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오천축국전 / 석미화
당신의 서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장안에 파다했습니다 천년이 더 걸려 편지가 도착하고 이 나라엔 자꾸만 눈이 휘몰아쳤습니다 천년을 돌아온 길, 또 천년이 흐를까 봐, 나는 천안의 거처에서 새벽 눈을 뚫고 올라갔습니다 천안에서 안서*까지의 거리가 꿈결인 듯 펼쳐진 능선은 끝도 시작도 없었습니다
눈들의 집결지 안서는 당신이 도달한 곳 잠들지 않는 눈, 천수천안은 내가 이를 곳입니다 당신 눈 속의 천산은 두려움을 모르고 나의 눈물 속 물음은 적요를 모른 채
당신의 전갈은 밤새 쌓이고 쌓였지요 눈은 거침없고 사방 흰 두루마리를 미리 펴주었습니다 몰아치는 눈발을 안섶에 여미고 가는 행적, 손을 뻗어 쓰다듬으면 되돌아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서역, 당신이 보았던 산마루 바라듯 그 남은 하루를 돌아들면
또박또박 쓴 정자체를, 긴 밤 소사나무 위에 내린 눈발의 획들을, 행간마다 내려앉는 장신의 숨소리를, 그 나머진 못다 읽은 멀고 먼 폭설이었습니다
안서(安西)에서 서안(西安)으로 흘러든 족적,
어디서부터 어디에 이르렀다는 안서(雁書)의 시편들은 천안(天眼)을 휘돌고
마지막 순례지를 지워버린 이국의 눈밭 당신이 찾은 한 구절은 무엇이었나요
이제 어디로 갈까요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그를 못봤나요 아무도 없었어요 저녁 눈 속으로 들어갔나요 저기 어딘가 흰 산이 우는 소리 따라갔나요
* 開元十五年十一月上旬 至安西 : 개원 12년 11월 상순에 안서에 이르렀다.
[ 감 상 ]
이 시는 쓰인 사연을 알아야만,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짧은 지식으로는 숨어 있는 본 의미 보다는, 개괄적으로 읽히는 내용만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얘깃거리가 많은 시(詩)이겠지만, ‘좋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시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 짧은 지식 때문이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저자석미화출판여우난골발매2021.04.15.
<왕오천축국전>은 현재 프랑스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 책은 8세기 신라의 혜초스님이 서역 지방을 여행하고 썼던 여행기인데요, 국내에서 머물다가 프랑스로 유출된 것이 아니라, 1908년 둔황의 <막고굴> 장경동에서 프랑스 학자 펠리오가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필사본으로 총 227행 5,893자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이 둔황에 남아있던 필사본을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가 1,283년 만에 국내로 잠시 귀향하여 전시된 것입니다.
화자는 전시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자신이 사는 천안에서 장안(서울)로 달려갔습니다. 천안에서 서울까지의 길에 눈이 내렸고, 그것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눈송이 하나가 하루인 듯, 이틀인 듯 과거로 흘렀고, 그 길은 혜초 스님이 걸어갔었던 길과도 연결 되어있을 것이고….
그런데요, 내가 모르는 이역을 찾아 떠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으로 훌쩍 떠난다는 정도의 의미일까요. 그것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지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여행이 호기심만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오늘처럼 투명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숨을 건 여행을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천축국’이라는 단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축국’은 그 당시 인도지방을 묘사하는 단어로, 한 지역을 뭉뚱그린 것입니다. 여행을 떠날 때 대략의 사정은 알 수 있었을 것이나, 세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겠죠. 당연히 인도 지역에 대한 참고할만한 여행기는 없었을 것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혜초 스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불러도 될 것입니다. 그의 여행기는 분명 신라에 큰 반향을 일으켰겠죠. 아쉬운 것은 국내에 필사본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돈황에 남겨진 필사본만이 그 발자취를 전해주고 있으니까요.
석미화 시인의 시집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으므로, 상세한 내용을 전달해 드리지 못합니다. 혜초 스님이 봤었던 천축국의 이미지가 사뭇 궁금해지네요. 화자가 말한 ‘또박또박 쓴 정자체’라는 단어에서 진지한 혜초 스님의 마음과 함께, 놀라움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 된다면, 꼭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시 쓰는 주영헌 드림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