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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선집 제76권 4편
체휼과 실천(축약 훈독본)
날짜: 1975. 2. 2(일)
장소: 한국 전본부교회
(아래 말씀은 말씀선집 제76권 4편 체휼과 실천의 말씀을 본인이 임의 축약하여 훈독해 올린 것입니다. 아래 원문을 추가했습니다.)
우리들은 신앙길을 가고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자기가 체험하고 깨닫고 가는 길이 안되어 가지고는 생애를 걸고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신앙자는 체휼을 통해서만이 강해질 수 있다
신앙자는 받은 말씀을 반드시 체험을 통해 그 말이 실제 사실인지, 아닌지를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신앙해 나가기 때문에 그 체험이 확실하게 현실적으로 우리가 몸으로 느끼고 만질 수 있는 내용으로 나타나기는 어렵습니다.
영적인 동시에 무형적인 주체를 상대로 하느니만큼 내 자신이 체휼적인 체험단계까지 나가기란 쉬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체휼의 길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 알 수 있고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어떠한 내정적인 심정의 인연을 갖고 계시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끼고, 보다 이상적인 새로운 소망을 지니는 것도 체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기독교 로마 박해시대에 있어서 신앙길을 꿋꿋이 갈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그러한 자리를 넘어갈 수 있었던 체휼적인 내용, 그들에게는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었던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베드로나 바울은 어려운 문제를 맞이할 적마다 반드시 하늘 앞에 기도를 했고, 그 기도를 통해서 하늘은 지시를 했습니다. 그러한 내적인 신앙생활의 기조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생활의 기반이나 전통이 있는 사람일수록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자기가 내적으로 체휼한 것이 오늘날 실천세계에 있어서 환경에 적용되는 사실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그 사람은 강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지만 자신은 출발함과 동시에 그 사실을 믿을 수 있고,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결과 이후의 것까지도 예상하면서 강하고 담대하게 환경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체휼입니다. (76-124)
하늘의 마음 문과 내 마음 문을 맞추는 생활이 중요해
사람의 마음에도 심문(心門)이라는 마음의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이 마음 자체가 돌고 있기 때문에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을 통하지 않고는 신이 있으면 신을 중심삼고, 플러스면 플러스를 중심삼고 마이너스의 입장에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각도와 방향이 틀리게 되면 작용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보면 시간에 따라서 느낌이 다릅니다. 잘 되는 시간에는 하나님과 감응의 도가 가깝습니다. 잘 된다고 하는 거기를 점점점 들어가게 되면 문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문과 인간의 마음의 문이 딱 맞아 가지고 어느 기준까지만 맞추어 돌아가는 날에는 하나님이 느끼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우리 마음의 세계도 선한 마음이 있음과 동시에 악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즉 마음의 문이 열리는 때를 알아서 하늘의 마음 문과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늘이 향하는 문과 일치화시키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한 문제입니다. (76-127)
마음 문이 맞추어지면 입체적인 느낌, 암시를 받게 된다
여러분이 상대적인 입장에 서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입체적인 느낌이 옵니다. 왜 그렇느냐? 우주가 돌고 있기 때문에 마음도 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춘하추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의 세계도 돌면서 그와 같이 변화하는 감도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일년을 두고 보면 춘하추동의 사계절이고, 일년을 축소한 것이 하루인데 하루에도 춘하추동이 있습니다. 아침이면 아침을 두고 보더라도 거기에서도 봄과 같은 아침을 느끼고, 여름과 같은 것을 느끼고, 가을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고, 겨울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느껴지는 느낌이 언제나 같지 않습니다. 계절을 따라서 자기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것을 알면 좋지만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많은 체험과 기도생활을 통해서 “아, 지금 때가 어떤 때에 처해 있구나!” 하고 가릴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암시라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내가 길을 무심코 쓱 가는데, 어떤 좋은 집 담벼락에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을 때 그것을 통해서 암암리에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의 생활에 있어서 그런 형태가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암시적인 조건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76-129)
몽시란 마음 상태가 공명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감을 나타낸다
그 단계를 지나가게 되면 몽시 같은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꿈 가운데 일어나는 일인데, 비몽사몽간에 체험합니다. 비몽사몽간에 어떤 현상이나 음성 같은 것을 오관으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걸 무심코 흘려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잊을 수 없는 몽시는 백 퍼센트 적중합니다. 그런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어떠한 사람이나 물건이 인연 되어 있는 것이 사실 가운데서 실체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 있어서 마음의 상태가 공명(共鳴)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것을 지극히 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76-131)
체휼과 실천은 생명의 인연을 가져온다
그런 상태가 되면 하나님이 마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한 차원이 높아져 은은한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하고 이야기합니다. 공명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을 내가 듣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무심코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배고픈 자의 심정이 돼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하는 사람의 태도는 전부 다 나와 더불어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타락으로 절단된 관계의 세계를 우리가 다시 접속시키기 위해서는 내 자체가 이걸 접속시킬 수 있는 작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작용을 해야만 환경은 개척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전부 다 무엇을 찾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기도하고 나면 “아, 오늘 좋은 일이 있다.” 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막연히 “좋은 일이 있으니까 그냥 좋은 일이 나타나겠지.” 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는 것을 찾아야 됩니다. 이러한 생활태도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돼야 합니다. 체휼과 실천은 생명의 인연을 가져옵니다. (76-132)
계시의 단계가 지나게 되면 묵시의 단계가 온다
그 단계가 높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그 다음에는 계시나 지시가 벌어집니다. 지시는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계시는 반드시 분석하고 해석을 해야 됩니다. 무엇을 가르쳐 줄 때도 가르쳐 주는 데는 음성으로 들려주기도 하지만 환상으로도 보여줍니다. 내 마음의 밭을 계발하기 위한 하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밭은 유리판같이 평평하게 되어 있지 않고 울뚝불뚝합니다. 울뚝불뚝한 여기에 하늘의 감도가 반사되어 가지고 오게 되면 빛의 굴절과 마찬가지로 들어오는 방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반사되어 나갑니다. 그러니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부 다 가리려니 그런 놀음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계시의 단계를 지나게 되면 묵시의 단계입니다. 하루 종일 영계에 들어가서 체험을 한다든가 저나라의 세계가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감정권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체휼적인 신앙을 갖지 않고는 위대한 하늘의 뜻을 생활무대에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을 갖지 않는 신앙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체휼적인 신앙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여러분이 알고 계발해 나가야 됩니다. (76-133)
영적인 역사의 과정을 통해 육신을 순화시켜 나가야
우리 식구들이 기도하는 중에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영적인 힘이 전기작용과 마찬가지로 들어옵니다. 여러분이 체험을 해봤으면 알겠지만, 고압에 접한 것과 같은 힘이 찾아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의식보다 강한 힘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세계의 의식입니다. 초자연적이고 초인적인 감정이 찾아 들게 되면 우리의 육신은 타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본연의 심성, 본연의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서 반발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 앞에 어떤 신의 성품이 강력하게 들어와도 자연적으로 순화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어오는 데는 한꺼번에 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게 들어왔다 약하게 들어왔다 합니다. 그러면서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를 자꾸 하게 되면 육성(肉性)이라는 것, 타락성 자체가 전부 다 순화되어 가지고 백 퍼센트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이 가르쳐 주는 것을 다 받으면서도 감쪽같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가지고 순화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야 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단계적인 현상들이 벌어집니다. 암시라든가, 몽시라든가, 계시라든가, 지시라든가 하는 과정들을 여러분이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체휼의 단계에 들어가면 마음이 여러분을 명령합니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말을 못 하게 합니다. 혹은, 내가 좋은 말로 그 사람을 위해서 말해야 할 텐데 책망의 말이 나오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가끔씩 벌어지기 때문에 조정할 줄 알아야 됩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미치광이로 취급받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할 줄 모르면 안됩니다. (76-134)
사람은 대개 지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으로 분류된다
대개, 우리 사람을 보게 되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사람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타입의 사람,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이치보다는 감으로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즉 지적인 면의 사람과 영적인 면의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내적인 면에서부터 느껴 가지고 외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이요, 지적인 사람은 외적인 면에서부터 느껴 가지고 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지성적인 사람은 대개 기도를 싫어합니다. 이론을 따져 가지고 무엇을 찾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동시에 나면서부터 “하나님!” 하는 말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막 좋아서 “아버지!” 하게 되면 밥을 안 먹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개, 영적인 운동에 있어서 혁명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이야 어떻든 느끼는 대로 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환경에 백중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일도 벌어지게 됩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지성적인 사람이었는데 다메섹에서 하늘의 영적인 벼락을 한번 맞고 나서 변해 버렸습니다. 외적으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내적으로 그렇게 폭발적인 느낌의 길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전부를 부정하고 그것을 존중시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기독교의 혁명의 기수가 된 것입니다. (76-136)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아서 부족한 면을 보강해야
이렇게 사람은 두 종류가 있는데, 자신은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대개, 영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크지만 진리 면에서는 뾰쪽합니다. 처음에는 굵지만 끝이 뾰쪽해지면 영원히 못 갑니다. 어느 때는 반드시 굴러 떨어집니다. 또, 진리는 크지만 영적인 면이 작다면 그것도 영원히 못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조정하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기도와 진리,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행을 만들어 가지고 화(和)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와 육계를 조정해야 됩니다. 영적인 세계의 중앙에 서야 될 것이요, 진리세계의 중앙에 서 가지고 중심적인 자리에서 좌우로 조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만 강하면 외적인 면은 결여되어서 곧장 가야 할 텐데 오른쪽으로 삐뚤어져서 갑니다. 힘으로 본다면 힘센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적인 면이 강하면 왼쪽으로 가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영적인 체험이 있더라도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체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합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진리로 조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중용의 길을 가면서 언제나 하늘의 섭리관에 방향을 일치시키는 놀음을 함으로 말미암아 영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고 지상세계와 진리세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세계가 어떻게 움직여 들어오고 진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하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생활화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지 않고는 안됩니다. 신령과 진리가 반드시 하나되어 조화를 이루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인간 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진리 면에서 느끼는 행복은 방향적입니다. 왜 방향적이냐? 영과 육, 신령과 진리를 두고 보면 어떤 것이 주체냐? 신령이 주체입니다. 진리는 상대적입니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방향적입니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령은 변하지 않습니다. 중심적이기 때문에, 사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을 통해서 느끼는 행복이 귀하냐? 진리를 통해서 느끼는 느낌은 방향적이기 때문에 변합니다. 오래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신령을 통해서 느낀 그 느낌은 중심적이기 때문에 오래갑니다. 중심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상대적인 입장이고 신령적인 면은 주체적인 입장입니다. 주체란 중심자리를 말하기 때문에 중심이란 것은 둘이 있을 수 없고 하나입니다. 그 주체적이고 중심적인 입장의 신령면을 통한 기쁨이라는 것은 영원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느낀 그 기쁨은 일생 동안 잊혀 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두 면의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지식을 중심삼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실천문제에 들어가서는 신령을 반드시 보강해야 됩니다.
보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생활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기도만 하고 신령면에만 치중한 사람은 반드시 진리에 대해서 연구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양면이 보강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내가 신령적이거든 진리적인 사람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두 사람이 의논하고 협조해서 하나될 수 있으면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남의 말을 듣고 심령에 타격을 받아 가지고는 새까매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건 자기 혼자서 암만 기도로 해결하려고 해도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와 상대적인 사람, 진리적인 외적인 사람을 중심삼고 친구가 되어 있으면 “야, 이 녀석아! 이렇게 해!” 하고, 또 진리적인 면의 사람이 문제가 생겼을 때 영적인 면의 친구가 “야, 내가 기도해 보니까 이래!” 하면 쉽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합니다. (76-137)
자기와 상대적인 소성을 가진 사람을 친구로 삼고 나가야
여러분이 원만한 인격을 지니려면 여러분과 다른 소성의 사람을 친구로서 환영할 수 있어야 됩니다. 싫은 사람이 나에게 제일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싫은 사람을 좋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악한 사람이 선하게 될 수 있는 첩경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 싫은 사람이 내게 있어서 원수가 아닙니다. 참의 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제일 가까울 수 있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혼자 신앙하려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남의 간증을 듣고 경험을 듣는 것은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내 성격의 짧은 면을 메우기 위해서는 간증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들어서 자기의 것으로 흡수하라는 것입니다. 들어 가지고 남이 말한 것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하는 것은 사탄 편이 되든가 하늘 편이 되는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판했다고 할 때는 사탄 편이 되든가 하늘 편이 되는 둘 중의 하나로 갈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내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암입니다.
