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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1)]
중국 조선족 음악가 김종화선생의 증언
류연산
마산에서 조두남기념관 낙성식이 있었고 그 날 시민단체의 반대시위가 격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밀가루가 날리고 낙성식장이 수라장이 되었다고 하며 그로 하여 세 분이 구류되었다고 하니 조두남선생은 저 세상에서 안녕치를 못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중국 조선족 음악계의 원로이시며 조두남, 윤해영과 남다른 교분을 가지셨던 김종화선생께서 하신 증언을 소개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아래에 적어 본다.
김종화(金種華 1921년 12월 3일 화룡현 룡문향 태생)선생은 1947년 흑룡강성 녕안현 신안진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여서부터 상지사범, 연길시2중, 연변사범, 화룡현 투도 제2고급중학교 등에서 음악교원으로 전전하다가 1983년에 퇴직을 한 분이시다. 중국조선족 음악사업에 공로가 있는 분이라 중국음악가협회 회원이고 연변음악가협회 명예리사이시지만 투도를 떠나 연길로 오신 다음의 생활은 별로 낙관할 바가 못되는가 보았다. 그런데다가 우리가 취재를 가기 전 해에 자전거를 타고 연길시를 다녀오다가 엉덩이 박죽 뼈를 상해서 두 번이나 대수술을 받은 선생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운신을 하면서도 각별히 반겨 맞아주었다.
당시 김종화선생은 연길시 흥안향 흥안촌에 잠시 세집을 맞고 계셨다. 원래 들어있던 집이 허물리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는데 오라지 않아 분여 받을 집 열쇠를 가진다는것이였다.
당시의 취재기록을 펼치면 아래와 같다.
취재자: 박청산(연변인민출판사 정치문교편집부 역사편집),
류연산(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 소설편집)
피취재자: 김종화(리직교원, 음악가)
동석자: 김금선(金錦仙 1930년 함경북도 명천군 다기동 태생, 퇴직교원, 김종화선생의 부인)
시간:1995년 5월 2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문:신안진으로 언제 이사를 갔습니까?
답:1937년 이른 봄이였답니다. 원래 왕청현 량수천자(지금의 도문시 량수진)에서 사진, 촌공소, 사타자세관 등에서 일을 하다가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부친과 함께 일곱식솔을 거느리고 이사를 갔지요. 신안진은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7, 80리 상거에 있는데 당시 주소지로는 목단강성 녕안현 신안진이랍니다. 신안진은 60리 넓은 벌에 위치해있고 주변에 18개의 큰 부락과 목재판이 있어서 반 도시, 반 농촌이였답니다. 한족부락 몇개와 일본인 개척단부락도 있었지요. 이곳은 우리 민족의 잡거구라 백성들이 돈을 대고 지은 20여개 교실을 가진 2층 벽돌집으로 된 소학교가 신안진에 있고 주변 마을에도 10여개의 소학교가 있었답니다. 40년도에는 성립 농업중학교까지 설립했었답니다. 그리고 신안진에는 병원이 세개, 사진관도 내가 꾸린 동양사진관까지 합해서 다섯개나 되였답니다. 벌 복판을 꿰질러 흐르는 해랑강(海浪江)으로 떼목을 띄워서 해림을 거쳐 목단강으로 운송했으므로 떼목군들이 많아서 신안진에는 려관이며 식당이며 그리고 기생집들이 수두룩했습니다.
