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산문집 [꽃 진 자리에 향기 더 붉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꽃진 자리에 향기 더 붉다]
山史 金載弘 산문집 / 도서출판 문화의 힘(2012.05.15) / 값 15,000원
================= =================
※축시
山史 散調 / 유자효
내 친구 산사와 함께 한 45년은
아내보다도
자식보다도
더 오래 함께 한 세월
이제 삶의 한 고비를 접고
조상 계신 터에 살 집을 마련했으니
그대 편안하신가
오로우신가
내 친구 산사와 얼마나 더 함께 할까
남은 세월
눈부실까
활홀할까
눈물겨울까
소년과 우물 - 산사 김재홍 귀거래 / 유재영
어머니가
떠주신 물 마시고
물 대접 속 낮달까지
마시고
떠난
고향
오십년 지나
돌아온 그 자리
누옥에
책 몇 권,
아침엔
햇빛 한 사발
저녁엔
고요 한 대접
우물 속
소년은 없고
커다란 하공 하나
조용히
잡겼습니다
21세기 디오게네스
김미숙
마침내 보았다
정치인은 제 주머니 속 나라만 보고
법률가는 고장난 저울만 보고
교육자는 책장 속에 든 사람만 본다는데
이백과 두보의 생각을 두루 꿰고 있다는 그를
우주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던 그를
바람 부는 물의 나라, 水國에서 만났다
시간의 풍랑 위에 조각배 띄우고
울타리 없는 뱃길 따라
삐걱삐걱 다시 돌아온 목천 마을
이제 등불 들고 찾지 않아도
제 스스로 등불이 되어
어둠의 파도 위에 묵묵히 서 있는 그를
마침내 만났다
해 - 산사 선생의 학덕을 기리며 / 이동순(시인, 영남대 교수)
해는
만물을 기르고 거두시나니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오래오래 느끼며 지켜보노라면
종일 공중에 떠서
지상의 작고 여린 목숨들을 보살피시나니
바위 같은 얼음장도 녹이시고
산골 후미진 모퉁이
한줌 흙에 겨우 뿌리박고 고개 내민
가냘픈 노루귀 dd엘리지를 측은히 바라보시나니
갓 태어난 고라니 등이 추울세라
젖은 물기를 속히 말려주시고
나뭇가지에 앉아 깃털 다듬는 어린 박새의
이마에도 입김을 보내어 주시나니
껍질 벗은 풀무치
방아깨비 여치 귀뚜라니
사슴벌레들이 힘차게 날아갈 수 있도록
다정한 손길로 오래오래 쓰다듬어주시나니
하지만 세상 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땐
단호하게 비를 멈추고 천년 세월 무서운 폭양으로
그 번성하던 궁궐과 음악소리 온갖 탐욕의 문서들까지
모조리 사막 속에 묻어버리시나니
해는
만물을 기르고 거두시나니
.▩.
=================
나 있는 곳이 내 집이다
김재홍
젊은 날 수많은 삶의 문제로 괴로워 방황하고 있을 때 문득 찾아뵌 어느 스님이 내게 불쑥 한마디 던졌다. “너 있는 곳이 바로 네 집 아니냐. 네 안에서 찾아라!”
이 말은 참으로 오랫동안 내 마음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지금까지도 희망의 등불로 빛나고 있다.
괴테가 말했듯이 ‘방황하고 있는 것은 삶의 슬기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기에 내 젊은 날은 오래오래 방황의 연속이었다. 세상은 넓고 넓지만 정작 갈 곳이 없었다. 어디에 가나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고 ‘촌닭 관청에 온 모습’ 그대로였다. 그만큼 자신이 없었고 열등감이 언제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돈에, 권력에 주눅들고 사람과 조직에 치이고 심지어는 커다란 건물 앞에서조차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그런 때 스님의 그 한마디는 참으로 순금의 말씀으로 다가왔다.