기도와 진리에 대한 탐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영적으로 느낀 것을 진리로 소화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되고, 진리적인 면의 사람은 신령적인 면을 보강할 수 있는 체휼적인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영원한 터전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혼자서는 힘들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와 상대적인 소성을 가진 사람을 친구로 삼든가 스승으로 삼아서 지도를 받고 협조를 받아 나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 이젠 나도 알았다.” 할 때 그렇게 알았다고 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봐야 됩니다. 전문가는 무엇이 전문가냐? 같은 일을 많이 해본 사람입니다. 전문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실험을 해봐야 됩니다. (76-139)
체휼한 사실을 일일생활권에 접맥시켜야
여러분,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가 얼마나 통일권인지 모릅니다. “아무개가 보고 싶다.” 하면서 24시간 기다리면 그 사람이 옵니다. 집중하게 되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파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수신기와 같은 마음의 바탕이 있기 때문에 괜히 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마음이 강해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학교에 간다고 떠났는데도 교회에 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식적인 기준을 넘어 가지고 행동하는 그런 결과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신령적인 길을 통하면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기도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체휼한 모든 사실을 실천장에 적용시키는 데 있어서 어떻게 상대성을 갖고 일일생활권에 접맥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신앙자입니다. 막연한 신앙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책임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체휼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정신을 집중해야 됩니다. 영점의 자리에 내려가야 합니다.
마음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영원한 이상적인 선의 주체이시면 그 주체적인 존재 앞에 상대적인 바탕으로서 언제나 변함없이 상대적인 기준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마음의 중심이라고 봅니다. 이걸 통일교회에서는 생심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상대기준만 딱 맞으면 초연한 힘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심문(心門)에 맞추어 가지고 심전(心田)을 계발해야 됩니다. 그 마음의 밭을 계발하고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되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런데 주체되시는 하나님은 모호하니까 하나님을 연결하려면 정신을 집중시켜 가지고 내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내 마음을 맑게 해 놓으면 반드시 방향을 알게 됩니다.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는 자연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지남철과 같이 말이에요.
그러한 모든 암시나, 몽시나, 계시나 묵시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가 맺어지기 위해서 벌어지는 개척적이고 발전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여러분의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76-142)
하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체휼신앙을 가져야
선생님은 자연을 참 좋아합니다. 왜 자연이 좋으냐 하면 선생님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비스런 체휼을 한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아주 새롭기 때문입니다. 느껴지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플러스가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자는 체휼적인 느낌을 언제든지 보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압니다. “아, 지금 내가 어떠한 단계에 들어왔다.” 하는 것을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사람을 대할 때 척 보면 벌써 설명하기 전에 그 사람이 A, B, C형 중 어느 형인가를 분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것이 빠릅니다. 그런 체휼이 벌어져야 합니다.
영들도 무수합니다. 사람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별의별 영들이 다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도 별의별 녀석들이 다 있지요? 마찬가지로, 영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영을 감정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영점을 중심삼아 가지고 왼쪽으로 가느냐, 바른쪽으로 가느냐를 분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가릴 수 없습니다. 선한 신이냐, 악한 신이냐 하는 것도 그런 느낌을 통해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체휼적인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76-145)
체험이 있으면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여러분이 체휼하려면 반드시 마음의 문을 맞추고 마음밭을 갈아서 계발해야 됩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면의 사람과 진리적인 면의 사람이 있는데, 나 혼자보다는 상대적인 어떤 지도자를 따라가든가 친구를 따라가면서 보강해 가지고 서로서로가 하나되는 입장을 취해야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빨리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현실과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반드시 실천장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무엇을 느꼈으면 그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무엇이 있었다.” 하고 그저 잊어버리지 말고 그것이 어디에 적중하느냐를 살펴야 됩니다. 반드시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무엇이 어떻게 맞아떨어지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찾아야 됩니다. 몽시라든가 환상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실들이 현실에 적중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체휼신앙을 통해서 선한 환경을 유지해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한 생활인 것을 여러분이 아시고 앞으로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76-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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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4) 체휼과 실천
1975년 2월 2일(日) 새벽, 전 본부교회. * 이 말씀은 <통일세계> 1975년 3월호에도 게재되어 있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1975년 2월 2일, 이달을 맞이하여 첫 번째 맞는 안식일 이 아침 당신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이 청중 위에 임하시옵소서. 한 달을 보내고 새달을 맞는 첫 주일 이 아침을, 아버님이 여, 굽어살피시옵소서. 당신을 흠모하는 마음이 이 청중 가운데 어리게 하 여 주시옵고, 당신의 사랑하는 심정과 자비의 마음이 저희의 머리 위에 임 하게 하시옵소서. 저희는 어린 자식이 되고 당신은 부모가 되시어서, 애원의 심정을 가지 고 부르짖는 저희의 간곡한 사정을 당신이 고대하는 모습으로서 맞아 주시 옵소서. 은은한 가운데 당신의 품속에서 전하고 싶은 당신의 내정과 사연 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 저희들은 어린애와 같이 그 심정적 인연을 흠모 하면서 당신의 품에 품기어 영원히 영원히 당신을 찬양할 수 있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숱한 역사노정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당신의 뜻을 따라 살아 나온다고 하던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많이 당신의 심정을 슬픔의 자 리로 몰아냈사옵니까. 그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그와 같은 역사적인 슬픔을 오늘도 계속하고 반복할 수 있는 두려운 자리에 저희들이 서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부디부디 저희들은 선조들이 남긴 역사의 전철을 밟는, 그런 역사를 다시 되풀이하는 불쌍하고도 용납받지 못할 무리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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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휼과 실천
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 아침 온전히 당신의 마음 가운데 기억되는 무리로서 나타나게 하여 주옵고, 당신의 심정 가운데서 이들을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잊어버릴래 야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될 수 있는 무리로 남아지게 하시사, 당신이 가 는 길에 이들이 동반하고, 당신이 머무는 길에 이들이 같이 머물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자녀와 명분을 다하는 모습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 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통일의 무리들을 아버지께서 사랑하시옵고 지금까지 키워 오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오늘 이날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이제 며칠 후에는 전 세계에 널려 있는 젊은이들이 한국 땅에 모여서 역사 적인 새로운 경축의 한 날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하는 그런 숨가쁜 차제에 있사오니, 아버님이여, 일체가 당신의 경륜 가운데서 시작됐을진대는 당신 의 경륜 가운데서 과정을 거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드러나지 않았던 한국이 이와 같은 행사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몰리고 있던 통일의 무리가 이와 같은 행사를 통하여 이 민족이 상상할 수 없는 역사적인 축복을 받은 민족임을 자각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아 주시옵 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일을 추진시키면서 이 일이 지극히 어려운 일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 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명이 저희 가운데에 있고, 저희들을 통하시어 초민 족의 형성을 뜻과 더불어 하지 않으면 안 될 엄연하고 엄숙한 과제를 앞에 놓고, 저희들은 모든 것을 바쳐 이 일을 수행하고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새 로운 전통을 남겨야 되겠사옵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소모도 많을 것이고 많은 인적 자원도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역사 과정에 있어서 한 번밖에 없는, 한때밖에 없는 이 기간에 이 일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이 자체가 역사노정에 미쳐질 영 향이 얼마나 막중한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번 이 경축의 날 이 역사적으로 섭리사적으로 얼마나 의의가 있는 것인가를 저희들은 생각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아버님도 이 일을 생각하면서 자랑 삼을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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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니다. 오늘도 서구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태평양을 날고 있고, 혹은 이 아시 아를 향하여 날고 있사오니, 아버지여,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그들 이 마음 가운데 그리고 있는 한국 땅이 슬픔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 니다. 그들이 마음으로 추앙하던 그립던 그 한국, 보고 싶던 그 한국, 만나 고 싶었던 한국의 식구들, 이 한국의 모습이 역사적인 중차대한 시점에 놓 여진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국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 을 스스로 자각하면서 스스로 깨닫고, 자기의 위신과 권위를 하늘 앞에 여 실히 드러내어, 그 자체가 그럴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나타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들이 며칠 동안 머무는 가운데 이 한국에서 깊은 신앙의 향취 를 마음과 몸을 통하여 체휼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 다. 바쁜 날들이 흘러가는 가운데 그들이 체험하고 그들이 깊이깊이 느끼 고 싶어하는 것은 한국의 정서적인 면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들을 대하는 이 본부 혹은 한국의 식구들, 한국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자연적 환경, 나타난 사회적 환경이 그들에게 선의의 인식과 자각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아버지 앞에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부디 오던 그날 보다도 돌아가는 그날이 영광되고 자랑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또 일본에서 13일에 있을 대회를 준비하고 있사오니 그 자 리에도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이 2월을 저희들이 뜻 있는 달로 아버지 앞에 봉헌하고자 하오니 받아 주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이제 한국에 있어서도 그야말로 단결하 고, 그야말로 자각하여 새로이 자체를 아버지 앞에 묶어 바치는 그런 결의 와 새로운 출발과 새로운 인연이 묶어지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오늘 당신의 이름을 갖고 모이는 곳곳마다 친히 찾아가셔서 축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 이다. 아멘. <말 씀> 우리 자체들은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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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것은 자기가 체험하고 깨닫고 가는 길이 아니 되어 가지고는 일생을, 혹은 생애를 걸고 갈 수 없는 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앙자는 체휼을 통해서만이 강해질 수 있다 누구의 말을 듣고 그 말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반드시 그 말을 중심삼고 체험을 통해 실제 사실인가 아닌가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입장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말씀을 듣고, 혹은 성경을 보고 다 배웠지만, 배운 그대로의 사실이 내 자 체에서 형성되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체험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신앙의 대상은 보이지 않는 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 고 신앙해 나가기 때문에 그 주체 되는 신앙 자체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것이 확실하게 현실적으로 우리가 몸으로 느끼고 만져 가지고 체험할 수 있는 내용으로 나타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척 보 는 것과 같이, 우리가 평면적인 입장에서 느끼는 것과 같이 그렇게 실감적 인 입장에서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동시에 무 형적인 주체를 상대로 하니만큼 그 자체와 내 자체가 체휼적인 체험 단계 까지 나가기란 쉬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체휼은 반드시 우리의 신앙생활에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체휼을 통 해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서 알 수 있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나와 더불 어 어떠한 내정적 심정의 인연을 갖는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 다. 