문:선생님께서 신안진에서 사진업 외에 음악활동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답:소학교때부터 음악이 소원이였더랬지요. 신안진에서 사진관을 벌리기전에 얼마간 목단강에서 예술사진관에서 사진을 배운적이 있는데요, 그때 그 사진관에 기타가 있었거든요. 얼마나 갖고싶었는지 몰라요. 신안진에 동양사진관을 꾸린 때와 거의 동시에 아끼다(秋田)개척단이 와서 자리잡았어요. 나는 일본어를 잘했으므로 사진기를 메고 개척단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구요. 그런데 그 개척단에 기타를 가진 사람이 있어서 25원에 흥정을 하고 선불 10원을 주고 내것으로 만들었답니다. 기타를 사고나니 온 세상을 독차지한 그런 기분이더군요. 만척회사의 일본인한테서 기타를 배웠고 작곡이며 화성학이며를 책을 사서 자학으로 익혔답니다. 내가 음악활동을 시작하게 된것은 전적으로 안의사의 덕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1941년 봄에 안의사(일본창씨 야스다)가 신안진에 와서 안전병원이란 간판을 걸었답니다. 원장인 안의사댁에 가면 책장보다도 훨씬 더 큰 레코―트장이 시선을 끌었지요. 클래식 음악을 즐겨 감상하시는 분이였습니다. 그 병원 의사들중에도 기타를 즐기는 조춘기라는 사람이 있었거니와 안원장의 처조카 남편 서씨(일본창씨 도시가와)는 기타를 쥔지 근 십년이 되여 독주훈련을 하는 중이였거든요. 하여 신안진에서 음악을 한다 하는 젊은이들은 병원집에 나들었답니다. 그후 안의사의 후원으로 몇차례의 연주회도 가졌더랬습니다. 성원들중에는 조선가극 초창기에 있었던 <<라이온 오페라>>에서 악장질을 했던 정씨(일본창씨 오오가와)를 비롯하여 직업 악사출신도 몇사람 있었지요. 일제의 <<대동아전쟁>>이 폭발하자 <<조선악극단>>, <<반도가극단>>, <<황금좌>> 등 예술단체들도 어려움을 겪는 때인지라 기울어가는 흥행단체에 몸담고있던 악사들은 직업을 구해주고 안치시키기만 하면 미련없이 흥행단체에서 빠져나왔지요. 그래서 안원장은 재간있는 음악인들을 신안진에 붙들어 둘수 있었답니다.
문:조두남선생과는 언제 만났습니까?
답:1942년 겨울이였습니다. 자그마한 류랑극단이 신안진으로 공연을 왔대서 <<라이온 오페라>>에서 악장질을 했던 정씨하고 함께 구경을 갔댔습니다. 그들의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것은 나보다 키가 조금 클사한 거쿨진 사내가 손풍금을 타면서 4, 5명 악사를 지휘하여 연주하는 음악프로였습니다. 강마른 얼굴의 손풍금연주가가 타는 탱고―<<라, 콤바르씨타>>, 룸바 <<마리네나>>는 대조적으로 이채로왔습니다. 주제와 화려한 바레션의 대조, 오른손의 주선률과 왼손의 대위선률의 통일, 룸바의 선률과 리듬의 배합, <<양산도>>에서의 비쁘라트처리 등 모두가 나를 매혹시켰습니다. 특히 정서처리가 아주 섬세했답니다. 정서전환구에 이르러 실죽 웃는 표정과 회전의자에서 빙그르 도는 멋진 몸동작―그대로 옹근 몸에서 음악이 흘러나왔지요. 내가 저분이 누구인가고 묻자 정씨는 조두남선생이라고 알려주더군요. 그런데 그의 왼손에는 붕대가 감겨져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며칠후 안원장댁에서 드디여 의심을 풀게 되였답니다. 그는 약침쟁이였던것입니다.
조두남선생은 나보다 아홉살이상이였습니다. 평양 태생이고 평양 건재(한약재)무역상을 하는 친구가 꾸린 악단 <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락관할바가 못되였나 보더군요. 부친이 페결핵에 걸려 당금 돌아가시게 되자 전도사였던 할머니께서 혼처를 마련해놓고 부친 생전에 성가를 시킨다고 억지 결혼을 시켰다는겁니다. 그래서 집을 뛰쳐나오고 술과 마약에 재미를 붙였던가 봅니다. 그 세월에 한다하는 사람은 마약이 그 어떤 행세품이기도 했지마는―<<라이온 오페라>> 정씨와 친구사이였던지라 정씨의 소개로 조두남선생은 안원장댁에서 묵으면서 치료를 받게 되였답니다. 음악을 생명처럼 사랑한 안원장은 조두남선생의 천재를 귀중히 여겨 방 한칸을 전용으로 내여주고 치료, 식사, 의복에 이르기까지 속속 보살폈지요. 약침을 맞을 때만 하면 코물을 줄줄 흘리면서 당금 죽어가듯 기골을 못추었는데 그럴 때면 안원장은 증류수를 주사하기도 했고 약담배 대신 술을 대접하기도 했답니다. 두달여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아서 드디여 건강을 회복한 조두남선생은 아예 신안진에 물앉아 음악활동을 했고 나 또한 그를 선생으로 모시고 열심히 배웠어요.
