 살이지?”
“우리보다 두 살 아래니까 스물넷.”
“의외네. 석우 오빠가 진영이하구 결혼했다는 게…….”
그녀는 말끝을 흘렸다. 나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혼전임신이 빌미가 되었다는 말은 곧 나를 깎아내리는 것과 진배없으리란 판단에서였다. 더구나 정라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나이 어린 진영의 아랫동서가 된다는 현실을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물며 진영의 아버지와 정라 아버지의 반목까지 상기한다면 까무러칠 사건일 터였다.
나는 그녀와 단순한 근황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술을 연거푸 마셨다. 어두운 조명 탓인지 취기가 쉽게 오르는 곳은 레스토랑이었고, 그녀와 마주앉아 집착이 반복되는 곳도 레스토랑이었나 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코올은 여지없이 조바심을 불러일으켰다. 조바심의 근원은 늘 적당한 거리에 머물면서 근접을 허락하지 않는 그녀의 매력에 있었다. 아니다. 오늘만큼은 나를 두고 다른 남자와 선을 보았다는 고백이 자꾸만 뇌리에서 맴돈 탓이었다. 일종의 괴리감, 불안감, 배신감들이 요동친 탓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확인해야만 안심이라는 생각이 지배한 탓일까, 나는 그녀를 자극하여 선을 본 남자보다 더 큰 관심을 갖고 싶다는 욕심에 사로잡혔다. 그녀에게 통제당하고 싶었다. 다시 맥주를 주문했다. 여지없이 정라는 나를 통제하려 들었다.
“양우야, 너무 마시는 거 아니니? 니는 언제부터 술을 그렇게 많이 배웠니?”
“걱정 마, 이 정도는 괜찮어.”
“스테이크가 나오지두 않았는데 벌써 취하면 어쩌려구 그려!”
맥주가 왔다. 나는 번개처럼 털어 넣었다. 그녀의 통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러 두 잔씩이나 목구멍에 부어버렸다. 벌써 트림이 복받쳤다. 정라의 힐책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힐책은 오히려 객기까지 발동시켰다. 마음속에 기생하던 또 다른 훼방꾼이 농간을 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를 맹렬하게 공격한 훼방꾼은 내면 깊숙이 숨겨진 불만의 찌꺼기까지 들이대고 꿈틀대었다. 녀석이 혓바닥을 타고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게 한 것은 정라의 야멸친 다음 말이었다.
“양우야, 술 그만 마셔야겠다. 이런 모습 정말 싫어!”
“상관 마. 언제부터 날 그렇게 생각했는데…….”
“얘가 갑자기 왜 이려? 니는 항상 일방적이여. 내 생각을 많이 한다구 입으루는 말하지만 정작 내 본심은 늘 모르구 있어!”
“정라 니두, 내 생각은 별루 한 적 없잖어. 난 애달프구, 그립구, 보구 싶어서 아무 일두 못한 날들이 너무나 많어. 그게 너무 오래되어서 이젠 병이 되었단 말이여. 그냥, 있는 그대루, 느끼는 그대루, 줌 살갑게 해주면 안 되니?”
나는 이미 사랑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목마르게 수백수천을 구걸했을 터인데, 그녀의 사랑은 구걸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오래전부터 터득했을 터인데, 그놈의 술 때문에 객기를 부리고 있었다. 처음 음주를 시작했던 망상해수욕장의 트라우마, 또 어긋난 술버릇이 도졌다. 그녀는 더더욱 발끈했다.
“그건 무슨 궤변이니? 사랑이 확인하구 소유해야만 꼭 사랑이니?”
“그려, 다른 눔하구 선 보는 거 정말 싫어! 대체 어떤 눔이여?”
“그게 왜 그리 알구 싶은 겨? 그냥 떠밀려서 봤다구 했잖어!”
“신경 쓰이잖어. 다른 사람두 아니구 니가 선을 봤다는데, 니 같으면 궁금하지 않겠어?”
“이제 그만해라. 한 번 본 것으루 끝이었으니까!”
그녀가 몹시 거슬렸는지 세차게 성깔을 부렸다. 하지만 내가 아닌 낯선 남자와 선을 보았다는 소리가 자꾸만 귓전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결혼과 연애가 다를 수 없다는 생각, 사랑이 없다면 질투도 없다는 생각, 강력한 어필만이 다시는 선과 같은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조갈증에 더욱 집착을 보이고 말았다.
