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탈리아의 루니에서 태어났고, 펠륵스 1세를 계승하여,
275년 1월 4일에 교황으로 축성되었으며,
283년 12월 7일에 서거하여 갈리스토 가다꼼바에 묻혔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게 없으나,
로마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해 온다.
♤뽈리까르보 St.Polycarp ? 순교자
성 폴리카르포 Polycarpus 12.07 순교
♤테오도로 St.Theodore ? 순교자
♤우르바노(테아노) St.Urban of Teano 356년경 주교
♤빅또르(피아첸자) St.Victor of Piacenza 375년 주교
성 빅토르 Victor 12.07 주교 피아첸자 375년
♤암브로시오(밀라노) St.Ambrose of Milan 397년 주교,학자,양조제조(업)자,배우기,학문의주보
# 성암브로시오 주교 학자(340 ? - 397)
암브로시오의 전기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은 그의 최후 심판 때에,
사람들은 암브로시오를 칭찬하는 쪽과 그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쪽으로 나누어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긴 행동가로 부각된다.
왕족들까지도 암브로시오의 가르침에 맞서다가 하느님의 무서운 벌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에 속한다.
유스티나 황후가 암브로시오가 관리하던 가톨릭 교회내에 있는
두 개의 대성당을 아리우스 이단에게 주기 위해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을 때
암브로시오는 그것을 집행하러 온 군인들과 대항하여 맞섰다.
그때 그의 신자들은 그와 함께 황제의 군대에 맞서려고 정렬해 있었다.
이러한 반란의 와중에서도 그는 자극적인 동방의 가락에 맞춘 새로운 찬미가를 지어
신자들을 매혹시켰으며 그들을 자극하기도 하고 진정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황제와의 논쟁에서
"황제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그를 반박했다.
그는 7천명의 무죄한 사람들을 학살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공적으로 비난했으며,
황제는 자기 죄를 깨닫고 공적 참회를 했다.
암브로시오가 로마 총독으로 밀라노에 파견되었을 때 아직 예비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그를 주교로 선출하였다.
암브로시오는 넓은 이마에 커다란 눈과 길고 우울한 듯한 얼굴을 가진
키가 자그마하고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성서를 안고있는 허약한 모습으로 그려진 그를 볼 수 있다.
그는 귀족적인 바탕과 학자의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암브로시오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면이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설교가 그 당시에 행하던 다른 사람들의 설교보다 더 훌륭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았지만 그가 다른 사람보다 휠씬 박식하다는 것을 알았다.
암브로시오의 설교는 대개 키케로를 모델로 한 것이지만
그의 사상은 당시의 사상가나 철학자들의 영향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이방인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의 철학자들에게서 인용한 '이집트 인들의 황금'이라는 이야기를
자신의 강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의 설교와 저술 그리고 그의 개인 생활을 보면 마치 그가
그 당시의 크나큰 문제에 파묻혀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생각된다.
암브로시오에게는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영(靈)이었다
하느님과 인간 영혼을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가장 가까운 것,
물질적 요소가 전혀 없는 선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축성된 동정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한 투사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암브로시오의 영향력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고백록'은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누스 사이에 있었던
몇 가지 대담하고 갑작스러운 대립을 보여 주지만
박학한 주교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깊은 존경은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모니카가 자기의 아들을 과거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으로 인도한 암브로시오를
하느님의 천사처럼 사랑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를 입기 위하여
세례반으로 내려갈 때에 아우구티누스의 벗은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것은
바로 암브로시오였다는 말이 있다.
설명 ; 암브로시오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그리스도교적 특성의 모범이다.
그는 고대와 그 시대의 학문과 법률,문화에 깊이 젖어 있던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암브로시오는 이 세상의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가운데
성서의 숨은 의미가 우리의 정신을 다른 세계로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자신의 생활과 설교를 통해서 드러나게 한 것이다.
인용 ; "인간은 자신이 물질 이상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은 자연의 한 조각이거나 인간 사회의 한 무명 요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도 속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 내적 품위로써 일체의 물질 세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예지를 힘입어 유형한 세계를 통하여 무형한 세계로 옮아 가는 것이다.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14-15항)
# 골의 근위대장 암브로시오의 아들로서, 독일 트리엘이서 태어난 그는
그의 부친이 사망하자 어린 나이로 로마로 돌아갔다.
그는 연설과 학덕을 겸비한 법률가가 되었다.
그의 성공은 이탈리아의 근위대장인 안치오 쁘로보의 도움이 컸는데,
그는 암브로시오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임명하였으며,
후일 황제 발렌티아노는 그를 리구리아와 에밀리아의 총독으로 봉하였다.
