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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29-6호 일인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 고(故) 공옥진 여사 영결식이
7월 12일 오전 9시 전남 영광군 농협장례식장에서 있었다.
고(故) 공옥진 (孔玉振)여사는 1931년 8월 14일 ~ 2012년 7월 9일)은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 · 민속 무용가였다. 대한민국 1인 창무극의 선구자이며, 병신춤으로 유명했다.
1931년에 전라남도 승주군(현 순천시) 송광면 월산리 추동마을에서 판소리 명창 공대일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일본에 가서 최승희에게 춤을 배웠는데,
사실상 천 원에 그녀에게 팔려가서 몸종 노릇을 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아버지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1948년에는 고창 명창대회에 나가 장원을 했다.
공대일, 최승희, 임방울 명인에게 사사 받았다.
1978년 공간사랑 초청공연을 통해 창무극을 국내 및 세계에 알렸다. 중국, 미국 케네디 센터, 대만, 영국,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 초청 공연을 했다. 고(故) 공옥진 여사의 삶은 고단했다. 1998년에 뇌졸중으로 한 차례 쓰러진 바 있고, 2004년에 2번째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는 왼쪽 몸이 마비돼 한동안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강인한 의지로 2010년 국립극장 초청공연을 했다. 2010~2011년도 영광문화원 어르신 문화나눔 예술단 창무극 연출 및 불갑산 상사화 축제 특별공연을 끝으로 건강 악화로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고인은 곱사춤의 명인이라 부를 만큼 곱사춤으로 유명했다.
공연은 익살과 해학으로 사람들을 웃고 울렸다.
공옥진의 1인 창무극은 전수중인 수제자가 없어 창무극의 맥이 끊기게 되었다, 무형무화재로 지정되는 것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닌 공옥진 자신의 창작무용이라는 이유로 무형문화재 지정이 거부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0년 11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29-6호 일인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2007년에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었으며, 전남 영광군 영광읍 교촌리 예술연구소에서 생활하다가 2012년 7월 9일 향년 81세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는 외동딸인 김은희(65)와 외손녀 김형진(41), 그룹 2NE1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친정 종손녀 공민지가 있다.
2012년 7월 12일 새벽 3시 시흥을 출발했다.
새벽 6시 영광군 농협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빈소로 들어가는 곳은 가계에서 보낸 화환으로 그득했다.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말년을 어렵게 살았던 고인이 생을 마감했을 때
화환들이 넘쳐났다. 고인 생전에는 찾지도 않다 부음을 듣고야 밤길을 달려온 사람은 알 수 없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또 어딘가에 말년을 어렵게 살고 있을 분들이 있을 듯했다. 빈소는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조용했다. 훨훨 학처럼 날고 싶다던 당신의 염원을 알고 있는 듯 춤을 추고 있는 영정사진이 놓여있었다. 빈소 앞에는 故 공옥진 여사를 그리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 혼자 가는 거라고 말씀하실 때 그땐 잘 몰랐습니다.” “민초의 슬픔 어루만진 춤사위 남기고 예인 공옥진 지다.” ‘선생님과 마주한 순간 민초들은 1분이면 모두 울었습니다. 1분이면 모두 웃었습니다.“등이 적혀 있었다.
영결식이 오전 9시였기에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노제를 지낼 교촌리 공옥진 여사 자택으로 향했다.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한마을에 살았던 동갑 김옥주(81) 어르신을 만났다. “공옥진 선생과는 동갑이었다. 마을회관에서 화투도 치시고 돈이 없으면 나눠주셨다. 공연을 하면 마을 분도 초대해서 보여주었다. 우리 집에 와서 식사도 함께 했는데 이렇게 떠나니 마음이 너무 안 좋다. 노인정에서 병신춤도 추고 즐겁게 놀았었다.”고 회고했다.
위폐와 영정이 농협장례식장으로 들어섰다.
전남 영광군 농협장례식장에서 9시에 진행되는 영결식장으로 왔다. 영결식장에는 유가족과 국악인, 추모객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깊은 애도 속에 개식사-분향-묵념-약력소개-헌화-조사-고별사-한현선 살풀이춤-조시-독경-고별묵념-폐식사의
순서로 치러졌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영광문화원 정형택 원장은 조시를 지었다.
故 공옥진 여사님을 그리며
정형택(영광문화원장)
恨, 恨이 맺히면
춤이 되나요
옷소매 두어 번 걷어
주먹을 불끈 쥐면
왕방울 두 눈에 맺히시던 그 지독스런 恨이여
무대와 관중석을 오르내리며
몸짓 손짓 하나하나에
조선의 恨을 담아내시던
대한민국, 아니 세계의 어느 곳에도 없던
님의 춤 솜씨며 격조 높은 해학이며
그래서 대한민국이 웃고,
세계가 웃었소이다
얼굴색 다른 콧대 높은 서쪽 사람들
배꼽 잡게 하시던 그 웃음도
님의 恨이었소
이제 그 恨까지 훌쩍 가슴에 안고
승천의 길 들었으니
이 땅엔 이젠 무엇이 남겠소, 무엇이 남겠소
눈물만 남겨두고 가시는 님
손 흔들 수 밖에 없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가시옵소서.
