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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 생각과 고민,
변명과 연민, 투정과 분개, 항의와 자존심이
여전히 끓는 물의 표면처럼 넘쳐나는 이혜정 님의 글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그가 무엇인가를 솔직하게 말할 때, 그가 나를 공격하고 있지 않아도 나는 아프고,
그가 여전히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많은 문장을 접할 때는
그가 아무리 나를 심하게 공격해도
나는 아프지 않다.
2
강좌 때,
나는 강의를 하지 않는다.
혹은, 강의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좌 때 내가 하는 말은, 수강생의 합평작에 대한 반응, 그러니까 대꾸의 말일 뿐이고,
그런 점에서 '대화적'이어야 한다, 고 생각한다. 이러한 취지와 의도는 좋은데, 그런데 말하다 보면,
나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고, 나의 고집과 편견과 체질까지 들어가 있고,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 학생들에게 투사되어 있기도 하고,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척 지껄이는 부분들도
적잖이 들어 있다.
그래서,
잡담이란 게
나름 의미있고 즐거운 자유연상 놀이지만
그러나 쓰잘데 없는 잡담을 너무 하고 나면 오히려 귀가하면서 허탈하고 속상해지면서 또다른 병이 되듯,
강좌를 하고 나면 그게 옳은 말일지라도 나도 모르게 뱉아버린 내 말의 여러 허튼 부분들에 대해
나도 어쩔 수 없이 시달린다. 심할 때는 나 역시 혼자 중얼거리는
전철의 미친 놈처럼, 시달린다. 옆에 가족들이 있는데
강좌 때 헛소리 부분이 떠올라서 혼자 고개를 막
가로저을 때도 있다. -,.-
또 간혹
출석부를 펼쳐놓고
한사람씩 이름을 짚어가보곤 하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내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는
이름들이 있다.
-,.-
나 자신부터
이렇게 시달리면서,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강의를 좋아하고 칭찬해주는 소수 수강생들에겐 정말 고맙지만,
또한 내 강의가 모든 수강생들에게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
아니 꽤 많은 수강생들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3
학기 때마다
절반이 남고 절반이 떠난다.
아니, 언제나 스무 명 안팎의 선을 유지하고 있으니,
절반도 남아 있지 않은 셈이다. 그때마다 나는 아프고, 그때마다 나는 이거 못할 짓이다, 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로서는 신나게(?) 수강생 작품의 문제점을 드러냈는데, 그 뒤로 수강하지 않았던
몇몇 수강생들에겐 정말로 미안하다. 내가 잘난 척하면서 심하게 호통을 쳤는데,
다시는 못 만나고 마는 이와 같은 인연은, 가령 수강료를 내고는
한번도 출석하지 않는 수강생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나를 허전하게 만든다.
마치
대화 시간이 별로 없는데,
너무 많은 대화 시간을 필요로 하는 얘기를 꺼냈다가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하고 일어나 떠나버리는 상대를 바라 볼 때, 이렇게 시간이 없을 줄 알았으면,
그냥, 좋은 말이나 할 걸, 하는 허전한 자책이
따르지 않을 수 없듯이,
마치
어느새 나의 살점인 듯 느껴지는 붕대처럼,
수강생들이 떨어져나갈 때면 종내는 나의 일부까지 떨어져나가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과장되게 고개 돌려 눈살 찌푸려가며 엄살을 떠는 아이처럼
신음 뱉고 싶어질 때도 있다.
4
황룡은
친해져 놓고는 떠나고, (그래도 국병은 저렇게 소식을 보내주고 있지만^^)
혜정은 남아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앓고 있고 닫혀 있다.
둘 다 내게는, 아프다. 더구나 이들 기억은 이들 기억에서 그치지를 않고
지난 일년 강좌를 하는 동안, 나와 인연을 맺었다가 떠난, 혹은 만났으나 만나지 못한,
혹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잘 하지 못한 채로 떠나보낸, 다른 수강생들에 대한 기억을 동시에 불러 일으킨다.
그러면서 마치 똑같은 강도로 때리지만 여섯번째의 매가 다섯번째의 매보다 더 아프듯이,
그렇게 오늘, 내 마음이, 거친 모직 천에 쓸리듯
쓸리는 기분이다.
물론
아주 절절하게 아픈 것은 아니고,
그러나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붕대나 연고를 바르지 않고
걸어갈 때의 살갗처럼 신경이
쓸린다.
5
강좌를
회의하곤 한다.
창과 문을 살펴봐도 열린 곳이 없지만,
그러나 어디선가 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껴져서
틀림없이 빈틈이 있는 것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을 때처럼
내 강좌 헛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인지하진 못하지만,
빈틈을 일단, 인정한다.
그러나
다시금 반복하는 수고를 무릎쓰고 말하지만,
엊그제 합평의 핵심은, "산문, 산문정신, 주변장르와 중심장르" 등에 대한
부분이었다.
즉,
산문이란,
일상의 한 부분을 글로서 풀어헤쳐보는 일이고,
일상의 어떤 부분을, 글로서 풀어헤쳐보는 일은, 문학하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하려는 자의 기본 태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문을 써봐야 한다.
미리 장르를 선택하고 그 장르의 관습과 기술을 익히기 전에 산문정신이 선행해야 한다.