그렇다! 세상 모든 생명들이 생명 앞에서 평등한 것이고 또 평등해야 하나 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당위적인 일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삶 앞에서 평등하며 평등해야만 한다. 능력에는 차이가 있고 인격 또한 다양하지만 생명 그 자체는 높낮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다른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사람을 무시하고, 매도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지 아니하는가? 또 우리 스스로도 자기를 천대하고 학대하며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감은 물론 자아를 잃고 허깨비처럼 방황하며 떠돌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선지 ‘나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라는 말씀은 내가 그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중심을 잃지 말고 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라는 얘기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선지 지난날 한용운 선생도 그런 깨침의 시, 오도송을 쓰지 않았겠는가. ‘남아란 가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그런데도 나그네 설움에 잠긴 사람 그 얼마나 많은가/한 마디 버럭 질러 세상을 뒤흔드노니/눈 속에 복사꽃 붉게 흩날리도다男兒到處是故鄕/幾人長在客愁中/一聲喝破三千界/雪裡桃花片片飛’라고 말이다. 이 말대로 진정한 고향은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마음에 있는 것, 내 마음 흘러가는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 집 또한 내가 머무는 그곳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나는, 우리는 어디 먼 곳에, 나의 밖 어디엔가 마치 고향이, 집이 따로 있는 것처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모습이 마치 소를 타고 있으면서 소를 찾고 있는 것처럼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그러고 보니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 햇빛 하염없이 뛰노는 언덕빼기이면 어떻고/ 소나기 쏜살같이 꽂히는 시냇가면 어떠리/ 온갖 짐승 제멋에 뛰노는 산속이면 어떻고/ 노오란 미꾸라지 꾸물대는 진흙밭이면 어떠리//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출 곳 없어 언제나 떠다니는 길목/ 그곳이면 어떠리/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조태일, 「풀씨」)라는 시가 생각난다.
그렇다! 세상 어느 밝은 하늘 아래 또는 어둔 쑥굴헝에 놓이더라도 그곳이 바로 나의 고향, 나의 집이라 생각하여 마음을 편안히 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면 그것으로 족하지 아니하겠는가 말이다.������
죽음과 시인 - 박정만 시인에게
김재홍
바람 한 점 없는데 온 세상의 풀꽃들이 일제히 시들어 버렸구나. 박정만! 그대 또한 저와 같아서 적막한 그대의 한 생애가 가을 들풀처럼 저물어 버렸구나. 바로 그 얼마 전만 해도 지인들의 도움으로 그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버린 시화전을 열며 ‘살인적으로 행복하다’던 그대. ‘한세상 살다보니 병도 그만 홑적삼 같다’고 조그맣게 행복해하던 그대가 그토록 쉽게 무너져 갈 줄이야. 정만아! 사람의 운명이란 것이, 그것이 서로 엇갈린다는 것이 정녕 백지 한 장 차이라더니, 그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시인 박정만! 그대 이름은 우리에게 저 무모하기만 하던 60년대 후반의 낮고 우울한 그 겨울을 생각나게 한다네. 4․19와 5․16의 뒤끝에서 어둔 기류가 안개처럼 이 땅을 뒤덮고 있던 우리의 문청文靑 시절, 무너져 가던 명동 「은성」이나 무교동 낡은 주점 골목을 허기져 기웃거리던 저 목마름 속에서, 함께 시를 논하고 인생을 다투던 그때 우리의 그 유치함과 맹목의 순수함이 새삼 생각난다네. 그대는 옛 모습 그대로 남루한 입성과 어렴풋한 취기로 순수 하나만을 그냥 데불고 살아가고 있더니만, 어떻게 그대 먼저 인가의 불빛 하나 없을 저 차운 바람 속 저승의 어둔 모퉁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을 것인가.
저 고통스런 70년대와 참혹하기만 하던 80년대의 뒤안길. 헐벗은 가로 어느 골목길에서 홀로 절망과 허무라는 천형天刑의 병고病苦를 통음하면서, 모든 허욕을 떨쳐버리고 한 올 한 올 절망의 실로 처절하게 시의 피륙을 짜내면서 시인의 자존심과 시의 위의를 지켜 나아가려던 그대 박정만!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가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 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는/ 마을마다 떠다니는 슬픈 귀동냥’이라는 그대 시구 하나가 끝내 아픈 화살이 되어 우리 심장에 날카롭게 박혀 오는구나.