이 체휼의 길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끼고, 또 신앙생활을 통해서 보다 이상적인 새로운 소망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이 체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체휼 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독교 역사를 보더라도, 4백년 로마 박해시대에 있어서 그런 핍 박을 받으면서 사자의 밥이 되면서 신앙길을 꿋꿋이 갈 수 있었던 것은 막 연한 입장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건 반드시 그러한 자리를 넘어 갈 수 있는 체휼적인 내용, 그들에게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 환경이 그들을 제압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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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그런 여건이 될 수 없게 한 사실적인 입장에 선 그 자체가 순교의 길도 무난히 넘을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베드로나 바울 같은 양반들이 어려운 문제를 맞이할 적마다 반드시 하늘 앞에 기도를 했고, 그 기도를 통해 하늘은 지시를 했 습니다. 어디 어디로 가라든가 가지 말라든가 하는…. 이러한 내적인 신앙 생활의 기조가 반드시 있었다는 것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아는 바입 니다. 이와 같은 생활의 기반이나 그런 전통이 각자에게 있으면 있을수록 그 사람은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체휼을 통한 사람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새로운 역사적인 일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반대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내적으로 체휼하고, 또 그것을 경험한 그것이 오늘날 실천세계에 있어서 환경에 적용되는 사실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그 사람은 강하게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지만 자신은 출발함과 동시에 그 사실을 믿을 수 있 고,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결과 이후의 것까지도 예상하면서 강하 고 담대하게 환경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체휼 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체휼이라는 것입니다. 체휼의 길은 마음의 영점 기준을 맞추는 데서부터 시작해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이 잘 알겠지만 체휼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생각 해 봐야 되겠습니다. 대개 이 체휼의 길은…. 우리가 신앙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흠모하는 그런 입장에 서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호하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되느냐? 이 문제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서부터? 주체가 확정돼 있지만 내가 느낄 수 없다 이겁니다. 우리가 이 오관으로 알듯이 그렇다 하는 것을 확정 지 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디서부터 살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그 주체로부터 살필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살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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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로부터 살펴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 자체를 중심삼고 볼 때, 나라는 존재는 몸과 마음이 있는 것 입니다. 몸과 마음이 있는데 몸을 중심삼고는 이것을 살필 수 없습니다. 결국은 마음을 중심삼고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무리 인간들을 두고 볼 때, 그 마음 자체가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전부 다 같으냐? 그 바탕은 같을는지 모 르지만 마음 자체는 소성(素性)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하나의 원형을 그 린다 하게 되면, 수평선을 그어 가지고 여기에서 1도 2도 해 가지고 쭉 십 자를 그음으로 말미암아 360도의 원형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나의 수평 선을 긋고 하나의 수직선을 긋는 여기에서 90각도의 분별의 도수가 정해 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우리 마음이 원형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 이 것을 어떻게 긋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수평선은 긋는 사람에 따라 그 수평선의 형태는 각각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본성도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 영도에서부터 360도를 그어 나가는 데는 반드시 도수는 이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수가 가산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360도 형태와 우리 마음이, 마음 바탕이 이런 원형이라면 그 각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전 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부 다 같지 않다는 거 예요. 그것은 왜 그러냐? 우리 얼굴이 다르고 우리 취미가 다르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다른 거와 마찬가지로 그 도수를 그릴 수 있는 평형선과 수 직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되어 있으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돼 있고 그것이 전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도수를 맞추어야 된다 는 결론이 나와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영점 자리를 찾아야 돼요. 영점 자리가 어디냐? 그것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체에, 그 마음의 심성을 이와 같 이 표시하면 반드시 영점이 있다 이거예요. 영점이 있어서 그 영점 자체를 수평선으로 한다면 그 수평선을 중심삼고 어떠한 수직선이 그어질 것입니 다. 하늘이 주체라면 그 주체 앞에 내가 대상적인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주체 되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대상으로서 감응할 수 있는 바탕을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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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었기 때문에 평면적인 마음 바탕의 기준 앞에 수직으로 향하는 그러한 방향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반드시 있다는 거예요. 반드시 있다는 것입 니다. 우리가 수평선을 보게 된다면, 이건 평면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이 수직 으로 서게 되면 이 수직선의 기준이 전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점 기준을 어떻게 맞추느냐 이거예요. 이쪽으로 가면 반드시 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 영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발전소에 가 보면 미터 기가 많이 있어요. 미터기에 영점 기준과 같은 것이 있어 가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가감의 조정을 해서 그 방향이라든가 힘이라든가 양의 비준 을 잡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영점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영점 기준은 어떤 자리냐?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날 참선을 하는 사람들이 무아경이라든가 하는 말을 쓰는데 그것도 역시 그런 경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영적 기준에 접근할 수 있는 내가 되 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이 되게 되면 반드시 자기의 수평선 기준 이 반응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마음 문과 내 마음 문을 맞추는 생활이 중요해 그렇기 때문에 마음도 보면 뭐라 할까요, 마음의 문이 있습니다. 심문 (心門)이라고 하지요? 마음의 문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문이 언제나 한 면으로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자체가 돌고 있기 때문에 그 문도 이동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신이 있으면 신을 중심삼고, 플러스면 플러스를 중심삼고 마이너스 입장에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각도, 방향이 틀리게 되면 이 것은 작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사람에게는 이런 심문이 있습니다. 마음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해 보면 아는 거예요. 기도를 해 보면 말이에요, 시간에 따라 느낌이 달라요. 새벽 한 시에 기도하는 것하고 세 시에 기도하는 것하고 달라요. 그건 여러분이 체험해 보면 알아요. 신비스런 깊은 경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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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서 기도해 보면 기도하는 시간에 따라 다르다구요. 느낌이 다르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아요? 아침에 느끼는 것하고 대낮에 느끼는 것 하고 저녁에 느끼는 것하고 밤에 느끼는 것하고 다르다구요. 그와 같이 우리의 마음 상태에 있어서도 느끼는 그 기준이 우리가 육체 적인 감정을 가지고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에 따라 상대적인 면의 느끼는 감도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세계도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데도 어떤 시간에 잘 되는지를 알아야 돼요. 잘 되는 시간,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감응의 도가 가깝다는 거예요. 잘 된다 하는 거기를 점점점점 들어가게 되면 문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마음의 문과 인간의 마음의 문이 딱 맞아 가지고 같이 어느 기준까지만 맞추어 돌아가는 날에는 하나님이 느끼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길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와 같은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마 음을 중심삼고 마음을 닦아야 됩니다. 마음의 상태를 우리가 찾아봐야 됩 니다. 이것이 원래는 이 기준이 영점에 있어야 할 텐데 타락했기 때문에 이것이 180도에 와 있다 이거예요. 이 도수가 영점에 있어야 될 텐데 제 멋대로 되어 있다구요, 제멋대로. 그렇기 때문에 이걸 돌려 가지고 이렇게 정상적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시며 말씀하심) 그런데 어떤 사 람은 말이에요, 영점이 여기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와 있기 때문에 이 렇게 (시계바늘 가는 방향으로) 돌아서 가야 하는데, 이것의 거리가 가깝 기 때문에 이 영점을 중심삼고 이렇게 움직이면 마이너스적 감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렇게 (시계바늘 가 는 반대 방향으로) 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면 천년 가도 안 됩니다, 천년 가도. 이것은 되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형상이 벌 어진다구요. 오늘날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도 목적의 때에 대해서는 끝날이다, 말세다 하는 것을 다 가려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전해 내려온 종교는 이렇게 가면 되지만, 이 자리에 와 머물러 있으면 이렇게 돌아가면 되는데, 만일 반대로 여기 있으면 이 종교는 끝날이 되게 되면 깨깨 당한다 이거예 요. 어떤 사람은 각도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 자리로 가려면 반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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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게 되는 현상도 벌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벌어진 종교도 있지만 사탄의 뜻을 중심삼고 벌어진 종교도 있다는 거예요. 이것 이 전부 다 이렇게 섞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려 가지고 가기란 지극히 어렵다는 거예요. 이와 같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세계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마음도 선한 마음이 있음과 동시에 악한 마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자신들의 마음이 ‘ 나는 선하다.’ 아!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마음 자체도 선하지 않다 이겁니다.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악한 마음권, 악한 사탄권에 감염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고 선한 권내의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천태만상의 차이로 벌어진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이 영도를 어떻게 찾느냐, 영도를? 영도를 어떻게 찾느냐? 마음 문을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 과정에서 언제나 주의해야 할 것은 마음 문이 열리는 때를 알아서 하늘의 마음 문과 어떻게 맞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언제나 준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이 시간이 마음의 문에 맞는 시간이 아니냐. 혹은 학생이면 공부하는 이 시간이 혹시나 그런 때가 아니냐. 혹은 내가 세상을 잊고 재미있게 노는 그 시간이 그런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언제나 수시로 찾아 맞추는 생활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심도를 가려 가면서 마음 문을 열게 하고, 그래 가지고 하늘이 향하는 문과 어떻게 일치화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생활 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문이 맞추어지면 입체적인 느낌, 암시를 받게 된다 점점점점 이 상대적 입장에 서면 무슨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지금까 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입체적인 느낌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게 온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겨울과 같은 기분만 느꼈는데 가을과 같 은 기분을 느끼게 되고, 가을과 같은 기분만이 아니라 여름과 같은 기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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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지고 봄과 같은 기분이 느껴지는 거예요. 왜 그러냐? 이 우주는 돌고 있다는 거예요. 마음도 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돌면서 춘하추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의 세계도 돌면서 그와 같이 변화하는 감도를 느끼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것이 일년을 두고 보면 사시, 춘하추동이 있지만, 일년을 축소한 것이 하루인데 하루에도 춘하추동이 있다 이거예요. 아침은 봄에 해당하는 것이 요, 낮은 여름에 해당하는 것이요, 저녁은 가을에 해당하는 것이요, 밤은 겨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춘하추동의 계절적 형태가 하루 사 이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사이에. 또 아침이면 아침을 두고 보 더라도 봄과 같은 계절도 그렇습니다. 거기에서도 봄과 같은 아침을 느끼 고, 여름과 같은 것을 느끼고, 가을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고, 겨울과 같 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큰 것은 큰 것을 중심삼고 단위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작은 것도 상대적인 그 단위의 형태를 각자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느껴지 는 느낌이 언제나 같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계절을 따라 서 자기가 봄이다, 봄 절기다 하는 것을 알면 좋지만 모른다는 거예요. 또 여름 절기다 하는 것을 알면 좋지만 그걸 모른다는 거예요. 혹은 겨울이다 하는 걸 모른다구요. 이것을 많은 체험을 통해서, 많은 기도생활을 통해서
