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격동(激動)의 세월
젊은 시절 피델 카스트로 / 늙은 피델 카스트로 / 동생 라울 카스트로
2015년 8월 14일, 쿠바(Cuba)의 수도 아바나(Havana)에 미국 대사관을 재개설(再開設)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1961년 미국과 국교단절이 된 후 실로 55년 만이다. 기사를 읽으며 중남미 격동의 60년대가 새롭게 뇌리에 떠올라 당시 상황들을 정리하며 회상해본다.
독자(獨自) 생존을 부르짖으며 비동맹국의 맹주로 자처하던 카스트로(Fidel Castro/1926~)는 결국 고립을 이기지 못하고 55년 만의 화해라고 해야 하나 굴복이라 해야 하나 결국 미국과 다시 수교를 시작하는 것이다.
카스트로의 미국에 맞선 대결은 쿠바의 자존심은 세워줬지만 끝없는 경제침체를 헤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체 게바라(그림) / 체 게바라(실물사진) / 벽면 글씨 ‘승리할 때까지 영원히’(혁명광장)
이번, 미국과 화해(和解)는 49년간 장기 집권했던 피델 카스트로가 2008년 2월 동생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1931~)에게 정권을 물려주는데 형보다는 온건한 협상파인 동생 라울의 노력 의해 미국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쿠바의 비극은 1952년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중남미 경제 헤게모니(Hegemony/주도권)를 노리던 미국은 쿠바에 쿠데타를 사주하여 친미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미국 기업들은 50년대 중반까지 쿠바의 모든 경제권을 장악하고 마피아 세력은 호텔업과 향락산업을 차지한다.
1958년,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는 반미감정이 팽배했던 쿠바의 민중들을 끌어모으고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와 힘을 합쳐 친미정권을 몰아내는 혁명에 성공하는데 주로 미국인들의 소유였던 ‘외국인 소유기업 국유화’ 등의 정책으로 미국과 등을 돌리고 1959년 공산화(共産化)를 선포한다.
미국의 코앞(플로리다에서 145km)에서 공산정권 수립을 선언하자 크게 자존심이 상한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쿠바의 피그스만(Bay of Pigs) 침공을 시도하는데....
1961년, 미국은 1.500명의 쿠바 출신들로 구성된 게릴라군을 훈련시킨 후, 피그스만(灣)에 공중 투하시켜 카스트로 정권의 붕괴를 노렸지만, 사전 정보누출과 기대했던 쿠바 내 동조도 일어나지 않아 3일 만에... 100명 이상 사망, 1.1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히며 실패로 끝난다.
1962년, 미국의 침공을 막아내자 기고만장한 카스트로는 소련 총리 후르시초프와 결탁하여 쿠바에 소련의 핵미사일 기지 4곳을 건설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데, 미국 코앞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다니... 격분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에서 오는 모든 배를 수색하겠으며, 만약 미사일이 발견되면 즉시 격침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내며... 세계 3차 대전(핵전쟁) 발발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갔으나 결국 소련의 양보(항복)를 받아내어 핵미사일 기지는 철수된다.
당시 쿠바(Cuba) 내의 미사일 기지에는 핵미사일이 이미 9기나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고 미국 연안에서 미국에 포위된 소련의 핵잠수함의 함장은 이미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착각하고 핵어뢰(核魚雷) 발사를 명령했는데 부함장 아르키포프(Vasili Alexandrovich Arkhipov)가 발사를 조금 주저하는 바람에... 인류 멸망의 핵전쟁이 일어날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1928. 6. 14. ~ 1967. 10. 9.)는 본명이 에르네스토 게바라(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이다. 진정한 영웅, 용기가 무엇인지 몸소 실천으로 보여 준 사람, 전설 같은 삶, 높은 도덕성, 불꽃 같은 혁명가, 끊임없는 인류애,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망하는 아이콘.....
아르헨티나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향한 찬사(讚辭)는 끝이 없다.
불꽃 같은 혁명의 길을 걸어간 체 게바라의 삶을 잠시 드려다 본다.
그는 의과대학생이던 시절, 남미대륙을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며 끊임없이 착취당하는 가난하고 병든 민중들을 보며 안정된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고난의 연속인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혁명의 불길을 좇아 볼리비아로, 과테말라로, 멕시코로 달려가 혁명의 선봉에 서던 그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비로소 쿠바혁명에 성공한다.
혁명 성공 후 쿠바의 국민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전권대사 등 정치활동에 잠시 몸을 담지만, 정치(政治)는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을 알고는 훌훌히 던져버린다.
다시 아프리카 콩고(Congo) 혁명에 뛰어들었으나 실패로 끝나자 다시 남미 볼리비아(Bolivia)로 건너가 혁명 전선에 뛰어드는데 체 게바라가 왔다는 사실 자체가 혁명군들에게는 엄청난 힘이 되었다. 그러나 체 게바라는 그곳에서 결국 체포되었고, 다음날인 1967년 10월 9일 처형당한다.
볼리비아 정부는 그의 사망을 확인시키려 시체에서 두 손을 잘라 쿠바에 보냈다고 한다.
진정 불꽃 같은 삶을 산 혁명가의 일생이라 할 것이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혁명광장 내무부 건물 벽면에는 체 게바라의 캐리커처와 함께 그의 좌우명인 ‘승리할 때까지 영원히’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