문:그럼 조두남선생과 음악활동을 얼마동안 같이하셨습니까?
답:광복까지이니깐 해수로는 3년입니다. 함께 무대공연에 나간것은 1943년 가을 목단강 유락극장에서 가진 <<동만총성추계민족예술제>>였습니다. 그때 신안진악단이 중심이 되여 출연하게 되였습니다. 출연한 프로로는 모두가 조두남선생의 작곡이였는데 자기의 새 출발을 주제로 한 기악조곡 <<한 사나이의 반평생>>, <<농촌의 사시절>>, 남성독창 <<고향생각>> 등 여러수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고향생각>>은 남수억이 불렀는데 지금 그는 팔가자(화룡시 팔가자진)에 생존해있습니다.
그런데 출하때라 경찰서의 허가가 없이 공연에 참가한 <<죄>>로 우리 모두가 호출을 받았습니다. 일제는 전선에 군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가을 출하시기이면 <<흥농사>>의 관리들과 순사들을 내몰아 야단법석을 떨었지요. 만일 출하시간을 단 하루라도 늦추면 구타히기도 하고 중하면 가두어넣었답니다. (당시 연길현 조양천 동구에 사는 전재홍이란 지주는 출하를 제때에 하지 못했다는 리유때문에 순사한테 모진 매를 맞고 며칠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필자 주) 안원장은 물론 바이올린수 조창학(국수집을 경영), 나팔수 권녕일, 그리고 나까지였습니다. 영업간판을 떼겠다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시말서(始末書)를 쓰고서야 놓여나왔습니다. 조두남선생은 소문을 듣고 아예 목단강에 물앉아버렸답니다.
문:윤해영선생은 언제 알게 되였습니까?
답:1944년 봄이랍니다. 목단강에 살던 조두남선생이 우리 집으로 와서 녕안에서 자기가 <<신곡발표공연>>을 하니 기타연주를 해달라고 청을 하더군요. 그래서 갔어요. 나는 기타연주를 맡고 새 악사들의 연습도 도왔답니다. 그번 녕안의 어느 려관에서 나는 조두남선생의 소개로 <<룡정의 노래>> 작사자인 윤해영선생을 뵙게 되였습니다. 조두남선생보다는 두세살 우이고 키가 작고 친절한 사람이였습니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녕안 협화회에서 일을 본다고 하데요. 그번 <<신곡발표공연>>에서 처음으로 <<룡정의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외에 또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목단강의 노래>>, <<산>>, <<흥안령마루에 서운이 핀다>> 등도 발표되였고 그 전해 가을에 목단강 <<동만총성추계민족예술절>>에서 발표했던 <<고향생각>>과 <<한 사나이의 반평생>> 등도 다시 선을 보였습니다.
문:<<룡정의 노래>>란 바로 지금의 <<선구자노래>>라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답:네. 그러합니다. 뒤에 자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번에 공연이 끝난 다음 우리는 윤해영선생의 집에서 소박한 피로연을 가졌습니다. 윤선생의 집은 한족집 구조를 가졌는데 캉(온돌) 면적이 한 20㎡쯤 될것 같아요. 그날 피로연의 마지막에 모두들 <<목단강의 노래>>를 합창했는데 그만 그것이 실수였다구요. 글쎄 윤해영선생이 벽에 걸려있던 사진액틀을 벗겨서 품에 안고 흐느껴 우는 바람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졌지요. 사진액틀엔 아이를 안은 한 녀인의 사진이 들어있었는데 윤해영선생의 부인의 유상이였던겁니다. 부인이 얼마전에 별세하고 그래서 추모의 심정으로 쓴 가사가 <<목단강의 노래>>였는데 하필 그걸 합창했으니 락루를 하시지 않고 어쩌겠어요.
