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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54쓰임 받는 것이 행복입니다.(마 21:1-11)2017. 8. 6. 프롤로그
-암환우와 가족들의 행복한 공동체 <아름다운 동행>이란 카페에 실린 글이다.
-아들아 보아라 ~~
연년생으로 4남매를 낳아, 막내인 너를 낳을 때 수월할 줄 알았는데, 머리가 커서 난산으로 엄마 목숨 잃을 뻔했다는 건, 어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
너는 엄마의 목숨과 맞바꿀 뻔한, 소중한 생명임을 잊지 말거라.
-엄마가 살았던 시절에는, 여자로 태어나면 초등학교 졸업으로 가방끈은 끝이었단다.
가정환경조사서에 엄마 학력을 고졸로 적어낼 때마다, 너희들에게 죄짓는 기분이었지만, 기죽지 말라고 한 일이니 이해해다오. 봄처녀 제 오시네....
-이 노래를 기억하니?
부부동반 모임이 있어 노래를 준비해야 했는데, 좀 더 고상한 노래를 부르고 싶어, 가곡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사남매 상의해서 이 노래를 골라주었지.
가사도 예쁘고 멜로디도 참 좋더구나.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어쩌면 노랫말이 이리 예쁜지...
덕분에 모임에 나가서 우아를 좀 떨었단다.
고맙다.
-딸기 값이 제일 쌀 때 정성껏 딸기잼을 만들었고, 포도 끝물에는 포도잼과 포도주를 만들었지.
식빵에 엄마가 만든 딸기잼 듬뿍 발라 맛있다 쩝쩝거리며 먹는 모습이 이뻐, 매년 제철 과일 끝물일 때 과일 잼 만드는 게, 엄마의 기쁨이었단다.
-알차게 먹인 것도 없는데, 아침저녁 맹물세례만으로 콩나물 크듯 쑥쑥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엄마는 고맙고 기뻤단다.
-아버지 사업이 흥하기를 몇 번, 망하기를 더 몇 번, 그렇게 천국과 지옥의 경험을 어린아이에 여러 번 했으니, 너희들 마음고생이 오죽했을까...
심성이 연약한 엄마는 결국 암에 걸리고 말았지.
몇 년을 원자력 병원을 들락거리고, 결국 신유의 은사에 기대어 전국을 떠돌기도 했고, 방학 때마다 너희들과 부흥회 간이천막에서 함께 지내야 했었지.
그 때 엄마는 딱 한 가지만 빌었단다.
막내아들 장가가는 것만 보고 가게 해달라고....
-몸이 꼬챙이처럼 말라가고,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을 때, 엄마의 기도는 오직 너희들뿐이었단다.
결국 엄마는 누구의 결혼식도 못보고, 먼저 세상을 떠나야 했지만, 사남매 잘 자란준 것만으로도 행복했단다.
-아들아~~
엄마가 평생한 일이라고는 세끼 밥상 차리는 거였단다.
밥상을 차려보니 알겠더라. 천성대로 사는 게 행복이라는 것을...
-밥상에 그릇 놓인 것처럼, 국그릇도 있고, 밥그릇도 있고, 작은 간자아종지도 있듯, 사람의 천성과 쓰임새는 다 다른 거란다.
작은 간장종지가 나도 이제 밥그릇이 되겠소 한들 밥풀 몇 개는 담을 수 있어도, 온전히 쓰이는 건 아니지 않겠니?
쓰임 받는 그릇은 오직 깨끗한 그릇이란다.
국그릇이 크고 멋져 보여도, 뜨거운 국물 품고 있으려면 얼마나 힘들겠니?
그러니 남부러워하지 말고, 받은 그릇 모양대로, 너의 천성대로 살거라.
그래야 니 맘이 편하고 행복하단다.
-아들아~~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엄마가 잼 만들 때 끝물 기다리듯, 주어진 삶의 끝물까지 진득하게 있다가,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고 그 때 만나자.
-다시 만나는 그날 나지막이 이 노래 불러줄 게.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맞다. 간장종지면 어떤가?
쓰임 받는 그릇이면 행복한 거다.
아무리 그럴듯한 그릇이라도, 쓰임 받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그릇의 생명은 쓰임 받는 것이다.
그릇은 쓰임 받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하던 장로님이, 암으로 고생을 하다가 임종을 하게 되었다.
이제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30대 젊은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게 된 장로님은, 무엇인가 아들을 위해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임종하기 직전, 한참을 말없이 있던 아버지가 마지막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한 평생을 살면서, 이런 일도 해봤고 저런 일도 해봤다. 보다 더 행복하게 살려고 온갖 몸부림을 다 해보았는데,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니, 신앙생활 열심히 할 때, 내가 은혜 받고 교회생활을 미친 듯이 열심히 할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아들아! 너도 하나님께 쓰임 받아 행복해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행복은, 그 장로님의 유언이자 간증이다.