과연 그 무엇이 그대를 그토록 아득한 절망에 이르게 하였고, 마침내 저 죽음의 세계로 치닫게 하였던가? 아마도 그것은 무엇보다도 천성이 방황하는 영혼, 자유인이었던 그대 성격 탓이 클 것이려니와 직접적으로 저 참혹했던 80년대 초의 어이없는 횡액과 뒤이은 방황 때문이 아닐지. 그 부자비한 군사정권의 폭력과 온갖 권위주의, 상업주의가 판치는 이 불모의 연대에 그대는 인간적인 자존심과 시인의 양심을 지켜보려다가 처참하게 좌초해 간 것이 아닐까 말일세. 그러기에 자네의 시구에는 온통 시퍼런 허무와 한의 칼날이 섬뜩섬뜩 빛나고 있었던 게 아니었겠나?
우리 뜻있는 사람들이 모두 아끼고 사랑하던 그대, 시인 박정만! 그대 깊고 깊은 잠의 머리맡에 끝없이 떠돌고 있는 초록별 하나 보이고, 그 곁에 살아서 그리도 고단하던 목숨 하나가 비로소 편안히 놓이는구나. 이승에서의 그대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겨웠길레 그대는 ‘그리운 저 무덤’을 생각하면서 죽음과 그리도 가까워지려 했었는가? 그대만큼 죽음과 진실을 따뜻하게 감싸 안으면서, 처절하게 허무를 전신으로 끌어안고 싸워간 진짜 시인들이 우리 시사에 과연 몇 사람이나 있었던가? 이제 이미 죽음을 그대 속에 통과시킨 그대, 죽음보다 강한 그대가 어찌 무엇을 더 두려워하랴. ‘침잠하는 돌 속에 산이 잠기고/ 산자락에 엎드린 수정무지개/ 잘 있거라 눈부신 잠의 목관木棺위에서/ 생은 다만 옥玉같은 어둠의 부표浮漂였으니’라고 자넨 노래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대는 소월보다 깊은 한과 말라르메보다도 더 그윽한 허무를 간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새삼 아프고 안타까울 뿐이네.
부디 편안히 잠들거라. 우주 저편으로 아스라이 사라져 간 그대 박정만! 우리 모두 아끼던 자유인. 천부적인 서정시인 박정만! 지금쯤 그대 죽어 홀로 걸어가고 있을 저승길 모롱이 천지 가득 오늘처럼 함박눈 나리어 이승에서 그토록 고단했던 그대 목숨 하나 포근하게 위무해주려니.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유수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라고 노래하던「작은 연가戀歌」가 문득 아프게 되살아오네.
그대 부디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 그곳에서 꽃피워 보게. 그리고 시의 별로 떠올라 우리 어둔 지상의 삶을 비춰 주게. 이제 마른 눈물로 간구하노니, 그대 고혼의 명복을 빌 따름이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
김재홍
새해, 동해 낙산에서 해돋이를 본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중략…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보리라’
우리 겨레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고 북누리 남누리의 우리 한민족 모두가 모쪼록 병자년 새해엔 마음속에 밝은 해, 고운 해가 떠오르기를 기원해본다. 무엇보다도 휴전선 철책선에서 눈보라 찬바람을 맞으면서 분투하고 있을 병사들의 가슴에 밝고 따뜻한 햇볕이 골고루 빛나기를 빌어본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랄까. 어떠한 방법이 있을까? 한번쯤 시詩를 통해 생각해 볼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첫째로 그것은 순응적인 인생관 또는 낙관적인 삶의 자세를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박목월의 유명한 시 ‘나그네’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사는 거다/ 그냥 사는 거다/ 슬픈 거, 기쁜 거/다 너대로 그냥 사는 거다/ 그게 세상/ 잠깐이다’라고 하는 조병화의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가 그 한 예가 된다. 이런 태도는 험난한 세월 어려운 환경에서 그런대로 삶을 긍정하며 자기 나름의 위안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데 유효한 자세라고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비판적인 인생관 또는 저항적인 인생관이라고 하겠다. ‘껍데기는 가라/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라고 노호하는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세계나,「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하는 김광규의 시적 태도가 그 예라고 할 것이다. 부정과 불의를 비판하고 사회와 역사적인 삶을 지향하는 열린 삶의 태도가 여기에 해당하리라.
세 번째로는 비극적인 인생관을 꼽아볼 수 있겠다.
이 태도는 ‘이마를 짚어다오/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가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눈이 멀고’라는 박정만의 시구처럼 세상에 만족하지도 저항하지도 못하는 비극적 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실상 역사 속에는 뜻을 이룬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분들이 많으며 이런 분들이 흔히 갖게 되는 생의 태도가 이러하리라.