‘ 지금 때가 어떤 때에 처해 있구나.’ 아! 하는 걸 가릴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느냐? 여러분은 대개 그렇잖아요? 우리 말에 암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암시라는 말이 있지요? 암시!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길을 무심코 쓱 가는데 어떤 좋은 집 담벽에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을 때, 새는 날아갔지만 퍼득 새 가 날아가는 그 자체를 보게 될 때 그 마음의 문이 딴 것으로…. 그 사실 을 통해서 암암리에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 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 그런 형태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거예요. 암시적 조건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말하는데 ‘ ’ 아! 무엇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점점점점 많아진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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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시란 마음 상태가 공명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감을 나타낸다 이 단계를 지나가게 되면 어떠한 형태가 벌어지느냐 하면, 몽시 같은 것 을 체험하게 됩니다. 꿈 가운데 일어나는 일인데 꿈도 깊은 잠 가운데서의 꿈이 아니라구요. 비몽사몽간에…. 바울 같은 양반도 비몽사몽간에 3층천 을 체험했다구요. 꿈 같기도 하고 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꿈 안에 있는 지 사실 안에 있는지…. 옆에서 누가 말하는 것을 다 들으면서, 3분의 2는 캐치하면서, 비몽사몽간에 그런 현상이라든가 혹은 음성이라든가 하는 것, 이 오관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감각이 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런 걸 무심코 흘려 보내지 말라는 거예요. 그걸 종합해 가지고 어떤 방향의 인연을 나에게 연결시키기 위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과학적인 면 에서 데이터를 내라는 거예요. 일생 동안 매일매일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느 냐…. 반드시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잊 을 수 없는 몽시 같은 것은 백 퍼센트 적중한다 이거예요. 그런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몽사몽간에 누구하고 얘기하고 있는데, 어떠한 사람이면 사람, 물건이 면 물건이 그 꿈 가운데 인연돼 있지만 그것이 사실 가운데서 실체로 연결 된다는 거예요. 내가 꿈 가운데서 누구하고 노래를 하고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꿈 가운데 노래가 아니고 옆에서 누가 부르는 노래가 그 노래였다, 이런 사실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영적 차원 에 있어서 마음 상태가 공명(共鳴)할 수 있는 권내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 니다. 음차(音叉; 소리굽쇠)라는 것이 있지요, 음차? 공명할 수 있는 권내 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지극히 귀하게 여겨야 돼요. 체휼과 실천은 생명의 인연을 가져온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말이에요….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 님이 어디에 나타나느냐? 공중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 나 타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과 내가 둘인 것을 알아요. 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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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것을 안다구요. 여러분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지요? 왜 그러냐 하면 마음이 아직까지 존재성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지, 몸뚱이한테 끌 려다니는 사람이 됐기 때문에 그렇지, 그 마음이 존재성을 확립해 가지고 또 다른 하나의 주체다 하는 그런 인격적인 차원의 자리가 형성되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다르다는 거예요. 차원이 높아지게 되면 은은한….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음하고. 공명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원 높은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을 내가 듣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로 발전해 나가는 거예요. 맨 첫 단계에서는 암시와 같은 사실들이 여 러분의 생활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자는 이런 막대한 자료를 수집해야 됩니다.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심코 대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 냐? 언제나 배고픈 자의 심정이 돼야 됩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냐? 그렇게 찾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결국 그 자체는 뭐냐? 내가 언 제나 주체가 되든가 대상이 되는 거예요. 확정적인 주체요, 확정적인 대상 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내가 언제나 찾고 있다는 사실은 그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주체 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면 대번에 안다는 거예요. 혹은 대상적인 존재가 나타나면 대번에 압니다. 내가 누굴 전도할 사람이 있으면 대번에 안다는 거예요. 괜히 그저 마음이 좋아서 간다는 거예요. 그걸 심파(心波)라고 하지요? 마음의 파장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게 있을 거 아니냐. 여러분 보게 되면, 고기 장사하는 사람은 푸주 냄새가 나지요? 그렇잖아요? 천(옷감) 장사 하는 사람은 천 냄새가 나요, 냄새가. 냄새가 난다구요. 여러분 몸에서도 냄새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그 마음의 냄새를 맡는다는 거예요. 그런 형태가 벌어진다 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촉각 같은 것이 있어 가지고 전부 접선한다, 이렇게 생각하 는 거예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전파 같은 것을 발사해 가지고 상대적 대 상을 찾고 있다는 생활…. 사실 그렇다구요. 내 마음은 이쪽으로 생각하려 고 해도 거절한다구요. 지남철의 방향성과 마찬가지로 플러스와 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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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이렇게 가더라도 ‘ ’ 아! 하고 그런 작용을 깨달을 수 있는 단계로 들 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하는 사람의 태도는 전부 다 나와 더불어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타락은 무엇이냐 하면 모든 관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관계, 본연의 인간에 대한 관계, 본연의 신에 대한 관계를 전부 절단해 버린 것입니다. 절단된 관계의 세계 를 우리가 다시 접속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내 자체가 이걸 접속시킬 수 있는 작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작용을 해야만이 관계가 개척되지, 접속시 키고자 하는 태도를 갖지 않는 한 이 환경은 개척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건 가장 이론적이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전부 다 무엇을 찾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기도하고 나면 ‘ 오늘 좋은 일이 있다.’ 아, 하는 것을 안다 는 거예요. ‘ 일이 있으니까 그냥 좋은 일이 나타나겠지.’ 좋은 이게 아니라 구요. 그걸 찾아야 된다구요. 이러한 생활태도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돼 야 돼요. 그러므로 체휼과 실천이라는 것은 생명의 인연을 가져온다는 것 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거예요. 비몽사몽간에 이런 사실이 벌어져요. 계시 단계가 지나게 되면 묵시 단계가 온다 그 단계가 높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그다음엔 여러분이 계시라 든가 지시라든가 이런 것이 벌어져요. 계시라는 것은 우리가 분석해야 됩 니다. 지시라는 것은 직접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계시는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반드시 해석을 해야 된다구요. 무 엇을 가르쳐 줄 때도, 가르쳐 주는 데는 음성으로 들려 주기도 하지만 환 상으로도 보여 준다는 거예요. 좋은 봄날을 맞이하여 사슴 한 쌍이 시냇가 에서 생수를 마시면서 먼 산을 바라본다, 이런 환상은 지극히 행복스러운 소망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런 모든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 것이 우연한 사실이 아니에요. 내 마음의 밭을 계발하기 위한 하늘 의 역사라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우리 마음의 밭이라는 것이 유리 판같이 평평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거예요. 울뚝불뚝하다는 거예요. 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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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 같은 면을 가졌지만 그 자체는 울뚝불뚝하다는 거예요. 울뚝불뚝한 여기에 하늘의 감도가 반사되어 가지고 오게 되면 빛의 굴절과 마찬가지로 들어오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반사돼 나간다는 거예요. 그러니 전부 다 르다는 거예요. 이것을 전부 다 가리려니 그런 놀음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 가지. 부분 부분을 계발하려니 그런 역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계시의 단계를 지나게 되면 묵시 단계입니다. 여러분, 묵시록 있지요? 하루 종일 영계에 들어가서 체험을 한다든가, 저나라의 세계가 어떻다든 가…. 전부 다 그런 세계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활적인 감정권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러한 체휼적인 신앙을 안 가지고는 위대한 하늘의 뜻의 결과세계를 우리의 생활장, 생활 무대에 적용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을 갖지 않는 신앙자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체휼적인 신앙이 얼 마나 고귀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이걸 계발해 나가야 됩니다. 영적 역사의 과정을 통해 육신을 순화시켜 나가야 우리 식구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역사를 합니다.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 다. 영적인 힘이 전기작용과 마찬가지로 들어와요. 여러분이 체험을 해 봤 으면 알겠지만, 고압에 접한 것과 같은 힘이 찾아들어 오게 되면, 우리 의 식보다 강한 힘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건 딴 세계의 의식이에요. 초자연적, 초인적인 의식적인 감정이 찾아들게 되면, 우리 몸, 이 육신이라는 것이 타락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본연의 심성, 본연의 하나님의 신성 과는 반발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 앞에 어떤 신의 성품이 강력하게 들어와도 자연적으로 순화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어오는 데는 플러스 마이너스와 같이, 음파도 강약으로 전파되어 나가는 것과 마 찬가지로, 반드시 그 힘도 한꺼번에 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게 들어왔다 약하게 들어왔다 이러면서 개척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거기에 진동이 벌어지고 자기의 의식이 없어지고 영적 힘이 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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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용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자꾸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몸뚱이가, 육성(肉 性)이라는 것이, 타락성 그 자체가 전부 순화되어 가지고 자연히 백 퍼센 트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현상이 없이 역사 이상의 자리에 들어가서 하늘이 가르쳐 주는 것을 다 받으면서도 감쪽같다 는 거예요. 모른다는 거예요. 이러한 현상의 과정을 거쳐 가지고 순화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단계적 현상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암시라든가 몽시라든가 계시라든가 지시라든가 하는 이런 과정을 여러분이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체휼 단계에 들어가면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을 명령하 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이. 누구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말을 못 하게 한다는 거예요. 혹은 내가 좋은 말로 그 사람을 위해서 말해야 할 텐데 책망의 말이 나오는 거예요.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구요. 이렇게 이해 할 수 없는 현상이 가끔 벌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할 줄 알아야 돼요. 까딱 잘못하다가는 이건 미치광이로 취급받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할 줄 모르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이와 같은 체휼적 신앙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그 체휼적 신앙을 가지 고, 마음으로 느낀 것을, 체휼한 것을 가지고 실험을 통한 체험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의 말을 듣지 않 는다 이거예요. 체휼과 실천,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필요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람은 대개 지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러면 이런 경지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대개 우리 사람을 보게 되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지성적인 사람으로 진리로써 뭘 탐구해 가지고 이치에 맞으면 인정하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부정하는 타입의 사 람,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이치보다는 감으로 파악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우리 통일교회 술어로 말하면 영적이다, 지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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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의 사람, 지적인 면의 사람. 영적인 사람은 내적인 면에서부터 느껴 가 지고 외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이요, 지적인 사람은 외적인 면에서부 터 느껴 가지고 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나가는 종 류요, 하나는 들어오는 종류입니다. 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대개 기도를 싫어합니다.
‘ 거 기도, 기도가 무슨 필요 있느냐?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는 아