이건 우리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결혼하는 자녀들에게 내가 해줄 말은, “예수 잘 믿어라”이다.
내가 이 땅에서 자녀들에게 남길 마지막 말도 똑같다.
“너희들 예수 잘 믿어라”
거기에 한 마디 덧붙인다면, “교회 좋은 일꾼 되고, 목사님 잘 섬기거라.” 이다.
-사실 그게 다다.
그게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그것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 비결이고, 하나님께 축복받는 비결이다.
알고 보면 단순하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비결도, 축복 받는 비결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그런데 그걸 잘 못한다.
옛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그렇다.
자기 안의 이기적인 자아, 교만한 자아 때문이다.
-김치가 맛을 제대로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배추가 땅에서 뽑힐 때 한번 죽는다.
씻은 다음 통배추 배를 가를 때 두 번째 죽는다.
소금에 절여질 때 세 번째 죽는다.
매운 고춧가루 짠 젓갈을 뒤집어쓸 때 네 번째 죽는다.
김장독에 담겨 땅에 묻힐 때 다섯 번째로 죽는다.
-배추가 그런 숱한 죽음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김치가 제 맛을 낸다는 것을 기억하라.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행복을 모르는 사람은, 어디 가서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까봐 눈치 보여서다.
그런데 그걸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행복인 줄 아는 사람이다.
그 행복만이 참된 행복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행복들은 일시적인 것들이다.
잠시 곁에 있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들이다.
이 땅에서 잠시 누리다가 내려놓고 가야 하는 것들이다.
-쓰임 받는 것이 행복이다.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다.
주의 몸된 교회에 쓰임 받는 것이 영적인 행복이다.
내가 교회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역을 행복으로 여기라.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다.
주님께로부터 내가 쓰임 받고 있다는 중거이다.-------------------------------------------------------
-먼저 쓰임 받은 제자가 나온다.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예수님의 제자는 열둘이다.
그 중 핵심제자는 세 명이다.
예수님은 정말 중요한 자리에, 이 세 사람만 데려갔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두 제자를 보내셨다.
베드로와 요한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야고보와 요한일 수도 있다.
아니면 맹인이었다가 고침 받은 두 사람일 수도 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두 제자는 중요한 명령을 받았다.
나귀를 풀어 데려오는 것이다.
그 일이 쉽고 어렵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선택을 받아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확실하게 누구에게 그 일을 부탁할 것인지를 마음에 정해놓았고, 적절한 타이밍에 부탁하셨다.
-지금 예수님이 시킨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아무나 해도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두 제자는 아주 중요한 일에, 예수님께 인정받아 선택받은 것이다.
속으로 ‘왜 꼭 나여야 하지’ 하고, 예수님한테 “주님, 쟤한테 시키세요.” 한다면, 그건 행복 대신 불행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 그 두 제자였을까?
만일 그들이 주님께 “그걸 꼭 우리가 해야 합니까?” 물었다면, 주님이 어떻게 하셨을까?
“하기 싫으면 말아라.” 했을까?
“야, 말 많다. 하라면 하지...” 했을까?
-나는 주님이 이렇게 답하셨을 거 같다.
“그래 그 일은 꼭 너희 둘이서 하면 좋겠다.”
“아니 예수님, A도 있고 B도 있고 C도 있는데요?”
“아니야, 그 일은 너희 두 사람의 몫이야. 너희가 그 일을 가장 잘할 수 있어.”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다.
그분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다.
주님의 몸된 교회로 부르셨다.
마지막 시대에 한꿈교회 믿음의 식구로 부르셨다.
한꿈교회를 주님의 건강한 교회로 세우라고 부르셨다.
류현철 목사와 함께 1110세계비전을 이루라고 부르셨다.
-그분은 실수하지 않는 분이다.
그 일을 내가 감당해야 해서, 내게 맡겨주신 것이다.
쓰임 받는 행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예 / 아니오” 선택은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예”만 있다.
그러나 물을 수는 있다.
“예”로 대답한 후에, 방법에 대해서는 물을 수 있다.
알아서 하다가 실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알면 확실하게 순종할 수 있지만, 애매하게 알면 애매하게 순종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아멘” 했으면, 그 다음은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물어볼 필요가 있다.
순종하기로 마음에 확정하고 묻는데, 하나님이 목소리를 깔고 “너 말 많다...” 하고, 나무랄 리가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순종할 의지가 있다고, 예쁘게 봐줄 거 같다.
더 순종을 잘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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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별 질문할 게 없었다.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그들이 물을만한 것까지 미리 알아서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매여 있는 나귀를 풀어 데려가려고 하면, 누가 말하겠는가?