이 지역 수도가 밀라노였다.
그때(374년) 밀라노의 주교좌가 공석이 되자,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암브로시오가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할 수 없어서 수락하였는데, 그당시 그는 예비자로서 아직 세례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교직은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지위이다.
그리고 밀라노는 로마 제국 서부 지역의 행정적인 중심지였고,
그 주교는 불가피하게 정치에도 개입되어 있었다.
따라서 개종자들도 홍수처럼 밀어 닥쳤지만, 이교인들도 수없이 많았으며,
또 크리스챤들 가운데에는 아리우스 이단에 동조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을 주교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는 374년 12월 7일에 영세받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였고, 신학, 성서 등을 연구하였으며,
그의 전 가정교사이던 심플리치아노 밑에서 크리스챤 학자들의 책을 공부하고,
엄격한 생활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고,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서방 교회의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황제 그라씨아노의 고문관이 되자 그를 설득하여
서방에서 아리우스파를 축출하는 법안을 만들게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황제가 전투에서 막시무스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암브로시오는 또 다시 막시무스를 설득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의 원로원에 승리의 여신상을 재건하려는
귄뚜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 일파의 기도를 분쇄하는데 성공하였으며,
385년에는 발렌티아노의 어머니, 황녀 유스띠나에 의하여 착수된 일단의 무리들에게
밀라노의 성당들을 전복시키도록 명한 발렌티노 황제의 명을 성공적으로 저항하였다.
390년, 살로니카에서 폭동이 일어나 로마 총독을 살해하자,
그에 대한 징벌로써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는 가공스러운 대학살을 명하자,
암브로시오가 황제에게 글을 썼다.
이 같은 범죄는 공적으로 보속해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황제는 이에 순순히 응하였다.
암브로시오는 항상 다음과 같은 원칙 밑에서 행동하였다:
"황제는 교회 안에있다. 그는 교회 위에 있을 수 없다."
393년, 반렌티아노 2세가 골에서 아르보가스트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는데,
그들의 대표자 에우제니우스는 우상 숭배르르 재건하려고 시도하는 무리들이었다.
암브로시오는 그들의 살인과 공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므로써,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마침내 제국 내에서 우상 숭배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수개월 후에 죽게 되자, 암브로시오가 그의 장례 때 기도하고 설교하였다.
암브로시오도 그 후 2년 뒤에 밀라노에서 운명하였다.
암브로시오는 초기 교회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며,
로마 제국이 쇠퇴해가던 서방 세계에서 그리스도교회의 부흥을 새로운 단계에 돌입시킨 분이시다.
또한 세속의 권위에 대항하여 교회의 독립과 자주성을 옹호했던 행정가이면서도,
그는 성서, 신학, 신비 신학 등, 설교를 중심으로 설파한 그의 지식 또한 괄목할만 하다.
그가 아우구스띠노를 이끌러 가톨릭 신앙을 고백토록 했고, 387년에 세례를 주었다.
이 사건은 그당시의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 놓은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암브로시오는 교회의 라틴 박사 4분 가운데 한 분으로 추앙받는다.
(성 아우구스띠노, 예로니모, 대 그레고리오).
또한 그의 저서 중에는 "신비에 대해서"란 책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세례, 견진 그리고 성체에 개한 글이 실려있다.
그는 시편을 대중적인 찬미의 기도로 활용하도록 가르친 첫번째 인물이다.
그의 주요 저서는 De officiis ministrorum, De virginibus, De fide가 있다.
# 12월 7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 념
340년경 이탈리아 트레비리의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시르미오(현재의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직에 들어갔다.
밀라노에 있을 때인 374년 12월 7일 뜻밖에 주교로 선임되어 서품받았다.
힘을 다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고 신자들의 참된 목자요 스승으로서
모든 이에게 넘치는 사랑을 보여 주었다.
꾸준히 교회의 권리를 수호하고, 저서들을 통해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참된 신앙을 옹호했다.
397년 4월 4일 성토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당신은 주교직을 맡았으나 이제 교회의 선미루 갑판에 앉아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배를 조종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거센 폭풍우에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의 방향타를 굳게 잡으십시오.
바다는 참으로 깊고 광대하지만 주께서 "바다 위에 그 터전을 마련하시고,
강물 위에 그 물을 굳히셨기"에 두려워 마십시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사도적 바위 위에 세워진 것으로서
온 세상의 암초 가운데서 의연히 흔들리지 않은 채 존속하며
그 견고한 기초 위에 서서 밀려 오는 바다의 성난 파도를 견디어 냅니다.