말을 어떻게 하노?’ 실감이 안 난다구요. 그걸 딱 생각하면 미신 같고, 믿 을 수 없고 자기 자체가 부정되는 것 같고 말이에요, 이런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이건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이론을 따져 가지고 무엇을 찾겠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는 동시에 나면서부터 ‘ 하나님!’ 하는 말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막 좋다구요. ‘ 아버지!’ 하게 되면 밥 을 안 먹더라도 좋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감도가 다르다는 거예요. 대개 영적인 운동에 있어서 혁명적인 운 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지성적인 사람은 못 합니다. 난 그렇게 봐요. 대개 신앙세계에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지적인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미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세 상이야 어떻든 느끼는 대로 해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해 보는 거라구요. 하다 보니 그것이 실천하는 환경에 백중하는 그런 일이 벌 어지는 거예요. 이럼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일도 벌 어지는 거예요. 바울 같은 사람도 지성적인 사람이라구요. 그런데 다메섹 에서 하늘의 영적 벼락을 한번 맞고 나서 돌아 버렸다구요. 그러니까 외적 으로 탐구하는 것보다는 내적으로 이렇게 폭발적인 느낌의 길이 있다는 것 을 느꼈기 때문에 전부를 부정하고 그것을 존중시한 거예요. 거기에서 새 로운 기독교의 혁명의 기수가 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따지는 사람은 종교적인 심령세계의 위대한 지도 역할을 할 수 없다 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여기 박 장로 같 은 사람도 미욱한 사람이라구요. 생기기도 미욱하게 생겼다구요. 보게 되 면 얼굴도 두텁게 생겼고 말이에요. 그거 다 무엇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 한 두 종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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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아서 부족한 면을 보강해야 우리 사람은 이 두 종류가 있는데, 나는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대개 영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는 크지만 진리 면에서는 뾰쪽하다는 거예요. 이것이 달라요. 처음에는 굵지만 끝이 뾰쪽 해지면 이것은 시종여일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못 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반드시 굴러 떨어진다 이거예요. 또 진리는 크지만 영적인 면이 이 렇게 작다면 이것이 영원히 못 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하 는 생활을 우리는 해야 됩니다. 기도와 진리, 영적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 은 뭐냐 하면, 평행을 만들어 가지고 화(和)하는 자리에 들어가라! 우리 인간은 영계와 육계를 조정해야 됩니다. 영적 세계의 중앙에 서야 될 것이 요, 진리세계의 중앙에 서 가지고 중심적 자리에서 좌우로 조정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자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만 강하면 외적인 면은 결여되어, (판서하시며 말씀하심) 이렇 게 곧장 가야 할 텐데 이렇게 간다구요, 이렇게. 그럴 거 아녜요? 힘으로 본다면, 힘센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에요. 진리적인 면 이 강하면, 이것이 둘이 합해서 가야 할 텐데 왼쪽으로 가 버린다 이거예 요. 이런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해야 되는 것입니 다. 그래, 선생님 같은 사람은 영적 체험이 있더라도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체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구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진리로 조정해야 됩니다. 이것은 이렇고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이다 하면서 중용의 길을 가면서 언제나 하늘의 섭리관에 방향을 일치시키는 놀음을 함으로 말 미암아 여기에 영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고 지상세계의, 진리세계의 발 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그러려면 영적 세계가 어떻게 움직여 들어오고 진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하는 그 사실을 생활화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리가 반드시 하나돼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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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인간 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체가 어디에서 행복감을 느끼느냐? 진리면에서 느끼는 행복은 방향적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그거 왜 방향적이냐? 영과 육, 신령과 진 리를 두고 보면 어떤 것이 주체냐? 신령이 주체입니다. 진리는 상대적이에 요. 상대적이라는 것은 방향적입니다. 이건 변한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신 령은 변하지 않아요. 중심적이기 때문에, 사방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을 통해서 느끼는 행복이 귀하냐? 진리를 통해서 느끼는 느낌은 방향적이기 때문에 변합니다. 오래 못 간다 그 말이라구요. 그렇지 만 신령을 통해서 느낀 그 느낌은 중심적이기 때문에 오래간다는 거예요. 중심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걸 알아야 돼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진리는 상대적 입장이고 신령적인 면은 주체적 입장입니다. 주체란 중심자 리를 말하기 때문에 중심이란 것은 둘이 있을 수 없고 하나라는 것입니다. 중심이라는 것은 사방을 대할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주체적 중심적 입장의 신령면을 통한 기쁨이라는 것은 영원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느낀 그 기쁨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인 당연한 결론입니다. 이렇게 돼 있는 거예요. 이러한 두 면의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알 아야 됩니다. 지식을 중심삼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실천문제에 들어가 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걸 반드시 보강해야 됩니다. 보강하기 위해서 는 반드시 기도생활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또 기도만 하고 신령면에만 치중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드시 진리에 대해서 연구해야 될 것 입니다. 이렇게 양면이 보강돼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됩니 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걸 내 자신이 혼자 조정하기 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를 잘 선택하라는 거예요. 내가 신령적 이거든 진리적인 사람과 하나돼라 이거예요. 그래 가지고 둘이서 ‘ 내 야! 맘은 이런데 네 마음은 어떠니?’ 이렇게 속삭이고 말이에요. 형(型)이 달라 요. 하나는 내형적이요, 하나는 외형적인 이 두 사람이 ‘ 그래?’‘ 내가 , 내가 그래?’ 이렇게 서로 의논하고 서로 협조해서 완전히 하나될 수 있으면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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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세계에 있어서 서로서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거예요. 그래 서 친구가 필요한 거예요. 통일교회 믿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경험 많이 했지요. 뭐 어떻고 어떻고 그런 말을 듣고 심령에 타격을 받아 가지고는 새까매지는 거예요. 그건 자 기 혼자 암만 기도로 해결하려 해도 지극히 어려운 거예요. 그렇지만 자기 와 상대적인, 진리적인 외적인 사람을 중심삼고 친구가 되어 있으면 ‘ 야, 이 녀석아, 이렇게 해!’ 하고, 또 진리적인 면의 사람은 영적인 면의 친구 가 그러면 ‘ 내가 기도해 보니까 이래.’ 야! 이렇게 되면 쉽게 해결이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합니다. 신앙자에게는 반드시 친구가 필요하다 하는 걸 알아야 돼요. 자기와 상대적인 소성을 가진 사람을 친구로 삼고 나가야 여러분이 원만한 인격을 지니려면, 춘하추동 사시계절 형태의 마음의 밭, 심전(心田)이 있으면 그 마음의 밭을 계발하려면, 그런 소성의 사람을 내가 친구로서 환영할 수 있는 자격자가 돼야 됩니다. ‘ 아이구! 그 사람은 보기만 해도 싫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싫은 사람이 나에게 제일 가깝다 는 것을 알아야 돼요. 싫은 사람을 좋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악 한 사람이 선하게 될 수 있는 첩경을 간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반드시 제일 싫은 사람이 있 다구요. 반드시 있어야 돼요. 없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 싫은 사람이 내 게 있어서 원수가 아니에요. 나와 제일 가까울 수 있는 것입니다. 참의 길 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제일 가까울 수 있는 친구가 될 수도 있 고 가까울 수 있는 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로마 병정을 대해 기도한 것도 그거라구요. 로마 병정이 본래는 제일 가까울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제일 먼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을 먼 원수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가까울 수 있는 입장에 세웠던 것입니다. 이럼 으로 말미암아 그 원수를 포괄해 가지고 제일의 친구를 만들기를 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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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도 거기에 들어 있는 거예요. 오늘날의 이 사망의 세계는 원수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니 이 세상은 부정당해야 할 세상이라구요. 부정당해야 할 세상에 있어서 긍정적인 내 입장을 세우면 그것은 영원히 이 악한 세계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돼 요. 그렇지만 이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나옴으로 말미암아 자체를 부정하고 넘어설 수 있는 자연적인 환경을 맞이할 수 있 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어렵구만, 무슨 말인지…. 그런 경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지적인 사람 은 기도가 필요함과 동시에 뭐가 필요해요? 신령적인 사람은 지적인 면의 보강이 필요함과 동시에 뭐가 필요해요? 친구가 필요합니다. 혼자 하려면 상당히 어려워요. 그래서 여러분이 남의 간증을 듣고 경험을 듣는 것은 신 앙생활에 지극히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 그렇구나.’그렇기 때문에 아!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고 싶거들랑 통일교회 간부들의 간증을 듣고 싶어해 야 된다구요. 알겠어요? 협회장은 어떻고, 누군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전부 다르다구요. 이런 것을 내가 상대로서 소화시킬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도수가 넓어진다는 거예요, 도수가. (판서하신 것을 가리키며 말씀하 심) 이 중앙선 아니면 이것은 길고 요것은 짧고, 전부 다르다는 거예요. 내 성격이 이러면, 짧은 이 면을 메우기 위해서는 이렇게 나오는 간증을 들으라는 거예요. 이것을 들어서 자기 것으로 흡수하라는 거예요. 보강해 야 된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체험담을 들어라! 들어 가 지고 남이 말한 그것을 비판하지 말라는 거예요. 비판하는 것은 사탄 편이 되든가 하늘 편이 되든가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비판했다 할 때는 사탄 편이 되든가 하늘 편이 되 든가 둘 중의 하나로 갈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 은 내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의 암이라는 거예요, 암. 사탄 편이 됐던 녀석 이 하나님 편에 갈 수 없고 하나님 편이 됐던 녀석이 사탄 편에 갈 수 없 다는 거예요. 우리 인간생활 있어서 가는 데에는 직행을 절대 못 합니다. 지그재그로 간다는 거예요. 선조도 선한 선조만 있는 게 아니라 악한 선조들도 전부 다 연관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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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기 때문에, 내 자체가 소성적으로 볼 때 선한 선조의 소성을 많이 갖고 있을 때는 이렇게 가지만, 악한 선조의 소성을 받은 부분도 있다구요. 그 런 때가 온다구요, 내 인생에 있어서. 그럴 때는 반드시 이렇게 하게 돼요. 비판했다가는 큰일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판단하지 말라는 말도 다 그런 이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할 수 있고 용서받을 수 있는 거예요. 신령적인 면에 자기 소성이 맞는 사람들은 그저 영적인 것에 대해 궁금 해요. 선생님 같은 사람은 본래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어요.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아주 궁금하다구요. 밥을 안 먹고 24시간 동안 들어도 들을 수록 재미난다구요. 그런 무엇이 있다구요. 그러면 그것을 일방적으로 하 지 말고 진리로 보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면을 가려 가지고 가야 돼요. 자기의 소성, 자기가 어떠한 면의 사람인가는 각자가 알 거예 요. 그러면 그 반대적인 면을 계발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혹은 진리를 탐구하고 혹은 신령면에서 체휼하고 말이에요. 여기에는 반드 시 뭐가 필요하냐 하면, 기도와 진리 탐구가 필요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느낀 것을 진리로 소화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되고, 진리적인 면의 사람은, 지성적인 면의 사람은 그 지성적인 면에 영적인, 신령적인 면을 보강할 수 있는 체휼적인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것은 반드시 내가 떨어지지 않는 영원한 터전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 혼자서는 힘들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와 상대적인 소성을 가진 사 람을 친구로 삼든가 스승으로 삼아서 지도를 받고 협조를 받아 나가는 것 이 제일 바른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어요. 알겠어요? 만약에 여러분이 그러한 것을 느꼈을 때는, ‘ 이젠 나도 알았다.’ 아! 할 때는 그 알았다 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는 거예요. 실천하라는 거예요. 자기가 해 봐야 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그렇잖아요? 실험을 해 보고 말이에요. 전문가는 무엇이 전문가냐? 같은 일을 많이 해 본 사람 입니다. 전문가가 따로 있지 않다구요. 그렇잖아요? 기술자는 어떤 사람이 기술자냐? 같은 일을 많이 해 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실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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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봐야 됩니다. 체휼한 모든 사실은 상대성을 갖고 일일생활권 내에 접맥시켜야 여러분, 그래요. 영적인, 정신적인 세계가 얼마나 통일권인지 몰라요. ‘ 내 가 누구를 보고 싶다.’하며 24시간 기다리면 그 사람이 온다구요. 그게 실현된다구요. 오는 거예요. 집중하게 되면 나타나는 거예요. 그것은 전파 가 방향성 전파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수신기 와 같은 자기 마음 바탕이 있기 때문에 괜히 궁금하고 가고 싶고 그런 거 예요. 자기도 모르게 그 마음이 강해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학교에 간다고 떠났는데도 그 가는 길의 방향을 거쳐서 오게 되면 교회에 와 있는 거예요. 이런 일이 벌어진다구요. 자기 의식적 기준을 넘어 가지 고 행동하는 그런 결과를 반드시 체험한다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 교인 들도 한창 반대받고 핍박받을 때는 말이에요, 이 아주머니들이 바구니 들 고 시장에 간다고 갔는데 통일교회 오는 거예요. 그것은 보통지사라구요. 그건 뭐 신기한 것도 아니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미쳤느니, 무슨 전기장치 를 했느니, 뭐 어떻고 해 가지고…. (웃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실제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거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최면술 같은 것도 말이에요, 인간이 그런 체험을 통해 가 지고 그게 가능하거든요. 