“그냥 마음의 표현이라구 이해해주면 안 되니. 그저 온전하게 받아주면 안 돼. 우리 두 집안, 할아부지의 아부지 때부터 인연이 있었잖아. 세상이 바뀌면서 운명두 바뀌었지만 우리 둘이 화해의 기틀을 마련했으면 해서여. 난 무엇보다 니 마음이 궁금혀.”
“내 앞에서 조상 이야기는 하지 마. 옛날 이야기를 들먹이면서까지 도대체 왜 이려?”
“내 말뜻은 옛날조차두 장애받구 싶지 않다는 의미여. 피차 마음에 걸렸던 건 사실이잖어. 나한테는 벽으루 여겨질 만큼 걸림돌이었어. 니, 날 사랑하기는 하는 거니?”
젠장, 이건 또 뭐람. 정작 주워 담지도 못할 말을 내뱉어버렸다. 그것도 하필 정라에게! 어쩌면 진수의 망령이 사주한 정호의 두려움에 대한 방어인지도 몰랐다. 가슴 밑바닥에 애써 잠재웠던 정호의 눈동자가 갑자기 겹쳐왔다는 변명은 더욱 치졸할 터였다.
정라가 갑자기 성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며 뇌까렸다.
“그걸 꼭 말로 표현해야 되니? 이 정도가 고작 니 사랑이었어?”
그러고는 맹랑하게 토라져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밖으로 동동동 나가고 말았다. 너무 돌발적으로 생긴 일이어서 스테이크가 오기도 전에 떠난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아니, 용기조차도 내겐 없었다. 확인하지 않으면 더럭 달아날 것만 같은 조바심이 화근이었다. 곁에 두어도 그리운 목마름이 화근이었다. 손안에 움켜쥐어야 내 것이 될 것 같은 불안, 어떻게든 확인받아야 얻어질 것 같은 사랑, 몹쓸 집착! 사랑은 결코 구걸해서 얻어지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의 사랑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졌다.
전화기 건너의 정라는 싸늘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도 않았다. 대책 없이 흐트러져 추락한 나를 힐책한다면 차라리 편할 텐데 요지부동이었다. 노여움이 어찌나 완강한지 감히 그녀 앞에 나설 용기조차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낯선 여자의 알몸까지 더듬은 주제에 질투라니, 내 질투는 본의가 아닌 온전히 조물주의 장난이라는 핑계라도 대고 싶었다. 정말이지, 그녀를 향한 사랑은 한순간의 먼지처럼 흩어져버렸고, 기약은 아득하여 처량했다.
그 처량한 가을이 언제였는가 싶게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다. 집안분위기는 더욱 처량 맞았다. 한 달 전, 교회에 맹신적인 작은어머니는 노환이 심한 할머니를 거의 쫓다시피 과수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배변이 원활치 않은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항문을 후벼 파서 방 안 여기저기에 흩뿌렸다. 어머니는 맏며느리라는 명분 앞에 힘든 병수발을 감내하였다. 입으로는 작은어머니의 기회주의 습성을 욕했지만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은 차라리 감동이었다. 다만 옆에서 거드는 진영의 타박은 날로 심해져 가관이었다. 석우는 그런 진영을 서슴없이 옹호하고 두둔했다. 어머니는 장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석우의 두둔을 나무라지 못하고 하극상을 가슴에 담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석우의 저지레는 나날이 엉뚱해졌다. 과수원만으로는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며 지난여름부터 송아지 세 마리를 키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토끼 이백 마리를 키우겠다고 설쳐댔다. 양털 대용으로 키우는 앙골라와 늘어나는 육류 대용으로 친칠라 종자를 사들여 사육해보겠다고 연일 아버지를 졸랐다. 아버지는 무언으로 승낙하였고 마침내 토끼를 사육할 5층짜리 토끼아파트가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석우의 저지레는 무작정 저질러놓고 뒤치다꺼리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 되는 데 문제가 있었다. 송아지와 토끼에게 먹일 무한정 필요한 풀을 확보하는데 거의 모르겠다는 수준이었다. 엄청난 양의 풀을 베는 일은 당연히 아버지와 내 차지가 되었다. 하물며 풀이 말라버릴 동절기를 대비하여 볏짚과 칡넝쿨을 준비하느라고 아버지와 나의 기운은 이미 고갈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습한 날 토끼는 대책 없이 널브러져 죽어나갔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건들거리는 석우에게 내장이 뒤틀리자, 나는 거칠게 항의했다.