문:그후 조두남선생과 윤해영선생은 어떻게 되였습니까?
답:그후 조두남선생은 평양으로 갔어요. 편지왕래가 있었지요. 1944년 여름이였을겁니다. 뜻밖으로 조두남선생께서 평양에서 편지를 보내왔더군요. <<성보악극단>>을 조직하는데 레코트회사 전속악단에서 연주하던 악사들이 여럿 있으니 나올 준비를 하라는것이였습니다. 뒤미처 또 평양에서 아까다마 소녀가극단을 새로 조직하고 련습중이니 나오지 말고 이제 목단강으로 갈터이니 거기에서 만나자는 내용의 편지가 왔더군요. 그해 겨울이였습니다. 조두남선생이 신안진으로 오셨댔습니다. 내가 조두남선생의 집으로 놀러가니 새로 맞은 부인을 소개하는데 키가 늘씬하고 말씨를 들어보아 서울녀성같습데다. 원래 결혼했던 본처는 남편이 소식도 없이 밖으로만 나돌자 재가를 해갔더라는것입니다. 조두남선생은 당시 목단강에 와서 극단을 조직하고있었습니다. 태평양레코트회사의 전속 가수였던 서태림 등도 참가했었습니다. 손풍금수로는 21살 나어린 안향락이였는데 조두남선생의 제자였습니다. 나하고 같이 가자고 했지만 집식구 모두가 나의 사진관에 매달려 호구하는 처지라 따라갈수가 없었습니다. 1945년도에 조두남선생은 또 안향락을 데리고 신안진으로 왔었습니다. 그때 나하고 안원장 그리고 조두남선생 셋이서 기념사진을 찍었더랬습니다. 그후 광복이 났고 다음으로 조두남선생을 만나지 못했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당시까지 보관했었답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심입되면서 내가 <<감옥>>에 갇혀 투쟁을 맞게 되고 홍위병들이 집수색을 하게 되자 로친이 태워버렸답니다. 아쉬운 일이긴 했어도 그때 그 사진이 탄로가 났더라면 한국간첩이라는 루명을 쓰고 맞아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랍니다.
문:<<동북인민행진곡>>과 <<동북인민자위군송가>>는 김선생님께서 윤해영선생의 가사에 곡을 단것이 아닙니까?
답:그렇습니다. 윤선생님과 합작을 하게 된것은 광복후인 1945년 9월부터였습니다. 윤해영선생은 신안진 대성백화점 김광호의 녀동생을 후처로 맞았답니다. 김광호 녀동생은 소학교선생이였습니다. 처가에 왔을 때 내가 초청받아 갔어요. 그때 <<해저문 마을>> 등 동요 두수를 나한테 주면서 작곡을 부탁하고 앞으로 합작을 약속했더랬습니다. 나는 그해 10월에 이 가사에 곡을 붙였던것입니다. <<해저문 마을>>은 이러합니다. <<딸라당 방울소리 들려옵니다/해저문 산길에서 들려옵니다/꼴 베러 간 오빠가 타고 오시는/송아지 목에 달린 내 방울이지요//울줄루 피리소리 들려옵니다/해저문 샘터에서 들려옵니다/물길러 간 언니가 꺾어서 부는/샘터에 늘어진 버들피리죠>>(김종화선생은 노래를 불러주었다. )
그후 광복과 함께 신안진에서는 고려인회를 조직하고 고려악극단을 내왔답니다. 첫공연에서 내가 신문에서 본 윤해영선생의 작사 <<동북인민행진곡>>에 곡을 붙인 노래가 처음으로 발표되였습니다. <<동북의 새벽하늘 동이 트는 대지우에/새로운 력사싣고 종소리는 울린다/모여라 동북인민 우리들의 일터로/희망의 아침이다 새 기발을 날리자//무도한 제국주의 침략자의 쇠사슬/인류의 적이란다 우리들의 원쑤다/피압박 약소민족 자유해방 위하여/정의의 칼을 들고 너도나도 싸우자//선구인 혁명자의 원한 서린 붉은 피/저녁 노을 지평선에 송화강도 붉었다/잊으랴 경신토벌 9. 18의 혈채를/복수의 날이 왔다 백년 한을 갚으리//흥안령 부는 바람 흐린 안개 가셔서/흑룡강 힘찬 줄기 나갈 길이 보인다/새로운 민주주의 우리들의 로선에/발맞춰 건설하자 아세아의 평화를>> 이 노래는 그후 중국 조선족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습니다. 당시를 살아온 사람으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였거든요.