주인이 말하지 않겠는가?
“아니 당신들 왜 남의 나귀를 왜 데려가려고 하느냐” 묻지 않겠는가?
누가 와서 자기 나귀를 데려가는데, 눈만 껌벅거리며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을 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인이 뭐라고 하면, 대답할 말을 주셨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너무나 간단하다.
밑도 끝도 없이 딱 한 마디다.
주님이 당신의 나귀를 쓰겠다는 것이다.
주님의 일에 당신의 나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전 보지도 알지도 못한 낯선 두 사람이 와서, 나귀를 풀며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건넸다.
그런데 나귀 주인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만일 다른 일로 나귀를 쓰겠다고 했다면, 주인이 나귀를 순순히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 두 말하지 않았다.
이게 믿음이다.
-나귀 주인은 자기 나귀가 주께 쓰임 받는 것을 행복으로 여겼다.
짐꾼 나귀였다.
밭일 돕는 나귀였다.
그런데 나귀가 주께 쓰임 받을 기회가 왔다.
그러자 얼른 내어드렸다.
-주인에게 나귀가 여러 마리 있었을 거 같지 않다.
당시 평범한 가정에서, 나귀를 여러 마리 키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주인은 당장 생활의 불편이 따른다.
오늘날 차가 있다가 갑자기 없어진 것 같은 불편이다.
-더구나 나귀를 잠시 빌려간 것이 아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 말 뿐이었다.
어쩌면 나귀를 되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고 하자 즉시 보냈다.
“기도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하고 미루지 않았다.
“24시간만 말미를 주세요.” 하고, 시간을 벌려고 하지 않았다.
즉시 보내드렸다.
최고의 순종을 한 것이다.
-쓰임 받는 행복을 안 나귀 주인은 즉시 순종을 선택했다.
제자들이 몸으로 즉시 순종했다면, 나귀 주인은 물질로 즉시 순종했다.
둘 다 쉬운 것은 아니다.
즉시 순종에는 조금도 의심 없는 믿음이 따라야하기 때문이다.
십일조에 대한 고민은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즉시 시행을 못하고 한해 한해를 넘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주인이면 우리는 청지기다.
이게 청지기신앙이다.
청지기 신앙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라고 믿는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드리는 것이 정상이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는데 “안 돼요 이건 내 거예요” 할 수 없다.
주가 쓰시겠다는 것을 내 것을 빼앗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럼 차를 살 때의 기준이 달라진다.
우리 가족만 위해서라면 작은 차면 된다.
그러나 셀가족들을 태우기 위해서, 교사로서 아이들 태우기 위해서, 더 큰 차를 산다.
교회와 떨어진 곳에 좋은 집이 났지만, 새벽기도회를 위해, 행복모임을 위해, 교회 가까운 곳에 집을 얻는다.
차든 집이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아멘하는 것, 그게 청지기 신앙이다.
-진정한 헌신은 청지기 신앙에서 나온다.
거짓 없는 헌신은 청지기 정신에서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주인이고 나는 청지기입니다.”
이게 청지기 신앙이다.
이게 청지기 정신이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가 나온다.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그건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주님은 말씀을 이루고자, 나귀 그것도 새끼를 타셨다.
그분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집에서 나귀새끼를 한 번 타보는 것이 아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환영하는 자리다.
그럼 백마가 어울린다.
그래야 폼이 난다.
그래야 환영하는 사람들의 사기도 올라간다.
그럼에도 주님은 백마가 아닌 나귀 새끼를 선택하셨다.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의 특징은 겸손이다.
예수님은 겸손하여 아버지께 쓰임 받았다.
두 제자도 겸손했기에 쓰임 받았고, 나귀 주인도 겸손했기에 쓰임 받았다.
교만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기는커녕, 하나님이 대적하신다.
-한 때 순간 교만하여, 주님께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들어야했던 베드로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이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장로 곧 교회 리더가 좀 부족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의 종을 부르실 때 완벽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다.
교회 리더가 부족해도 순종하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하면 하나님이 대적하신다.
이게 성경적인 원리다.
-겸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자.
하나님 앞에서의 최고의 겸손은 기도다.
가난한 심령으로 드리는 기도로, 우리의 겸손을 표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정직한 마음으로 드리는 중보기도로, 우리의 겸손을 드러낼 수 있다.
-어느 때보다 기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 다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자.
우리가 무엇보다 기도자로 쓰임받자.
특별히 중보기도사역에 쓰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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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제자들이 순종한 덕에 나귀 새끼가 쓰임 받게 되었다.
예루살렘 근교에 수많은 나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나귀가 선택받아 쓰임 받게 되었다.