하나님을 중심삼고 신령적인 그 길을 통하면 가 능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거예요.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여러분이 알 거예요. 이 경지에서 벌어진다는 거 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체휼한 모든 사실을 실천장에 적용시키는 데 있어서 이것을 어떻게 상대성을 갖고 일일생활권 내에 접맥시키느냐, 형성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신앙자입니다. 막연한 신앙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하나님을 대역하여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 있는 책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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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휼하기 위해서는 뭘 해야 된다구요? 먼저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기 도. 정신 집중을 해야 돼요. 될 수 있으면 영점의 자리에 내려가든가 그렇 지 않으면 (판서하신 것을 가리키며) 이 자리에 가든가 해야 돼요. 그러면 제일 빠른 길이 어디냐? 이 영점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여기에 내려오는 것이 제일 빨라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무엇이냐? 참선하는 사람이 ‘ 도대 체 마음이 무엇이냐?’ 문제를 놓고 하는 거예요.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이 문제는 간단해요. 마음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영원한 이상적인 선의 주체 이시면 그 주체적 존재 앞에 상대적 바탕으로서 언제나 변함 없이 상대 기 준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마음의 중심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걸 통일 교회에서는 생심의 기원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 상대기준만 딱 맞으면 초 연한 힘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렇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신비스런 기도 가 운데로 들어가게 되면…. 석가모니 같은 양반도 그런 경지에 들어가서 그런 것을 말한 거예요. 수 도하면서 정신을 통일해 가지고 신령한 영적 세계에 들어가서 체험하는 가 운데, 완전히 하나님 주체 앞에 대상의 자리에 딱 들어가기 때문에 천상천 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내가 세상 을 한번 꽉 쥐면 세상이 옴싹 이 주먹 안에서 녹아나는 그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이거 들게 되면 들리는 기분이 나고 말이에요, 치게 되면 한꺼번 에 녹아나는 기분, 이런 경지가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이적기사는 자동적이에요. 병 고치는 그런 일은 자연히 신앙생활의 부속물로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심문(心門)에 맞추어 가지고 심전(心田)을 계 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밭을 계발하고 방향 기준을 개척하기 위 해서는 반드시 주체되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런데 주체되시는 하나님은 모호하니까 하나님을 연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정신을 집 중시켜 가지고 내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길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내 마 음에서부터 마음을 맑혀 놓으면 반드시 방향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 지 않아요? 지남철과 같이 말이에요.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는 자연 히…. 누가 가라고 그래서 가나요? 자연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 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걸 느끼지요. 내가 동쪽을 향해서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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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는데, 신비의 경지에 들어가면 벌써 방향이 달라진다 이거예요. 또 내가 북쪽을 향해서 기도했는데 언제 이렇게 됐는지….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실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 문이 있다 는 거예요. 기도가 잘 될 때가 있지요? 그거 다 알 거라구요. 기도가 잘 될 때가 있 다구요. 내가 아무리 목욕재계를 하고 정성을 들이더라도, ‘ 아이구…!’ 기도 가 안 될 때가 있어요. 방에 따라 다르기도 해요. 방의 위치에 따라서 다 르다 이거예요. 그거 그럴 수밖에 없다구요. 하나의 중심 앞에 있어서 중 심을 중심삼고 동서남북이 있기 때문에 그 위치에 따라 다른 거예요. 또 방향에 따라 달라요. 산에 가더라도 기도가 잘 되는 곳이 있습니다. 또 사 탄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이건 음지예요. 음지와 양지라는 것이 영 적으로 그렇게 돼 있다는 거예요. 여러 번 체험하면 그런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암시나 몽시나 계시나 묵시가 벌어지는 것은 인간과 하늘 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개척적이고 발전적인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불가 피한 요건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여러분의 생활에 적용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하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휼적 신앙을 가져야 그것은 소성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에이(A)라는 사람하고 비(B)라 는 사람이 같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체험을 참조해야 됩니 다. 여러분은 반드시 체휼적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 신 앙을 해라. 교회에 가라.’ 필요 없어요.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구요. 벌 할 써 내가 내 갈 길을….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목이 마를 때 물을 먹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히 그렇게 되는 거예 요. 선생님 같은 사람은 자연을 참 좋아합니다. 왜 자연이 좋으냐 하면 선생 님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런 신비스런 체휼을 한 그런 내용이 많기 때문 입니다. 그 기분이 언제나 새롭다는 거예요. 그 기분이 아쉬웠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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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면 자기가 옛날에 은혜스러운 자연을 바라보고 명상하던 그런 경지, 혹은 밤이면 밤 하늘을 바라보던 그런 경지, 사시사철 그 기분이 전부 다 다르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복잡다단한 도회지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생 활권 내에 스스로 싸여 자기의 위치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은 수택리로 갈 때도 있고 청평을 잘 갑니다. 미국 가기 전에도 매일같이 청평에 갔다 왔다구요. 어제 저녁에 갔다 왔는데 아침에 또 뭐 하러 가느냐 이거예요. 여기에서 가려면 세 시간, 네 시간이 필요한 데 말이에요. 거 왜 가느냐? 자연이 아주 새롭다는 거예요. 느껴지는 무엇 이…. 영적으로는 플러스된다는 거예요, 이게. 클클할 때는 메울 수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런 놀음 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일방적이 아니라 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면을 보강해야 됩니다. 이런 체휼적인, 본성의 감도 라고 할까, 그러한 느낌을 언제든지 보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건 자 기가 안다는 거예요. ‘ 지금 내가 어떠한 단계에 들어왔다.’하는 것을 아, 대번에 안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얼마만큼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거예요. 말씀을 해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하고 나면 반드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 구요. 더욱이나 열렬히 피땀을 흘리고 하면 벌써 이것이 어느 면에 치우친 다구요. 이걸 전부 다 조정해 놓아야 돼요. 그러니 신앙길이 참 어렵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친구가 없더라도 혼자 갈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안다는 거예요, 기도하면.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사람을 대할 때 척 보면 벌써 설명하기 전에 그 사람이 A, B, C형 중 어느 형인가를 분석한다는 거예요. 그런 무엇이 있 어요. 선생님은 그런 것이 빠르다는 거예요. 그런 체휼이 벌어져야…. 영들 도 무수해요. 사람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별의별 영이 다 있다구요. 사 람 가운데도 별의별 녀석이 다 있지요? 마찬가지로 영들도 그래요. 그러니 영을 감정하기 위해서는 그런 내 스스로의 척도, 마음의 영점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것이 왼쪽으로 가느냐 바른쪽으로 가느냐를 분별할 줄 알아야 됩 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것을 가릴 수 없다는 거예요. 선한 신이냐 악한 신 이냐 하는 것도 그런 느낌을 통해서 대번에 분석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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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기 때문에 반드시 체휼적인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 겠습니다.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현실과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여러분이 체휼하려면 반드시 무엇을 해야 되느냐? 마음 문을 맞추고 마 음 밭을 갈고 이러면서 이것을 전부 계발해야 됩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면 의 사람, 진리적인 면의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나 혼 자 하는 것보다는 상대적인 어떤 지도자를 따라가든가 어떤 친구를 따라가 든가 해서 보강하면서 서로서로가 하나되는 입장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많 이 보필 받아야 빨리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현 실과의 관계를 맺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실천장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무엇을 느꼈으면 그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 무엇이 있었다.’ 그 저 잊어버리지 말고 그것이 어디에 적중하느냐를 살펴야 됩니다. 반드시 가르쳐 준다 이거예요. 반드시 가르쳐 주는 내용으로써, 이렇게 됐다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무엇이 어떻게 맞아떨어지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찾아야 됩니다. 몽시라든가 환상 가운데서 됐던 사실들이 현 실에 적중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전문적인 체험을 가져야만…. 성경의 예언서 내용에 세계의 때가 어떤 때냐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아, 지금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때로 가고 있다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체휼신앙을 통해서 여러분이 실천장에서, 생활적인 환경에 있어서 선한 환경을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귀 한 생활인 것을 여러분이 아시고 앞으로 노력해 주길 바랍니다. 기성교회에서 십년에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일년에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통일교회 교인들은 말이에요, 조금만 정성들이게 되면, 기 성교회가 10년 공들여서 할 수 있는 것을 통일교회는 1년만 공들이면 도 달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길이 다르다구요. 왜 다르냐? 나는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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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요. 수많은 종교들은 말이에요, 이런 원형이 있으면, 사람 사람에 따라 원형을 그리면서 이렇게 도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돌고…. 이 중심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것이 방향이 있지 않다 이거예요. 위인지 아래인지 방향이 없다 이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모르잖아요, 지금?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되고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제멋대로 돌고 있으니 이게 빙글빙글 제멋대로 돌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 니 이거 기도를 해도 중심이 어딘지 막연하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 나님이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전부 해 주기 전에는 체휼적 신앙 단계에 들 어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통일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딱 관이 서 있다 이거예요. 창조 목적….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기성교회 목사에게 혹은 신학박사에게
‘ 하나님의 뜻이 뭐요?’ 하고 물어보면, ‘ 아이고! 그건 지극히 쉽고도 어려운
말이오.’ 이렇게 대답해요. (웃음) 암만 목사라도 ‘ 하나님 뜻이 뭐요?’ 하고 물으면 ‘ 글쎄…’ 이러고 있어요. 글쎄가 아니라구요. 벌써 통일교회는, 하나 님의 뜻 하면 창조이상을 완성하는 것, 딱 나왔다구요. 창조목적 완성이다! 창조목적 완성이 뭐냐? 개체에 있어서는 개인 완성이요, 가정에 있어서는 가정 완성이요, 이렇게 전체가 나온다구요. 그게 딱 확정돼 있는 것입니다. 주체관이 확립돼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대상관이 확립돼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미 결정된 방향에 대해서는 문제시할 필요가 없다 이거예 요. 그러나 기성교회 신앙은 방향에 대해 모호하니까 이게 큰 문제라구요.
‘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되는 거야?’ 하면 ‘ 세상을 불로 심판한다.’ 아, 이럽