물결이 사방에서 밀려오지만 파선되지 않고
악의 세력들이 자주 무서운 함성을 지르며 밀려 왔다 물러가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수고하는 자를 받아들일 지극히 안전한 구원의 항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 배는 거친 바다 위에서 시달리기도 하지만 잔잔히 강들을 항해하기도 합니다.
이 강들은 "주여, 강물 소리 높삽나이다."라고 예언자가 말한 그 강들입니다.
이 강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물을 받고 하느님의 영을 받은
이들의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강들입니다.
이 강들은 영적인 은총으로 흘러 넘칠 때 소리를 드높입니다.
폭우처럼 그의 성도들 안에 흘러 들어가는 강도 있습니다.
평화롭고 잔잔한 영혼을 기쁘게 해주는 성급한 물줄기도 있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나 바울로 그리고 베드로처럼 이 강물에서 물을 충만히 받는 사람은 소리를 높입니다.
사도들이 마치 전령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로 복음의 메시지를 온 세상 끝까지 전파한 것과 같이,
이 물을 받는 사람 역시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목소리를 높이도록 그리스도의 물을 받으십시오.
주님을 찬미하는 그리스도의 물을 받으십시오.
여러 곳에서 비를 내리는 예언자들의 구름의 물을 받으십시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거두고 샘에서 솟아나는 물을 받는 사람 역시 구름처럼 이슬을 내립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을 물로 가득 채워
당신 지반이 내부의 가득 찬 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물로 축축하게 적셔지도록 하십시오.
많이 읽고 그서을 이해하는 사람은 가득 채워져 넘치는 그 물로 다른
사람에게 물을 대줄 수 있습니다.
"비를 싣고 오는 구름은 비를 땅에 쏟아 놓지 않고는 지나가지 않는다."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당신의 설교는 유창하고 순수하며 명료한 말로 하고
윤리에 관한 훈계를 할 때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의 마음이 멀어지지 않도록 하며
고상한 말로 신자들을 이끌어 당신이 이끌어 가는 곳으로 그들이 기꺼이 따라가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하는 말이 지혜로 가득 차도록 하십시오.
솔로몬은 "지혜 있는자의 입술은 지혜의 무기로다."하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 "네 입술이 생각과 떨어져 있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듯이
당신의 설교가 명료하고 재빨리 이해를 주어 다른 사람의 설명이 필요 없고
설교가 그 내용의 힘으로 옹호받도록 하며, 당신 입에서 헛되고 뜻 없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골 지방의 로마 근위대장 암브로시오의 아들로서
독일의 트리엘에서 태어난 성 암브로시오(340-397년)는
부친의 사망에 따라 로마로 돌아가서 학덕을 겸비한 법률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부친의 친구인 이탈리아의 근 위대장 안치오 프로보의 도움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그의 보좌관으로,
나 중에는 리구리아와 에밀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지역의 수도가 밀라노였다.
그 당시(374년)에 새 주교의 선출 문제로 밀라노 교회 분위기가 혼미를 거듭하자,
주민들이 그를 주교로 선출하는데,
그는 예비자로서 세례조차 받지 않은 입장이었다.
그로부터 8일 후에 그는 세례를 받고 사제로 임명되는 순서를 밟는 동시에,
아리우스 이단 척결과 교회의 세속 화에 반대하여 투쟁해 나갔다.
밀라노의 주교직은 막중한 책임과 권한이 따르는 지위였다.
그리고 그곳은 로마제국 서부 지역의 중심지였기에 정 치적 영향 또한 막강하였다.
정력적이며 인내심이 강하고 합리적이며 체 계적 사고력을 지녔던 암브로시오는
교회의 성직자로서 뿐만 아니라 행정 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아마도 그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황제의 권력과 간섭으로부터
교회를 독립시키려던 그의 노력일 것이 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서, 신학, 신비신학 연구에 몰두했고,
뛰어난 설교가로서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그가 아우구스티노를 교회로 이끌어 들 인 것은 그 당시 사회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그는 교회의 라틴 박사 네 분 가운데 한 분으로 꼽히며,
시편을 대중적인 찬미 기도로 활용하게 함으로써 암브로시오 전례 및
성가 집대성자로 기억된다.
♤마르띠노(소종) St.Martin of Saujon 400년경 원장
성 마르티노 Martinus 12.07 원장 소종 400년경
♤세르보(아프리카) St.Servus of Africa 483년 순교자
♤아니아노(샤르트르) St.Anianus of Chartres 5세기경 주교
성 아니아노 Anianus 12.07 주교 샤르트르 5세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