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30주년을 맞아 칠천량 해전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임진왜란 가운데서도 거제는 왜적의 침입을 받아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지역일 뿐 아니라, 경상도와 전라도 수군이 합동작전을 최초로 수행하여 승리의 장소이면서도 한 번의 패전으로 궤멸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희비가 교차하는 국난의 교훈으로 삼을 중요한 현장이다. 게다가 선조 1597년 1월에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왜군은 리순신 제거 작전과 더불어, 전면공격을 재개하였고, 끝내 2월 말에 리순신은 구속되고 대신에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으로 교체되었다. 해상지휘관이 바뀐 상태는 일본의 전략이 주효하였다는 것이며, 그 뒤에 있었던 해전이 곧 漆川梁海戰칠천량해전이며,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때에 왜적과 싸운 조선수군이 겪은 가장 참담한 패전의 하나이다. 패전은 누구나 입에 담기 싫어하고, 어떤 지휘관에게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일 것이지만, 패전에서 교훈을 삼지 않으면, 미래에 또 똑같은 겪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우리는 패전을 연구하고 교훈을 도출하여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경상도 수군의 많은 전함과 무기 등을 침몰시켰다는 것과 칠천량 해전의 패배의 책임을 대개 원균에게 돌리고 있지만, 당시에 수행했던 전략의 선택과 시행과정에 잘못이 없었는지 지휘 책임도 다시 살펴보았다. 특히 칠천량 해전에서 패했던 원균은 사전의 조짐으로서 안골포 및 가덕도 해전과 다대포 해전과 절영도 해전 등이 있었는데, 해전다운 해전을 해보지도 못하고서 수군의 피로를 증대시켰고, 직접 함상에서 지휘하지 않는 등 해상지휘관으로서의 권위를 지키지 못하여 곤장을 맞기까지 했다. 이것은 리순신과 너무도 다른 태도이며, 전쟁관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전쟁을 지휘하는 비변사의 작전명령이 리순신 한 사람의 생각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며, 도원수 권률의 편협한 군사지식으로 수군을 사지로 몰아붙인 데다가 원균의 철저하지 못한 행위는 개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떠나 국가의 명예까지 떨어뜨린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결국 칠천량에서 경계의 원칙을 지키지 않아 패전하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어떤 전략이 선택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면 최선을 다해야 함에도 그는 술을 마시고 취했으며, 전쟁지휘를 소홀히 했다. 설사 수륙병진 전략이 좋더라도 선택되지 않았으면, 이길 수 있는 새로운 전략개발이 필요하며,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리순신은 반년 전에 똑같은 군사 상황을 두고 출전을 거부하다가 결국 파직되고 구속까지 되었다.
칠천량 패전의 원인은 첫째로 중앙조정과 도원수 및 경상도 체찰사 등을 포함한 비변사의 전략이 부재했고, 그 수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여 육군지원마저 무시했으며, 둘째로 해상작전 지휘권을 수군전략을 모르는 육군, 즉 도원수가 지휘함으로써 수군의 사기를 떨어뜨렸으며, 셋째로 도원수 권률의 기본전략의 기조가 육군 중심 육전에 있었으므로, 리순신을 파직시킨 것이나, 원균을 곤장쳐서 패전케 한 것은 해전을 가볍게 보았던 때문이며, 넷째로 전투 중에 결전의지가 부족한 배설 함대가 달아남으로써 세력 집중을 하지 못했으며, 다섯째로 배설이 달아나겠다는 말을 듣고도 이를 말리지 못한 원균에게도 지휘의 책임이 있다.
이러한 것은 군령권과 전략개념의 문제와 더불어 지도자로서의 품성과 자질에 관련되며, 또한 원균 자신의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며, 리더십의 부족에 기인한 책임이 크다.
우리는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슬픈 일을 당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당시에는 오직 리순신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초기 해전을 승리와 더불어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되었던 정유왜란 때에도 리순신이 있음으로 해서 수군을 재건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가 있었다.