니다. 거 얼마나 모호해요? 난 그런 신앙 하는 게, 어떻게 그걸 믿고 있는 지, 참…. (웃음) 그런 관점에서 방향이 있어야 된다구요. 방향이 되어 있 어야 된다구요. ‘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진짜 아버지야?’ 하면 ‘ 글쎄, 아버지 라고 하니까 아버지지.’ 그러고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통일교회는 어떻게 돼 있느냐? 방향이, 목적관이 확실함 으로 말미암아 방향은 이미 제정돼 있다구요. 목적이 확실하고 방향이 정 해져 있어요. 지금 방향이 문제거든요. 세계가 어떤 목적을 가져야 되느냐? 인류가 어떤 목적을 가져야 되느냐? 어떤 길로 가야 되느냐? 민주주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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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냐? 목적관이 확립 안 돼 있다구요. 방향이 민주주의 방향이냐 공 산주의 방향이냐가 확정 안 돼 있다구요. 그러니까 왔다갔다 혼란이 벌어 지는 거예요. 제멋대로라는 거예요. 그렇지만 통일교회는 목적이 확정돼 있고 방향이 확정돼 있기 때문에 이것은 움직이면 어디로 가느냐? 전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전진도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구요. 노력하면 방향에 있어서 발전적 결과를 이루어 놓기 때문에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그 목적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고, 혹 은 목적의 가치에 대한 감응을 생활권 내에서 느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 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기성교회에서는 10년 동안 정성들여야 도 달할 것을 통일교회에서는 일년 이내에도 도달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일년 까지도 안 가지요. 일년까지 안 간다구요. 내가 알기엔 일년까지 안 간다 구요. 대번에 체험한다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누가 가르쳐 주느냐 할 때, 하나님이 가르쳐 주 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많이 가르쳐 주는 거예요. 지금 통일교회가 참 신기한 것은 선생님은 살아 있는 몸뚱이지만, 지금 미국이면 미국 식구에 게, 독일이면 독일 식구들한테 영적으로 다 가르쳐 준다구요. 여러분도 그 렇잖아요? 몽시라든가 꿈 가운데라든가 혹은 기도하는 가운데서 선생님을 많이 보지요? 그런 체험이 있는 사람 손 들어 봐요. 그건 백 퍼센트예요, 백 퍼센트. 이것이 안 되는 사람은 통일교회 교인이 아니에요. 이렇기 때 문에 통일교회가 위대한 거예요. 통일교회가 강한 거예요. 선생님의 명령 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그런 놀음이 벌어져요. 그거 왜 그런지 모르지 요? 나만 알지요. (웃음) 그런 일이 가능합니다. 이미 체휼권 내에 들어선 거예요. 이것이 과거에는 종적인 면에서 하늘과 관계되었기 때문에 얼마나 어려 웠어요? 그러니 내 위치를 희생시키고 떠나야 된다구요. 그렇지요? 그러니 체휼하는 것이 어렵지만, 오늘날 통일교회는 횡적 기준이 돼 있다 이거예 요. 그냥 그대로 가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쉬워요? 그렇게 차원 이 다른 경지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빠른 시일 내 에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정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의 심정 하면 모호하지요?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들어가 보니까,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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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들어가서 느껴 보니까 선생님하고 가까워지는 것이더라, 결론이 그렇게 된다구요. 그게 통일교회 교인들의 비결이에요. 체휼한 것을 세계화시켜라 기도하다 보니, 통일교회를 믿다 보니 결국은 누구하고 가까워지느냐 하 면, 누구하고 가까워진다구요? 하나님하고 가까워지는 것보다도 선생님하 고 가까워진다구요. 그게 병이라구요. 그게 통일교회 병이라구요. (웃으심)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하고 가까워지려고 했는데 결국은 누구하고 가까 워진다구요? 선생님하고 가까워진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 천국은 네 마음에 있나니라, 천국은 네 환경에 있어야 된다.’ 이거라구요. 천국은 천 상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거예 요. 환경천국을 이루지 않으면 천상천국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지극히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극히 나빠하 는 사람이다! 그래요? 생각해 보라구요. 사람을 지극히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극히 나빠하는 사람? 「지극히 좋아하는 사람!」 지극히 좋아 하는 사람이다 이겁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지극히 좋아해 봤어요? 나를 속 여 먹어도 좋고, 나를 잡아먹어도 좋고, 지져 먹어도 좋다, 그렇게 좋아해 봤어요? 「못 해 봤습니다.」 못 해 봤으니, 사람으로 그것을 못 해 봤으 니 안됐다는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가 그런 거예요. 내가 이번에 약혼해 줄 때도 처녀들에게 ‘ 이놈의 간나들!’하며 발길로 들이차고 뺨을 갈기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맞고는 쓱 이러고 그만이에요. (웃음) 거 이상하다구요. 거 얼마나 눈에 불을 켜고 욕을 해도 복수하려고…. 암만 쥐어박아도…. 그건 뭐 잊어버리지 말라고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구요. 잊어버린다 이거예 요. 그거 이상하지요? 그걸 보게 되면 통일교회 교인들은 아기와 같다구요. 어머니 아버지가 자식이 말을 안 듣고 꾀 부리면 ‘ 이놈의 자식아! 왜 말을 안 듣느냐?’ 하 고 며 뺨을 때리고 몽둥이로 패기도 하지요. 그리고는 밤새껏 어머니 아버지 는 ‘ 아이고! 그 녀석 맞았으니 내일 아침에는 부르트겠구나.’ 했는데, 아침 에 일어나서는 ‘ ’ 엄마! 이런다구요. (웃음) 그런 것들이 통일교회 교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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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요. 참 이상하다는 거예요. 선생님한테 매 한 대 맞아도 기분이 좋지 나 쁘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 무엇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는 보통 사 람은 암만 연구해도 모른다구요, 우리만이 알지. (웃음) 우리는 어떻게 아 느냐? 우리는 체휼하기 때문에…. 그런 무엇이 있다구요. 그 체휼한 것을 선생님과 여러분 사이의 체휼로 남기지 말고 세계화시키라는 거예요. 그것 이 가능하다면 지상천국이 벌어진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건 종적인 체 휼인데 횡적화시켜라! 횡적이라는 것은 사방 세계입니다. 동서남북이기 때 문에 민족을 초월하고 종족을 초월해 가지고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세계 만민 앞에 사방성으로 체휼화시켜라! 그러면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렇게 딱 공식 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식구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식구. 그 식구라는 말 이 듣기에 참 기분 좋은 말입니다. 거꾸로 하면 구식이 돼서 안 되지만 말 이에요. (웃음) 영적 지도자는 그런 체휼적 무엇이 없어 가지고는 일을 못 하는 것입니 다. 책을 봐 가지고 설교 준비하고, 책을 봐 가지고 하늘이…. 그 책 가운 데 하나님이 있나요? 그렇지 않다구요. 하나님은 신령한 가운데 계시기 때 문에 신령을 통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되겠어요. 비약적인, 혁명적인 영적 세계의 발전을 이루어 놓은 통일교회 체휼적인 신앙은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식구라 면 대개 체휼하게 됩니다. 반드시 체험을 한다는 거예요. 어떤 일까지 벌 어지느냐 하면 말이에요, 여러분의 현실적 생활권 내에 다 벌어지는 거예 요. 진정 뜻을 위해서 있는 정성을 다 들이면 하늘이 같이해 주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일본 식구들이 인삼차 팔이를 하는데, 책임량을 주고 얼마에 팔아라 하면 인삼차가 하나님 대신 놀음 할 때가 있다는 거예요. ‘ 선생 아! 님이 인삼차를….’ 그런 일이 벌어진다구요. 내가 힘들게 팔게 되면 선생님 이 영적으로 인삼차를 팔아 주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라구요. 그런 경 지에 들어간다구요. 지금 현실에서 내가 인삼을 팔러 다니는데 눈으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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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선생님이 따라다닌다구요. 아무 집이나, 들어가는 집집마다 팔린다는 거예요. 그런 일이 벌어진다구요. 그거 이상하지요? 그것이 가능하다 이거 예요. 어떤 때는 여러분이 옛날에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고생한 선생 님을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나고, 밥 먹을 것을 잊어버리고 잘 것을 잊어 버리고 미치다시피 되게 된다면, 선생님이 좋은 양복을 입고 기분 좋게 쓱 나타나 가지고 위로도 해 주고 그런 일이 벌어진다구요. 그런 일이 많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종교에서 체휼할 수 없는, 수십 년 정성들여야 체휼할 수 있는 것을 통일교회에서는 즉각적으로 체휼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은 비약적인 뭐라 할까요, 혁명적인 영적 세계의 발전을 이루어 놓은 통일교 회라고 나는 보는 거예요. 여러분, 다 체휼했어요? 체휼한 적 있어요, 없어 요? 「있습니다.」 있지요? 「예.」 이건 뭐 다 있어야 된다구요. 그 체휼한 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을 위하고 선 생님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형제를 위하고 형제를 좋아해야 이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 것이 가능하게 된다면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천국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을 중심삼고 여러분이 체휼적인 하나의 모델 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거예요. 그 놀라운 체휼을 오늘날 현실적 실천 무대에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현실적 무대에서 체휼이 가능하다는 것은 종교세계의 위대한 혁명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어디에 있느 냐 할 때, 기도 가운데서 음성을 들어 보면 ‘ 선생님의 말을 잘 들어라. 선 생님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려라.’ 하는 거예요. 그것밖에 없다구요. 그렇게 가르쳐 준다구요. 그리고 선생님이 보고 싶어 서 잠을 안 자고 그러다 보니 영계가 열리더라 이거예요. 제일 빠른 게 그 거라구요. 영계가 열린다구요. 선생님이 미국에서 뭘 하는지 앉아서 보거 든요. 그런 일이 벌어진다 이거예요. 이것은 막연하던 신앙의 주체적 대상 을 현실적인 실체적 주체로서 횡적 무대에서 체휼할 수 있는 권을 형성했 다는 거예요. 이러한 사실은 종교세계에 위대한 혁명을 제시하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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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 온 교수님도 계시구만요. 지성적인 면과 그런 면의…. 거 논산 할머니가 무식한 할머니라구요. 여기 본부에, 있는 승도 할머니도 무 식한 할머니예요. 선생님이 그들을 데리고 지금까지 몇십년 같이 나왔지만, 지금도 증거해 준다구요. 내가 뭐 어떻고 어떻고 증거하는 것보다도…. 자 기 자랑하는 사람은 뭐라구요? 병신 축에 들어간다구요. 그러니까 내가 자 랑 안 해도 그런 사람들이 자랑해 줍니다. 전부 다 나발 불어 줘야 된다구 요. 필요하다구요. 내가 그러고 있으면 뭐예요, 그게? (웃음) 그거 안됐지 요. 안됐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전부 대신해 주기 때문에…. 그런 할머니들이 앉 아서…. 그거 보면 우습지요. 세상이 그럴 수 있나 말이에요. 뭐라고 할까, 형편이 무인지경이라는 거예요. 그렇지만 거기에서 새로운 창조가 벌어지 는 거예요. 창조하기 전에는 뭐가 있나요? 형편이 무인지경이지요. 그렇지 만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가게 되면 재창조의 실적, 혹은 실체 가치가 형성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데에 관심을 가져야 돼 요. 그런 할머니가 남자도 앉아서 소변을 보라고 하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서양 사람은 걸터 앉아서 변을 보고 동양 사람은 쪼그리고 앉아서 보는데, 동양 사람도 걸터 앉아서 보라고 하면 그렇게 해야 돼요. 맨 처음엔 안 나 온다구요. (웃음) 그거 그렇다구요. 다르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렇게 하 려면 습관화되어야 돼요. 그게 필요하다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극과 극,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부정해서는 원만이라는 것이, 완성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많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체휼이 얼마나 필요한가에 대해 얘기하는 것입니다. 체휼 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를 해야 되고 정성을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 다. 요걸 알아야 됩니다. 거기에서 나타나는 계시나 몽시를 절대 무시하지 말라구요. 그것을 조정을 해서 현실적 생활권 내에, 실천 무대에 어떻게 적용시키느냐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선 생님 자신도 그렇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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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체휼이 세계화되어 가는 데는 개체가 문제
‘ 앞으로 때가 온다. 실체적 3년노정을 가야 되겠다.’ 자, 이제부터 3년이
중요합니다. 대한민국도 이 3년노정에 걸려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세 계도 이제 3년노정의 한계선을 넘어야 할 때에 들어와요. 기독교와 통일교 회도 이 3년노정의 한계선을 넘어야 할 때에 들어와요. 기독교와 통일교회 도 이 3년노정에…. 조수가 들어갔다가 나오고 나갔다가 들어오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나가던 것이 들어오는 단계로 교차될 때가 온다는 거예 요. 그런 세계사적인 시대를 어떻게 아느냐? 공식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개인의 사정은 가정에 반영되고, 그다음에는 이렇게 높아지는 거라구요. (판서하시면서 말씀하심) 이건 같은 원형이에요. 이렇게 발전되는 거예요. 결국은 이것은 뭐냐? 커진다는 거예요. 퍼진다는 거예요. 이 모양은 마찬 가지라구요. 결국은 개인의 체휼은 가정의 체휼로 나타나야 되고, 가정의 체휼은 종족의 체휼로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커질 뿐이라는 거예 요. 개인천국은 가정천국, 가정천국은 종족천국, 종족천국은 민족천국, 민 족천국은 국가천국, 국가천국은 세계천국으로 이렇게 발전해 나가야 된다 는 거예요. 그 공식은 변함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이 기점이 어디냐 하면 나입니다, 나. 여러분 개 인이다 이거예요. 개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 자체가 하나님을 중심 삼 고…. 이 가는 길은 전부 다 90도입니다. 모두 90도라는 거예요. 이것도 전부 마찬가지라구요. 결국은 이것도? 「90도!」 전부 90도라는 거예요. 이 점은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누가 중심이 돼 있느냐? 전부가 내 개인이 중심입니다. (판서하시면서 말씀하심) 그런 의미에서 우주를 얻는 것보다 도 내 한 생명을 얻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은 그런 관점에서 하는 말 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저울대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틀리면 세상이 다 틀어진다구요. 그러므로 비판이라는 것은 내가 옳은 자리에서의 비판이 아니에요. 하나 님이 아니고는 참다운 판정을 할 수 없다, 이렇게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데 기독교에서는 통일교회에 대해서 잘 판정해 버립니다. 그 녀석들, 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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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틀리는 날에는 내가 최후의 판정을 해 버린다구요. 그럴 때가 온다는 거예요. 문제는 나입니다. 그러면 내 자체에서 그것이 벌어지는 것이냐? 아닙니다. 하늘이 있으면, 통일교회 선생님을 통해서 여러분과 관계맺는 데서는 일대일이라구요. 그 렇지요? 그것이 내 자체만으로, 축소된 내 개인 자체만으로 종결시키기 위 한 것이 아니라 확대해서 전체를 대표해서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 아야 됩니다. 그러니 그와 같은 공식은 언제나 적용해야 된다는 말이라구 요. 내가 기뻐야 상대도 기쁘다는 거예요. 설교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반드시 내가 은혜받고 눈물을 흘린 그 체휼 적인 사실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 그 환경은 은혜의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이 없이, 체휼적인 그 내용이 없이는 아무리 외치더라도 그 환경은 전 부 다 따로따로 돌아갑니다. 공식에 들어맞으면 하나에서 열, 백, 전부 다 맞아떨어지지만, 공식에 안 맞으면 전부가 틀어져 알알이 놀아난다 이거예 요. 냉랭하고, 도리어 안 왔던 것만 못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일이 벌어 진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체가 문제라는 거예요. 통일교회는 체휼과 실천이 겸해진 무서운 곳이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통일교회 활동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과 여러분과의 관계를 가르쳐 주 는 것입니다. 그 내적인 관계를 중심삼고 외적인 관계로 확대시키기 위한 모델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시될 수 있는 가치의 것으로서 확 정 짓지 않는 한 환경적 절대적인 상대권은 형성 안 된다 이겁니다. 이렇 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교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귀한 거예 요. 우리 통일교회에 있어서도 그렇다구요. 여러분, 주일날 아침에 다섯 시 면 다섯 시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서, 몇 시간 전부 터 잠을 못 자고 피곤한 몸으로 전차를 타고 오게 되면 전차간에서 다 가 르쳐 준다구요. 그런 일이 벌어진다구요. ‘ 오늘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 한 다.’ 하고 말이에요. 