네 번째는 초월적인 인생 태도라 하겠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김상용의 시처럼 끊임없는 정신적 극복의 노력을 통해 형이상학적 달관과 초월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은자隱者의 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태도는 흔히 난세에 뜻있는 분들이 정신적인 지절을 지키기 위해 취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다섯 번째는 운명애運命愛의 자세라고 하겠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윤동주의 「서시」의 자세가 그것이다. 스스로의 운명을 따뜻하게 긍정하고 뜨겁게 사랑함으로써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 나아가려는 이러한 자세는 오늘날과 같은 불확정의 시대, 혼돈의 시대에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한다.
이제 새해가 밝았으니 우리 모두 새로운 몸과 마음의 자세로 새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하잘 것 없는 허욕을 버리고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키면서 새봄에 돋아날 새 풀꽃의 겸허한 마음으로 한 해를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떫은 사랑, 익은 사랑
김재홍
한평생 사랑이라는 대주제를 일관성 있게 탐구하고 있는 원로 대가 시인이 한 분 계시지요. 김남조 시인 그분 말씀입니다.
시단의 원로이시고, 53년 등단한 이래 사랑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60년 세월 생명․자유․평화의 철학을 일관되게 추구해 오셨으니 일가를 이룬 대가 시인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겠지요.
일반적으로 시인 호칭에 있어 막 등단한 사람을 신인, 10년 정도 모색기의 사람을 신진, 20년 내외로서 자기세계를 이루어가는 사람을 중견, 그리고 30-40년 정도로 비중 있는 분을 중진, 그 이상으로 하나의 대주제를 다양하고 깊이 있게 천착하여 일가를 이룬 분을 원로 대가라고 부르곤 하니까 말입니다.
여하튼 소월, 만해 그리고 모윤숙, 노천명의 뒤를 이어 김 시인은 분단 후 이 땅에서 사랑의 시학으로 일가를 이룬 대표적인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떫은 사랑일 땐
준 걸 자랑했으나
익은 사랑에선
눈멀어도 못 다 갚을
송구함뿐이구나
-김남조,「사랑초서․53」
사랑은 정직한 농사
이 세상 가장 깊은 데 심어
가장 늦은 날에
싹을 보느니
-김남조,「사랑초서․83」
어떻습니까? 과연 대가 일획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이라는 주는 것이니 뭐니 구구히 늘어놓는 것보다 단 한 마디 ‘떫은 사랑: 익은 사랑’을 대조시켜 사랑의 본성과 원리를 갈파하는 그 솜씨야말로 대가일획인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손익을 계산하면서 주는 것, 남아돌아서 주는 적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없다면 구해서라도 자신의 지극정성을 바치는 자비행의 실천인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지상 인간의 영위 중에서 가장 정직한 농사이기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정직한 것이고 끝없는 노고와 헌신, 인내와 기다림, 눈물과 사랑을 기울여야 하는 자식농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죄없는 일이고 고귀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시 쓰는 일 그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과 농부는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도반인 것입니다.
농부는 육신의 에너지를 주는 밥을 생산하는 분이고, 시인은 시를 통해 정신의 에너지인 사랑을 발전시키고 충전시켜주는 소중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시詩가 필요한 사회
김재홍
지난 1995년 연말 서울 비원 근처에 있는 조그만 소극장인 북촌창우극장에서 아주 작지만 뜻있는 행사가 펼쳐졌다. 이름하여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출간 70주년 기념 <김소월시의 밤>이 그것이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시와 시학회>주최로 시를 낭송하고 그것을 연극으로 입체시 등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2백여 관객들은 오랜만에 삭막한 공룡도시의 한복판에서 시의 향기에 젖어들 수 있었다. 특히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라는 시「산유화」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리라’라고 하는 시「부모」를 시인과 관객들이 함께 노래로 부를 때는 깊은 나라사랑, 겨레사랑, 인간사랑, 자연사랑의 공감이 물결 쳐서 장내를 숙연하게까지 만들었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세사에 찌들고 현실문제에만 사로잡혀 머리 위에 별이 빛나고 산야에 꽃이 피며 우리 가슴에 시가 살아 있는 줄을 너무도 모르고 무시한 채로 살아온 것이 분명하다. 온갖 탐욕과 허세, 분노와 어리석음, 위선과 시기의 감옥에 갇혀서 내 마음의 올바른 도덕률과 양심, 그리고 진실의 빛나는 별빛을 잊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자식이 유산을 노려 인륜에 어그러진 행위를 하고…. 그것도 미국 유학까지 하고 돌아온 지식인이…. 한강 다리가 무너져 내리고 지하철 공사장이 폭발하고…. 어쩌다가 이러한 지경이 되고 말았는가. 과연 누구의 탓이라고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 생각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어제 오늘 일이던가. 그렇다! 참 오랜 분단의 세월 속에서 저질러져 온 물질 만능 사상은 그로 인한 인간 경시의 폭력성으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을 별것 아닌 것으로 전락시키는데 은연중 작용해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인류사에서 사람과 그 생명이 목적가치가 아닌 수단가치로 전락하는 것을 어디 한두 번 보았는가?