“형, 지금 이게 뭐 하는 겨? 토끼를 키우겠다구 설쳐놓구 나 몰라라 하면 누가 다 키워?”
“니가 하는 게 뭐 있다구 이 난리냐?”
“토끼 툭하면 죽는 거 알어? 지금 몇 마리나 남았는지 알기나 혀?”
“토끼란 원래 죽는 수보다 낳는 수가 많은 동물이여. 대수롭지두 않은데 뭘 따지구 그려?”
“앙골라는 어떻구. 털을 깎아 팔기루 해서 키운 거 아녀. 털을 안 깎아주어 서루 엉켜서 쓸모없게 됐다구. 또 친칠라는 왜 그렇게 많이 처먹구 등치가 커. 도대체 판로는 있는 겨?”
“나두 백방으로 알아보구 있는 중이여. 가뜩이나 골치 아파 죽겠는데 니까지 왜 난리냐?”
“이번 달 내루 별 방도가 없으면 다 때려 부술 겨. 형은 도대체 그 눔의 연합회장이 밥 먹여줘?”
더욱 작심하고 대들었다. 심각한 상황을 별 대수롭지 않게 지껄이는 석우가 미워서였다. 그건 형제간에 점점 증폭되어 가는 반목을 직시하지 못하고 장남을 통제하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 눔 봐라, 형한테 막 대들어!”
“대들긴 누가 대들어, 현실을 말하는 것뿐이지.”
“나도 최선을 다하는 겨, 니가 장남의 멍에를 알어?”
“멍에? 누가 형한테 멍에를 씌웠어. 그건 순전히 혼자 생각이지. 항상 형 맘대루였잖어!”
“이 자식이!”
석우의 손바닥이, 내 왼쪽 뺨에, 일순간 달라붙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모든 것이 뒤엉키는 짧은 순간이었다. 만감이 교차되는 상실감, 한없이 초라해지는 몸뚱이, 무너지는 것은 결코 남루한 자존심이 아니었다. 뺨을 맞아 아픈 것보다 혈육의 균열이 더 아파왔다. 석우의 행동은 독을 품지 않았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연못둥지과수원은 깊은 괴리에 빠져들었다. 석우 또한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우발적이었다는 표정으로 안절부절했다. 너나없이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심약한 근본을 타고났고, 이럴까 저럴까를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세월만 허비하는 햄릿과도 같은 나약함이 석우와 나의 공통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닮은 그것이 싫어 닮지 않으려고 나름 애써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등을 돌려 도망치듯 집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처진 등판이 자신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는 나약함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저 멍하니 과수원을 떠나 어디론가 가버리는 석우의 뒷모습을 어이없이 지켜보다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먼 하늘의 구름들은 겨울바람을 타고 어지럽게 뒤엉키며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초저녁부터 사랑채에 처박혀 결론 낼 수 없는 괴로움으로 좌불안석이었다. 맹장에 걸렸을 때처럼 묵직한 느낌인 몸뚱이가 오늘따라 유독 부담스러웠다. 몸을 뒤집어 엎드렸다. 그래도 불편하여 다시 모로 누었다. 집 나간 석우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를 일, 그와의 화해 방법은 다람쥐처럼 똑같은 물음표만이 맴돌 뿐 귀결되는 것은 없었다.
“도련님, 오늘 형 못 봤어유? 애가, 열이 펄펄 끓어유!”
밖에서 진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벌컥 문을 열어 젖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불빛이 뛰쳐나가며 진영을 밝혔다. 진영은 불안에 떨며 앞마당을 왔다 갔다 콩콩대고 있었다. 그녀의 등에는 어린 조카가 업힌 채 칭얼거렸다. 어디쯤 처박혀서 술이라고 진창 푸고 있을 것 같은 석우의 동태를 직감한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집에 누구 없어유?”
“아무두 없어유. 낮부터 열은 있어두 괜찮겠지 했는데…….”
진영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울먹이면서, 어머니는 인근 마을에 가고 없다고 말했다. 또한 아버지는 어디를 갔는지 귀가 전이었고, 가래를 뱉지 못하고 가릉거리는 할머니만이 있다고 전했다.