그러나 산문을 써나가는 일은 평생을 병행해야 할,
막막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그때 그때 한편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작정 선문정신만 펼쳐보일 게 아니라, 장르관습을 적절히 활용하여,
한편의 완결된 작품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대부분의 초보자들은
아예 일상어나 잡담 수준의 문장을 구사하거나,
주변장르 중에서도 비급 주변장르라고 할 수 있는, 상투적 광고 문구나 대자보 문구, 청취자 사연 엽서나
단조로운 연속극 대사 수준, 혹은 블로그에나 올릴 나르시즘 수준의 인식과 문장을 구사하는데,
이것은 일단 경계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일기, 편지, 기행문, 독후감, 엽편소설..
등의 주변장르 글쓰기(소위 생활글)를 활용해 보면 좋다.
일기 장르의 표면시간이라든가, 기행문 장르의 표면시간은, 견고한 구성을 갖춰야 때 좋은 장르규칙이고,
수신자 발신자 및 구성과정의 틀이 분명한 서간문 양식 역시
내용을 제한적으로 명확하게 이끌어 가고자 할 때
활용하면 좋은 장르규칙이다.
이러한
장르규칙의 활용은 결국 소설을 비롯한
여타 중심장르 쓰기를 위한 글감이 되거나 밑천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까
방법적으로 장르관습으로 벗어나서
마치 안거 기간의 스님이 자기 직분과 관계없이 모두가 명상의 평상심으로 돌아가듯,
글쓰기는 일단 산문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시 글쓰기를 그때그때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키려면
장르관습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는 다만 순수하게 혹은 순진하게 아마추어처럼
나르시즘이나 치유수준으로 산문을 써보자, 하는 취지에서 멈추면 안되며,
자신의 글이 공히 발표될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이 되도록
매번 최선을 다해 문장과 구성을
만들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산문과 하위 장르 글쓰기 훈련을 바탕으로
결국은 소설이나 시나리오나 동화 같은 중심장르를 모색해야 한다.
산문쓰기란 배설이 아니라, 문장의식과 장르규칙의 활용을 통해 하나의 작품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엊그제 내 합평 포인트가 여기에 맞춰진 까닭은, 이날 합평하게 된
다섯 작품이나 되는 산문들이 그저 블로그의 글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진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부족하고 흐트러진 강의였더라도,
엊그제 수업을 마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핵심 내용은, 작품다운 작품 좀 쓰자! 이다.
우리가 아마추어 같은 생활글부터 다시 쓰고, 기본 문장이나 장르 관습부터 다시금 의심해 보고는 있지만,
결국 지향점은 작품다운 작품을 쓰는 것이다.
글쓰기 교실일지라도
모든 논의가 허용되지만, 허용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모든 논의가 언제나 정말로 작품다운 작품을 쓰기 위한 과정일 때,
글쓰기 교실다운 논의로서
가치 있다..
6
우리가
너무 방만해지거나,
순수하지만 너무 막연한 정신교육 수련장 같아지거나,
헛소리 픽픽하는 그 자체로 끝나버리거나, 아마추어들의 나르시즘 같아 보이거나,
개인의 자의식적 고백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면,
차라리 기존 문화센터의 소설창작반처럼 등단지망생들만 별도로 모아서
글쓰기 강좌를 해나가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또 문학책만 읽거나
신춘문예용 기술을 익히는 것이 문학행위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거나,
치밀하지 않은 불분명한 말로 서로 비판하거나 칭찬하면서 친해지는 것으로 습작 시간을 보내거나,
책과 소설에 대한 정보교류와 토론만이 문학인의 중요한 논제라고 생각하거나,
글 조금 더 잘 쓰는 것을 중요한 위계질서의 가늠자로 받아들이거나,
조급하게 등단만을 꿈꾸거나, 하는 태도에 대해
나로서는, 우습다고 일축하고 싶다.
나는
조급한 등단지망생을 만나고 싶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이유로, 작품성 있는 글을 쓰려고 열라 애쓰는 수강생을 만나고 싶다...
우리 강좌의 중심은, 언제나, 어쩔 수 없이,
이들이어야 한다.
7
좋은 글 쓰자.
좋은 작품 만들려 애쓰는 것만이,
나에겐, 우리에겐, 가장 기쁘고도 반가운,
우리가 지향하는 지점으로 건너갈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가장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대화법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글쓰기 강사로서는, 좋은 글을 쓰려고 애쓰는 사람이 제일 좋다.
그리고 솔직히 좋은 글을 써버린 사람이 (좋은 글 쓰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아직 못쓴 사람보다)
언제나 더 반가운 것이, 어쩌지 못할
현실이다. -,.-
첫댓글 꿈속에 나타났어요. 선생님의 그 좋은글..타령, 내가 기지도 못하면서, 왜 이러고 있는지..에고에고...
할~~~
!
좋은 글 이라 ~ ..가슴에 와 닿네요 ..
내치기도, 보듬기도 버거운 게 지도자 입장인 거 같아요. 하지만 진정성은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치죠. 쌤이 이렇듯 자신을 짚어보고 아파하는 모습이 아름답네요.
아마도 선생님의 요구를 진득이 잘 알 진디, 글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씀에, 그저 저 말을 잊어버리지 말고 글을 진득하게 쓰거라.하는 소리로 받아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