그렇다고 이제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겨를이 있겠는가. 이에 밤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별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스물아홉 순결한 나이로 적국에서 순국한 청년 시인 윤동주의 맑은 영혼이 떠오른다. 별 하나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기도하던 그 맑고 슬픈 영혼의 모습이 부딪쳐 온다. 또 조국 광복을 위해 북만주 벌판을 말달리던 이육사 시인의 강철의지도 떠오른다.
그렇다! 어느새 우리 주변에는 별 하나, 풀잎 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서 진정한 생명사랑․인간사랑․평화사랑의 마음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풀잎 하나가 우주를 떠받치고 이슬방울 하나에서 영원을 발견하며 어머니와 아가를 사랑하고 고향을 아끼는 마음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때가 왔다. 저 휴전선 어느 산야에서 밤 새워 별빛을 바라보며 조국을 지키는 병사들의 외로운 눈망울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마음 그것이 바로 생명사랑․인간사랑․겨레사랑․조국사랑의 따뜻하고 강철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백담사 만해기념관 상량문萬海記念館 上樑文
김재홍
때는 바야흐로 천지만물이 생명을 마음껏 자랑하는 새봄이요, 부처님의 자비공덕이 온 세상에 가득 찬 오월이라. 때맞춰 설악산 백담사에 만해기념관의 상량식을 거행하게 되니 사대부중은 물론 온 민족의 큰 경사이러라.
일찍이 백담사는 신라 진흥왕 원년(647년)에 자장법사慈臟法師가 창건하여 이후 천여 년 동안 이 땅의 민족정기와 불법을 전수해 온 명찰이 아니던가. 창건 이래 한계사, 운흥사, 심원사, 현구사, 영가사를 거쳐 오늘의 이름 백담사에 이르기까지 이 땅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법전도正法傳道의 도량으로서 꾸준한 법맥을 이어 왔다고 하겠다.
여기 백담사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하여 많은 고승대덕과 수행선자들이 주석하거나 수행을 해 왔으니, 근세의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만해 선사는 구한말 외세침탈의 풍운이 몰아치던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05년 이곳 백담사에 출가하였다. 이후 한평생을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堤 下化衆生의 큰 뜻으로 불도를 닦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다가 1944년 6월 29일 서울 심우장 냉돌 위에서 순국하신 위대한 승려이자 투철한 애국지사이고 동시에 빛나는 민족의 시성詩聖인 것이다.
승려로서 만해 선사는 조선조 이래 오랫동안 침체돼 왔던 이 땅의 불교를 근대화하기 위해 진력한 당대의 선승이자 개혁승이라고 하겠다. 선사가 이곳 백담사에서 저술한 「조선불교유신론」이나「불교대전」등을 통해 역설한 민족불교로서 불교가 새롭게 태어나고 힘차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밝혀주는 불교중흥의 횃불이라고 아니할 수 없으리라.
또한 선사가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3․ 1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지표를 제시한 것은 역사적 쾌거가 아닐 수 없으리라. 선사가 선구한 반외세 민족해방운동과 반계급사회해방운동, 그리고 반봉건 민주화운동이야말로 일제강점 하 어둔 현실은 물론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에 있어서도 소중한 민족사적 나침반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천적인 투쟁은 물론 선사가 체계화한 자유사상, 평등사상, 민족사상, 민중사상, 진보사상, 통일사상 그리고 평화사상, 게다가 끝까지 절조를 변치 않은 정신적 일관성은 오늘날은 물론 통일조국의 미래에도 빛나는 민족사적 귀감이 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아울러 선사가 1925년 이곳 백담사에서 ‘해저문 벌판에 돌아가는 길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쓴’ 시집 『님의 침묵』은 민족의 시성으로서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하리라. 시집『님의 침묵』에서는 중생에 대한 가없는 자비심의 발현으로서 생명사상과 사랑의 철학이 장엄한 화엄의 바다를 이루며 끊임없이 물결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만해선사가 소중하게 일깨워준 생명사랑, 인간사랑, 나라사랑, 겨레사랑, 자유와 평화사랑의 정신이야말로 우리 민족에게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나는 정신사적 덕목이자 가치체계가 아닐 수 없으리라.