달리 대안은 없었다. 사랑채를 나와 엉덩이가 반쯤 벗겨진 채 호흡을 꿀꺽이는 할머니를 먼저 살폈다. 다음은 헛간에서 자전거를 꺼내어 불안에 떠는 진영을 뒷좌석에 태웠다. 조카는 그녀의 등짝에 꽁꽁 동여맸다. 자전거에 올라타자마자 서둘러 페달을 밟았다. 과수원을 벗어나자 주위는 지독한 어둠에 짓눌려 깊은 고요로 죽어 있었다. 자전거의 작은 헤드라이트 불빛은 끊어질 듯 비틀대며 어둠 속을 가까스로 버텨내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도립병원 응급실에 아이와 진영을 내려놓았다.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받으며 달려왔음에도 등줄기에는 땀방울이 한바탕 흥건했다. 찬 공기에 식혀지는 등줄기의 서늘함이 오히려 쾌적하게 휘감겼다.
아이를 진찰대에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녀석이 갑작스럽게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작은 몸을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팔다리가 뒤틀리며 각도가 휘어졌다. 눈동자는 가장자리로 몰려가 허공을 헤매었다. 놀란 진영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지게 달려들었다. 의사들이 달려와 아이를 발가벗겼다. 거즈에 알코올을 붓고 아이의 전신을 훑었다. 다른 한 의사는 커튼을 쳐 아이를 격리하고 보호자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그녀는 비밀리에 아이를 처치하려는 의사를 막무가내로 밀쳐내고 진찰대를 부여잡았다.
“보호자님은 나가 계세요! 열이 높아 그러니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나 아이의 상태를 목격한 진영은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눈알이 뒤집히고 심장이 튀어나와 까무러칠 기세였다. 진영의 절규에서 끓어오르는 모정이 읽혀졌다. 그녀를 보는 나의 부정적 시각이 달라지고, 어머니라는 단어를 새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녀석은 곧 거짓말처럼 고요하게 잠이 들었다. 의사는 하루쯤 지켜보다가 이상이 나타나면 몇 가지 검사를 해야 한다며 치료를 마무리 지었다. 자지러지던 진영은 진액을 빼앗긴 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비로소 의자에 몸을 내려놓았다. 내가 조심스럽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친정어머니한테 연락해야 하는 거 아녀유? 우리 집은 내가 가서 말하면 되지만…….”
잊었던 일이 그제야 생각난 듯 진영은 다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공중전화가 있는 현관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는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유. 도련님 덕분에 큰일을 피한 것 같어유. 그나저나 애 아버지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미치겠네!”
“어디 짚이는 데 없어유. 낮에두 약간 술 냄새가 나던데…….”
“글쎄유, 요즘 툭하면 술이니. 가끔 호암지 어딘가에 있는 술집에 간다는 얘긴 들었어유.”
그 술집이라면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바였다. 월악산에서 무대뽀삼형제와 버섯을 채취하고 돌아오던 길에 요란한 젓가락소리와 뽕짝노래에 고요하던 마음이 깨졌던 곳이다. 여자와 남자의 뒤엉킨 목소리가 문밖까지 튀어나와 불쾌했던 선술집. 석우가 혹시 화녀까지 끼고 술판을 벌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에 이르렀다. 그곳이라면 그녀 앞에서 술집 위치를 모르는 척 더욱 시치미를 떼어야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친정어무니가 오시면, 집으루 가는 길에 한번 들러보지유.”
“아니에유. 혼자 있을 테니 지금 가보는 게 좋겠어유. 늦게 오면 사위로서 우리 어무니 눈치두 봐야 할 것 아녀유. 혹시 형 만나면 빨리 오라구 전해줘유!”
진영은 석우의 입장까지 배려하는 성숙함을 보였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격언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 훌쩍 커버린 마음씀씀이가 낯설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의 권유대로 병원을 나와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병원을 올 때보다 페달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헤드라이트 불빛은 끊어질 듯 여전히 비틀거렸다. 화녀를 끼고 흥청댈 술 취한 석우를 만나야 한다는 불편한 생각은 갈피를 못 잡고 더욱 비틀거렸다. 작은 마을모퉁이를 돌아 나오자 그제야 떠오른 흐린 달빛이 연못 위에 일렁거렸다. 달빛은 밤하늘에도 하나, 연못에도 하나, 두 개였다. 멀리 맞은편 호숫가의 일렁이는 불빛도 두 개였다. 선술집에서 나오는 불빛 하나, 연못에 일렁이는 데칼코마니의 불빛 하나. 인간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자연만은 아름다운 섭리 그대로 너울거렸다.