투애니원(2NE1)의 멤버로 공 여사의 조카 손녀인 공민지 씨는 고별사를 통해
“할머님의 마지막 소원이셨던 기념관 건립을 위해 군수님과 군민, 가족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할머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겠습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예인정신을 꼭 이어 성공하여 할머니 앞에 바치겠습니다.” 고 했다.
故 공옥진 여사의 마지막 제자인 한현선 씨가 살풀이춤을 추었다.
운구가 노제를 지내기 영광군 교촌리 자택으로 출발했다.
“엄마 미안해! 너무 미안해!” 외동딸 김은희(65) 씨의 통곡 속에 떠났다.
노제가 치러질 교촌리 자책 앞에는 한 평생을 함께 지냈던 30여 명의 마을 분들이 미리 나와서
운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정자(78) 씨는 “ 어르신은 보시 심이 강했다. 뭐든지 다 주셨다
. 마음도 베풀고 예술적인것도 당신을 필요로 하시면 뭐든지 다 주셨다.
한 많은 일생을 살면서도 공인이 됐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아무나 공인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고 했다.
한순(71) 씨는 “노인당에 오셔서 화투도 치시고 봄이면 고사리 꺾고 꼬막 따러 다녔던 때가 그립다.
노인당에서 공연도 해주시고 우리들을 호텔에서 재우기도 하셨다. 노인당에 과자도 사다주셨다.
돌아가셔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러니까 이렇게 일 안 나가고 일하다가도 모두 이렇게 나와서 배웅해드리는 거다.”
김옥경(72) “마을의 엄마였다. 공연도 많이 따라다녔다. 고운 옷도 많이 얻어 입었다.
마을 사람들도 엄마한테 노냥 김치 해다 드리고 재미지게 잘 놀았다. 좋은 곳에서 편히 지내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노제를 지내는 동안 끊임없이 울었던 마을 주민 전봉순(56)씨는 “이모가 이뻐했다. 이모 손에서 컸다.”며 다시 울먹였다. 마을 주민들은 공옥진 선생을 그냥 ‘엄마’와 ‘이모’라고 불렀다.
노제가 끝나고 유족들이 영정을 들고 당신의 온기가 남겨있는 자택을 유족들이 돌았다.
노제가 모두 끝났다.
운구가 마을을 떠나자 마을의 엄마이고, 친구이며, 공연가, 이모였던
고 공옥진 여사를 마을 주민들이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노제가 끝나고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영락공원에 도착했다.
오후 1시 광주 영락공원 화장장에서 고인을 화장했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계셨던 재활원의 최영기(42) 씨는 “공옥진 선생님은 몸이 불편하신 가운데도 무대에 다시 서시기 위해 재활운동을 열심히 하셨다. 나중에는 혼자서 수저들 힘도 없으셨는데도 꿋꿋이 버티셨다. 정이 많았다. 한 인간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베푸셨다. 마음과 정을 쏟으셨다.”고 회고했다.
고인이 생전에 잠시 머물렀던 광주 무등산 원효사에 유골함을 모시기 위해 떠났다.
가족들이 영정과 유골함을 들고 고인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탑을 돌았다.
가족들이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외손녀 김형진(41) 씨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49제 동안 열심히 기도해서 좋은 곳으로 가시게 하고 싶다. 늘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시작인 거 같다. 할머니는 욕심이 없으신 분이셨다. 병원에서도 늘 사랑해요 해서 언제나 이와 같을 것이다. 당신의 마지막 소원인 기념관 건립이 이뤄줬으면 좋겠다.” 고 했다.
무등산 원효사에서 사십구재를 연 후 증심사 문민정사에 안치할 계획이다.
고 공옥진 여사는 무대에서는 당신의 한과 민중의 한을 익살과 해학으로 풀어내는 1인 창무극의 당대 최고의 예인이었다.
그러나 마을로 돌아오면 마을주민들을 위해 공연을 해 주고 고사리 뜯고 꼬막을 캐는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이웃이었다.
2012년 7월 9일은 영광군 교촌리 마을 주민들이 ‘엄마’ ‘이모‘ ’시대의 예인‘을 잃은 날이었다.
고인이 평생을 연구하고 이뤘던 1인 창무극과 병신춤의 맥이 끊긴 것이 안타까웠다.
고인의 창무극이 전승되고 고인의 염원이었던 기념관 건립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돌아오면서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첫댓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잘보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