뒤미처 또 신문에 발표된 윤해영선생의 글에 곡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동북인민자위군 송가>>였습니다. <<흥안령 높이 솟아 우리들의 새 기상/송화강 힘찬 줄기 우리들의 뜻일가/손잡고 너도 나도 달려 모인 동지들/맹세도 장하구나 동북인민자위군//빛나는 청천 백일 대지에 붉은데/황하수 남북하늘 로선리념 다르다/새로운 민주주의 자유평등 기발아래/이 한몸 혁명 위해 붉은 피도 바치리//동북은 우리의 터 우리들이 지키여/중국의 완전해방 실현하기 위하여/칼 들고 싸워 갈길 검산도수 험해도/막을자 그 누구냐 정의용사 우리들//새 세기 부는 바람 오대양은 끓는다/장성을 넘어넘어 두만강을 건너서/침략자 내적외구 한칼로 베고/아세아 하늘가에 평화종을 울리다>>(김종화선생은 격동된 심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1946년 7월 목단강 서장안 공영회관에서 부대의 위문공연을 했는데 2일간 걸렸어요. 끝나는 날 윤해영선생이 공연을 관람하고 나를 만나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조두남선생이 이미 조선으로 가고 없어 윤해영의 다른 친구 두세분과 함께 자리를 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상봉이였습니다. 그후 우리 악극단이 도문에 이르러 공연을 할 때 극단의 사람들이 윤해영선생이 떡국대장사를 하는지 어느 식당에서 나오는것을 보았다고 합데다. 그가 재취한 후처가 잔치해서 일곱달만에 해산을 했는데 윤해영선생의 아이가 아니였답니다. 그래서 리혼을 하고 떠돌다가 조선으로 건너갔지요. 1949년 16절지 석판인쇄로 된 조선 노래집에서 윤해영선생의 가사로 되여있는 <<분여받은 땅>>인지 하는 노래를 보았어요. 가사 내용은 대개 <<장군님 주신 땅에 밭갈이 하세>>라는 뜻이였습니다. 그후론 소식을 몰라요. (윤해영선생은 조선에서 1956년에 별세했다고 한다. ―필자 주)
문: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선구자노래>>가 확실히 있었습니까?
답:1962년엔가 어느날 서울방송을 들을라니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더군요. 1944년 봄에 녕안에서 조두남선생의 신곡작품으로 발표한 그 <<룡정의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노래제목이 <<선구자노래>>로 되여있더라구요.
특히 가사에서 보면 류랑민의 서러움이 력력히 보이는 <<눈물 젖은 보따리>>거나 <<흘러온 신세>>같은 구절은 없어지고 그 대신<<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로 되였더군요. 원 가사에는 <<선구자>>라는 어구가 전연 없었답니다. <<룡정의 노래>>를 발표한 그 당시 목단강지대는 물론 한국 전체에서도 항일투쟁이 이미 저조기에 들어갔으며 군경들의 경계가 삼엄한 때인데 커다란 녕안극장에서 감히 <<조국을 찾겠노라 말 달리던 선구자>>라고 노래할수 있었겠습니까? 그 시기 서울에서는 일장기를 걸고야 음악회를 했다고 하는데 그처럼 <<선구자>>를 노래했다면 그것은 민족해방 투사가 아니라 우매한 사람일수밖에 없습니다. 연주에 참가한 나 역시 나이가 어리긴 했어도 단군력사를 배웠고 애국가를 부르며 자라났으므로 일본놈이 되기 싫어 종래로 일본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이긴 했어도 그런 담량까지는 갖지 못했었습니다. <<선구자노래>>는 원래의 곡이긴 하지만 <<룡정의 노래>>를 가사로부터 제목에 이르기까지 고친것입니다.