연못을 돌아 나온 사이 자전거는 벌써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먼저 안에서 흘러나오는 왁자지껄 중에 석우의 목소리가 있는가를 염탐해야 했다. 석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심증만으로 무작정 쳐들어가 훼방꾼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석우가 없다면 봉변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을 바에야 무모한 행동을 저지를 나도 아니었다. 그렇게 방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즈음,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며 찬란한 한복을 입은 여인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어이쿠 깜짝이야, 거기 누구여?”
화들짝 놀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여인의 놀라는 소리에 내가 더 장승처럼 굳어버렸다.
“언니, 언니. 여기 좀 나와 봐!”
찬란한 한복이 방 안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언니라는 또 다른 한복이 미닫이문을 와락 열어 젖혔다. 몇몇 사내들과 두세 명의 한복들이 불빛을 따라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 질펀한 틈에, 그 흥청대는 자욱한 담배 연기 틈바구니에, 석우의 얼굴이 문득 스쳤다. 아니기를 바랐는데, 제발 아니기를 내심 바랐는데, 기대는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이 밤에 누구신가?”
방 안의 한복이 자라처럼 목을 길게 빼고는 나를 훑기 시작했다. 사내들의 흥이 멈춰지고 나머지 한복들의 머리도 자라처럼 기어 나왔다. 족히 이십여 개의 안쪽 눈과 두 개밖에 없는 내 눈이 허공에서 엉켰다. 연신 훌쳐 내리는 눈총들을 회피하려 용건만을 힘주어 뱉어버렸다.
“사람 찾으러……. 석우, 전석우라는 사람이 있는가 해서유!”
석우라는 이름이 지목되자 흐트러진 제각각의 자세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행동은 우두머리를 모시는 병졸의 행동 바로 그것이었다. 우두머리는 거저 얻어지는 지위가 아니다. 더구나 오합지졸에서의 우두머리란 오로지 병졸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만이 우두머리를 유지할 수 있다. 평소 술값은 석우의 몫이었다는 추측이 여실이 입증된 셈이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형이 너무 취해서 동생을 알아나 볼지 모르겠네!”
나는 씁쓸한 웃음을 삼켜 넣었다. 분명 동생이 빌미가 되어 술을 퍼마시게 된 핑계였을 터였다. 초라한 구실에 불과한 자기합리화, 하극상이 이유가 된 술자리였을 터였다. 더구나 우두머리의 비위에 맞장구를 치며 배불리 채웠을 무리들, 나를 응시하는 작태들이 볼썽사나웠다. 나는 불만을 잔뜩 보태어 내뱉었다.
“형, 밖으루 줌 나와 보시여!”
그러나 석우의 대답은 없었고, 나이 많은 한복의 비아냥거림이 내 앞으로 던져졌다.
“이왕 왔으니 거기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한잔 걸치시구려.”
“시방 아들 눔이 입원했단 말이여. 술 먹구 죽쳐 있을 상황이 아니란 말이여!”
나는 한복의 유혹을 무시하고 한층 더 볼멘 목소리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마침내 석우의 얼굴이 병졸들 틈을 비집고 내비쳤다. 눈은 이미 죽은 생선의 눈처럼 풀려 있었고, 앉은 자세임에도 제멋대로 비틀거리는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되었는지 옆에 있던 한복이 석우를 억지로 앉히려 시도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한복이 함께 부축하자 오징어처럼 늘어졌던 그가 곧게 세워졌다. 석우가 게슴츠레 눈을 치떴다. 한참 후 겨우 나를 확인한 입에서 앙금이 섞인 이죽거림이 튀어나왔다.
“뭐, 할 말이 아직 남은 거여, 뭐여? 인마!”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알려야겠기에 어깃장으로 대꾸했다.
“아들 눔이 도립병원에 입원했다지 않았어.”
이어서 석우에게 들리지 않을 만한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대체 술을 어디로 처먹은 거야!’
그런데, 석우를 부축하고 나온 한복의 여자가 태연하게 나를 알아보는 게 아닌가?
“전양우 씨, 석우 씨 병원까지 자전거로 태워다 주고 다시 와요. 내가 한잔 대접하게…….”
내 이름을 서슴없이 호명하는 어둠에 가려진 한복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화장으로 위장된 아리송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석우같은 남자쯤은 제대로 홀려버릴 재능을 겸비한 갸름한 그녀와 틀림없이 구면이기는 했다. 그러나 생각나지 않았다. 머쓱해하는 나를 보고는 여인이 스스로 자신을 확인시켜 주었다.