나귀새끼는 한 번도 등에 짐을 져보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사람을 태워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태웠을 때 얼마나 힘들었겠나...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 힘들었다.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어렸을 때 지게를 좀 져본 적이 있다.
밭이 산비탈에 있어, 지게로 짐을 져 날라야 했다.
아버지가 원양어선 탄다고 나가있어서, 할머니와 엄마가 농사를 지었는데, 내가 중학생이었지만 장남으로서 농삿일을 거들어야 했다.
지게질도 요령이다.
힘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지면 어깨뼈가 내려앉는 것 같다.
지게에 짐을 얹으면, 앞뒤로 중심을 잡기가 힘들다.
특히 힘들어 쉬었다가기 위해 지게를 받칠 때, 잘못하면 뒤로 넘어갈 수 있다.
-나귀새끼는 등에 예수님을 태운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앞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다.
오늘은 자기에게 가장 재수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자기 발 앞에 겉옷을 깔아주는 것이었다.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주기도 했다.
갑자기 자기가 주인공이라도 되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자기를 환영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힘이 났다.
그래서 등에 태운 예수님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신나서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영 인파가 늘어났다.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리고 노래하는 소리가 커져만 갔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얼마나 신나는지 모른다.
자신이 태운 분이 보통 분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임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됐다.
-자신이 그토록 엄청난 분을 모시는데 쓰임 받게 된 것이다.
순간 나귀새끼는 너무 행복했다.
‘아, 쓰임 받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구나’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기를 선택하여 자기 등에 타주신 예수님이 고마웠다.
-이제 자기 평생의 자랑거리가 생겼다.
내가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태웠었노라고...
-예수님을 태운 나귀새끼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다.
성에 들어서자 온 성이 시끌벅적했다.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 위에 타신 예수님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향해 그토록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너도 수고가 많구나.” 하고 인사해주는 것 같았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도 행복해졌다.
이게 쓰임 받는 행복이다.
나귀새끼는 주님께 쓰임 받는 행복을 듬뿍 누렸다.
-사실 다른 사람을 위해 쓰임 받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2006년 3월 술, 담배, 사람을 좋아하던 김천수라는 전라도 정읍에 사는 집배원이, 직장암 말기의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받고도 죽기만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웃음으로 암을 물리친다.’는 문구를 보고, 웃음치료사 자격증을 따게 된다.
그 때는 살기위한 웃음이었다.
-그런데 웃음치료사 자격증을 따는 과정에서는 웃을 일이 있었지만, 웃음 치료사 과정을 마치고 나니, 웃을 일이 없어졌다.
계속 웃기 위해서라도, 웃음 치료사 자격증을 써 먹을 데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관내에 혼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떠오른 것이다.
그 때부터 경로당, 경로대학을 찾아다녔다.
이렇게 노인들을 섬기게 되었을 때, 사역의 지경이 넓혀졌다.
파티 마술도 배우게 되었고, 또 노인들의 피해가 잦은 보이스피싱 예방교육 전문가가 되었다.
-이렇게 남을 섬기며 웃고 돌아다니다 보니, 놀랍게도 자신에게 좋은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암 발병 5년째, 병원에서 ‘중증환자를 졸업했다’는 축하 서신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우수 집배원상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변한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젠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제게 좋은 일이 생기고, 제가 도움을 받은 겁니다. 아침에 한시라도 빨리 일어나고 싶고, 저녁엔 조금이라도 늦게 자고 싶어집니다. 주변 사람들 덕분에, 저는 세상을 다시 살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우리가 이타적인 삶을 살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몇 달 전부터 아내가 일어나면, 발을 주물러달라고 한다.
발바닥이 그렇게 아프다는 것이다.
처음엔 “아니, 자기 발을 자기가 주무르지 않고...” 했다.
“당신은 공도 안 차는데 왜 발바닥이 아프냐?”고 물었더니, “한의원에서 계속 서 있으니까 그래요.” 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 발바닥이 공차는 내 발바닥만큼이나 딱딱하게 느껴졌다.
-속으로 ‘네가 남편 잘 못 만나서 고생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그 때부터 발 주물러달라고 할 때 군말하지 않았다.
‘집에 식구들이 있지만, 자기 발을 누구한테 주물러달라고 내밀 수 있겠나. 그래도 남편이라고 발을 내밀며 부탁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자 정성껏 주물러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건 아내를 위한 작은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별 거 아닌 그 일에서 행복이 느껴진다.
그것이 쓰임 받는 행복이다.
-쓰임 받는 것이 행복이다.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평생 쓰임 받는 행복을 누리자.
어딜 가나 쓸모 있는 사람, 쓰임 받는 사람으로 살아, 스스로 행복을 누리며, 다른 이에게 하늘 행복을 전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