한국의 책을 보면 <<선구자노래>>는 1932년에 창작된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당시 룡정에서 불렸다고도 하는데 그때 룡정에서 살았거나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그런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답니다. 그리고 예술가란 자기의 작품을 자랑하기를 좋아한답니다. 조두남선생도 그러한 분이였습니다. 그런데 나하고 2년나마 사귀여왔고 무랍없는 사이였지만 그런 말 한마디 없었다구요. 더구나 1944년 봄에 녕안에서 가진 신작발표공연에서 처음으로 <<룡정의 노래>>를 내놓았던것이랍니다.
문: 조두남선생의 그 후의 행적은 모릅니까?
답: 1944년 조선 청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양 골목에 나붙은 무슨 악극단의 포스타를 보았는데 조두남 작곡으로 된 <<간첩은 날뛴다>>라는 소가극 소개를 보고 공연을 관람했는데 내용은 <<간첩>>들이 경찰서를 치는것을 주의하고 미리 막아야 한다는것이었습니다. 조두남선생도 <<징병제만세>> <<황국의 어머니>>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문:조두남선생의 다른 애호가 어떤것이 있습니까?
답:그분은 장기를 아주 잘 두었습니다. 신안진에서 그분을 당할 사람이 없었답니다. 한다하는 오장기도 조두남선생한테 졌으니깐요.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평양에 계실 때 담배돈이 떨어지면 거리에 나가 장기박보풀이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한테 가서 고개를 기웃거리면 벌써 장사군들이 슬그머니 돈을 쥐여주며 자리를 뜨기를 바랐다는겁니다. 평양에서도 그의 장기가 소문이 자자했던가 봅니다.
문:김선생님 외에 조두남선생을 아시는 분이 생존해계십니까?
답:있지요. 조두남선생의 작곡으로 된 <<고향생각>>과 <<용정의 노래>>를 시창한 남수억(南壽億)선생이랍니다. 지금 팔가자에 계십니다.
필자는 1995년 5월 16일 오후 1시 20분에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촌에 사시는 남수억선생을 찾았다. 남수억선생은 1922년 4월 4일 연길현 팔도향에서 출생하셨다고 한다. 그날 취재석에 동석한 분들로는 남수억선생의 부인 안경숙(安京淑 69세), 박장길(朴長吉 35세 연길시 조선족예술단), 김윤찬(金允燦 47세 한국 서울신문사 사진부 차장) 등이였다. 당시 취재자료를 적으면 아래와 같다.
문:신안진으로 언제 갔습니까?
답:내가 7세 때에 조선 청진으로 이사를 갔다가 1942년 봄에 신안진으로 다시 이사를 갔댔습니다.
문:조두남선생이 신안진으로 언제 왔습니까?
답:1942년 가을인가 겨울인가일겁니다. 자그마한 연출대가 신안진에 와서 공연을 했는데 조두남선생이 손풍금을 쳤답니다. 약침쟁이였는데 안원장이 붙들어서 술을 먹이면서 치료했습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권녕일이 주동이 되여 조두남선생이랑 목단강에 가서 민족예술절에 참가했습니다. 나는 1944년 녕안에서 가진 조두남선생의 신작발표회에서 노래 <<고향생각>>과 <<용정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문:조두남선생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답:키가 크고 몸이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걀죽했습니다. ―나는 팔가자림업국 기본건설과에서 일하다가 1980년에 퇴직했습니다. 윤해영선생은 이름은 들었고 <<룡정의 노래>>를 작사하여 조두남선생이 곡을 붙여서 녕안에서 있은 신작발표공연에서 불렀답니다.