“양우씨, 저 혜진이에요! 언젠가 사촌이랑 과수원에 갔던. 나를 바람맞힌 유일한 남자 전양우 씨!”
그녀와의 짧았던 접촉이 벼락처럼 상기되었다. 퍽 도시적인 세련미가 느껴졌던 첫인상의 여자였다. 보조개와 깨알만 한 까만 점의 움직거림, 새의 깃털처럼 적당히 보드라운 겨드랑이의 결, 자연미가 아롱진 겨드랑이에서 느닷없이 여성의 또 다른 매력을 느껴지게 만들었던 여자였다. 무대뽀삼형제에게 월악산으로 끌려간 탓에 바람맞힌 꼴이 되어버렸던 혜진이라는 여자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 더구나 왜 이런 모습으로 있는지 도무지 추측이 되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이질감으로 아무런 대꾸도, 아는 척도 할 수 없었다.
“자세히 말해봐. 내 아들 눔이, 어디가 아파서, 입원했다는 거여? 꺼억…….”
석우가 몸을 가누려 애쓰며 끊어지는 호흡으로 뇌까렸다. 비로소 상황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다시 짤막하게 정황을 설명했다. 아들이 열이 펄펄 끓어 입원시켰고 경기까지 일으켜 진영이가 펑펑 울었노라고, 중요한 순간에 자리를 비운 아버지란 사람이 이 모양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빨리 병원에 가자고, 연거푸 설명하고는 자전거 핸들을 꺾어 대령했다. 혜진에 대한 의문점 따위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별개의 사안이었다.
“빨리 뒤에 타!”
“자전거 이리 내. 나 혼자 갈 겨!”
“도대체 그렇게 취해 가지구 어떻게 혼자 가겠다는 겨?”
“까불지 마 인마. 나 혼자 갈 수 있다는데 왜 지랄이여!”
석우는 여전히 바늘로 찌르듯 염장을 질렀다. 나는 옥신각신하고 싶은 맛까지 아예 달아나버렸다. 낯선 사람들에게 혈육 간의 불협화음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니 울화까지 치밀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자전거 핸들을 팽개쳤다. 석우가 핸들을 잡기도 전에 자전거는 나동그라졌다. 나동그라진 충격에 바퀴가 빙그르 한참을 제멋대로 돌아갔다. 석우는 비틀대며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려 애썼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석우가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다시 세우며 소리쳤다.
“뒤에 타. 자전거 하나두 지대루 세우지 못하면서 똥고집은…….”
석우가 겨우겨우 뒷자리에 올라타고는 허리를 꽉 감아 잡았다. 나는 혜진에게 인사는 물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페달을 짓눌렀다. 술 취한 석우를 태운 자전거의 작은 불빛은 가까스로 무게중심을 버텨내며 더욱 비틀거렸다. 비틀대는 것은 내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혜진이라는 여자는 도대체 어찌된 노릇인가, 더구나 제대 전 술집에서의 낯선 여자의 망령이 되살아나 교차되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궁금증을 견딜 수가 없어 등 뒤로 물음표를 던졌다.
“술집에 있던 혜진이라는 여자, 그 여자는 어떻게 된 거여?”
“누구, 누가 어떻게 됐다구?”
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한 석우의 꼬부라진 혓소리가 어깨를 타고 건너왔다. 나는 목소리를 더욱 증폭시켰다.
“혜진이라는 여자가 술집에 왜 있냐구?”
“아아, 성혜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어. 얼굴만 이쁘지 머리는 돌이여. 하하하…….”
참으로 대책 없는 웃음이 등 뒤에서 흩날렸다. 남의 불행이 그렇게 웃어넘길 일인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의 성姓이 성씨였던 모양이다. 사람은 누구나 정상적이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동물이다. 성혜진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글을 좋아해 문예부 참가를 권유했던 고종사촌의 친구가 아니던가. 과수원을 찾아와 내게 관심을 보였던 나름 매력이 있던 여자, 고단한 술집으로 흘러들어온 경위가 몹시도 궁금했지만 진위는 석우가 아닌 고종사촌에게 확인할 일이었다.