어찌 이러한 만해 선사의 높은 민족정신과 깊은 불교사상, 그리고 향기로운 문학정신이 우리 온 국민이 흠모하고 새롭게 실천 선양해 가야할 가치 적목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세계사 속에서 한국의 위치가 새롭게 정립돼야 하고, 동시에 밀려오는 외세의 격랑 속에서 민족적 주체성과 자긍심 그리고 민족정기를 고양해야만 할 시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도 분단 상황 하에서 가속화해 가는 민족 이질화 현상을 극복하고 날로 어려워만 가는 이 땅의 정치, 경제, 문화의 혼란을 이겨내야만 할 시점이기에 특히 그러하다. 또한 가치관의 혼란과 전도된 윤리 도덕을 바로잡아 인간적 존엄성과 진정성을 회복해가야만 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정한 애국자로서 존경할만한 지도자를 갈망하고, 권위 있는 양심적인 구도자를 그리워하고 진정성이 넘쳐나는 문학인을 갈망하고 있지 않은가? 만해 선사가 선구한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과 민중사상, 진보와 통일사상, 그리고 문학과 실천이 인류의 근원적 양심에서 우러나온 불교적 휴머니즘 사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민족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역사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까닭이라 하겠다.
이런 연유로 조계종 총무원장 송월주 대종사와 조오현 신흥사 회주스님 등 우리 불교계와 이수성 전 국무총리 등 우리 사회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결성하고 백담사에 만해기념관 건립을 추진하여, 오늘 상량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회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만해 선사의 높은 정신과 깊은 사상이 대대손손, 영영세세 겨레의 가슴속에 살아남음으로써 빛과 향기를 더해 갈 것을 확신하고 또 간절히 고대해 마지않는 바이다.
이 뜻 깊은 만해기념관 상량에 즈음하여 그간 국가 차원에서 물심양면 지원의 노고를 아끼지 않은 김영삼 대통령과 김우석 내무장관, 안우만 법무장관 들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건립을 위해 애쓴 모든 분들의 노고와 정성을 오래도록 기록해 두고자 한다.
엎드려 바라건대 부처님의 가피가 산자수명한 설악산 백담사에 더욱 충만하며 만해기념관이 온 국민의 정신의 고향, 겨레의 도량으로 더욱 흥성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노라.
世尊應化 二千五百四十一年 五月
萬海硏究者 金載弘 謹述 ������
.▩.
=============== == = == ===============
◆ 표사의 글 ◆
이제 귀향을 준비하면서 마지막으로 소망하는 것이 하나 있다. 내 고향 천안 목천은 남쪽 국토의 한 중간 지점이고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출생, 성장한 ‘충절의 고향’이다. 그래서 독립기념관이 바로 이곳에 세워진 연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꿈꾼다. 이곳에 물려받은 1500평 대지에 다시 시 전문 문학관을 세우고, 이곳을 중심으로 시마을예술촌을 조성하여 이 땅 시문화예술의 한 고향집을 마련하여 시와 시인의 마음의 중지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비록 평생 시인도 아니고 가진 것도 없으며 이제 건강도 전만 못하지만 시를 향한 순정과 열정은 아직도 젊다. 이에 마지막으로 내 열정을 바쳐 작지만 들꽃 같은 시마을예술촌, 시마을문학관을 만들어 세상에 남기고 가고 싶은 것이다. 이 나의 작은 꿈이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바로 ‘하늘엔 별, 땅엔 꽃, 사람에겐 시’라는 모토로 살아온 지난 40여년 세월과 고향, 이웃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은혜를 조금은 갚을 수 있는 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
▶山史 김재홍 金載弘∥
∙ 1947년 충남 천안 출생
∙ 현재 경희대 국문과 명예교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