김종화선생과 남수억선생의 회상담을 들어보면 조두남선생은 신안진에서 살았었고 녕안에 살았던 윤해영선생과 래왕하면서 <<룡정의 노래>>, <<목단강의 노래>>, <<산>>, <<아리랑 만주>> 등 노래를 창작했다. 그리고 <<선구자노래>>는 <<룡정의 노래>>의 가사를 뜯어고친 재판에 불과하다. 그런데 조두남선생은 왜서 1932년에 윤해영을 만난 뒤로는 다시 상봉하지 못했고 윤해영이 <<선구자노래>>라는 가사를 썼다고 했을가?
김종화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조두남선생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선생이 아니라 다른 제삼자가 조두남선생의 이름을 빌어 력사를 분식한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
물론 이는 김종화선생께서 조두남선생을 존경하는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력사는 력사인것만큼 조두남선생이 글로써 남겼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조두남선생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을가?
광복후 랭전으로 말미암아 조선반도가 분단되고 중국과의 래왕도 끊어졌으니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국 국민한테 해도 윤해영, 김종화 등 동료들이 모를거라는 생각에서 한 말일가?
그리고 <<룡정의 노래>>를 <<선구자노래>>로 뜯어고친것은 조두남선생의 소행일가 아니면 제삼자의 소행일가?
노래의 가사가 후세인에 의하여 임의로 고쳐진다면 그것은 력사의 진실을 뜯어고치는것과 같다. <<동북인민행진곡>>의 제4절 마지막 구절의 <<아세아의 평화를>>하는것이 <<새 동북을 건설하자>>로, <<동북인민자위군 송가>>의 제2절 첫구절 <<빛나는 청천백일 대지에 붉은데>>가 <<빛나는 혁명기발 대지를 휩쓰는데>>로 그리고 제4절 두번째 구절과 세번째 구절 <<장성을 넘고넘어 두만강을 건너서 침략자 내적외구 한칼로 베고>>가 <<장성을 넘어넘어 황하장강 건너서 간악한 내외 원쑤 한칼로 베고>>로 후에 고침으로써 민족색채가 사라지고 완전한 혁명노래로 탈바꿈 한것과 같이 한수의 애수의 노래(<<선구자노래>>)가 비장한 민족의 투사의 노래로 된것이 아닐가?
조두남선생은 1932년 윤해영이라는 사람이 가사를 주고 표연히 사라진후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아마 독립군이였을것이라고 전설적인 이야기를 창작했는데 그것은 무엇때문일가?
광복전 몇해간 윤해영과 래왕하면서 여러수의 노래를 창작했고 아울러 동료들과 함께 윤해영의 집에서 파티까지 가졌으면서도 왜서 윤해영을 독립군 전사로 미화하고 희생되였을것으로 추측을 했을가?
그렇다면 윤해영은 독립군이였던가?
만일 조두남선생의 회상을 사실이라 믿어서 윤해영선생이 <<선구자노래>>를 1932년에 썼다고 하자. 하지만 이미 알려진 윤해영의 광복전 창작품에서 이른바 <<선구자노래>>를 내놓고 애수에 젖은 동요외에 <<발해고지>>, <<해란강>>, <<사계>>, <<오랑캐고개>>, <<락토만주>> 등은 친일시들이다. 그후 광복이 나자 윤해영은 또 <<동북인민행진곡>>, <<동북인민자위군 송가>> 등을 창작했고 조선에 가서는 <<분여받은 땅>>이라는 노래를 썼다. 그리고 윤해영선생은 학교 교원으로부터 녕안협화회에 몸담고있었던 사람이고 독립군은 아니며 시대적인 핍박과 본인의 세계관의 제약성으로 말미암아 한때 친일사상에 물젖었다가 공산주의를 신앙한, 시대의 조류를 따라 살아온 시인에 불과하다.
당시를 살아온 문인들중에 일제의 강압정치에 억눌려서 민족의 량심을 저버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조두남선생이 썼다는 <<간첩은 날뛴다>>는 가극에 나오는 간첩이란 반일세력이였으니 결코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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