석우를 병원 앞에다 버렸다. 밉살맞기도 했지만 아직 할머니가 혼자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떠오른 게 더 큰 이유였다. 나는 다시 집으로 내달렸다. 미친 듯이 밤길을 이리저리 내달려서일까, 진즉부터 넓적다리가 뻐근해오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도착한 과수원은 지극히 고요하고 적막했다. 안방에 불빛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헛간에 밀어 넣고는 희미한 미등만이 새어나오는 사랑방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마치 도둑놈이라도 된 것처럼 살며시 할머니의 동태를 엿보았다. 그러나 괴이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늘 누워만 있던 할머니가 벽에 기대고 앉아 거친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를 대로 말라서 뼈만 남겨진 몸, 살붙이 하나 없이 광대뼈만 도드라진 얼굴, 분노와 공포에 휩싸인 퀭한 눈동자가 내 눈과 맞닥뜨렸다. 섬뜩한 소름이 등줄기를 훑었다.
“할무니, 왜 그러세유?”
놀라 물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가래 오르내리는 숨소리만이 거칠게 메아리로 되어 돌아왔다.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까이에 이르자 할머니가 갑자기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디에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던 할머니의 힘이 일시에 내 몸으로 옮겨졌다. 강렬한 힘이 전율과도 같이 엄습했다. 퀴퀴한 구린 대변 냄새와 함께 지린내까지 콧구멍으로 밀려들어 왔다. 나는 거듭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할무니, 왜 그러시냐구유?”
“…… 으음, 으…… 음!”
할머니의 신음소리는 거의 절규나 다름없었다. 그 파열음은 엄청난 고통에 짓눌려 저절로 치미는 신음이었다. 여전히 내 멱살을 잡고 있던 할머니의 손이 덮고 있던 이불더미와 등 뒤를 연거푸 가리켰다.
“등에다 이불 고여 달라구유?”
할머니의 의사표시는 여전히 신음이 전부였다. 이불을 끌어당겨 깡마른 등과 벽 사이에 끼워 넣었다. 워낙 마른 몸이어서 공간이 메워지지 않았다. 할머니의 신음소리는 여전히 잦아들지 않았다. 나는 팔을 잡고 양발로 할머니를 벽으로 밀어 이동시켰다. 할머니의 몸은 마치 종잇장처럼 가볍게 떠밀려 이불과 맞닿았다. 그제야 조금은 편해진 듯 쪼글쪼글한 입술로 막혔던 호흡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할머니를 잡았던 손을 떼었다. 그러나 내 손아귀 힘에 밀려 주름졌던 거죽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살 거죽표면과 뼈가 이완되어 이미 분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순, 느닷없는 공포가 뇌리를 때렸다. 눈물이 벼락같이 올라와 시야를 왈칵 적셨다. 때마침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방문을 벌컥 열어 젖히자 힘없는 걸음으로 마당에 들어서고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부지, 빨리 들어와 보세유. 할무니가 이상해유!”
아버지는 신발을 팽개치며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은 아버지의 목소리는 벌써 울먹이고 있었다.
“어무니. 왜 그러세유? 말씀 줌 해보세유. 어디가 아픈지?”
“…… 흠, 으…… 음!”
할머니의 대답은 여전히 신음이었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이별이 임박한 것 같았다.
“양우야, 니 어무니는 어디 갔냐. 빨리 오라구 혀!”
“저두, 어디 가셨는지 몰러유!”
“석우하구 며느리는?”
“애가 아파서 도립병원에 입원했어유.”
할머니의 숨소리는 가물거리며 점점 스러져가고 있었다. 호흡은 꺼졌다가 살아나는 촛불처럼 일어섰고, 다시 스쳐가는 바람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간헐적인 호흡조차 서로 부딪혀 목구멍을 막았다. 또한 고통이 치밀 때마다 스스로 움직거릴 수도 없는 몸을 애써 뒤채려 안간힘을 썼다.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고, 그 울음은 굵고 깊은 절망으로 토해졌다. 그토록 슬픈 울음을 나는 처음 접했다.
“아이구, 어무이! 양우야, 나가서 빨리 니 어무니 줌 찾아봐라!”
나는 혼을 빼앗긴 채 꼼짝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때마침 어머니가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어 천만다행이었다. 아버지는 또 다른 심부름을 내게 주문했다.
“양우야, 니는 동네에 가서 반장에게 전해라. 할무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구!”
나는 엉덩이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헛간에 팽개쳤던 자전거를 다시 꺼냈다. 외딴 과수원집에서 반장 집으로 향하는 길이 이토록 공포의 밤길인지는 진즉에 느껴보지 못한 길이었다. 볼따구니에서는 할머니 생각에 여전히 눈물이 왈칵거렸다.