와 보면 그 이야기 한다구요. 그 체휼과 실천이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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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거예요. 그런 일이 벌어진다구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맞아떨어져 들어가는 것을 체험하는데 누가 부정해요? 그 나라 국 민이 거국적으로 반대하고 대통령이 뭐 전부 다 말살하라는 선포령을 내리 더라도 그걸 부정할 수 없다구요. 통일교회에서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은 나갔다가는 사고라구요. 자, 이거 반대를 했으니 들어오려니 들어올 수도 없고 안 들어가려니 안 되겠고…. 그래서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뭐 어떻고 어떻고 이런다구요. 그럼 어디 로 갈 거예요? 파산하든가 자체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구요. 그거 불 쌍하니까 내가 포섭운동도 해 주지요. 아무리 딴 데 교회, 기성교회에 가 봐야…. 이거 술로 말하면 위스키 먹다가 사이다 먹는 맛이거든요. (웃음) 이거 그렇다고 올 수는 없고…. 그런 사람이 참 많다구요. 그러다 보니까 마음이 동요되니 병이 나고 몸의 병까지 나 가지고 전부 다 불우한 운명에 부딪히는 경우를 내가 참 많이 봤다구요. 통일교회 반대하다 잘되는 녀석은 내 하나 못 봤다구요. 내가 보기에는 통일교회는 참 무서워요. 내가 그걸 알아요. 통일교회는 무서운 곳이라는 것을 느껴요. 내가 만일에 분해 가지고 이를 악물고 이를 갈면서 기도하는 날에는 옥살박살되는 걸 봤다구요. 그렇지 않아도 마음으로 ‘ 이놈의 자식! 고약한 자식!’ 이러면 벌써 몇 개월이 못 가서 전부 창이 나 버리는 거예 요. 그런 것을 참 많이 봤어요. 통일교회는 무서운 곳이라구요. 난 그렇게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거망동할 것이 아니요, 자기 마음대로 세상에서 생활하 던 그런 습관성으로 대할 수 없는 곳이 통일교회라는 것을 내가 잘 알아 요. 그 대신 선생님이 그런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선생님은 심각한 사람이 라구요. 원리원칙에는 일보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나라가 반대하고 공산당 이 반대하고 민주세계가 반대하더라도 일보도 양보하지 않는다구요, 반대 하면 반대할수록 네지(ねじ; 나사)를 더 틀면 틀었지. 그렇게 생각한다구 요. 너 반대해라, 반대하면 난 더 들어간다 이거예요. 더 들어가니, 너하고 나하고 비교해서 네가 약하게 될 때는…. 네지가 빠가(ぼか) 된다는 말이 있지요? 네지가 넘지 않기 위해서는 네가 후퇴해야지. 너트와 볼트를 맞추 어 조이는데 볼트가 돌든가 해야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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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날에는 반대하더라도 틀어 들어간다 이거예요. 내가 빠가 되지 않으려면 네가 후퇴해야지. 그런 작전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통일교회에서는 실제 어떻게 움직이느냐? 선생님하고 여러분이 느 끼는 그 심정적인 그것이 핵심이 되어 가지고 상대적인 세계에 응용해야 된다 이겁니다. 알겠어요? 「예.」 또 선생님 자신은 어떻게 하느냐? 하나 님하고 선생님하고 그 느낀 것을 여러분한테 응용해야 되는 거예요. 마찬 가지라구요. 그래서 선생님이 아는 것은 여러분이 모르지요. 그렇지만 여 러분이 선생님을 대해서 느낀 것은 여러분의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여러분 자체에 있어서 신앙세계의 마음 문을 열고 마음 밭 을 계발하는 놀음을 지금까지 해 오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계발되는 날에 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상대적인 세계에 적용시킬 수 있 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체휼과 실천은 두 세계를 조정하기 위해 절대 필요 여러분이 영적으로 체휼하지요? 선생님을 통해서 체휼하지요? 「예.」 그 체휼한 것을 실천 무대에 적용시키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거 기에서 반드시 천국이 벌어집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내가 둘째 번이면 실천 환경은 셋째 번입니다. 소생․장성․완성입니다. 나는 중심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내가 하늘도 완성시킬 수 있고 세상도 완 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이 벌어져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더라도 언제나 둘째 번이 문제가 되어 있는 것 입니다. 그 둘째 번 자리는 어떤 자리냐? 천지 만물 가운데 하나님과 우주 를 두고 볼 때, 사람은 둘째 번 자리에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의 선을 중 심삼고 보면 3점을 연결한 것이에요. 이 지점이 인간입니다. 사람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완성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완성을 볼 수 있고, 인간의 완성을 봄으로 말미암아 우주의 완성을 볼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러한 내가 지금 개척하는 도상에서 절대 필요한 것은 이 두 세계를 조정하기 위한 체휼과 실천입니다. 체휼이 영적인 면을 말하면 실천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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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적인 면을 말하고, 체휼이 오른쪽이라면 실천은 왼쪽입니다. 이것이 일 치되는 평행선을 그려 가지고 내 인격 기준 앞에 완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우주를 대표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주 기 바랍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한 많은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시면서 아버 님께서는 인류의 서글픔을 얼마나 느꼈사옵니까? 여기 서 있는 이 자식도 남 모르는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서글픔을 느낀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과 제 자신을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잘 알게 되옵니다. 아버지! 통일교회 식구와 통일교회 책임자 되는 이 자식과의 관계도 마 찬가지인 것입니다. 밤이 오면 그 밤이 기쁨의 밤이 아니고 하늘의 슬픔이 스며져 있는 밤인 것을 깨닫게 될 때는 그 밤을 슬픈 밤으로 맞이해야 할 운명적인 책임을 져야 될 때가 많았던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의 무리도 스승이 가는 발자취를 따라오게 될 때는, 핍박 받는 무리에 가담했기 때문에 그들도 핍박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사옵니 다.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 자를 따르고 있는 무리들도 외로운 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랬기 때문에 우리도 그래야 된다는 필연적인 운명을 다짐 짓고 있기 때문에, 남아진 생을 내일의 희망과 더불어 오늘의 현실에서 싸 워야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듯이, 만일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저희 들은 세상의 불쌍한 사람이요, 절망 중의 절망 가운데서 자멸할 수밖에 없 는 저희 자신들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아버님! 타락의 원한이 이렇게도 큰 줄이야, 타락의 보응이 이렇게도 무 정한 줄이야 미처 몰랐나이다. 본연의 내 마음을 잃어버리고, 본연의 인격 의 가치 기준이 어디 있는가를 알지 못하고 허덕이던 자체를 깨우쳐 가지 고, 하늘의 계명성을 바라보라고 해도 그 눈이 어둡고 그 귀가 어두웠기 때문에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자체를 바라보시는 하늘은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하는 사실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을 이 자식도 체험했습니다. 아버지! 그런 환경의 무리들을 바라볼 적마다 나 자신이 하늘 앞에 그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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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때를 상기하면서, 불쌍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남아진 것을 생각 하면서,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지 않으면 안 된 다는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내일의 소망을 갖게 하심도 아버지를 안 연고 이고 아버지 때문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제 통일교회는 그 누구의 교회가 되기를 저는 원치 않습니다. 통일교회 문 아무개의 이름과 더불어 이 교회가 빛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더불어 빛날 수 있는 그날을 당신이 바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이름과 그 가치의 기준을 저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께서 원하시는 표준이 높은 것을 제가 알았기 때문에 저 자체도 그 표준에 도달하는 것이 문제였고, 여기에 따르고 있는 무리도 그 표준까지 도달시 켜야 할 책임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옵니다. 체휼과 실천장 이 일치되는 그런 결과적 가치를 타진하지 못한다 할진대는 영원한 주체 앞에 영원한 대상권을 오늘날 이 땅에 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 에, 그와 같은 가치의 그 미국을 향하여 더듬고 전진하고 있는 것이 통일 교회가 가는 길이옵니다. 그러한 길을 개인에서부터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를 향하여 가 는 지금 진전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저희들이 자랑할 것이 아니 라, 이제부터 가야 할 내 자신이 어떠하며, 이제부터 가야 할 통일교회 자 체가 어떠한 것인가가 문제이옵니다. 지난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내일이 문제이기 때문에, 내일의 통일교회 자체로서 남아져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느낀 바가 컸고 과거에 체휼한 바가 컸다 할지라도 현실 에 그 가치의 대상을 이루지 못하게 될 때는, 하나님이 임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사옵기에, 오늘날 저희들은 아버지의 무한한 가치를 인 정함과 동시에 현실적 가치보다도 미래의 가치를 더 높이 우러러보는 마음 이 간절한 것을 아시사, 이 무리를 버리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 하옵니다. 지난날의 수난이 아무리 컸고 앞으로 다가올 수난이 더 클지라도 그 수 난을 달게 수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무리를 하늘이 바라고 있다는 사 실을 알게 될 때, 저희는 초췌한 모습이요,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그 마음 바탕 앞에 상대적 존재로서 남을 것을 스스로 맹세하면서 다짐하는 무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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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틀림없다는 것을 기억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 옵니다. 아버님! 1975년은 무서운 해라고 저는 생각하옵니다. 내가 넘어야 할 2 차 7년노정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고 1974년을 맞게 될 때 초조한 마음을 가졌던 지난해의 일을 다시 상기하면서, 3차 7년노정을 시작할 수 있는 1975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배 바쁜 걸음을 걸어야 되겠고 숨막히는 싸움 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내 생명이 다하고 내 힘이 다하는 한 이 최후의 7년노정을 중심삼고 세계 정상의 고개를 당당코 넘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며, 슬픔과 비장이 교차되는 마음을 가지고 원한에 사무쳤던 한국 땅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이 땅에 와서 1월을 당신의 가호 가운데서 지내고 2월을 새로 이 맞이했습니다. 이 땅 위에 역사상에 없었던 새로운 일을, 다시 문제시 하지 않으면 안 될 새로운 역사적인 사실을 전개할 날이 2월 8일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세계의 젊은 청년 남녀들이 이 땅에 찾아와 하늘 앞에 진 정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땅이 망해서는 안 되겠다 며 세계 젊은이들이 하늘 앞에 맹세하고 결의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개인이 그럴 뿐만이 아니라 새로이 가정의 인연을 맺고 나타나는 1800 쌍 이상의 무리들이 이 땅에서 하늘의 가정을 발산시켰으니, 이 땅을 기념 의 땅으로 하여 이 땅 위에 승리의 표적을 남기겠다는 결의를 다짐할 수 있는 거룩한 기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 하옵니다. 숨막히는 43일간을, 이제 한국에서 머무는 이 기간을 아버지께서 가호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1차적인 정월달의 만찬회는 성공리에 끝났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라는 기준 앞에는 아직까지 미급한 것을 생각하면서, 그날의 부끄러움을 나는 아버지 앞에 호소했습니다. 아버지! 이 민족이 그러한 것을 깨닫고, 통일교회를 알던 지금까지의 부 끄럽던 마음을 회개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삼아 주시옵소서. 또 이번 2월달 에는 민족과 이 나라가 동원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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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오니, 이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초월하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생각할 수 있는 국가 민족적 하나의 동기가 될 수 있게끔, 아버지, 삼아 주시옵기 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번 2월달의 행사를 지내고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다시 치열한 싸움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남겨진 세계적인 십자가를 가로막고 최후의 전선에서 비틀걸음을 하면서도 쓰러질 수 없다는 각오로 개척해야 할 길이 남아 있는 것을 아옵니다. 아 득한 천리 길, 당신의 광명한 등대 빛을 바라보고 암중모색하면서 싸워 가 야 할 길이옵니다. 아버님이여! 소수의 무리인 미국 식구들을 격려하여 주 옵고, 지켜 주옵고, 아버지, 편 되어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나를 높이기 위한 생각은 추호도 없나이다. 그늘 아래, 밑창에서 밟히더라도 당 신이 높아질 수 있는 한 날을 엄숙히 준비하고, 그곳을 향하여 가야 할 날 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지, 여기 한국에 남아질 무 리들을 격려하여 주시옵소서.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무식한 자나 유식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할것없이 하늘 앞에 충효 의 도리를 다짐하는 것만을 우리의 필연적인 운명의 길로서 지킬 줄 아는 이 무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남기고 가는 그 무리들이 스승 앞에 지지 않는 보람 있는 싸움을 이 땅 에 남기어, 불쌍한 이 민족을 3년 가운데 지키고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통일교회의 사명을 완결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하는 무리가 되게끔, 아버지, 오늘 2월 이 첫 주일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약속을 다짐하게 하여 주옵기 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아직까지 확실한 그 무엇이 없거들랑 체휼 적인 심정을 통하여 그를 각성시키옵소서. 그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하늘의 대역자가 되어 사탄을 굴복시키는 하늘의 용사로서 전쟁 마당에 나서는 하 늘의 장병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그날 앞에, 남아진 미래 앞에 부끄럽지 않는 나 자신이 되겠다고 맹세를 다짐하는 거룩한 오늘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간절 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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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이달을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당신이 경륜하신 뜻대로 백 퍼센 트 승리의 결과를 가져오기를 진정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그날들 이 아버지의 가호와 저희들이 받드는 정성의 터전 위에 승리와 영광이 깃 들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 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