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포도에서 만납시다(상상인)
진혜진
2016년 경남신문,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산맥》 등단. 시산맥작품상 수상.
인간은 누구나 관계를 통해 존재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고립과 적막 속에 내쳐질 때는 존재감을 잃고 어둡고 우울한 생의 터널을 지나게 된다. 「수상한 색맹」에서 보듯 “색을 놓치고/당신은 그림 앞 정물”이 되는 상황이다. “한 사람의 코발트블루와 또 한 사람의 붉은 저녁”이 하나가 될 수 없는 비극적 정황을 시의 화자는 대상을 타자화 하여 보여준다. 그러한 삶은 주체적 삶이 아니라 마지못해 “살아지는” 것이다. 시의 화자는 단절과 균열이 불러온 삶의 민낯을 사상의 압축과 여운을 통해 드러내면서 존재의 어두운 풍경을 암갈색 톤으로 묘사한다.
우산이 감옥이 될 때
예고 없이 소나기가 쏟아진다 손잡이는 피하지 못할 것에 잡혀있다
비를 펼치면 우산이 되고 우산을 펼치면 감옥
수감된 몸에서 목걸이 발찌는 창살 소리를 낸다
소나기 속의 소나기로 나는 흠뻑 젖는다
보도블럭 위의 빗방울
절반은 나의 울음으로 남고 절반은 땅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낼 것이다
버스정류장 앞 웅덩이가
막차를 기다리는 새벽 2시의 속수무책과 만나 서로의 발목을 잡는다
빗방울 여러분!
심장이 없고 웃기만 하는 물의 가면을 벗기시겠습니까
젖어서 만신창이가 된 표정을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어떤 상실은 끝보다 시작이 더 아파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끝이 날까
두 줄을 긋듯 질주하는 차가 나를 후경에 밀치고
검은 우산과 정차 없는 바퀴와 폭우가 만들어내는 민들레
젖어서 죄가 되는 빗방울
기도가 잠겨 있는 빗방울
우산은 비를 따라 용서 바깥으로 떠난다
-「빗방울 랩소디」 전문
이 시에서는 겹겹의 목소리가 들린다. 중층의 이미지가 여러 겹으로 겹치면서 화자가 발언하고자 하는 내용이 공명음을 얻게 된다. 대부분 그의 시는 직진이 아닌 우회의 통로를 곳곳에 마련한다. 하나의 색깔은 단색인 듯 보이지만 이면에 또 다른 색을 내포하고 있어 그의 시를 풍성하게 한다. 첫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작과정을 통해 습득한 시적장치들을 작품의 적제적소에 배치하여 운용할 줄 아는 능력을 여러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빗방울 랩소디도 그 중 하나이다. 우산을 하나의 감옥으로 설정한 시는 곧바로 비를 호명한다. “소나기 속의 소나기”다. 순간, 방점이 찍힌 ‘소나기’가 반짝 빛을 발하고, 화자가 맞고 있는 소나기는 다른 기의를 끌어안으면서 확장된 의미로 돌올해진다. 빗방울은 다시 ‘울음’으로 전이 되어 실체를 드러내면서 과감하게 시의 방향을 튼다. “심장이 없고 웃기만 하는 물의 가면” 앞에서 독자는 서늘한 통증과 조우하게 된다.
-홍일표(시인), 시집해설 「신생의 감각과 미지의 언어미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