동네 반장이 아저씨 한 명과 함께 내 뒤로 도착하기 전, 그러니까 잠깐 마을로 나간 사이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등졌다. 할머니의 가래는 조용해졌다. 자식인 아버지는 통곡하다가 길게 흐느꼈다. 며느리인 어머니는 훌쩍이다가 부엌으로 나갔다. 반장과 아저씨는 할머니의 몸이 굳기 전에 준비해온 칠성판 위에 반듯하게 뉘였다. 가까스로 지탱하던 메마른 육신은 비로소 고요해졌다. 할머니는 바야흐로 이승의 고통에서 해방된 듯 보였다.
할머니의 무덤은 과수원 양지바른 언덕으로 정해졌다. 삼일장 내내 친족은 물론 봉계와 연못둥지 사람들로 외딴 과수원은 모처럼만에 왁작거리며 붐볐다. 할머니의 노후 수발을 포기한 작은어머니는 염치없이 부엌 주변만 맴돌았고, 이튿날에도 술이 덜 깬 석우는 사사건건 목소리를 높이며 장남이라는 권위를 내세우려 활보했다. 보다 못한 아버지의 핀잔을 듣고 시큰둥해진 석우는 그의 장인과 함께 진수의 무덤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목격되어 더욱 힐책을 들어야 했다. 더구나 술에 취한 진수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를 붙잡고 공화당 사건을 자꾸 되뇌었다. 진수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에게 청주로 이사한 동기가 정라 큰아버지 때문이었냐며 술주정을 해댔다. 줄곧 발뺌하던 작은아버지는 그렇다고 인정을 하고서야 겨우 술주정에서 벗어났다.
반면 나는 온갖 잔심부름으로 지쳐갔다. 그 와중에 고종사촌의 입을 통해 성혜진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야 했다. 혜진은 문예부장과 열애를 했는데 버림받은 충격으로 술집을 전전하게 되었다는 요지였다. 군대에서 겪은 여자의 과거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두 여자의 이유가 상투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생각이 스친 것은 알 수 없는 우연이었다. 어쩌면 남자에게 동정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는 추측에 그나마 내재되어 있던 동정심마저 사그라져 버렸다.
장례가 끝나고 나는 용단을 내렸다. 정라에게 서울로 상경할지도 모른다는 귀띔을 행동으로 옮길 시점이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석우와의 갈등으로 상처내고 피 흘리는 짓은 이제 접어야 마땅했다. 또 다른 좌절의 끝을 확인할 미련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아부지, 저 일간 서울루 올라갈까 합니다!”
“결국, 결정한 거냐? 아주 올라가는 겨?”
아버지는 발음을 한 박자씩 끊어내며 무덤덤하게 물었다. 이미 예견이라도 했던 아버지의 표정이 읽혀졌다. 아버지의 무덤덤한 일면에는 간간히 불거지는 석우와의 충돌도 한몫했을 것이었다. 나날이 깊어가는 석우의 태만은 이제 맏아들을 그렇게 키운 부모의 몫이었다.
“예에, 서울루 가서 취직하려구유!”
“그러려무나. 애비가 용돈은 많이 못 주니까 알아서 잘해보거라.”
“아부지한테 무슨 돈이 있어유. 가축 사느라구 다 썼을 텐데…….”
“그럼 어쩌겠니. 지난 번 사과 판 돈이 조금 있으니까 가지구 가거라. 그리구 형하구 있었던 다툼은 잊어라. 다 내 잘못이구나. 아무리 투닥거려두 결국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여!”
대답하지 않았다. 장남이면 무조건적인 아버지의 가르침이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더는 강요하지도 않았다. 내 속내를 읽고 있기 때문으로 여겨졌다.
이튿날 곧바로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해봐야 기껏 옷가지 몇 개였지만 마음의 짐은 되도록 모두 거두어 쌌다. 일단은 이문동 이모네 집, 음식이 입에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등학생 내내 함께한 만만함이 우선이었다. 때마침 군에서 휴가를 나온 사촌이 중랑천에서 환영회를 베풀어주었다. 내가 군대에 가고 고향에 머물러 있는 동안 중랑천은 말끔하게, 그러나 썰렁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수없이 즐비하던 중랑천의 판잣집들은 강제로 철거되어 어디론가 증발되고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빈한한 육신을 뉘고 남루한 희망을 연명하던 숱한 사람들은 대관절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나일론 빨래 줄에 땅콩처럼 매달려 바람에 흔들거리던 브래지어의 여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향수를 달래며 술을 잔뜩 마신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걸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